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바라기-2-

까미유2004.03.09
조회1,378

제 2 화

 

-그녀를 알다-

 

 

지니선배와 함께 동거한지 한달이 지났다. 그녀는 예전과 다를바 없이 씩씩했고

밝았다. 우리는 정말 가족처럼 아니, 가족보다도 더 가까운 사람처럼 매일 밤

이야기를 피우고 웃고 떠들고 마시고 잠이 들었다. 그녀는 서울 모 대학의 시간 강사로

일을 시작했고 긴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면 오피스텔을 알아 볼거라 했다.

우린 그녀를 붙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딱 1년만 더 같이 있자고 하은이 매달렸다.

오늘은 장모님 생신이다. 하은과 나는 처가집에 가서 저녁까지 먹고 들어 올 생각이었다.

일요일이라 점심은 함께 했지만 하은에게 중요한 약속이 생기는 바람에 나만 먼저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돌아왔을 때 지니선배는 집에 없었다.

한 시간쯤이 지나서야 지니선배가 들어왔다. 그녀의 얼굴은 아침과 달리 어두웠고

나를 보고도 아무 말 없이 이층으로 올라가 내려오지 않았다.

 

-선배...저기, 저녁 안 먹을래요?

 

말이 없다. 방문은 잠겨 있다. 가끔 그녀는 예전에도 그랬었다. 우울할 때나, 그녀에게 아주 좋지

않은 무언가가 닥칠 때면 혼자 있고 싶어 했다. 그러고 보면 대학시절 내내 그녀를 쫓아 다녔건만

그녀에 대해서 정작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철저하게 자신의 프라이버시는 지키고 살았던 것 같다.

다시 돌아 서는데 방문이 열린다.

 

-준하야, 우리 나갈래?

 

그녀는 아마도 울었던 것 같다. 얼굴이 부어 있다.

그녀와 나는 차를 몰고 무작정 나왔다.

 

-어디로 갈까요?

 

그녀는 말없이 창밖만 멀뚱 바라본다. 그녀의 옆모습은 어쩐지 안쓰럽다.

 

-세상엔....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게 너무 많어....정말 너무 갖고 싶은데....그런데도 안된대.

 

그녀의 말에 물기가 베여 있다.

 

-무슨...일 있었어요?

-어디든 숨어 버리면 괜찮아질 거다 그렇게 생각했었는데....세상은 이렇게 넓은데...왜 내가 숨을만한

  곳은 하나두 없는 거니...꼭꼭 숨어지질 않아. 마음을 여기저기 두고 와서 그런가....준하야.....

  너는 내가...많이 가졌다고 생각하니?

-글쎄요....그건 사람 마음에 달린 것 같은데. 충분하다고 느끼면 그것이 하나든 둘이든 많은 것이고

  적다고 느끼면 백개든 천개든 적은 것 아니겠어요.

-똑똑하네 우리 준하.

 

그녀의 농담에도 즐겁지가 않다. 그녀는 지금 즐겁지 않다.

다시 침묵이 흐른다. 자꾸자꾸 나아가면 돌아오는 길을 잊어버릴텐데...자꾸만 아까부터 그것이

신경 쓰인다. 그녀를 힐끔 거린다. 울고 있다. 그녀가 우는 것을 본 것은 처음이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사람 자꾸 힐끔 거리지마...보려면 똑바로 보든지, 안 보려면 아예 눈도 주지 말든지.

 

그녀의 말에 나는 당황스럽다.

 

-나 여기 길 잘 모르는데....이 길은 처음 와 보는 길이라서...

-돌아 갈 수 없을까봐 걱정이니?...걱정마....내가 안전하게 제자리로 돌려 보내줄 거니까.

  너, 나 우는 거 처음 보지?...나두 그래, 누군가의 앞에서 눈물 보이기는 첨이다....근데...있지...

  자꾸....눈물이 나려 그런다 주책맞게.....나, 울어도 되지?

-네...의식하지 말구....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녀는 이제 소리까지 내며 훌쩍인다. 나는 차를 한쪽에 세운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내가 보지 못하게 울고 있다. 소리만 내 귓가에 전해져 올 뿐이다.

그녀의 어깨가 파르르 떨린다. 어깨를 잡아 주려다 그냥 관둔다. 한동안 그렇게 울고 나더니 아무 일

없듯이 나를 보고 씨익 웃는다. 그것이 더 마음 아프게 만든다.

 

-하은인 어디 갔어?

-학교 근처에 자리가 하나 났대요....장모님이랑 거기 갔어요.

-학원 말이니?

-네.

-잘 됐네....그만 가자, 하은이 올 때 됐겠다.

 

다시 차를 돌린다. 그녀는 이제 울지 않는다.

 

-근데...아까, 왜 울었어요?

-뭐가 그렇게 궁금하니?

-선배가 우는 거 첨봐요....그래서 신경 쓰이네 괜히.

-너, 가끔 이유 없이 울고 싶어질 때 없어?....물론 난 이유가 있지만...언제나 그렇듯이

  이유는 한 가지야. 그런데 가끔 그 이유가 불쑥 불쑥 튀어 올라서 가슴을 마구 때려...

-그 이유가 뭔지 물어도 되요?

-아니...묻지마. 모르는 게 나아....알아서 나눌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상처가 될 수도 있어.

  상처는 혼자서 감당하고 싶어.

-선배....난 선배 좋아해요.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래요. 그런데...좋아하는 사람이

  아파하면 나두 아파요. 내가 대신 해결해 줄 수는 없지만....그래도....걱정은 되요....그러고 보니

  난 선배에 대해서 아는 게 정말 없는 것 같애요.

-눈에 보이는 것만 믿어라....마음으로 날 알게 되면 충격이 클 테니까....오늘 일 하은이한테는

  비밀이다. 나 울었다 그러면 놀래 쓰러져.

-알았어요.....근데요, 정말...단 한 번도 사랑해본 적 없어요?

-뜬금없이 그게 왜 궁금한대?

-느낌으로...순전히 내 느낌인데....사랑 때문에 그렇게 운 게 아닌가 싶어서요.

-너 자리 깔아도 되겠다....난, 사랑할 줄 모를 것 같니?

-그건 아니고...워낙 그런 모습 안보여서..

-이래뵈두 나....첫사랑두 있었어. 뭐, 보기 좋게 짝사랑으로 끝났지만.

-그랬어요? 언제요?

-대학 때....몰랐지?

-전혀요.

-말두 못 꺼내구...그냥 뭐 흐지부지...그렇게 됐어.

-그건 선배 답지 못하다.

-나 다운 게 뭔데?....내가 지금까지 내 것으로 만들어 본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그림두, 내가

  하고 싶어 시작한 게 아니었고, 유학생활도 그러했고...대학에 들어 온 것두 그랬고...하기 싫었는데

  정말 죽기보다 하기 싫은데도....해야만 했어. 어릴 적부터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뭐든...양보하고

  포기하고....

-하기 싫음 하지 말지...왜 그렇게 했어요?

-우리 엄만...그러니까 우리 아버지의 두 번째 부인이시거든....어릴 적에 아버지집에 맡겨진 채

  엄만 이태리로 갔어. 어릴 적부터...그러니까 아버지의 조강치처지...그 사이에 자식이 둘인데...

  항상 난 그들의 맨 뒤에 섰어. 매일 나에게 니가 포기 해라, 니가 양보해라...그런 말만 하셨던 분들  

  이야....그게 베였나봐. 사랑도 그런식으로 한 거 보믄 말야....

-그럼...그 사람 소식은 몰라요?

-아니...알어. 너무 잘 알지.....근데 만날 수가 없어. 여기까지만 하자 오늘은....민망하려 그러네.

-네....

 

그녀는 어쩐지 예전의 그녀가 아닌 것 같았다. 그녀가 여자라는 사실을 오늘에서야 깨닫다니...

그녀와 내가 집으로 돌아왔을 땐 하은이 먼저 와 있었다.

 

-나 없다구 둘이서 그새 데이트 했구나?

-엉, 좀 봐주라. 니 꺼면 내 껏두 되지?

 

그녀가 아무 일 없듯이 웃는 얼굴로 하은과 수다를 푼다.  조금 전에 눈물을 흘리던 그녀의

모습이 지워지지 않는다.

다음날 아침은 분주했다. 지니선배는 일찍 나간 모양이다.  하은이 서둘러 야채주스를

내어 온다.

 

-지니선배 언제 나갔어?

-새벽 6시쯤 나갔을 거야...오늘 좀 늦는대, 저녁 먼저 먹으라 그러던데.

-그래?....

-근데 표정이 왜 그래?

-왜?

-영, 걱정스러 죽겠단 표정인데?..질투나려 그러네.

-그랬어?...아냐...미안해.

-으이그...농담두 못해 증말. 울 신랑 이뻐 죽겠네...차 조심하구 사람 조심하구...

-알았어, 개 조심두 할게..

 

그녀는 정말 괜찮은 걸까. 하은의 밝은 표정을 보고 출근길에 오르니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하은 역시 내게 박카스 같은 존재다...히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