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TA content="Namo WebEditor v4.0" name=generator> "준욱씨, 나 이제 그만 가야해요." 그 사람이 구슬프게 울고 있었습니다. 난 그 사람에게 다가가려 애쓰지만 이상하게 나의 발걸음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은 기어코 내게 등을 돌리더니 조금씩 내게서 멀어져만 갔습니다. "지은씨! 지은씨! 어디 가요?! 기다려요?! 기다리란 말이에요!" 난 애타게 그 사람을 그토록 불렀건만, 그 사람은 돌아보는 시늉도 하지 않은 채 깊은 어둠 속으로만 들어갔습니다. 그 사람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완전히 자취를 감추자 그제야 나는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습 니다. 난 그 사람이 사라진 곳으로 한없이 달려가 보았건만, 그 사람의 흔적 따윈 이미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일순 어디선가 구슬픈 그 사람의 울음소리가 들렸고, 난 다시 어둠으로 둘러싸인 이곳을 배 회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다 어둠의 한편에서 뿌연 안개가 나를 감쌌고, 이내 나의 몸을 조르기 시작했습니다. 조여오는 고통 속에 난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건만, 조그마한 신음하는 소리조차 낼 수 없 었습니다. 이대로 죽어야 하는지... 그 사람을 그렇게 떠나보내고, 이대로 죽어야만 하는지... 다행히 꿈이었습니다. 난 불현듯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무슨 가위가 그리 지독한지 나의 몸은 어느새 식은땀으로 범벅인 상태였습니다. 난 지독한 가위로 인한 나른한 몸을 이끌고, 자리에 일어나 시계를 들여다보니 이제 막 8시 를 넘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방안은 새벽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좀 어두웠습니다. 평소에 나의 단잠을 깨우던 그 흔한 밝은 햇살조차도 오늘은 창문으로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난 내 몸을 뒤덮고 있는 땀을 식히기 위해 창문을 열어보니 밖에는 언제부터인가 비가 촉촉 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샤워를 하기 위해 내 방 한편에 있는 수납장에 속옷을 꺼내고는 막 방을 벗어날 찰나였습니다. 문득 벽에 걸린 허름한 달력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오늘은 9월 14일... 그리 빠르지 않 은 암산력(暗算力)이었지만, 계산해보니 어느덧 그 사람과 이별한지도 200일이나 되었습니다. 이젠 타국(他國)에 있는 그 사람은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지 일순 궁금했습니다. 식사는 제때 하는지... 그곳에서 적응은 잘 하고 있는지... 이젠 내 사람도 아닌데 아직도 그 사람에게 미련이 남아있는 건지... 샤워를 하면서 꿈 때문인지 나의 머릿속에는 내내 그 사 람 생각으로 가득했습니다. 샤워를 다하고 아직 마르지 않는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털며 욕조에서 나올 때였습니다. 충전기에 꽂아 둔 휴대폰이 시끄러운 멜로디와 함께 울렸습니다. "여보세요?" "나야, 석재. 추석은 잘 보냈냐?" "그냥, 그렇지, 뭐. 그런데 아침부터 웬일이야?" "나도 그냥." "할 일도 없지. 할 말 없으면 빨리 끊어. 레포트도 써야하고 무지 바빠." "짜식, 매정하긴. 오늘 좀 보자." "오늘? 왜?" "왜긴, 얼굴 좀 보자는 거지. 우리가 만난지도 1달은 넘었잖아." "그래, 그렇게 하든지. 어디서 만날래?" "12시쯤에 너희 학교정문에서 보자. 너희 학교 구경도 하고 너희 학교 여자 많다니깐 여자 구경도 하고." "쳇, 결국 네 목적은 그거 군." "임마, 농담이야. 설마 너희 학교 여자 구경하려고 너 만나겠어?" "응, 너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놈이지." 그렇게 전화를 끊고 어제 밤에 쓰다만 레포트를 마저 작성하곤 집을 나섰습니다. 비가 와서 버스에 사람이 많이 많을 거라 생각했건만 다행히 한산했습니다. 1시간 정도 버 스를 타고 학교 정문에 도착하자 막 12시를 넘기고 있었습니다. 그때 자동차의 경적소리가 울려댔습니다. 자연스레 난 고개가 돌아갔고 낯익은 외제차가 눈 에 들어왔습니다. 석재의 차였습니다. 역시 집이 부유하다 보니 같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석재의 차는 항상 나를 의기소침하게 만듭니다. 나는 그 차에 다가가 문을 열고 어느 때처럼 빈정대며 올랐습니다. "여전히 차는 좋네. 역시 졸부 집 아들은 뭔가 달라도 달라. 부모가 이런 것도 사주고." 석재는 나의 빈정거림이 이젠 익숙하다는 듯 피식거렸습니다. "한 달만에 보는 인사가 고작 그거냐? 우선 어디로 갈까?" "교양학관으로 가자. 그쪽에 수업이 있으니깐." "교양학관?" "그냥 계속 올라가다 보면 나와. 내가 가르쳐줄게." 석재는 다시 차를 몰고 나의 안내에 따라 이윽고 붉은 벽돌과 하얀 기둥이 인상적인 교양학 관이 보였고 그 앞에 있는 주차장에 이르렀습니다. 비가 와서 그런지 교양학관 앞에 있는 주차장에는 이미 많은 차들이 정차되어 있었습니다. 그 주위를 잠시 배회하더니 겨우 주차공간이 보였고 이에 놓일세라 석재는 급히 주차했습니 다. "그래, 할 말이 뭐니?" "야, 뭐가 그렇게 급하니?" 석재는 시동을 끄곤 안전벨트까지 풀어헤치더니 나의 무릎 위에 놓인 가방으로 시선을 옮겼 습니다. 그러다 문득 나의 가방을 만지작거렸습니다. "고등학생도 아니고 무슨 가방에 책이 많니?" "수업교재도 있고 공부할 책도 들어있고 그렇지, 뭐." 순간 석재는 놀란 표정이었습니다. "공부?! 이∼야! 네가 공부라니 정말 언밸런스 하다." "그래도 지난 학기엔 장학금도 받았다고. 그리고 중학교 2학년 때까지만 해도 공부는 웬만 큼 했다고. 고등학교 3학년때 조금... 아니, 좀 많이 방황해서 그렇지 대학에 들어와서는 얼 마나 공부를 열심히 하려고 노력한다고. 이래봐도 선배들이 나보고 모범생이라고 그래." "그건 나도 알지. 그리고 네가 중 3때 양아치 놈들한테 괴롭힘 당해서 제대로 공부할 수 없 었던 것도 잘 알고." "그렇게 잘 알고 있으면서 그 놀란 표정은 뭐야?" "근데 솔직히 나한테는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나랑 철민이랑 어울려 다니면서 매일 싸움 하고 학창 시절 때 너 괴롭혔던 애 새끼들 두들겨 패는 험악한 모습만 봤으니깐 그렇지." "웬만하면 지난 과거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자. 뭐, 자랑스럽다고 그런 소리는 하는지... 그런 소리할거면 빈 강의실에 들어가서 공부나 하련다." 난 발아래 놓아둔 우산을 다시 집어들고 차에서 내리려고 하자 석재가 만류했습니다. "야, 얘기 좀 하자." 좀 전까지만 해도 활발하기 그지없던 석재의 얼굴엔 진지함이 묻어 났습니다. "준우야..." 게다가 그의 낮은 목소리는 나를 더욱 의아하게 만들었습니다. 난 다시 우산을 내려놓고는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갑자기 목소리까지 깔고 그래?" "지은이 누나 말이야..." 순간 나의 얼굴은 굳어졌고 말투마저 굳어져버렸습니다. "됐어. 그 사람 얘기라면 하지 마." "애써 외면하지 말고... 너, 얼마 전에 만났다며?" "응. 그 사람이 떠나기 전에. 그 사람... 여전히 예쁘더라. 아니, 더 예뻐진 것 같더라." "괜찮아?" "뭐가?" "참, 넌 나는 물론 다른 친구들이 힘들지 않냐고 물어도 넌 힘들지 않다고 하겠지? 넌 항상 어느 누구에게나 솔직하지 못하고, 아무리 힘들어도 절대 힘든 기색 같은 건 내지 않잖아." "잘 알면서 묻긴 왜 물어?" "하지만 준우야... 힘들면 나한테 탁 터놓고 말해. 난, 네 친구잖아." "네 그런 호의는 고마운데 솔직히 그러고 싶지 않아. 이제 너는 물론 그 사람으로 인해 알 게된 다른 친구들한테는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받고 싶지 않아." "야, 친구끼리 어려우면 서로 돕고 돕는 거지. 하여튼 자존심은 강해 가지고." "자존심 문제도 있지만, 그 사람과 헤어지고 난 이상 이제 너는 물론 너희들과 더 이상 어 울리고 싶지도 않고 어울릴 명분(名分)도 없어. 솔직히 너희들은 그 사람 때문에 알았잖아. 게다가 너희들과 계속 이 관계를 유지해 간다면... 언젠가는 그 사람이 다시 돌아오면 그 사 람과 마주칠 수밖에 없겠지. 그런데 그러고 싶지 않아. 그 사람이 첫사랑이니 만큼 그저 좋 은 추억으로만 묻어 두고 싶어. 그 사람을 다시 만난다면... 내가 더 비참해질 것 같아. 그 사람을 다시 만난다면... 너무 슬플 거야. 그 사람에게 미안하고... 항상 그 사람에 대해 죄책 감을 안고 살게 될 것 같아. 솔직히 지금도 힘들어 죽겠는데 그 사람을 다시 본다면 더욱 더 힘들어 질 거야. 더 이상 그 사람으로 인해 힘들어 지고 싶지 않아." 석재는 나의 말에 분개라도 한 모양인지 약간 목소리까지 높아졌다. "야! 박준우! 너, 너무 이기적이지 않니?! 누나는 떠나면서까지 네 걱정만 하던데. 그토록 누 나는 널 사랑하는데. 넌 너의 쓸데없는 무력감에 누나한테서 도망친다는 거 아냐? 그저 내 편의만을 위해서..." 하지만 난 애써 평정심을 유지했습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나, 원래 나쁜 놈이잖아. 나쁜 놈이니까 지키지도 못할 사랑하면서 괜 히 그 사람한테 상처만 줬잖아. 바보같이... 그리고 그 사람... 나보다 더 좋고, 더 어울리는 사람을 만날 거야." "그럼 이제 누나를 잊겠다는 거니?" "완전히 잊을 수는 없겠지. 그저 잊는다기보다는 가슴속에 묻어둬야 할 아름다운 추억일 뿐 이지. 그게 날 위해서나 그 사람을 위해서나 더 좋을 것 같아." 순간 목이 메어왔습니다. 이제 그 사람은 내게 추억일 뿐이라는 생각에 그 사람에 대한 지난 그리움과 아직 내 마음 속에 어딘가에 남아있는 그 사람에 대한 나의 비겁한 사랑에 목놓아 울고 싶었습니다. 난 깊게 내쉬는 한숨으로나마 나의 처량한 감정을 마음 깊숙한 저편으로 묻어둬야 했습니다. 석재는 그런 나를 보며 측은했는지 조심스레 말했습니다. "내가 괜한 얘기를 한 것 같군. 미안하다." 난 고개만 절래 저으며 괜찮다고 표시하지만 침울한 기분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석재는 능청스런 표정을 지으며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습니다. "야, 궁상맞게 이러고 있지 말고 학교 구경이나 시켜줘라." 석재는 먼저 우산을 펼쳐들곤 차에서 내렸고 나 역시 차에서 내렸습니다. "구경은 무슨 구경? 뭐, 특별한 게 있다고." 난 자연스레 교양학관으로 들어서는 높은 계단을 올랐고 석재도 따랐습니다. 이윽고 교양학관으로 들어서자 로비(lobby)의 가장자리에 있는 몇 개의 벤치에는 다른 학생 들이 끼리끼리 모여 수다를 떨고 있었고 금방 수업이 끝났는지 강의실이 밀집되어 있는 복 도에서 학생들로 붐비기 시작했습니다. 도저히 지금 복도를 지나가기엔 무리였습니다. 그때 석재의 탄성이 들여왔습니다. "오∼ 물 죽이는데?! 정말 소문대로 너희 학교엔 여자들이 정말 많네." "왜? 또 발정(發情)이라도 났어?" "내가 암컷이니? 발정(發情)하게. 난 그저 자연의 섭리대로 남자의 본능에 따르는 것뿐이라 고. 근데... 너, 이제 지은이 누나 잊는다고 그랬지?" 석재가 또 그 사람에 대해 언급하자 나도 모르게 발끈했습니다. "또 그 사람 소리니?!" "임마, 흥분하지 말고 더 들어봐. 너한테 좋은 충고 하나 해주려고 하니깐. 너 솔직히 말해 서 지은이 누나를 잊으려고 하는데 잘 안 잊어지지?" "그거야 당연한 거잖아." "물론 그렇지만, 그렇다고 평생을 잊지 않을 수는 없잖아." "그야 그런데 도대체 하고자 하는 말이 뭐야?" "내가 지은이 누나를 잊는 방법을 가르쳐줄까?" 난 그의 말에 솔깃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사람과 이별한 사실을 받아들이고 적응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엔 아직도 그 사람의 흔적 의 잔재들이 남아있어 자주... 아니, 가끔 고통스러운데 잊을 수 있다니... 자연스레 그의 말 에 반문했습니다. "어떻게?" "그야 간단하지. 사랑으로 얻은 슬픔은 다른 사랑으로 극복하라! 이런 기초적인 연애의 정석 (定石)도 몰라?" "난 또 뭐라고. 누구는 그런 생각 안 해봤겠니? 나도 그 사람 잊으려고 다른 사람을 사랑해 볼까 생각했는데..." "했는데?" "내 행색을 좀 보고 그딴 소리나 하지 그래? 누가 나 같은 사람을 좋아하겠니? 얼굴도 못생 겼고, 뚱뚱하고, 돈도 없고... 뭐 하나 잘난 게 없잖아." "또 자기 비하에 들어가는군." "자기 비하가 아니라 사실이야. 그리고 더 중요한 건... 그 사람에게 그런 상처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과연 누군가를 사랑해도 될 지 모르겠고 아직 헤어진지 반년밖에 되지 않았 는데 다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한테 미안하잖아." "웃기고 있네. 너, 정말 지은이 누나를 잊으려는 생각은 있는 거니? 헤어진지 반년밖에 되지 않았건,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건 헤어지면 끝이잖아. 네가 사랑하는 여자가 생기면 다시 그 여자를 사랑할 수 있는 거지, 꼭 헤어진 사람의 눈치를 보는 게 이상하지 않니? 게다가 헤어진지 반년이면 어떻고 일주일이면 어떠니? 네가 다시 사랑하고 싶으면 다시 사랑하면 되잖아. 그리고..." 그의 말에 그저 마음만 침잠할 뿐이었습니다. 그와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 어느덧 주변은 물론 그 비좁던 복도도 조금 한산했습니다. "잠깐만, 어디 빈 강의실에 들어가서 얘기를 하든지 하자." "그래, 그렇게 하자. 그전에 잠시 볼 일 좀 보고." 그는 바로 뒤편에 있는 화장실로 허둥지둥 발걸음 했고 난 그 자리를 지킬 뿐이었습니다. 일순 휴대폰의 진동이 외투에서 전해와 확인해보니 다름 아닌 광고 메시지일 뿐이었습니다. 심드렁하니 메시지를 지우고 다시 외투 속으로 휴대폰을 집어넣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한 여자가 친구들과 함께 나를 스쳐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분홍색 니트와 아이보리계통의 스커트를 입은 그 여자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눈이 부 셨습니다. 지금 밖에는 뿌연 하늘에 눅눅하게 비까지 내리는데 말입니다. 게다가 오뚝한 콧날과 하얀 피부, 포근함까지 느껴지는 그 여자의 미소는 나의 가슴을 고동 치게 했습니다. 그 사람과 헤어진 후로 설레이는 감정을 느껴보지 못했던 나였는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 사람을 못 잊어 번민(煩悶)으로만 가득했는데 고작 처음 본 그 여자 때문에... 순간 그 사 람을 잊어 버렸습니다. 지금 내 눈앞에서 나를 스쳐 가는 그 여자를 사랑하고 싶다는 위험한 생각까지 했습니다. 비록 순간이라 할지라도 난 그런 내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내가 그토록 그리던 그 사람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이 겨우 처음 본 그 여자 때문에 이렇게 무너져버리다니... 이 세상에 그 사람보다 좋은 사람은 없을 거라고... 난 평생 그 사람을 제 외하고는 어떤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 자신도 어의가 없었습니다. 그 사람은 항상 날 걱정해주며... 날 위로해주며... 날 사랑해주며... 자기 자신보다 나란 사람 을 더 위한 사람이었는데...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의 위험한 생각에 분노하며 내 자신 에게 저주하고 있을 때 그 여자는 완전히 나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하지만 더 아이러니한 사실은 나도 모르게 나의 시선은 그 여자의 뒷모습을 따르는 것이었 습니다. 게다가 나의 두 눈은 이참에 그녀의 모습을 각인(刻印)이라도 시킬 모양인지 계속 바라볼 뿐입니다. "야, 뭘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보니?" 문득 들려온 석재의 말에 나도 모르게 움찔거렸습니다. "아니, 그냥..." 아직도 내 눈엔 그 여자의 뒷모습이 아른거립니다. 지금이라도 쫓아가 나의 마음을 알리고 싶지만 그나마 남아있는 나의 이성이 나를 달랬습니다. 그리고 좀 전 석재가 한 말이 생각났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다시 사랑해도 괜찮은지... 난 나, 아닌 다른 타인(他人)에게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물론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타인의 허락 따윈 필요 없는 것임을 잘 알지만 내가 지금 누 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결코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그 타인(他人)에게... 그리고 나, 자신 에게 밝히고 싶었습니다. "석재야... 아까 전에 네가 한 말... 진심이니...?" "무슨 말?" 갑작스런 나의 그런 물음은 그의 반문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계속 말을 이었습니다. "내가 다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거 말이야. 아직 그 사람과 헤어 진지 반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내가 누군가를 다시 사랑하고 싶다면 사랑해도 되는 거지?" "당연하지! 그런데 갑자기 왜 물어? 좀 전에는 관심도 없는 것 같더니만. 내가 화장실에 다 녀올 동안 네가 첫눈에 반한 상대라도 나타났던 거야?" 난 주저 없이 대답했습니다. "응." "뭐?! 응?!" 석재는 소스라치듯 놀래더니 나를 재촉하기 시작했습니다. "누군데?! 어디에 있어?!" 하지만 난 그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 여자가 지나간 곳으로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내 얼굴엔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그날 저녁, 학교를 다녀와서는 계속 책상에 앉아 턱에 팔까지 괸 채 그 여자의 모습을 생각 했습니다. 물론 잠깐 스쳐갔기에 그 여자의 모습을 완전히 생각나진 않지만 그 여자의 느낌만은 고스 란히 나의 가슴속에 남아있습니다. 행여나 이 느낌마저 잃을까 책상 서랍을 뒤적여 조그마한 노트를 찾아내 기록했습니다. 그 사람에게 너무 미안하지만, 그 여자에 대해 적기 시작했습니다. 2000년 9월 14일... 그대를 처음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저 스쳐지나갔기에 그대에 대한 좋은 느낌만이 내 가슴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대의 수련한 외모보다는 그대의 은은한 미소가 지금도 나의 가슴을 설레게 만듭니다. 다시, 그대와의 재회(再會)를 감히 꿈꾸어 봅니다. 과연 그대를 다시 볼 수 있을지...? 그리고 그 사람에게 미안합니다. 너무나 미안하지만... 그대를 다시 보고 싶습니다... 난 역시 나쁜 사람인가 봅니다. 미안합니다.
Memories... <제 1 회> - 새로운 사랑
<META content="Namo WebEditor v4.0" name=generator>
"준욱씨, 나 이제 그만 가야해요."
그 사람이 구슬프게 울고 있었습니다.
난 그 사람에게 다가가려 애쓰지만 이상하게 나의 발걸음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은 기어코 내게 등을 돌리더니 조금씩 내게서 멀어져만 갔습니다.
"지은씨! 지은씨! 어디 가요?! 기다려요?! 기다리란 말이에요!"
난 애타게 그 사람을 그토록 불렀건만, 그 사람은 돌아보는 시늉도 하지 않은 채 깊은 어둠
속으로만 들어갔습니다.
그 사람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완전히 자취를 감추자 그제야 나는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습
니다.
난 그 사람이 사라진 곳으로 한없이 달려가 보았건만, 그 사람의 흔적 따윈 이미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일순 어디선가 구슬픈 그 사람의 울음소리가 들렸고, 난 다시 어둠으로 둘러싸인 이곳을 배
회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다 어둠의 한편에서 뿌연 안개가 나를 감쌌고, 이내 나의 몸을 조르기 시작했습니다.
조여오는 고통 속에 난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건만, 조그마한 신음하는 소리조차 낼 수 없
었습니다.
이대로 죽어야 하는지... 그 사람을 그렇게 떠나보내고, 이대로 죽어야만 하는지...
다행히 꿈이었습니다.
난 불현듯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무슨 가위가 그리 지독한지 나의 몸은 어느새 식은땀으로 범벅인 상태였습니다.
난 지독한 가위로 인한 나른한 몸을 이끌고, 자리에 일어나 시계를 들여다보니 이제 막 8시
를 넘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방안은 새벽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좀 어두웠습니다.
평소에 나의 단잠을 깨우던 그 흔한 밝은 햇살조차도 오늘은 창문으로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난 내 몸을 뒤덮고 있는 땀을 식히기 위해 창문을 열어보니 밖에는 언제부터인가 비가 촉촉
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샤워를 하기 위해 내 방 한편에 있는 수납장에 속옷을 꺼내고는 막 방을 벗어날 찰나였습니다.
문득 벽에 걸린 허름한 달력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오늘은 9월 14일... 그리 빠르지 않
은 암산력(暗算力)이었지만, 계산해보니 어느덧 그 사람과 이별한지도 200일이나 되었습니다.
이젠 타국(他國)에 있는 그 사람은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지 일순 궁금했습니다.
식사는 제때 하는지... 그곳에서 적응은 잘 하고 있는지... 이젠 내 사람도 아닌데 아직도 그
사람에게 미련이 남아있는 건지... 샤워를 하면서 꿈 때문인지 나의 머릿속에는 내내 그 사
람 생각으로 가득했습니다.
샤워를 다하고 아직 마르지 않는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털며 욕조에서 나올 때였습니다.
충전기에 꽂아 둔 휴대폰이 시끄러운 멜로디와 함께 울렸습니다.
"여보세요?"
"나야, 석재. 추석은 잘 보냈냐?"
"그냥, 그렇지, 뭐. 그런데 아침부터 웬일이야?"
"나도 그냥."
"할 일도 없지. 할 말 없으면 빨리 끊어. 레포트도 써야하고 무지 바빠."
"짜식, 매정하긴. 오늘 좀 보자."
"오늘? 왜?"
"왜긴, 얼굴 좀 보자는 거지. 우리가 만난지도 1달은 넘었잖아."
"그래, 그렇게 하든지. 어디서 만날래?"
"12시쯤에 너희 학교정문에서 보자. 너희 학교 구경도 하고 너희 학교 여자 많다니깐 여자
구경도 하고."
"쳇, 결국 네 목적은 그거 군."
"임마, 농담이야. 설마 너희 학교 여자 구경하려고 너 만나겠어?"
"응, 너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놈이지."
그렇게 전화를 끊고 어제 밤에 쓰다만 레포트를 마저 작성하곤 집을 나섰습니다.
비가 와서 버스에 사람이 많이 많을 거라 생각했건만 다행히 한산했습니다. 1시간 정도 버
스를 타고 학교 정문에 도착하자 막 12시를 넘기고 있었습니다.
그때 자동차의 경적소리가 울려댔습니다. 자연스레 난 고개가 돌아갔고 낯익은 외제차가 눈
에 들어왔습니다.
석재의 차였습니다.
역시 집이 부유하다 보니 같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석재의 차는 항상 나를 의기소침하게
만듭니다.
나는 그 차에 다가가 문을 열고 어느 때처럼 빈정대며 올랐습니다.
"여전히 차는 좋네. 역시 졸부 집 아들은 뭔가 달라도 달라. 부모가 이런 것도 사주고."
석재는 나의 빈정거림이 이젠 익숙하다는 듯 피식거렸습니다.
"한 달만에 보는 인사가 고작 그거냐? 우선 어디로 갈까?"
"교양학관으로 가자. 그쪽에 수업이 있으니깐."
"교양학관?"
"그냥 계속 올라가다 보면 나와. 내가 가르쳐줄게."
석재는 다시 차를 몰고 나의 안내에 따라 이윽고 붉은 벽돌과 하얀 기둥이 인상적인 교양학
관이 보였고 그 앞에 있는 주차장에 이르렀습니다.
비가 와서 그런지 교양학관 앞에 있는 주차장에는 이미 많은 차들이 정차되어 있었습니다.
그 주위를 잠시 배회하더니 겨우 주차공간이 보였고 이에 놓일세라 석재는 급히 주차했습니
다.
"그래, 할 말이 뭐니?"
"야, 뭐가 그렇게 급하니?"
석재는 시동을 끄곤 안전벨트까지 풀어헤치더니 나의 무릎 위에 놓인 가방으로 시선을 옮겼
습니다.
그러다 문득 나의 가방을 만지작거렸습니다.
"고등학생도 아니고 무슨 가방에 책이 많니?"
"수업교재도 있고 공부할 책도 들어있고 그렇지, 뭐."
순간 석재는 놀란 표정이었습니다.
"공부?! 이∼야! 네가 공부라니 정말 언밸런스 하다."
"그래도 지난 학기엔 장학금도 받았다고. 그리고 중학교 2학년 때까지만 해도 공부는 웬만
큼 했다고. 고등학교 3학년때 조금... 아니, 좀 많이 방황해서 그렇지 대학에 들어와서는 얼
마나 공부를 열심히 하려고 노력한다고. 이래봐도 선배들이 나보고 모범생이라고 그래."
"그건 나도 알지. 그리고 네가 중 3때 양아치 놈들한테 괴롭힘 당해서 제대로 공부할 수 없
었던 것도 잘 알고."
"그렇게 잘 알고 있으면서 그 놀란 표정은 뭐야?"
"근데 솔직히 나한테는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나랑 철민이랑 어울려 다니면서 매일 싸움
하고 학창 시절 때 너 괴롭혔던 애 새끼들 두들겨 패는 험악한 모습만 봤으니깐 그렇지."
"웬만하면 지난 과거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자. 뭐, 자랑스럽다고 그런 소리는 하는지... 그런
소리할거면 빈 강의실에 들어가서 공부나 하련다."
난 발아래 놓아둔 우산을 다시 집어들고 차에서 내리려고 하자 석재가 만류했습니다.
"야, 얘기 좀 하자."
좀 전까지만 해도 활발하기 그지없던 석재의 얼굴엔 진지함이 묻어 났습니다.
"준우야..."
게다가 그의 낮은 목소리는 나를 더욱 의아하게 만들었습니다.
난 다시 우산을 내려놓고는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갑자기 목소리까지 깔고 그래?"
"지은이 누나 말이야..."
순간 나의 얼굴은 굳어졌고 말투마저 굳어져버렸습니다.
"됐어. 그 사람 얘기라면 하지 마."
"애써 외면하지 말고... 너, 얼마 전에 만났다며?"
"응. 그 사람이 떠나기 전에. 그 사람... 여전히 예쁘더라. 아니, 더 예뻐진 것 같더라."
"괜찮아?"
"뭐가?"
"참, 넌 나는 물론 다른 친구들이 힘들지 않냐고 물어도 넌 힘들지 않다고 하겠지? 넌 항상
어느 누구에게나 솔직하지 못하고, 아무리 힘들어도 절대 힘든 기색 같은 건 내지 않잖아."
"잘 알면서 묻긴 왜 물어?"
"하지만 준우야... 힘들면 나한테 탁 터놓고 말해. 난, 네 친구잖아."
"네 그런 호의는 고마운데 솔직히 그러고 싶지 않아. 이제 너는 물론 그 사람으로 인해 알
게된 다른 친구들한테는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받고 싶지 않아."
"야, 친구끼리 어려우면 서로 돕고 돕는 거지. 하여튼 자존심은 강해 가지고."
"자존심 문제도 있지만, 그 사람과 헤어지고 난 이상 이제 너는 물론 너희들과 더 이상 어
울리고 싶지도 않고 어울릴 명분(名分)도 없어. 솔직히 너희들은 그 사람 때문에 알았잖아.
게다가 너희들과 계속 이 관계를 유지해 간다면... 언젠가는 그 사람이 다시 돌아오면 그 사
람과 마주칠 수밖에 없겠지. 그런데 그러고 싶지 않아. 그 사람이 첫사랑이니 만큼 그저 좋
은 추억으로만 묻어 두고 싶어. 그 사람을 다시 만난다면... 내가 더 비참해질 것 같아. 그
사람을 다시 만난다면... 너무 슬플 거야. 그 사람에게 미안하고... 항상 그 사람에 대해 죄책
감을 안고 살게 될 것 같아. 솔직히 지금도 힘들어 죽겠는데 그 사람을 다시 본다면 더욱
더 힘들어 질 거야. 더 이상 그 사람으로 인해 힘들어 지고 싶지 않아."
석재는 나의 말에 분개라도 한 모양인지 약간 목소리까지 높아졌다.
"야! 박준우! 너, 너무 이기적이지 않니?! 누나는 떠나면서까지 네 걱정만 하던데. 그토록 누
나는 널 사랑하는데. 넌 너의 쓸데없는 무력감에 누나한테서 도망친다는 거 아냐? 그저 내
편의만을 위해서..."
하지만 난 애써 평정심을 유지했습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나, 원래 나쁜 놈이잖아. 나쁜 놈이니까 지키지도 못할 사랑하면서 괜
히 그 사람한테 상처만 줬잖아. 바보같이... 그리고 그 사람... 나보다 더 좋고, 더 어울리는
사람을 만날 거야."
"그럼 이제 누나를 잊겠다는 거니?"
"완전히 잊을 수는 없겠지. 그저 잊는다기보다는 가슴속에 묻어둬야 할 아름다운 추억일 뿐
이지. 그게 날 위해서나 그 사람을 위해서나 더 좋을 것 같아."
순간 목이 메어왔습니다.
이제 그 사람은 내게 추억일 뿐이라는 생각에 그 사람에 대한 지난 그리움과 아직 내 마음
속에 어딘가에 남아있는 그 사람에 대한 나의 비겁한 사랑에 목놓아 울고 싶었습니다.
난 깊게 내쉬는 한숨으로나마 나의 처량한 감정을 마음 깊숙한 저편으로 묻어둬야 했습니다.
석재는 그런 나를 보며 측은했는지 조심스레 말했습니다.
"내가 괜한 얘기를 한 것 같군. 미안하다."
난 고개만 절래 저으며 괜찮다고 표시하지만 침울한 기분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석재는 능청스런 표정을 지으며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습니다.
"야, 궁상맞게 이러고 있지 말고 학교 구경이나 시켜줘라."
석재는 먼저 우산을 펼쳐들곤 차에서 내렸고 나 역시 차에서 내렸습니다.
"구경은 무슨 구경? 뭐, 특별한 게 있다고."
난 자연스레 교양학관으로 들어서는 높은 계단을 올랐고 석재도 따랐습니다.
이윽고 교양학관으로 들어서자 로비(lobby)의 가장자리에 있는 몇 개의 벤치에는 다른 학생
들이 끼리끼리 모여 수다를 떨고 있었고 금방 수업이 끝났는지 강의실이 밀집되어 있는 복
도에서 학생들로 붐비기 시작했습니다.
도저히 지금 복도를 지나가기엔 무리였습니다. 그때 석재의 탄성이 들여왔습니다.
"오∼ 물 죽이는데?! 정말 소문대로 너희 학교엔 여자들이 정말 많네."
"왜? 또 발정(發情)이라도 났어?"
"내가 암컷이니? 발정(發情)하게. 난 그저 자연의 섭리대로 남자의 본능에 따르는 것뿐이라
고. 근데... 너, 이제 지은이 누나 잊는다고 그랬지?"
석재가 또 그 사람에 대해 언급하자 나도 모르게 발끈했습니다.
"또 그 사람 소리니?!"
"임마, 흥분하지 말고 더 들어봐. 너한테 좋은 충고 하나 해주려고 하니깐. 너 솔직히 말해
서 지은이 누나를 잊으려고 하는데 잘 안 잊어지지?"
"그거야 당연한 거잖아."
"물론 그렇지만, 그렇다고 평생을 잊지 않을 수는 없잖아."
"그야 그런데 도대체 하고자 하는 말이 뭐야?"
"내가 지은이 누나를 잊는 방법을 가르쳐줄까?"
난 그의 말에 솔깃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사람과 이별한 사실을 받아들이고 적응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엔 아직도 그 사람의 흔적
의 잔재들이 남아있어 자주... 아니, 가끔 고통스러운데 잊을 수 있다니... 자연스레 그의 말
에 반문했습니다.
"어떻게?"
"그야 간단하지. 사랑으로 얻은 슬픔은 다른 사랑으로 극복하라! 이런 기초적인 연애의 정석
(定石)도 몰라?"
"난 또 뭐라고. 누구는 그런 생각 안 해봤겠니? 나도 그 사람 잊으려고 다른 사람을 사랑해
볼까 생각했는데..."
"했는데?"
"내 행색을 좀 보고 그딴 소리나 하지 그래? 누가 나 같은 사람을 좋아하겠니? 얼굴도 못생
겼고, 뚱뚱하고, 돈도 없고... 뭐 하나 잘난 게 없잖아."
"또 자기 비하에 들어가는군."
"자기 비하가 아니라 사실이야. 그리고 더 중요한 건... 그 사람에게 그런 상처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과연 누군가를 사랑해도 될 지 모르겠고 아직 헤어진지 반년밖에 되지 않았
는데 다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한테 미안하잖아."
"웃기고 있네. 너, 정말 지은이 누나를 잊으려는 생각은 있는 거니? 헤어진지 반년밖에 되지
않았건,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건 헤어지면 끝이잖아. 네가 사랑하는 여자가 생기면 다시
그 여자를 사랑할 수 있는 거지, 꼭 헤어진 사람의 눈치를 보는 게 이상하지 않니? 게다가
헤어진지 반년이면 어떻고 일주일이면 어떠니? 네가 다시 사랑하고 싶으면 다시 사랑하면
되잖아. 그리고..."
그의 말에 그저 마음만 침잠할 뿐이었습니다.
그와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 어느덧 주변은 물론 그 비좁던 복도도 조금 한산했습니다.
"잠깐만, 어디 빈 강의실에 들어가서 얘기를 하든지 하자."
"그래, 그렇게 하자. 그전에 잠시 볼 일 좀 보고."
그는 바로 뒤편에 있는 화장실로 허둥지둥 발걸음 했고 난 그 자리를 지킬 뿐이었습니다.
일순 휴대폰의 진동이 외투에서 전해와 확인해보니 다름 아닌 광고 메시지일 뿐이었습니다.
심드렁하니 메시지를 지우고 다시 외투 속으로 휴대폰을 집어넣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한 여자가 친구들과 함께 나를 스쳐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분홍색 니트와 아이보리계통의 스커트를 입은 그 여자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눈이 부
셨습니다.
지금 밖에는 뿌연 하늘에 눅눅하게 비까지 내리는데 말입니다.
게다가 오뚝한 콧날과 하얀 피부, 포근함까지 느껴지는 그 여자의 미소는 나의 가슴을 고동
치게 했습니다.
그 사람과 헤어진 후로 설레이는 감정을 느껴보지 못했던 나였는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 사람을 못 잊어 번민(煩悶)으로만 가득했는데 고작 처음 본 그 여자 때문에... 순간 그 사
람을 잊어 버렸습니다.
지금 내 눈앞에서 나를 스쳐 가는 그 여자를 사랑하고 싶다는 위험한 생각까지 했습니다.
비록 순간이라 할지라도 난 그런 내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내가 그토록 그리던 그 사람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이 겨우 처음 본 그 여자 때문에 이렇게
무너져버리다니... 이 세상에 그 사람보다 좋은 사람은 없을 거라고... 난 평생 그 사람을 제
외하고는 어떤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 자신도 어의가 없었습니다.
그 사람은 항상 날 걱정해주며... 날 위로해주며... 날 사랑해주며... 자기 자신보다 나란 사람
을 더 위한 사람이었는데...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의 위험한 생각에 분노하며 내 자신
에게 저주하고 있을 때 그 여자는 완전히 나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하지만 더 아이러니한 사실은 나도 모르게 나의 시선은 그 여자의 뒷모습을 따르는 것이었
습니다.
게다가 나의 두 눈은 이참에 그녀의 모습을 각인(刻印)이라도 시킬 모양인지 계속 바라볼
뿐입니다.
"야, 뭘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보니?"
문득 들려온 석재의 말에 나도 모르게 움찔거렸습니다.
"아니, 그냥..."
아직도 내 눈엔 그 여자의 뒷모습이 아른거립니다.
지금이라도 쫓아가 나의 마음을 알리고 싶지만 그나마 남아있는 나의 이성이 나를 달랬습니다.
그리고 좀 전 석재가 한 말이 생각났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다시 사랑해도 괜찮은지... 난 나, 아닌 다른 타인(他人)에게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물론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타인의 허락 따윈 필요 없는 것임을 잘 알지만 내가 지금 누
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결코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그 타인(他人)에게... 그리고 나, 자신
에게 밝히고 싶었습니다.
"석재야... 아까 전에 네가 한 말... 진심이니...?"
"무슨 말?"
갑작스런 나의 그런 물음은 그의 반문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계속 말을 이었습니다.
"내가 다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거 말이야. 아직 그 사람과 헤어
진지 반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내가 누군가를 다시 사랑하고 싶다면 사랑해도 되는 거지?"
"당연하지! 그런데 갑자기 왜 물어? 좀 전에는 관심도 없는 것 같더니만. 내가 화장실에 다
녀올 동안 네가 첫눈에 반한 상대라도 나타났던 거야?"
난 주저 없이 대답했습니다.
"응."
"뭐?! 응?!"
석재는 소스라치듯 놀래더니 나를 재촉하기 시작했습니다.
"누군데?! 어디에 있어?!"
하지만 난 그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 여자가 지나간 곳으로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내 얼굴엔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그날 저녁, 학교를 다녀와서는 계속 책상에 앉아 턱에 팔까지 괸 채 그 여자의 모습을 생각
했습니다.
물론 잠깐 스쳐갔기에 그 여자의 모습을 완전히 생각나진 않지만 그 여자의 느낌만은 고스
란히 나의 가슴속에 남아있습니다.
행여나 이 느낌마저 잃을까 책상 서랍을 뒤적여 조그마한 노트를 찾아내 기록했습니다.
그 사람에게 너무 미안하지만, 그 여자에 대해 적기 시작했습니다.
2000년 9월 14일...
그대를 처음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저 스쳐지나갔기에 그대에 대한 좋은 느낌만이 내 가슴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대의 수련한 외모보다는 그대의 은은한 미소가 지금도 나의 가슴을 설레게 만듭니다.
다시, 그대와의 재회(再會)를 감히 꿈꾸어 봅니다.
과연 그대를 다시 볼 수 있을지...?
그리고 그 사람에게 미안합니다.
너무나 미안하지만...
그대를 다시 보고 싶습니다...
난 역시 나쁜 사람인가 봅니다.
미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