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형 암살 배후로도 의심 받았지만여운형은 공산당 세력에게 암살당했다그 뒤에 김구 임정 세력은 고립되었고 (비상정치회의소집) 등으로 돌파구를 모색했으나 우파 한민당, 공산당 좌익 세력 모두에게 외면당했다.한민당이나 공산당은 송진우, 여운형 등의 암살에 배후로김구를 의심했었기에 외면하는게 당연하게 보이는데 이승만은 왜 김구를 외면했을까?이승만은 더 중요한 것에 집중하며 정쟁에서 한발짝 벗어나 있었다.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살피며 대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1946년 새해 들어서 1차 미소공위가 열리게 되는데 이승만은 김구에게 손을 내밀었다.이승만과 김구는 서로 연합하게 되었고(비상국민회의)->(조선 대한국민 대표 민주의원)하지도 이승만과 김구를 이용해 또 한번 좌우 합작을 노렸다.그러나 민주의원의 의장 이승만과 국무총리 김구 등 우익 세력은 또 한번 반탁을 결의, 하지를 엿먹였다.미군정은 이승만 김구 카드를 버리고 다음단계 좌우 합작 정부 추진 카드로 김규식, 여운형을 뽑는다찬탁vs반탁 구도는 좌익에 타격을 가져오는데 좌익이 처음엔 반탁을 하다가 1946년 1월 2일박헌영이 모스크바소련의 지령을 받고 갑자기 찬탁으로 돌아섰기때문이다.찬탁은 미소공위, 미국과 소련 등 강대국 통치를 받자는 것이고 반탁은 자주적 민족 통일 독립 국가를 건설하자는 것이기에원래 찬탁은 친소, 친미반탁은 반미, 반소였다좌빨의 갑작스런 말바꾸기에민족 감성이 반발한것임소련 지령을 받은 찬탁파 좌빨의 몰락으로 반탁=반소련 이라는 프레임이 만들어졌고 이를 미군정이 의도적으로 선전했다김구와 임정도 가세해 반탁=제2의 독립운동 프레임을 만들어 반탁이 곧 애국하는길이라고 선전했다사실 미군정도 소련과 함께 신탁통치를 추진했기에 반미 움직임으로 전환될 수도 있었던 정국이었다그러나 찬탁=친소=매국 등식이 만들어졌고 그동안항일과 친일 중 양자택일의구도에서 친소 친공vs 반소 반공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다문재인 정부 때 일본 불매운동 등의 반일 선동이 있었는데 이것이친중 친러 종북 매국vs 반중 친미 친일 애국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북한의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중국의 올림픽, 한복, 김치, 역사 공정, 이순신 중국인 주장 등의 사건과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전쟁이라고 본다.이렇게 정국의 흐름은 계속해서 바뀐다문제는 김구 임정 세력이반탁에 섰다면반탁이 불러올 결과인 단정(단독정부 수립)을예측했어야 했는데그러지 못했다 미소공위가 결렬되면 냉전으로 치닫게될 것이고 북은 소련이 먹고 남은 미국이 먹게 될 것이었으니 단독 정부 말고는 노답인 상황이미 소련에 의해 실질적 정부가 구성 된 북한은찬탁, 친소, 친공 노선을 확립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반탁, 반소, 반공을 표방하는 임정은 북한과는 확연히 다른 길에 들어선 것이므로 앞으로 남한 단정으로 갈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음유일하게 이러한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던 인물은 이승만뿐이었다단정이 분단의 원흉이 아니라미소대결(냉전)이 원흉이고소련과 스탈린, 김일성이 분단의 원흉이었다1945년 9월 20일 북한에 민주 정권 수립 지령by 스탈린1946년 2월 민족주의자 조만식 감금임시린민위원회 의장 선출(김일성)농지개혁, 국유화조치, 사회제도 시행1차 미소공위 결렬 시점에 북한 원조 시작1948년 2월 10일 북조선 헌법초안 발표결과적으로 1946년 여름1차 미소공위 결렬 시점에남북은 분단된것이나 다름없었으므로 1948년 건국된 대한민국의 국부 이승만을 분단의 원흉이라 몰아가는 것들은 빨갱이 김구는 반탁으로 해방정국의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었으나미소 공위 협상 국면에서 미소 냉전 체제로의 전환의 흐름으로 바뀌는 정세를 살피지 못해서 도태된다.미국과 소련의 대결이 확실해진 시점에서친소련 김일성, 친미 이승만 외에김구가 설 자리는 없었던것임김구가 마지막 기회를 놓친것은 1947년 봄이다 이승만이 단정 수립론을 미국에 알리러 도미 외교를 떠났을 때이승만이 없는 틈을 타3.1일 본인을 수반으로 한 임시정부를 수립하려는 시도를 했다그러나 김규식 중도파의 외면을 당했고한민당, 한국인 군정 관료, 경찰의 외면으로 사실상 임정, 한독당계의 고립을 불러왔다. 1947년 10월 신탁통치안의 폐기로김구의 반탁도 동력을 잃었다찬탁 대 반탁 정국이 아니라UN 선거(단정) vs 남북통일(연공) 정국으로 전환되었다.여기서 김구는 남북통일쪽에 붙었다반탁 반공 반소를 주장하던 김구가 친소 친공 찬탁파 북한과 협력하자고 하며 중도에 노선을 변경한 결과는참혹했다대한민국 건국으로 가는 길을 막고 북한으로 남북협상길에 나선김구, 김규식을 이승만도 말리고 하지도 말렸다북한 정권 수립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호재로 철저하게 이용당한 김구와 김규식.이후 김구 세력은 몰락했다.김구는 민족국가 건설이라는 허상에과열되어 정세를 제대로 살피지못했다아니 제대로 살폈기때문에 협상(주화파)을하자는 주의였을수도 있다남북연석회의 참석차 평양에 방문했을 때소련 지원을 받아 무장한 북한 군대를 목격했을지도 모른다 내전의 민족 비극을 막기 위해 주화파를 자처한 현실론자일수도 있다민족 통일을 꿈꾼 이상론자일수도 있다그러나 현시점에서 드러났듯이 민족 통일 국가의 끝이 소련 괴뢰국,중공 괴뢰국인 수령 독재 북조선으로 귀결되었을뿐인 지금에서 과거를 본다면김구는 현실을 제대로 못본 비현실론자에이상이 아닌 망상론자다.독립운동에서 성공한 김구는 왜 해방정국에서 실.. : 네이버블로그 (naver.com) 1
독립운동에서 성공한 김구는 왜 해방정국에서 실패했는가?-2
여운형 암살 배후로도 의심 받았지만
여운형은 공산당 세력에게 암살당했다
그 뒤에 김구 임정 세력은 고립되었고
(비상정치회의소집) 등으로 돌파구를 모색했으나
우파 한민당, 공산당 좌익 세력 모두에게 외면당했다.
한민당이나 공산당은
송진우, 여운형 등의 암살에 배후로
김구를 의심했었기에 외면하는게 당연하게 보이는데
이승만은 왜 김구를 외면했을까?
이승만은 더 중요한 것에 집중하며 정쟁에서 한발짝 벗어나 있었다.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살피며 대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1946년 새해 들어서 1차 미소공위가 열리게 되는데 이승만은 김구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승만과 김구는 서로 연합하게 되었고
(비상국민회의)->(조선 대한국민 대표 민주의원)
하지도 이승만과 김구를 이용해 또 한번 좌우 합작을 노렸다.
그러나 민주의원의 의장 이승만과 국무총리 김구 등 우익 세력은 또 한번 반탁을 결의, 하지를 엿먹였다.
미군정은 이승만 김구 카드를 버리고
다음단계 좌우 합작 정부 추진 카드로
김규식, 여운형을 뽑는다
찬탁vs반탁 구도는 좌익에 타격을 가져오는데
좌익이 처음엔 반탁을 하다가
1946년 1월 2일
박헌영이 모스크바
소련의 지령을 받고 갑자기 찬탁으로 돌아섰기때문이다.
찬탁은 미소공위, 미국과 소련 등 강대국 통치를 받자는 것이고 반탁은 자주적 민족 통일 독립 국가를 건설하자는 것이기에
원래 찬탁은 친소, 친미
반탁은 반미, 반소였다
좌빨의 갑작스런 말바꾸기에
민족 감성이 반발한것임
소련 지령을 받은 찬탁파 좌빨의 몰락으로
반탁=반소련 이라는 프레임이 만들어졌고 이를 미군정이 의도적으로 선전했다
김구와 임정도 가세해 반탁=제2의 독립운동 프레임을 만들어 반탁이 곧 애국하는길이라고 선전했다
사실 미군정도 소련과 함께 신탁통치를 추진했기에 반미 움직임으로 전환될 수도 있었던 정국이었다
그러나 찬탁=친소=매국 등식이 만들어졌고 그동안
항일과 친일 중 양자택일의
구도에서
친소 친공vs 반소 반공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다
문재인 정부 때 일본 불매운동 등의 반일 선동이 있었는데 이것이
친중 친러 종북 매국vs 반중 친미 친일 애국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북한의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중국의 올림픽, 한복, 김치, 역사 공정, 이순신 중국인 주장 등의 사건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이라고 본다.
이렇게 정국의 흐름은 계속해서 바뀐다
문제는 김구 임정 세력이
반탁에 섰다면
반탁이 불러올 결과인
단정(단독정부 수립)을
예측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미소공위가 결렬되면 냉전으로 치닫게
될 것이고 북은 소련이 먹고 남은 미국이 먹게 될 것이었으니 단독 정부 말고는
노답인 상황
이미 소련에 의해 실질적 정부가 구성 된 북한은
찬탁, 친소, 친공 노선을 확립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반탁, 반소, 반공을 표방하는 임정은
북한과는 확연히 다른 길에 들어선 것이므로 앞으로 남한 단정으로 갈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음
유일하게 이러한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던 인물은 이승만뿐이었다
단정이 분단의 원흉이 아니라
미소대결(냉전)이 원흉이고
소련과 스탈린, 김일성이
분단의 원흉이었다
1945년 9월 20일 북한에 민주 정권 수립 지령by 스탈린
1946년 2월 민족주의자 조만식 감금
임시린민위원회 의장 선출(김일성)
농지개혁, 국유화조치, 사회제도 시행
1차 미소공위 결렬 시점에 북한 원조 시작
1948년 2월 10일 북조선 헌법초안 발표
결과적으로 1946년 여름
1차 미소공위 결렬 시점에
남북은 분단된것이나 다름없었으므로
1948년 건국된 대한민국의 국부 이승만을 분단의 원흉이라 몰아가는 것들은
빨갱이
김구는 반탁으로 해방정국의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었으나
미소 공위 협상 국면에서 미소 냉전 체제로의 전환의 흐름으로 바뀌는 정세를 살피지 못해서 도태된다.
미국과 소련의 대결이 확실해진 시점에서
친소련 김일성, 친미 이승만 외에
김구가 설 자리는 없었던것임
김구가 마지막 기회를 놓친것은
1947년 봄이다
이승만이 단정 수립론을 미국에 알리러 도미 외교를 떠났을 때
이승만이 없는 틈을 타
3.1일 본인을 수반으로 한 임시정부를
수립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러나 김규식 중도파의 외면을 당했고
한민당, 한국인 군정 관료, 경찰의 외면
으로 사실상 임정, 한독당계의 고립을 불러왔다.
1947년 10월 신탁통치안의 폐기로
김구의 반탁도 동력을 잃었다
찬탁 대 반탁 정국이 아니라
UN 선거(단정) vs 남북통일(연공) 정국으로 전환되었다.
여기서 김구는 남북통일쪽에 붙었다
반탁 반공 반소를 주장하던
김구가 친소 친공 찬탁파 북한과
협력하자고 하며
중도에 노선을 변경한 결과는
참혹했다
대한민국 건국으로 가는 길을 막고
북한으로 남북협상길에 나선
김구, 김규식을
이승만도 말리고 하지도 말렸다
북한 정권 수립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호재로 철저하게 이용당한 김구와 김규식.
이후 김구 세력은 몰락했다.
김구는 민족국가 건설이라는 허상에
과열되어 정세를 제대로 살피지못했다
아니 제대로 살폈기때문에
협상(주화파)을
하자는 주의였을수도 있다
남북연석회의 참석차 평양에 방문했을 때
소련 지원을 받아 무장한 북한 군대를
목격했을지도 모른다
내전의 민족 비극을
막기 위해 주화파를 자처한
현실론자일수도 있다
민족 통일을 꿈꾼 이상론자일수도 있다
그러나 현시점에서 드러났듯이
민족 통일 국가의 끝이 소련 괴뢰국,
중공 괴뢰국인 수령 독재 북조선으로 귀결되었을뿐인 지금에서 과거를 본다면
김구는 현실을 제대로 못본 비현실론자에
이상이 아닌 망상론자다.
독립운동에서 성공한 김구는 왜 해방정국에서 실.. : 네이버블로그 (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