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화 -나도 사랑 받고 싶다- 여름 태양은 길고 깊다. 그늘 없는 벤치에 앉아 오랫동안 그 빛속을 들여다본다. 무엇이 보일까 싶어 오래오래 들여다 본다. 들여다 볼 수록 내 눈은 시각을 잃는다. 빛을 피해 시선을 옮기면 한동안 그 빛의 후유증으로 세상을 보지 못한다. 잠시 잠깐 현기증이 일어난다. 내게 사랑은 그러했다. 오래오래 들여다 볼수록 상처는 깊어질 수 밖에 없었고, 내 눈만 자꾸 먼다. 내 사랑은 내게 위험한 흉기 같은 것이다. -어이, 유교수 여기서 뭐해? 박교수다. 그는 삼십대 후반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 사이에서도 빛이 난다. 함께 있으면 그와 더불어 나까지도 빛이 나는 것 같다. -사춘기야? 씨익 웃어 보인다. -사춘긴 아닐테구 오춘기라도 온 거야 뭐야, 뭐가 그렇게 심각해? -그러게...가볍게 살고 싶은데 그게 안되네요, 몸무게가 불었나... -아직 팔팔하게 가볍네, 농담하는 거 보니까. -내 나이가 새삼스러워지네요 요즘. -젊은 게 좋은 것만은 아냐, 연륜이란 말이 왜 생겼겠게?...수업 끝났지 오늘? -네....너무 일찍 끝나니까 갈 곳도 없네요. -작업실 알아보고 있다더니 아직인가 보네. -방학하면 그때부터 서서히 알아봐야죠....참, 박교수님은 왜 결혼 안해요? -그러는 유교수는 왜 안해? -이유가 똑같은가, 그래요? -이유가 뭔데? -에이, 덫에 걸렸네. 내가 먼저 물었던 건데... -이 나이에 한 번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면 믿겠어? -설마... -이런다니까, 정말 그런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어....젊었을 땐 그냥 모든 여자들이 다 시시했고, 시간이 지나고 어느 정도 이성에 눈을 뜨니까 이 나이가 되어 있더라구. 내 나이 되면 사랑이 말처럼 쉬운 게 아니야, 용기가 필요해지더라구....무슨 용기가 필요 있을까 하겠지만....글쎄, 선뜻 시작할 엄두가 안나대....뭐, 아직 여자가 황금처럼 보이진 않지만 말야. -병이네요... -병인가? -네, 그것두 아주 심각하게 무서운 병이죠.... 한국으로 돌아온지 두어달이 다 채워진다. 나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삼년을 이태리로 또 삼년을 프랑스로 그리스로, 영국으로 돌아다녀도 나는 항상 여기에 있었다. 여기, 사랑하는 사람이 숨 쉬고, 잠 자고, 밥 먹고...하는 여기에 나도 있었다. 사람들은 나더러 역마살이라며 농을 던지지만...실상 나는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서 아주 멀리 달아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나 항상 나는 그의 손에 뒷덜미가 잡혀 있었다. 그는....여전히 나에게 첫사랑이며, 완전한 사랑이라는 사실을 재차 확인하게 된 셈이다. 다시 돌아오지 말 걸 그랬다. 그냥 거기에 눌러 앉아 있는 게 나을 뻔했다. 하은은 요즘 학원을 꾸민다고 난리다. 정신없이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겠다고 투정을 부린다. 준하는 그런 하은을 어떻게든 도와주기 위해서 이리저리 애쓴다. 하은을 너무도 사랑한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는 순간이면 나는....겁이 덜컥 난다. 내 안에 숨어 있던 무엇이 튀어 나와 준하를 옭아맬 것만 같아서.... 준하는 내게 첫사랑이었다. 내가 감히 준하에게 손을 내밀지 못한 것은 하은 때문이긴 하지만 나 자신에게 있었다. 박교수의 말대로 나는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준하 곁엔 항상 그림자처럼 하은이 따라 다녔고, 그런 그 둘을 떼어낼 자신이 없어서였다. 준하를 사랑하는 만큼 하은 역시 사랑했다. 그러나....어쩌면 나는 준하만큼 하은을 사랑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다시 그들 앞에 돌아온 걸 보면 말이다. 오늘도 하은은 늦는다. 준하도 늦을 것이다. 씻고 욕실에서 나오는데 준하가 들어온다. -하은인? -선배가 걸리나 봐요, 자꾸 가서 놀아주라구 그러네요. -내가 짐이 됐구나 어느새...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그런 뜻 아닌데... -알어...자격지심. 그와 마주하면 드러내지 않지만 가슴이 뛴다. 나는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라도 항상 밝아야 한다. -저녁은요? -생각 없는데...넌? -저두 별 생각 없네요...우리 시원한 맥주나 한 잔 할까요? -좋지... 그가 찬 맥주를 두 개 내온다. 거실 쇼파에 나란히 앉는다. 참지 말았어야 했다. 오래 전 대학때 그에게 거절 당하더라도 마음을 전했어야 했다...문득 후회가 된다. -곧 있음 방학인데 그때, 나 나갈까 해. -왜요, 더 있어도 되는데. 우리랑 있는 게 불편해? -아니, 너무 편해서 아예 눌러 앉을까 겁나서 그래 임마. -선배....선배 요즘 선배 답지 않아요... -무슨 말이니? -그게...뭐라고 해야 되나....선배가 좀 낯설어요. 내가 생각했던 선배는 항상 밝고 건강하고....웃음이 많고, 말도 재미 있게 했고....또.. -알어...나두 내가 이상해. 낯설고 그래.... -하은이 요즘 선배 걱정 많이 해요....얼굴에 그늘이 졌다고...예전 같지 않다고. -신경 쓰이니? -그럼요, 그것도 아주 많이. 가슴이 뛴다. 선후배 사이의 감정일 뿐이지만 가끔 준하의 말 한마디에 가슴이 저리곤 한다. -미안하다 분위기 망쳐서...자식, 나는 분위기도 못 잡냐? 드러워서 안한다 안해... -웃으니까 얼마나 이뻐요...진작 그러지. -니 눈엔 하은이만 이쁘지 다른 사람들이 이뻐 보이니? 아이구, 감사함다. -선배는 선배가 얼마나 이쁜 사람인지 모르는구나...참 아까운 사람이다, 혼자 살기엔. 그런 생각 하는데. -그럼 니가 좀 책임을 져 주든지. -그건 좀....힘들구, 좋은 선배 한 명 소개 시켜줄까요? -욕 먹을텐데.. -직장 동룐데....저보담 입사 선배에요. 생각도 트였고, 또... -그만해, 생각 있음 말할게. 됐지? -진짜 아까운데.... -뭔들 안 아깝겠냐, 그만 잘련다. -하은이 오면 자지...나두 심심한데. -너랑 더 놀다간......일 날 것 같다 야. 웃으며 이층으로 올라가지만 그 말은 진심이었다. 그는 나를 아직도 대수롭지 않은 아주 편안한 선배로 생각한다. 방으로 들어왔지만 내 귀는 아랫층에 있다. 그는 지금 뭘할까....그의 발소리가 들릴 때마다 심장은 자꾸 곤두박질 친다. 어느새 깜박 졸았나 보다. 웅성웅성 말 건네는 소리에 눈을 뜬다. 하은이 돌아왔나 보다. 시계를 보니 열두시가 다되어 간다. 아랫층으로 내려가 냉장고 문을 연다. 목이 칼칼하다. 냉수를 마시고 올라가려다 안방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본다. 방문 틈 사이로 들여다 본다. 그들은 아주 편안한 자세로 누워서 소근소근 이야기를 한다. 팔베개를 하고 누워 있는 하은의 표정은 정말 행복하다. 준하는 그런 하은이 이뻐 죽겠단 표정을 한다. 나는 여기서 지금 뭘하고 있는가. 오랜만에 하은과 함께 백화점에 들렀다. 오전 수업이 끝나고 오후엔 수업이 없었기에 시간이 남아 돌았다. 오래 전 은사님도 이미 뵙고, 친구들도 가끔 만나면서 시간이 흘렀다. 하은은 들떠 있다. -생각보다 학생들이 많이 와서 기분 정말 짱이다 선배. -녹슬지 않았구나.. -엉, 그래두 아직 쓸만하대. 선배 말대루 너무 안쓰면 고장 날 것 같아서 요즘 나두 학생들하고 같이 공부 하잖어....선배, 이거 어때요? -괜찮은데, 준하는 얼굴이 희니까, 블루색이 더 나을 것 같은데. -그렇지?....넘 이쁘다. 준하에게 사줄 옷을 고르는 하은은 행복해 보인다. -이걸루 주세요, 사이즈는 백이면 되겠는데.... -아냐, 이거 내가 사줄게. -그러지 마요, 내가 살게. -내가 사주고 싶어서 그래, 신세두 지니까. 성의다 무시하지마. -무시하면 화낼 거에요? -엉, 엄청 서운할거야. 일년간다 그거. -피이...알았어요 알았어. 준하가 좋아하겠다. 우리끼리 저녁 먹구 들어갈까? -준하는 어쩌구? -질투 좀 하라 그러죠 뭐. 하은과 함께 백화점을 나와 페스푸드점에 들어간다. 그녀는 식사를 하는 도중에도 준하 얘기와 학원 얘기에 열을 올린다. 그녀가 나보다도 훨씬 젊어 보이는 것 같은 생각에 위축감이 든다. 준하가 하은을 사랑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애를...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하은의 퇴근 시간은 항상 늦다. 준하와 단 둘이 저녁을 먹는 일이 자주 있다. 어쩐지 어색하고 거북해지는 것을 나는 느낀다. 준하는 그러는 나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오늘은 하은을 기다리는 동안 둘이서 영화를 보기로 했다. 이런식의 데이트라도 나는 행복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영화를 보지 않고 준하만 보고 있었다. 그는 알지 못한다. 나를 자제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웠다면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다. 왜 난 이런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을까. 다시 돌아가기엔 내 욕심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영화가 거의 다 끝날 무렵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정말 이러다 나를 자제할 수 없게 될까 무섭다. 준하가 뒤따라 나온다. -선배....지나선배. 영문을 모른채 따라 나온 준하가 자꾸 나를 불러 세운다. -왜 그래요? -집에 가고 싶어졌어. 미안해... -갑자기 왜.... -머리가....그래, 머리가 좀 아퍼. -많이 아퍼요? -조금 그래...신경 쓰이네 자꾸. -어떻게 아퍼요? 약 사올게요. -아냐, 됐어. 자고 나면 괜찮을 거야...나 택시 타면 돼. 기다렸다 하은이랑 같이 와. -그럼, 타요. 나는 다시 나오면 되요. -됐어, 그러지 마 번거롭게.-아프다면서...고집 피우지 말고 타요. 가다 약도 사구... -됐어 제발.... 순간 나도 모르게 화를 낸다. 준하의 표정이 당혹스러워진다. -너 왜 그래?...됐다는데 왜 자꾸 그러니? 나, 애 아냐...하은이나 챙겨 나까지 챙기려 하지 말구. 이미 화를 내버린 상태로 수습이 안된다. 그냥 돌아서 갈 수 밖에. 준하가 뛰어 와 내 팔을 잡는다. -선배... -미안해...화내서. 그냥...몸이 안좋아서 짜증이 나. -그럼 내가 하잔대로 해요 그냥. 이렇게 보내면 내가 맘이 쓰이잖아요. -알았어...태워줘 그럼. 결국 그와 함께 차에 오른다. 그는 자꾸 내 눈치를 본다. 화가 난다....왜 이렇게 화가 나는 것일까. 나도....이제 그에게 사랑 받고 싶단 욕심이 생겨서일까.
해바라기-3_
제 3 화
-나도 사랑 받고 싶다-
여름 태양은 길고 깊다. 그늘 없는 벤치에 앉아 오랫동안 그 빛속을 들여다본다.
무엇이 보일까 싶어 오래오래 들여다 본다. 들여다 볼 수록 내 눈은 시각을 잃는다.
빛을 피해 시선을 옮기면 한동안 그 빛의 후유증으로 세상을 보지 못한다.
잠시 잠깐 현기증이 일어난다. 내게 사랑은 그러했다. 오래오래 들여다 볼수록
상처는 깊어질 수 밖에 없었고, 내 눈만 자꾸 먼다. 내 사랑은 내게 위험한 흉기 같은 것이다.
-어이, 유교수 여기서 뭐해?
박교수다. 그는 삼십대 후반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 사이에서도 빛이 난다.
함께 있으면 그와 더불어 나까지도 빛이 나는 것 같다.
-사춘기야?
씨익 웃어 보인다.
-사춘긴 아닐테구 오춘기라도 온 거야 뭐야, 뭐가 그렇게 심각해?
-그러게...가볍게 살고 싶은데 그게 안되네요, 몸무게가 불었나...
-아직 팔팔하게 가볍네, 농담하는 거 보니까.
-내 나이가 새삼스러워지네요 요즘.
-젊은 게 좋은 것만은 아냐, 연륜이란 말이 왜 생겼겠게?...수업 끝났지 오늘?
-네....너무 일찍 끝나니까 갈 곳도 없네요.
-작업실 알아보고 있다더니 아직인가 보네.
-방학하면 그때부터 서서히 알아봐야죠....참, 박교수님은 왜 결혼 안해요?
-그러는 유교수는 왜 안해?
-이유가 똑같은가, 그래요?
-이유가 뭔데?
-에이, 덫에 걸렸네. 내가 먼저 물었던 건데...
-이 나이에 한 번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면 믿겠어?
-설마...
-이런다니까, 정말 그런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어....젊었을 땐 그냥 모든 여자들이 다 시시했고,
시간이 지나고 어느 정도 이성에 눈을 뜨니까 이 나이가 되어 있더라구. 내 나이 되면 사랑이
말처럼 쉬운 게 아니야, 용기가 필요해지더라구....무슨 용기가 필요 있을까 하겠지만....글쎄,
선뜻 시작할 엄두가 안나대....뭐, 아직 여자가 황금처럼 보이진 않지만 말야.
-병이네요...
-병인가?
-네, 그것두 아주 심각하게 무서운 병이죠....
한국으로 돌아온지 두어달이 다 채워진다. 나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삼년을 이태리로 또 삼년을
프랑스로 그리스로, 영국으로 돌아다녀도 나는 항상 여기에 있었다.
여기, 사랑하는 사람이 숨 쉬고, 잠 자고, 밥 먹고...하는 여기에 나도 있었다.
사람들은 나더러 역마살이라며 농을 던지지만...실상 나는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서 아주 멀리 달아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나 항상 나는 그의 손에 뒷덜미가 잡혀 있었다.
그는....여전히 나에게 첫사랑이며, 완전한 사랑이라는 사실을 재차 확인하게 된 셈이다.
다시 돌아오지 말 걸 그랬다. 그냥 거기에 눌러 앉아 있는 게 나을 뻔했다.
하은은 요즘 학원을 꾸민다고 난리다. 정신없이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겠다고 투정을 부린다.
준하는 그런 하은을 어떻게든 도와주기 위해서 이리저리 애쓴다. 하은을 너무도 사랑한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는 순간이면 나는....겁이 덜컥 난다.
내 안에 숨어 있던 무엇이 튀어 나와 준하를 옭아맬 것만 같아서....
준하는 내게 첫사랑이었다. 내가 감히 준하에게 손을 내밀지 못한 것은 하은 때문이긴 하지만
나 자신에게 있었다. 박교수의 말대로 나는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준하 곁엔 항상 그림자처럼 하은이 따라 다녔고, 그런 그 둘을 떼어낼 자신이 없어서였다.
준하를 사랑하는 만큼 하은 역시 사랑했다. 그러나....어쩌면 나는 준하만큼 하은을 사랑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다시 그들 앞에 돌아온 걸 보면 말이다.
오늘도 하은은 늦는다. 준하도 늦을 것이다. 씻고 욕실에서 나오는데 준하가 들어온다.
-하은인?
-선배가 걸리나 봐요, 자꾸 가서 놀아주라구 그러네요.
-내가 짐이 됐구나 어느새...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그런 뜻 아닌데...
-알어...자격지심.
그와 마주하면 드러내지 않지만 가슴이 뛴다. 나는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라도 항상 밝아야 한다.
-저녁은요?
-생각 없는데...넌?
-저두 별 생각 없네요...우리 시원한 맥주나 한 잔 할까요?
-좋지...
그가 찬 맥주를 두 개 내온다. 거실 쇼파에 나란히 앉는다. 참지 말았어야 했다. 오래 전 대학때
그에게 거절 당하더라도 마음을 전했어야 했다...문득 후회가 된다.
-곧 있음 방학인데 그때, 나 나갈까 해.
-왜요, 더 있어도 되는데. 우리랑 있는 게 불편해?
-아니, 너무 편해서 아예 눌러 앉을까 겁나서 그래 임마.
-선배....선배 요즘 선배 답지 않아요...
-무슨 말이니?
-그게...뭐라고 해야 되나....선배가 좀 낯설어요. 내가 생각했던 선배는 항상 밝고 건강하고....웃음이
많고, 말도 재미 있게 했고....또..
-알어...나두 내가 이상해. 낯설고 그래....
-하은이 요즘 선배 걱정 많이 해요....얼굴에 그늘이 졌다고...예전 같지 않다고.
-신경 쓰이니?
-그럼요, 그것도 아주 많이.
가슴이 뛴다. 선후배 사이의 감정일 뿐이지만 가끔 준하의 말 한마디에 가슴이 저리곤 한다.
-미안하다 분위기 망쳐서...자식, 나는 분위기도 못 잡냐? 드러워서 안한다 안해...
-웃으니까 얼마나 이뻐요...진작 그러지.
-니 눈엔 하은이만 이쁘지 다른 사람들이 이뻐 보이니? 아이구, 감사함다.
-선배는 선배가 얼마나 이쁜 사람인지 모르는구나...참 아까운 사람이다, 혼자 살기엔. 그런 생각
하는데.
-그럼 니가 좀 책임을 져 주든지.
-그건 좀....힘들구, 좋은 선배 한 명 소개 시켜줄까요?
-욕 먹을텐데..
-직장 동룐데....저보담 입사 선배에요. 생각도 트였고, 또...
-그만해, 생각 있음 말할게. 됐지?
-진짜 아까운데....
-뭔들 안 아깝겠냐, 그만 잘련다.
-하은이 오면 자지...나두 심심한데.
-너랑 더 놀다간......일 날 것 같다 야.
웃으며 이층으로 올라가지만 그 말은 진심이었다. 그는 나를 아직도 대수롭지 않은 아주 편안한
선배로 생각한다. 방으로 들어왔지만 내 귀는 아랫층에 있다. 그는 지금 뭘할까....그의 발소리가
들릴 때마다 심장은 자꾸 곤두박질 친다. 어느새 깜박 졸았나 보다. 웅성웅성 말 건네는 소리에 눈을
뜬다. 하은이 돌아왔나 보다. 시계를 보니 열두시가 다되어 간다. 아랫층으로 내려가 냉장고 문을 연다.
목이 칼칼하다. 냉수를 마시고 올라가려다 안방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본다.
방문 틈 사이로 들여다 본다. 그들은 아주 편안한 자세로 누워서 소근소근 이야기를 한다.
팔베개를 하고 누워 있는 하은의 표정은 정말 행복하다. 준하는 그런 하은이 이뻐 죽겠단 표정을 한다.
나는 여기서 지금 뭘하고 있는가.
오랜만에 하은과 함께 백화점에 들렀다. 오전 수업이 끝나고 오후엔 수업이 없었기에 시간이 남아 돌았다. 오래 전 은사님도 이미 뵙고, 친구들도 가끔 만나면서 시간이 흘렀다. 하은은 들떠 있다.
-생각보다 학생들이 많이 와서 기분 정말 짱이다 선배.
-녹슬지 않았구나..
-엉, 그래두 아직 쓸만하대. 선배 말대루 너무 안쓰면 고장 날 것 같아서 요즘 나두 학생들하고
같이 공부 하잖어....선배, 이거 어때요?
-괜찮은데, 준하는 얼굴이 희니까, 블루색이 더 나을 것 같은데.
-그렇지?....넘 이쁘다.
준하에게 사줄 옷을 고르는 하은은 행복해 보인다.
-이걸루 주세요, 사이즈는 백이면 되겠는데....
-아냐, 이거 내가 사줄게.
-그러지 마요, 내가 살게.
-내가 사주고 싶어서 그래, 신세두 지니까. 성의다 무시하지마.
-무시하면 화낼 거에요?
-엉, 엄청 서운할거야. 일년간다 그거.
-피이...알았어요 알았어. 준하가 좋아하겠다. 우리끼리 저녁 먹구 들어갈까?
-준하는 어쩌구?
-질투 좀 하라 그러죠 뭐.
하은과 함께 백화점을 나와 페스푸드점에 들어간다. 그녀는 식사를 하는 도중에도 준하 얘기와
학원 얘기에 열을 올린다. 그녀가 나보다도 훨씬 젊어 보이는 것 같은 생각에 위축감이 든다.
준하가 하은을 사랑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애를...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하은의 퇴근 시간은 항상 늦다. 준하와 단 둘이 저녁을 먹는 일이 자주 있다. 어쩐지 어색하고
거북해지는 것을 나는 느낀다. 준하는 그러는 나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오늘은 하은을 기다리는 동안 둘이서 영화를 보기로 했다. 이런식의 데이트라도 나는 행복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영화를 보지 않고 준하만 보고 있었다. 그는 알지 못한다.
나를 자제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웠다면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다. 왜 난 이런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을까. 다시 돌아가기엔 내 욕심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영화가 거의 다 끝날 무렵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정말 이러다 나를 자제할 수 없게 될까
무섭다. 준하가 뒤따라 나온다.
-선배....지나선배.
영문을 모른채 따라 나온 준하가 자꾸 나를 불러 세운다.
-왜 그래요?
-집에 가고 싶어졌어. 미안해...
-갑자기 왜....
-머리가....그래, 머리가 좀 아퍼.
-많이 아퍼요?
-조금 그래...신경 쓰이네 자꾸.
-어떻게 아퍼요? 약 사올게요.
-아냐, 됐어. 자고 나면 괜찮을 거야...나 택시 타면 돼. 기다렸다 하은이랑 같이 와.
-그럼, 타요. 나는 다시 나오면 되요.
-됐어, 그러지 마 번거롭게.
-아프다면서...고집 피우지 말고 타요. 가다 약도 사구...
-됐어 제발....
순간 나도 모르게 화를 낸다. 준하의 표정이 당혹스러워진다.
-너 왜 그래?...됐다는데 왜 자꾸 그러니? 나, 애 아냐...하은이나 챙겨 나까지 챙기려 하지 말구.
이미 화를 내버린 상태로 수습이 안된다. 그냥 돌아서 갈 수 밖에.
준하가 뛰어 와 내 팔을 잡는다.
-선배...
-미안해...화내서. 그냥...몸이 안좋아서 짜증이 나.
-그럼 내가 하잔대로 해요 그냥. 이렇게 보내면 내가 맘이 쓰이잖아요.
-알았어...태워줘 그럼.
결국 그와 함께 차에 오른다. 그는 자꾸 내 눈치를 본다. 화가 난다....왜 이렇게 화가 나는 것일까.
나도....이제 그에게 사랑 받고 싶단 욕심이 생겨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