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영우와 관련된 사회적 분위기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단순히 케이블 방송국에서 만든 드라마가 공전의 대히트를 기록했다는 것이 아니며, 박은빈이라는 배우가 보여주는 캐릭터성과 뛰어난 연기력도 아니다. 독특하게도, 장애인과 관련된 이슈를 다루는 사회의 태도에 괴리가 있다는 것이다. 우영우라는 장애인은 사회의 전면에 등장하며 긍정적인 이슈로 소비되고 있는 반면, 장애인이라는 측면에서 동일한 범주에 속해있었던 단체인 전장연은 우영우의 히트로부터 채 반년조차 거슬러가기 전인 2022년 초 일반인의 이동권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수많은 비판을 받았던 역사가 있다. 어째서 우영우는 대세가 되었지만 전장연은 대세가 되지 못했는가? 어째서 전장연의 시위는 장애인의 권리와 그들이 받는 차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부정적으로 만들었지만 우영우는 부정적인 이슈가 된 그것을 다시금 양지로 끌어내 수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받고 있는가? 사람들의 약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 수준이 반년도 지나지 않은 기간 사이에 향상된 것일까? 아니면 전장연에 대한 비난에 대한 채무감과 부채의식에서 우영우에 대한 공감이 이루어진 것일까?
단순히 산술적으로 따졌을 때 우영우와 전장연 문제를 다루는 입장은 네 가지로 나뉜다.
1. 우영우에 공감하며 전장연 시위를 지지하는 경우
2. 우영우에는 공감하지만 전장연 시위에는 비판하는 경우
3. 우영우에는 공감하지 않지만 전장연 시위는 지지하는 경우
4. 우영우에 공감하지 않으며 전장연 시위도 지지하지 않는 경우
가 그것이다. 필자는 이중 4번의 입장에 해당하며, 사회적인 분위기로 미루어 짐작했을 때 가장 많은 경우는 2번이며 그 다음이 1번일 것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4번의 입장에서 1번과 2번의 입장을 반박해보도록 하겠다. 3번에 관해서는, 그 숫자가 매우 적을 것이라 생각하기에 따로 지면을 할애하지 않을 것이며, 3번에 대한 반박은 1번에 대한 반박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기에 이로 대체할 것이다. 이어질 반박을 요약하자면, 1번은 무지한 경우이며, 2번은 위선적인 경우이다.
우선 2번에 대해 먼저 반박을 하자면, 이들의 정의에는 기준이 없다는 것이 그 주된 골자이다. 우영우를 보며 대중은 귀엽고 사랑스럽지만 안타까운 상황에 놓인 주인공에 공감한다. 주인공이 그러한 차별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을 함께하며 통쾌함을 느끼고, 자연스럽게 그러한 공감은 장애인 차별에 대한 반대를 이끌어내며 현실에서의 사회적 논의로까지 이어지려고 한다. 장애라는 이유로 부당한 차별을 받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며 그동안 우리의 태도를 반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허나 이 ‘공감’은 시작부터 잘못됐다. 이들은 오히려 매우 특수하고 소수의 경우인 우영우에 집중하면서도 보편적이면서도 다수의 문제를 다루는 전장연 시위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시하거나 비난했기 때문이다. 우영우라는 장애인은 매우 특수한 경우이다. 현실적으로 자폐아가, 서울대 로스쿨을 수석으로, 또 만점으로 졸업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자폐 스펙트럼이라는 변명으로도 정당화는 불가능하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드넓은 스펙트럼을 가진 자폐아가 그러한 일을 해낸 경우는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극 중 우영우가 받는 차별은, 장애인이라는 집단의 입장에서 봤을 때 매우 특수한 경우이며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가의 가능성을 다뤄야하는 문제이다. 전장연의 시위의 경우는 다르다. 우리 주변 수많은 장애인이 마주하고 있는 실질적 어려움인 이동권과 관련된 시위이다. 자신들도 이동권을 보장받고 시민으로서 당연한 권리를 누려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의 요구는 우영우의 경우보다 보편적이며,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어째서 당신들은 우영우에게는 공감하면서 전장연에게는 손가락질을 하는가? 일어나지 않을 일에는 지레짐작으로 공감하며 반성한다고 말하면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문제는 외면하고 그들보고 반성하라고 말하는가? 전장연이 다루는 문제의 심각성은 우영우가 마주하는 현실에 비해 훨씬 심각하다. 우영우의 문제는 의식주와 관련되어 있지 않다면, 전장연의 문제는 장애인의 기본적인 생활권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외면하면서 가상의 인물에 공감하며 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자고 외치는 당신들의 태도에서 오는 그러한 아이러니는 어디에서 출발한 것인가? 후에 1번에 대해 반박할 논리에서 출발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러한 의식을 가지고 있을 지에 대해 의문이 든다. 이 경우 이러한 아이러니는 바로 공감이라는, 정의라는 착각에서 온다고 밖에 해석할 수 없다.
어느 순간 한국사회에서 공감은 마치 절대적인 정의로서 작용하고 있다. ‘공감능력’이라는 말이 등장하며 누구보다 객관적이어야할 법정에서 조차 온갖 ‘감수성’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시대가 되었다. 약자의 편에 서서, 그들의 문제에 공감하고 이들을 지지하는 이들은 선이며, 그 반대편에 서서 이성과 합리, 질서에 따라 양보하기보다 그들의 당연한 권리를 요구하는 사람들은 마치 시민의식을 내팽겨처버린 악으로 취급되고 있다. 정말 그러한가? 공감과 감성은 이성과 질서를 가볍게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정의’로운가? 그렇지 않다. 공감은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며 순간적으로 기분을 좋게 만들어줄 뿐이다. 상품을 생산할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그를 향유할 자본 또한 평등하지도, 충분하지도 않다. 결과적으로 파이는, 당연하게도 제로섬이다. 누군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누군가 불행해져야 한다. 파이도 키우면서 자신의 몫도 늘릴 수 있는 고도성장의 시대는 끝났다. 특히나 저성장 시대의 국면에서 파레토 최적은 자명한 진실이다. 단지 이 진실이 불편하다고 해서, 그러한 진실을 외면하고자 공감이라는 방패 뒤로 숨어버리는 것이 어디가 정의로운가? 문제가 생기면 해결을 위해 나서기보다 공감을 요구하며 좋은 것이 좋은 것이란 식으로 덮어버리는 것이 정의인가? 현실은 변하지 않고 삶은 여전히 시궁창이지만 따뜻한 공감이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가? 인간은 공감을 먹고 살지 않는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실질적인 의식주의 충족이다. 소위 공감이라는 말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도덕적 우월감밖에 의미하지 않는다. 문제를 해결하면서 악역을 맡기는 싫기에, 선한 쪽에 남고자 하며 그렇게 그 과정 속에서 얻게 되는 도덕적 성취감. 눈앞에 있는 사람을 울리기보다 웃게 했다는 데에서 오는 알량한 정의감과 뿌듯함. 덮어놓고 하는 공감의 뒷모습엔 그러한 추악한 모습이 있다.
우영우와 관련된 입장에서 중요한 부분은 바로 이 덮어놓고 하는 공감이라는 측면이다. 우영우는 차별을 상징하는가? 로펌이 우영우를 채용하지 않은 것은 차별이 아니다. 변호사라는 직업은 그 사회적 지위로 인해 종종 착각되곤 하지만 결국 영업직이다. 스스로 영업에 나서 고객을 유치해야하고, 의뢰인과 신뢰관계를 구축하여 그의 이익을 대변함으로써 이익을 실현하는 직업이다. 우영우는 이러한 변호사의 업무에 적합한가? 귀엽고 사랑스러운 배우의 이미지를 빼고 생각해보자. 시도 때도 없이 고래 얘기를 하는, 심지어는 법정에서까지 고래 얘기를 꺼내는 변호인. 김밥 외에는 밖에서 음식을 먹지 않는 영업사원. 절체절명의 상황에 놓인 피고인 앞에서 말을 따라하는 ‘반향어’를 하는 변호사. 의뢰인에게 충분한 신뢰를 주고, 판사에게 긍정적인 인상을 이끌어내고, 기업들과 신뢰관계를 구축해 계약을 따내야하는 변호사라는 직업에 빈말이라도 적합하다고 할 수 있는가? 면접 기회조차 부여하지 않은 로펌의 선택은 잘못됐지만, 결과적으로 우영우가 채용되지 않았던 것은 기업 입장에서 매우 적절하고 당연하다. 우영우는 변호인에 적합하지 않다. 능력이 있다고? 하자도 있다. 심지어 신뢰를 무기로 하는 변호인이라는 직업의 특성상 그러한 하자는 더욱 치명적이다. 세상 모두가 당신을 비난하더라도 혼자 당신의 편이 되어주며 당신의 이익을 대변해야하는 변호인이 우영우라고 생각해보자. 드라마적인 서사를 제외하고 보았을 때, 당신은 그에게 일을 믿고 맡길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당신들은 우영우에게 공감한다. 권모술수에게 분노한다. 드라마적인 서사가 그렇게 짜여있기 때문이다. 드라마 속에서 당연하게도 구분된 선과 악에서 주인공 우영우를 질투하며 그를 괴롭히는 권모술수는 악이며, 그 반대편에 선 주인공 우영우는 정의다. 장애인의 부당한 차별이라는 명분도 충분하다. 따라서 공감이 발동할 차례다. 당신들은 우영우에게 공감하며 또다시 알량한 도덕적 우월감을 느낀다. 어째서 이것이 비판받아야 하냐고? 사람을 웃게 만든다면 충분한 것 아니냐고? 따뜻하지 않은 세상을 알면서도 따뜻하다고 묘사하며, 누구보다 자기만족만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마냥 좋은 사람이 아니면서도 좋은 사람으로만 남고자하는 위선에서 오는 그 역겨움은 뒤로 한다고 하더라도 당신들의 공감엔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우영우에게는 공감하지만, 실제 장애인들의 모습에는 공감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는 우영우에게는 공감하지만, 실제로 내 출근길을 방해하는 전장연에게는 도리어 분노한다. 우영우는 실제로 로펌에 수십억에 해당하는 계약을 날려먹게 만들 정도의 피해를 입혔음에도. 어째서 수십억을 날려먹은 우영우는 공감받아야하며, 수십억을 얻기 위한 노력이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린 상사는 ‘입장은 이해는 간다’라는 취급을 받아야 하는가? 정작 본인에게 문제가 닥쳐온다면 수십억이 아니라 10만원으로도 화낼 사람들이? 우영우가 부딪히는 문제는 화면을 통해 바로 나에게 다가오지만 전장연이 말하는 문제는 나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영우의 문제에서는 자신의 입장과 자유롭게 ‘정의로운’ 편을 선택할 수 있지만, 전장연의 문제에서 자신은 혜택을 내려놔야 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우영우의 입장을 선택해 권모술수와 거리를 두고 자연스럽게 비난할 수 있지만, 전장연과 관련된 문제에서 자신은 당사자로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우영우를 보면서 장애인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은 정의로워서 정의로운 척 하는 것이 아니다. 깨어있는 척 하고 싶고, 정의롭고 싶으면서도 실제 문제는 바라볼 용기가 없기에, 또 자신에게 불편한 말을 하고 귀찮은 요구를 하는 사람들은 아니꼽기에, 실체는 위선인 정의라는 가면을 쓰고 눈앞에 귀엽고 사랑스러운 우영우에만 공감하는 것이다. 비겁한 자기만족일 뿐이다. 소위 우영우 신드롬의 실체는 이것이다. 당신들의 논리라면 장애인 차별은 나쁘며 철폐되어야 하지만, 더 현실적인 차별을 말하는 전장연은 이러한 위선과 가짜 공감 아래에서 비난을 받을 뿐이다. 감히 정의를 꺼내며 위선과 자기만족을 포장하지 말라. 진정 약자를 공감하고 싶다면 해준다라는 마인드에서부터, 그 알량한 도덕적 우월감에서부터 내려와 동일한 눈높이에서 출발하라.
그럼 우영우와 전장연을 동시에 지지하는 것은 옳은가? 그렇지 않다. 앞선 집단이 위선을 상징한다면, 이번의 입장은 무지를 상징한다. 문제의 핵심을 모르기 때문이다. 우영우를 지지하면서도 전장연을 비판하는 것. 알량한 정의감에 기반을 둔 다수의 경우를 제외하고도 합리적으로 이 입장을 정당화 할 수 있는 근거가 있다. 우영우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지만, 전장연은 명백한 불법행위를 했다.
우리 사회에는 수많은 약자와 둘러싼 논쟁들이 있다. 이 논쟁의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일까? 가령 인스타에 올라온 글에서 등장하는 농어촌 전형과 관련된 문제(창녀 지원금에 대해서는 논의조차 하지 않겠다. 범죄자를 지원하겠다는 그러한 논의를 당당하게 꺼내고 진행하는 것은, 같은 어려운 형편에서도 뼈빠지게 노력하며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 많은 분들에게의 모욕이다.)에서, 문제의 핵심이 되는 것은 농어촌 학생들에게 혜택을 주는 것 자체일까? 장애인과 관련된 문제에서 문제의 핵심은 ‘장애인을 배려해야 하는가와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일까?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논의를 마치겠다. 어차피 이해를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핵심은, 무엇을 해야하는가가 아니라 어디까지 해야하는가이다. 농어촌 학생들이 도시의 학생들보다 열악한 교육 인프라를 마주하기에, 이들에게 지원을 해야한다는 것에 공감하지 않는 사람들은 극단주의를 제외하자면 없다. 장애인에 대한 차별에 찬성하거나 장애인에게 일체의 배려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없다. 논의의 핵심은, 혜택을 어디까지 주어야 하는가이다. 사회적 약자를 배려한다는 대전제에 사회의 다수가 동의할 때, 또다시 입장들은 어디까지 배려해야하는가를 둘러싸고 나뉜다. 농어촌 전형을 예로 들어보자. 이 전형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정말 농어촌 전형 자체의 폐지일까? 서울대를 예로 들어 지역균등 전형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정말 지역 균등 전형 자체를 없애버리자는 것일까? 이러한 전형과 관련된 주요한 문제는 바로 ‘선’이다. 여기서 이 선은 수능 최저 등급으로 대변될 수 있다. 3합 6이라는 낮디 낮은 최저 등급이 그들의 최소한의 자격을 증명하는가? 도시의 학생과 시골의 학생이 동일한 100의 노력을 한다면 당연히 도시의 학생이 인프라로 인해 더 유리하며 좋은 결과를 만들어낸다. 다라서 시골의 학생에게 혜택을 주는 것은 정당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시의 학생은 200의 노력을 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을 시골의 학생이 120의 노력만을 해서 얻는 것이 정당한가? 농어촌 전형 자체의 정당함이 그 수준의 정당함을 담보하지 않는다. 택배 시스템이 잘 되어 있고, 대치동 인강 강사들의 강의가 온라인으로 저렴하게 열려있는 지금, 3합 6이라는 기준이 과연 도시 학생들이 동일한 성과를 얻기 위해 필요한 노력의 양과 동일한 양의 노력을 그들에게 요구하는가? 전혀 동의할 수 없다. 정시 기준 3합 4를 맞더라도 서울대에는 원서조차 넣지 못한다. 너무나도 쉽고 너무나도 낮은 기준이다. 집단을 분류했을 때 도시 학생들의 상위 0.1%의 노력을 요구하는 어떤 성과를 얻기 위해서라면 당연히 농어촌 학생들의 집단 내에서도 상위 0.1%의 노력이 쓰여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공정이고 정의다. 허들은 낮춰져야 할 뿐 없어져서는 안된다. 당연히 당신의 옆에서 뛰고 있는 누군가도 각자의 허들을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약자로 인정되는 집단에 대한 우대조치를 둘러싼 모든 논의는 여기서 출발한다: ‘어디까지 허들을 낮춰야 하는가?’
전장연의 경우는 어떠한가? 시위를 하는 것은 좋다. 이동권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고 범법행위를 허용해야 하는가? 대기업의 불법 행위는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전장연의 경우는 존중받아야 하는가? 당연히 아니다. 집시법은 사문화된 법이 아니다. 법을 준수하지 않았다면 장애인이라도 비판받아 마땅하다. 장애는 벼슬이 아니다. 노동자는 벼슬이 아니다. 부자가 벼슬이 아니라면 빈자도 벼슬이 될 수 없다. 민주주의, 자유주의, 다원주의 사회에서 벼슬이 되어야 할 정체성은 존재할 수도 없으며 존재해서도 안된다. 전장연은 바로 이 지점에서 비판받아야만 한다. 단순히 지하철을 못타게 하는 불편한 존재여서가 아니라 바로 이 이유에서.
우영우를 둘러싼 사회적 담론이 이렇게 지성 없이 진행되는 것은 위험하며, 치기어린 시도이다. 이들은 자신이 무엇을 주장하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정확히 어느 포인트에서 우영우가 공감을 얻어야 하는지 조차 알지 못한다. 이들은 무지하거나 위선적이다. 우영우를 자신들에 비추어보고 이대남을 권모술수에 비추어보는 시도는 역겹기 그지없다. 당신들의 위치는 우영우가 아니라 권모술수이며 당신들은 정의의 사도가 아니라 역겨운 위선자일 뿐이다. 자신이 놓인 입장에 따라 바뀌는 정의가 어딜 봐서 ‘옳은 뜻’인가? 우영우를 보며 당신들이 느끼는 감정은 알량한 정의감에서 오는 뿌듯함과 도덕적 우월의식을 뿐이며, 진정 약자를 배려하기 위해 필요한 건 눈앞에 놓이는 불쌍한 고양이에게 밥을 던져주는 태도가 아니라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동일한 높이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장문)우영우와 관련한 논의에 대해서
단순히 산술적으로 따졌을 때 우영우와 전장연 문제를 다루는 입장은 네 가지로 나뉜다.
1. 우영우에 공감하며 전장연 시위를 지지하는 경우
2. 우영우에는 공감하지만 전장연 시위에는 비판하는 경우
3. 우영우에는 공감하지 않지만 전장연 시위는 지지하는 경우
4. 우영우에 공감하지 않으며 전장연 시위도 지지하지 않는 경우
가 그것이다. 필자는 이중 4번의 입장에 해당하며, 사회적인 분위기로 미루어 짐작했을 때 가장 많은 경우는 2번이며 그 다음이 1번일 것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4번의 입장에서 1번과 2번의 입장을 반박해보도록 하겠다. 3번에 관해서는, 그 숫자가 매우 적을 것이라 생각하기에 따로 지면을 할애하지 않을 것이며, 3번에 대한 반박은 1번에 대한 반박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기에 이로 대체할 것이다. 이어질 반박을 요약하자면, 1번은 무지한 경우이며, 2번은 위선적인 경우이다.
우선 2번에 대해 먼저 반박을 하자면, 이들의 정의에는 기준이 없다는 것이 그 주된 골자이다. 우영우를 보며 대중은 귀엽고 사랑스럽지만 안타까운 상황에 놓인 주인공에 공감한다. 주인공이 그러한 차별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을 함께하며 통쾌함을 느끼고, 자연스럽게 그러한 공감은 장애인 차별에 대한 반대를 이끌어내며 현실에서의 사회적 논의로까지 이어지려고 한다. 장애라는 이유로 부당한 차별을 받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며 그동안 우리의 태도를 반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허나 이 ‘공감’은 시작부터 잘못됐다. 이들은 오히려 매우 특수하고 소수의 경우인 우영우에 집중하면서도 보편적이면서도 다수의 문제를 다루는 전장연 시위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시하거나 비난했기 때문이다. 우영우라는 장애인은 매우 특수한 경우이다. 현실적으로 자폐아가, 서울대 로스쿨을 수석으로, 또 만점으로 졸업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자폐 스펙트럼이라는 변명으로도 정당화는 불가능하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드넓은 스펙트럼을 가진 자폐아가 그러한 일을 해낸 경우는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극 중 우영우가 받는 차별은, 장애인이라는 집단의 입장에서 봤을 때 매우 특수한 경우이며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가의 가능성을 다뤄야하는 문제이다. 전장연의 시위의 경우는 다르다. 우리 주변 수많은 장애인이 마주하고 있는 실질적 어려움인 이동권과 관련된 시위이다. 자신들도 이동권을 보장받고 시민으로서 당연한 권리를 누려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의 요구는 우영우의 경우보다 보편적이며,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어째서 당신들은 우영우에게는 공감하면서 전장연에게는 손가락질을 하는가? 일어나지 않을 일에는 지레짐작으로 공감하며 반성한다고 말하면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문제는 외면하고 그들보고 반성하라고 말하는가? 전장연이 다루는 문제의 심각성은 우영우가 마주하는 현실에 비해 훨씬 심각하다. 우영우의 문제는 의식주와 관련되어 있지 않다면, 전장연의 문제는 장애인의 기본적인 생활권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외면하면서 가상의 인물에 공감하며 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자고 외치는 당신들의 태도에서 오는 그러한 아이러니는 어디에서 출발한 것인가? 후에 1번에 대해 반박할 논리에서 출발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러한 의식을 가지고 있을 지에 대해 의문이 든다. 이 경우 이러한 아이러니는 바로 공감이라는, 정의라는 착각에서 온다고 밖에 해석할 수 없다.
어느 순간 한국사회에서 공감은 마치 절대적인 정의로서 작용하고 있다. ‘공감능력’이라는 말이 등장하며 누구보다 객관적이어야할 법정에서 조차 온갖 ‘감수성’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시대가 되었다. 약자의 편에 서서, 그들의 문제에 공감하고 이들을 지지하는 이들은 선이며, 그 반대편에 서서 이성과 합리, 질서에 따라 양보하기보다 그들의 당연한 권리를 요구하는 사람들은 마치 시민의식을 내팽겨처버린 악으로 취급되고 있다. 정말 그러한가? 공감과 감성은 이성과 질서를 가볍게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정의’로운가? 그렇지 않다. 공감은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며 순간적으로 기분을 좋게 만들어줄 뿐이다. 상품을 생산할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그를 향유할 자본 또한 평등하지도, 충분하지도 않다. 결과적으로 파이는, 당연하게도 제로섬이다. 누군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누군가 불행해져야 한다. 파이도 키우면서 자신의 몫도 늘릴 수 있는 고도성장의 시대는 끝났다. 특히나 저성장 시대의 국면에서 파레토 최적은 자명한 진실이다. 단지 이 진실이 불편하다고 해서, 그러한 진실을 외면하고자 공감이라는 방패 뒤로 숨어버리는 것이 어디가 정의로운가? 문제가 생기면 해결을 위해 나서기보다 공감을 요구하며 좋은 것이 좋은 것이란 식으로 덮어버리는 것이 정의인가? 현실은 변하지 않고 삶은 여전히 시궁창이지만 따뜻한 공감이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가? 인간은 공감을 먹고 살지 않는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실질적인 의식주의 충족이다. 소위 공감이라는 말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도덕적 우월감밖에 의미하지 않는다. 문제를 해결하면서 악역을 맡기는 싫기에, 선한 쪽에 남고자 하며 그렇게 그 과정 속에서 얻게 되는 도덕적 성취감. 눈앞에 있는 사람을 울리기보다 웃게 했다는 데에서 오는 알량한 정의감과 뿌듯함. 덮어놓고 하는 공감의 뒷모습엔 그러한 추악한 모습이 있다.
우영우와 관련된 입장에서 중요한 부분은 바로 이 덮어놓고 하는 공감이라는 측면이다. 우영우는 차별을 상징하는가? 로펌이 우영우를 채용하지 않은 것은 차별이 아니다. 변호사라는 직업은 그 사회적 지위로 인해 종종 착각되곤 하지만 결국 영업직이다. 스스로 영업에 나서 고객을 유치해야하고, 의뢰인과 신뢰관계를 구축하여 그의 이익을 대변함으로써 이익을 실현하는 직업이다. 우영우는 이러한 변호사의 업무에 적합한가? 귀엽고 사랑스러운 배우의 이미지를 빼고 생각해보자. 시도 때도 없이 고래 얘기를 하는, 심지어는 법정에서까지 고래 얘기를 꺼내는 변호인. 김밥 외에는 밖에서 음식을 먹지 않는 영업사원. 절체절명의 상황에 놓인 피고인 앞에서 말을 따라하는 ‘반향어’를 하는 변호사. 의뢰인에게 충분한 신뢰를 주고, 판사에게 긍정적인 인상을 이끌어내고, 기업들과 신뢰관계를 구축해 계약을 따내야하는 변호사라는 직업에 빈말이라도 적합하다고 할 수 있는가? 면접 기회조차 부여하지 않은 로펌의 선택은 잘못됐지만, 결과적으로 우영우가 채용되지 않았던 것은 기업 입장에서 매우 적절하고 당연하다. 우영우는 변호인에 적합하지 않다. 능력이 있다고? 하자도 있다. 심지어 신뢰를 무기로 하는 변호인이라는 직업의 특성상 그러한 하자는 더욱 치명적이다. 세상 모두가 당신을 비난하더라도 혼자 당신의 편이 되어주며 당신의 이익을 대변해야하는 변호인이 우영우라고 생각해보자. 드라마적인 서사를 제외하고 보았을 때, 당신은 그에게 일을 믿고 맡길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당신들은 우영우에게 공감한다. 권모술수에게 분노한다. 드라마적인 서사가 그렇게 짜여있기 때문이다. 드라마 속에서 당연하게도 구분된 선과 악에서 주인공 우영우를 질투하며 그를 괴롭히는 권모술수는 악이며, 그 반대편에 선 주인공 우영우는 정의다. 장애인의 부당한 차별이라는 명분도 충분하다. 따라서 공감이 발동할 차례다. 당신들은 우영우에게 공감하며 또다시 알량한 도덕적 우월감을 느낀다. 어째서 이것이 비판받아야 하냐고? 사람을 웃게 만든다면 충분한 것 아니냐고? 따뜻하지 않은 세상을 알면서도 따뜻하다고 묘사하며, 누구보다 자기만족만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마냥 좋은 사람이 아니면서도 좋은 사람으로만 남고자하는 위선에서 오는 그 역겨움은 뒤로 한다고 하더라도 당신들의 공감엔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우영우에게는 공감하지만, 실제 장애인들의 모습에는 공감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는 우영우에게는 공감하지만, 실제로 내 출근길을 방해하는 전장연에게는 도리어 분노한다. 우영우는 실제로 로펌에 수십억에 해당하는 계약을 날려먹게 만들 정도의 피해를 입혔음에도. 어째서 수십억을 날려먹은 우영우는 공감받아야하며, 수십억을 얻기 위한 노력이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린 상사는 ‘입장은 이해는 간다’라는 취급을 받아야 하는가? 정작 본인에게 문제가 닥쳐온다면 수십억이 아니라 10만원으로도 화낼 사람들이? 우영우가 부딪히는 문제는 화면을 통해 바로 나에게 다가오지만 전장연이 말하는 문제는 나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영우의 문제에서는 자신의 입장과 자유롭게 ‘정의로운’ 편을 선택할 수 있지만, 전장연의 문제에서 자신은 혜택을 내려놔야 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우영우의 입장을 선택해 권모술수와 거리를 두고 자연스럽게 비난할 수 있지만, 전장연과 관련된 문제에서 자신은 당사자로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우영우를 보면서 장애인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은 정의로워서 정의로운 척 하는 것이 아니다. 깨어있는 척 하고 싶고, 정의롭고 싶으면서도 실제 문제는 바라볼 용기가 없기에, 또 자신에게 불편한 말을 하고 귀찮은 요구를 하는 사람들은 아니꼽기에, 실체는 위선인 정의라는 가면을 쓰고 눈앞에 귀엽고 사랑스러운 우영우에만 공감하는 것이다. 비겁한 자기만족일 뿐이다. 소위 우영우 신드롬의 실체는 이것이다. 당신들의 논리라면 장애인 차별은 나쁘며 철폐되어야 하지만, 더 현실적인 차별을 말하는 전장연은 이러한 위선과 가짜 공감 아래에서 비난을 받을 뿐이다. 감히 정의를 꺼내며 위선과 자기만족을 포장하지 말라. 진정 약자를 공감하고 싶다면 해준다라는 마인드에서부터, 그 알량한 도덕적 우월감에서부터 내려와 동일한 눈높이에서 출발하라.
그럼 우영우와 전장연을 동시에 지지하는 것은 옳은가? 그렇지 않다. 앞선 집단이 위선을 상징한다면, 이번의 입장은 무지를 상징한다. 문제의 핵심을 모르기 때문이다. 우영우를 지지하면서도 전장연을 비판하는 것. 알량한 정의감에 기반을 둔 다수의 경우를 제외하고도 합리적으로 이 입장을 정당화 할 수 있는 근거가 있다. 우영우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지만, 전장연은 명백한 불법행위를 했다.
우리 사회에는 수많은 약자와 둘러싼 논쟁들이 있다. 이 논쟁의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일까? 가령 인스타에 올라온 글에서 등장하는 농어촌 전형과 관련된 문제(창녀 지원금에 대해서는 논의조차 하지 않겠다. 범죄자를 지원하겠다는 그러한 논의를 당당하게 꺼내고 진행하는 것은, 같은 어려운 형편에서도 뼈빠지게 노력하며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 많은 분들에게의 모욕이다.)에서, 문제의 핵심이 되는 것은 농어촌 학생들에게 혜택을 주는 것 자체일까? 장애인과 관련된 문제에서 문제의 핵심은 ‘장애인을 배려해야 하는가와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일까?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논의를 마치겠다. 어차피 이해를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핵심은, 무엇을 해야하는가가 아니라 어디까지 해야하는가이다. 농어촌 학생들이 도시의 학생들보다 열악한 교육 인프라를 마주하기에, 이들에게 지원을 해야한다는 것에 공감하지 않는 사람들은 극단주의를 제외하자면 없다. 장애인에 대한 차별에 찬성하거나 장애인에게 일체의 배려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없다. 논의의 핵심은, 혜택을 어디까지 주어야 하는가이다. 사회적 약자를 배려한다는 대전제에 사회의 다수가 동의할 때, 또다시 입장들은 어디까지 배려해야하는가를 둘러싸고 나뉜다. 농어촌 전형을 예로 들어보자. 이 전형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정말 농어촌 전형 자체의 폐지일까? 서울대를 예로 들어 지역균등 전형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정말 지역 균등 전형 자체를 없애버리자는 것일까? 이러한 전형과 관련된 주요한 문제는 바로 ‘선’이다. 여기서 이 선은 수능 최저 등급으로 대변될 수 있다. 3합 6이라는 낮디 낮은 최저 등급이 그들의 최소한의 자격을 증명하는가? 도시의 학생과 시골의 학생이 동일한 100의 노력을 한다면 당연히 도시의 학생이 인프라로 인해 더 유리하며 좋은 결과를 만들어낸다. 다라서 시골의 학생에게 혜택을 주는 것은 정당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시의 학생은 200의 노력을 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을 시골의 학생이 120의 노력만을 해서 얻는 것이 정당한가? 농어촌 전형 자체의 정당함이 그 수준의 정당함을 담보하지 않는다. 택배 시스템이 잘 되어 있고, 대치동 인강 강사들의 강의가 온라인으로 저렴하게 열려있는 지금, 3합 6이라는 기준이 과연 도시 학생들이 동일한 성과를 얻기 위해 필요한 노력의 양과 동일한 양의 노력을 그들에게 요구하는가? 전혀 동의할 수 없다. 정시 기준 3합 4를 맞더라도 서울대에는 원서조차 넣지 못한다. 너무나도 쉽고 너무나도 낮은 기준이다. 집단을 분류했을 때 도시 학생들의 상위 0.1%의 노력을 요구하는 어떤 성과를 얻기 위해서라면 당연히 농어촌 학생들의 집단 내에서도 상위 0.1%의 노력이 쓰여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공정이고 정의다. 허들은 낮춰져야 할 뿐 없어져서는 안된다. 당연히 당신의 옆에서 뛰고 있는 누군가도 각자의 허들을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약자로 인정되는 집단에 대한 우대조치를 둘러싼 모든 논의는 여기서 출발한다: ‘어디까지 허들을 낮춰야 하는가?’
전장연의 경우는 어떠한가? 시위를 하는 것은 좋다. 이동권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고 범법행위를 허용해야 하는가? 대기업의 불법 행위는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전장연의 경우는 존중받아야 하는가? 당연히 아니다. 집시법은 사문화된 법이 아니다. 법을 준수하지 않았다면 장애인이라도 비판받아 마땅하다. 장애는 벼슬이 아니다. 노동자는 벼슬이 아니다. 부자가 벼슬이 아니라면 빈자도 벼슬이 될 수 없다. 민주주의, 자유주의, 다원주의 사회에서 벼슬이 되어야 할 정체성은 존재할 수도 없으며 존재해서도 안된다. 전장연은 바로 이 지점에서 비판받아야만 한다. 단순히 지하철을 못타게 하는 불편한 존재여서가 아니라 바로 이 이유에서.
우영우를 둘러싼 사회적 담론이 이렇게 지성 없이 진행되는 것은 위험하며, 치기어린 시도이다. 이들은 자신이 무엇을 주장하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정확히 어느 포인트에서 우영우가 공감을 얻어야 하는지 조차 알지 못한다. 이들은 무지하거나 위선적이다. 우영우를 자신들에 비추어보고 이대남을 권모술수에 비추어보는 시도는 역겹기 그지없다. 당신들의 위치는 우영우가 아니라 권모술수이며 당신들은 정의의 사도가 아니라 역겨운 위선자일 뿐이다. 자신이 놓인 입장에 따라 바뀌는 정의가 어딜 봐서 ‘옳은 뜻’인가? 우영우를 보며 당신들이 느끼는 감정은 알량한 정의감에서 오는 뿌듯함과 도덕적 우월의식을 뿐이며, 진정 약자를 배려하기 위해 필요한 건 눈앞에 놓이는 불쌍한 고양이에게 밥을 던져주는 태도가 아니라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동일한 높이에서 출발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