그날 통보한 이별은 거짓말이었다.

쓰니2022.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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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알콜중독자였고, 병원신세를 자주 졌다.
나는 병문안을 자주 갔었다. 초등학교 때 기억의 반 이상은 아빠가 있는 병원이다.
중학교 2학년 이후 아빠를 보는 일은 거의 없었다.
엄마는 아빠를 더이상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이혼이었다.
엄마는 나를 미워했다. 말도 안듣고 공부도 안해서.
내가 뭔가 크게 잘못한 날에는 구타 수준의 체벌을 하셨다.
그리고 혼자서 자식새끼들 키운다고 집에 붙어있질 못하셨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난 항상 혼자였다.
난 엄마도 밉고 아빠도 미웠다.
양쪽 그 누구도 날 사랑한다는 느낌은 주지 못했다.물론 지금은 엄마랑 오해도 풀고 돈독하게 지낸다.

어릴때부터 몸도 약하고 소심했던 나는 초등학교때 왕따를 당했다.
중학교때는 무리와 어울리고 싶어서 별의별 짓을 다하고 나쁜 물도 들었다.
그냥 평범한 집에서 평범하게 자라고 싶다는게 내 소원이었다.학교도 싫었고 집도 싫었다. 그 어디도 내자리는 아닌듯 해서,오늘밤 잠에 들면 티비 전원처럼 내 삶도 픽 하고 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적도 여러번 있다.
우리 집 얘기를 털어놓았던 친구라고 믿었던 아이들은
딱 자기 동정심이 바닥날때까지만 날 위해주었고,
그 다음엔 애비없는 자식인거, 못받고 자란 새끼인거 소문나는 일밖에 안남더라.

그리고 고등학교에 처음 들어갔을 때, 너를 마주쳤다.
난 지금도 신기하다. 왜 너한테는 그렇게 당당하고 스스럼없이 다가갔을까?
그것도 심심하면 네 이마에 딱밤을 때리면서 말이다.
그래, 널 좋아했던거다.
우리는 연락도 했고, 만나기도 했고, 밖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
지금도 너와의 추억들은 생생하게 기억난다.

왜갔는지는 기억이 안나지만 마트 가는길에 버려진 카트에 널 태우고 놀다가 동네 어르신한테 혼난 날.
둘이서 대학축제를 보러간 날, 그 학교에서 너희 집까지 몇십분동안 걸어간 날. 그날은 우리가 처음 손을 잡았던 날이었지.
평일이면 먼저 일어난 사람이 전화해서 서로를 깨우고 같이 등교하던 나날들.
버스에서 나보고 클라이밍 동아리에 들어오라고 돌려말하다가 내가 별로 끌리지 않아하자 멋쩍은듯 내얘기 아니라고 쏘아대던 모습도 귀여웠다.비오던 어느날 입고있던 외투를 너에게 씌워줬을때 착하다며 내 머리를 쓰다듬던 너의 손길도 기억한다.
여름방학때 외국에 갔다가 네 생각나서 사왔던 이상한 표정의 판다인형을 넌 아직 갖고 있을까?오랜만에 만난 너는 나보고 당연한 것처럼 집에 데려다줘서 고맙다고 했다.그냥 너랑 1분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은 것 뿐이었는데.
너와 함께 있으면 내 우울함은 마치 강렬한 햇살 앞에 녹는 눈처럼 사라졌고,
내 옆에 네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나같은 놈도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언젠가 내가 용기내어 한 고백을 넌 거절했었지만, 우리는 계속 함께 다녔다.
넌 나의 어디가 좋았던걸까?
소심하고, 옷도 못입었고, 친구도 없었다. 네가 전부였다. 네가 전부여서 좋았나?
아무튼 시간이 조금 흐르고서, 넌 내가 너에게 고백할때 했던 말들을 토씨하나 안틀리고 반복하면서 나를 좋아한다고 말해주었다.
날아갈듯 기뻤다. 나도 행복할 수 있겠구나, 나도 평범하게 살 수 있구나, 나도 사랑받을 수 있구나....
너만 있으면 됐었다. 넌 나같은 놈도 누군가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려준 사람이니까.

그런데 세상을 다 가진 것 같던 그날 새벽, 엄마가 말하길 아빠가 쓰러졌다고 했다.
잘 기억은 안나지만 뇌쪽에 문제가 있었다.
다시 병원에 들락날락해야 했다. 보호자 역할을 할만큼 시간이 있는건 나뿐이었으니까.
그때, 너한테 털어놓아도 될까 하는 고민을 했다. 학교가 끝나고 널 못만나는 핑계를 대는 것도 한계가 있을 것이었고,
항상 너희 집에 데려다주고서야 헤어졌던 내가 갑자기 그러지 않게 되면 분명히 넌 의심했을테니까,
혹시 네가 추궁하거나 하면 그때에는 너에게 내 아픔을 털어놓고 싶을 터였다.


결국 난 나의 세상에 들어온 너를 다시 밀어내기로 결정했다. 내가 그토록 바라던 일이었는데도.
너도 지금껏 다른 사람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내가 평범한 아이인 줄 알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를 멀리하게 될까봐.네가 나를 그토록 괴롭게 했던 그 시선으로 보게 될까봐, 네가 나를 좋아하지 않게 될까봐, 네가 나를 떠날까봐.만약 그렇게 되면, 난 정말 흔적도 없이 무너져 버릴 것만 같았다.
차라리 스스로 다시 혼자가 되는게 마음 편할거라고 생각했다.
너가 생각해도 웃기지 않냐? 몇달동안 좋다고 쫓아다녔던 놈이 사귄지 이틀만에 네가 여자로 안보인다고 말하는게.
나중에 안건데,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그런것도 다 품어주는거더라.
나중에 안건데, 그럴때 옆에서 위로해주고, 그럴 떄일수록 함께 있어주는게 사랑이더라.
나중에 안건데, 저마다 말못할 슬픔이나 아픔을 하나씩는 안고 사는거더라.
그땐 몰랐다. 우린 어렸으니까. 그래서 두고두고 후회할 바보같은 일을 저지른거다.
처음 며칠은 그냥 멍했다. 아무 생각도 안들고, 그냥 다시 혼자가 됐다는 사실만이 차갑게 내 머리와 마음을 이따금씩 훑었다.
그 이후엔 후회했다. 그냥 말할걸, 그냥 털어놓을걸, 그냥 너한테 의지해볼걸.

그 이후로 너의 빈자리를 다른걸로 채우고 싶어서, 그리고 나약하고 소심한 내가 너무 역겨워서 뭐라도 열심히 했다.
운동도 열심히 했고, 자존감도 키우고, 주위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연습도 하고.
너한테 말해줬던 이 분야에서 이렇게까지 열심히 하고 있는 것도, 너 대신이라고 생각해서였다.
정말 열심히 일했고, 지금은 우리 나이대에 나보다 잘하는 사람 찾기 힘들 정도로 실력도 좋다.너만큼 좋아하려고 했던 일이 이젠 너무 좋아져서 내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남들보다 한계단 더 오르고 싶고, 더 높은 세계에서 인정받고 싶다.소심함도 많이 줄고, 남의 눈치도 덜보고, 넉살도 좋아졌고, 어디가서 크게 꿀리지 않을 만큼 몸도 키웠다.다시는 누군가를 버리기 싫어서 내 친구들이라면 무리해서라도 챙기고 산다.내 할일 열심히 하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친구들도 열심히 챙기면서 산다.아마 너와의 시간이 없었다면 지금은 그냥 평범하게 남들처럼 살지 않았을까?어릴적 내 꿈은 평범한 삶을 사는 것이었으니까.근데 너만 없다. 너만 있으면 됐는데, 너만 없어.

난 그날 이후로 몇년째 널 그리워하고 있다. 네가 남긴 흔적들이 너무 강렬하다.
너와 함께 손잡고 인파 속을 헤엄치며 벚꽃을 구경했던 그날 밤을 잊을 수 없다. 인생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날이다.
지금도 가장 좋아하는 꽃이 벚꽃이다. 너와 함께 간 그 운동장에서 매년 열리는 벚꽃축제는
너와 함께 간 그 해 이후로 다시는 가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 누구와도 가기 싫다. 네가 새겨져있는 추억을 다른 무언가로 덮어쓰기 싫어서.
아무리 몹쓸 인간이고 자격미달이었지만 그래도 날 낳아준 사람이고, 지금은 죽어버린 아빠보다도,
내 인생에서 단 몇달을 함께 했을 뿐인 네가 더 보고싶다.

입가에 붙은 큰 점도 사랑스러웠고,
애굣살 가득한 큰 눈으로 지어내는 눈웃음이 누구보다도 아름다웠던 사람.
조그마한 키와 통통한 손, 막대사탕같은 목소리, 새하얀 목선, 전부 그립다.

요즘들어 하는 생각인데, 혐오와 갈등이 팽배한 이 시대에
그냥 있는 그대로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 그게 가장 큰 행복이고 행운인 것 같다.
돈 많이 버는것, 자기 분야에서 성공하는것, 강남에 수십억 자택을 보유하는 것보다 더.
넌 나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주었었다.
난 아직도 너에게 그런 사람인 채로 멈춰 서있다.
아직도 네가 그립고, 아직도 네가 좋다.
그냥 너라서 좋아. 다른 사람도 아닌 하나뿐인 너인게, 아직도 좋다고.
나만 그때 그자리에 멈춰있고, 너에게 난 그냥 잠깐 네 곁에 머물다가 상처만 남기고 떠난 사람이란 사실도 알지만,
널 그리워하는 일은 멈출 수가 없다.

그 때 이후로 계속 그렇지만, 아직도 이따금씩 꿈에 니가 나온다.
얼마 전 네가 나온 꿈에서 깬 새벽, 정말 미친듯이 보고싶어서 너에게 연락을 했었고,
네가 연락을 받아준 며칠동안 심드렁한 널 두고 나 혼자 옛날로 돌아간 것처럼 설레고, 네 연락을 기다리고 있더라.
사실 그때 뜬금없이 보자고 한 이유도, 차라리 네 앞에서 다 털어내고 나면 네가 내 마음속에서 떨어져 나갈까 해서였다.
언젠가는 너한테 전하고 싶었던 얘기인데,
결국은 우리가 자란 이곳을 떠날 때가 되어서야 용기가 서더라. 아직도 난 등신인거같다.
우리 그때는 더 어렸지만, 지금도 충분히 젊잖아.
조금, 아니 어쩌면 너무 많이 늦었지만, 늦게나마 다시 하는 고백이라고 생각해주라.
내 마음속엔 아직도 너라는 사람이 먼지덮인 채로 빛을 내고 있다.
엊그제 너한테 이제 곧 타지로 떠난다고,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얘기하고 싶다고 연락했는데, 답장이 안온다.
난 너한테 용서받지 못할 자격조차도 없나보다.
멀리 이름모를 누군가에게 전해지길 바라면서 바다로 흘려보내는 병속의 편지처럼,
이 편지도 인터넷 바다를 부유하다가 너에게 닿기를 바라면서.
나에게도 작은 기적같은 일이 일어나진 않을까 하는 희망, 혹은 그냥 바보같은 미련을 함께 담고 너의 마음속 해변가를 향해 흘려보낸다.
만약 너에게 닿는다면,
잊으란 말이어도 좋으니까, 나쁜놈이라고 욕해도 좋으니까 꼭 답장해줬으면 좋겠다. 아니면 내가 먼저 너한테 이 글을 보낼지도 모르겠다.
너한테 보낸 마지막 메세지처럼, 기다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