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인- 아주 섬뜩하고 소름돋는 이야기

쨔샤ㅡ2022.08.04
조회2,107

여우골이라 불렸대죠 아마~지금은 친숙한 이름이지만 실정은 그러하지 못했습니다민초들의 이야기인데요그랬습니다배가 고파 굶주려 죽은 아이,미처 치료를 받지 못해 죽은 이들,가난하고 가난해서 너무 억울한 죽음을 맞은 이들은, 지게에 실려와 여기 기슭에 묻혔습니다무덤을 마련할 돈이 없었기에, 밤에 그냥 골짜기 아무렇게나 땅을 파고, 흙이랑 태반인 돌들로 대충 덮은후 사라져야 했습니다
비가 오면비에 쓸려 시신들은 들어났겠죠얇은 무덤은 여우들이 파혜치기 안성마춤이었습니다그렇게 밤마다 여우들은 달빛을 보며 울부짖었고 사람들은 이곳을 여우골이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이곳은 음식 장사를해서 망한적이 없었다고 합니다그 유명한 **식당과 칼국수집, 전국적으로 알려진 지역 명물 거리도 이곳, 골짜기에 있는데요아마도 꿂주려 죽은 원혼들이 지나는 이들에게 달라붙은 건 아닌가 합니다"배가 고파~, 배가 고파서..."민초의 그 억울한 죽음들이 한이 쌓이고 쌓여 알알이 맺히지 않았는지...
저희 부모님이 이곳에 이사온 해는 80년대 초반이었습니다당시 이곳은 지역에서 알아주는 부촌이었죠당대 최고 실세 전두환의 친인척들과, 역대 정권을 휘두르던 역사의 인물들..이 모두 이 근처에 살았습니다물론 최고 권력 기구인 남산의 지역지부도 이곳에 있었는데, '개도 오금을 지리고 피해 간다'는 소문을 무색하게 간간히 새어 나오는 나지막한 비명소리가 여명을 멍들게 하였지요
막 지은 새집은 정말 그림같은 집이었습니다잘 다듬어진 소나무들이 늘어서 있는 넓은 정원과, 돌들이 박혀있는 2층 양옥집은 지나는 이들 모두가 부러워하는 선망의 대상이었지요그리고 이곳은 우리네 가족의, 어쩌면 성공의 표상같이 보였습니다
어느날 오후, 스님이 문앞에 서서 목탁을 두들기기 시작합니다당시 이곳 산속 깊은 곳엔 암자들이 참 많았습니다어쩌면 득도를 위해 기가 센 이곳이 가장 안성마춤이었나 봅니다
어머님이 쌀댓박에 쌀을 가득 담아 급히 나가셨습니다망태기에 쌀을 들어붓자 스님이 말하더군요'이 집은 전국에서 터가 가장 험한곳일세 그려 나무 관센보살''뭐 저런 땡중이 다 있나!'시주을 받았으면 덕담을 해 주진 못할 망정 악담을 하니 화가 치미지요.하지만 스님은 아랑곳이 없이 말을 이어갑니다'다 죽는다'고 했습니다'이 집에 살고 있는 이들은 한명만빼고 모두 죽는다'고요참 할말이 없습니다어머님이 급히, 또 쌀을 한 댓박 퍼와 망태기에 붓습니다하지만 악담은 끊이질 않습니다어머님의 자랑거리인 큰 아들도 직장도없이 한 평생 빌어먹을거라 했습니다결혼도 서너번 할거라고...당시에 유명 공립대 교수였는데 말이죠
이 집이 이 터에 유일하게, 처음이자 마지막 집이 될거라며...살아남은 이가 그 센 기를 뚫고 아이 셋을 놓을 것인데 하지만 또 수 백명이 또 목숨을 내어놓을 것이라 했습니다스님은 갔지만 어머님은 계속해서 빌고 빌기를 끊이질 않습니다
그후 10년동안 스님의 예언이 적중되었습니다아버지는 극심한 음주로, 어머님은 암으로, 동생은 스스로 유명을 달리했습니다집에 같이 살진 않았지만 큰 형 또한 예언대로 되었습니다막 시집간 누나는 불치병의 두 아이를 낳는가하면,역시 타지에서 교편 생활을 하다 시집간 둘쨰 누나 또한, 남편의 바람기로 평생을 3만리 서로 떨어진 곳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전 그렇게 35년을 그 집에서 살았고 지역 부촌 동네는 겨우 옛 명성의 명목만 유지한채 빈민가로 전략했습니다그 집은 지역의 흉가로 유명해졌는데, 나무들은 멋대로 자라 비바람이 불면 마치 비명소리인듯한 흉음을 내기도 했지요.아이 셋을 낳았고 집을 처분하자말자 그 사건이 터졌습니다
식당에서... 급보 뉴스로 그 사건을 접했는데 보는 순간 그 끔찍한 저주의 예언이란 걸 알았습니다그래도 감이 아니길 바랬습니다.
하지만 뉴스는 하루종일 흘려나왔고 며칠뒤엔 우리집 터도 보이길 시작했습니다..
내가 이 애길 단순 지어낸 것은 절대 아닙니다.집이 팔리기 전..몇년전에도 네이트 게시판에 'sain0125-어느 순간 정지 되었음' 아디로 비슷한 글을 수 차례 올렸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