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바라기-8-

까미유2004.03.11
조회973

제 8 화

 

 

-전시회장에서 사라졌어요...제가 잠깐 다른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사이에...

-거기서..무슨 일 있었습니까?

-아니요, 특별히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았습니다.

 

목이 타는지 박교수는 앞에 놓인 냉수를 한꺼번에 들이킨다.

 

-거기서...지니선배가 만난 사람이 누구죠?

-유교수에게 초대장이 온게 아니라, 제가 받은 초대에 유교수와 동석한 거라서 아마..아는 사람이

  없었을텐데...

 

감쪽같이 지니선배는 사라졌다. 그녀가 갈 만한 곳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마땅한 곳이 없었다.

그녀는 도대체 어디로 숨어 버렸을까. 이 불안한 마음은 무엇일까. 그녀가 처음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을 때의 느낌과 같은 것이었다.

 

-죄송합니다..제가 오늘은 인터뷰 약속이 있는 날이라서 그만 일어나야 할 것 같은데...

-그러시죠...혹시 유교수 갈만한 곳은 아시는 게 없는지..

-아는 곳이 있다면 벌써 다 뒤져봤을 겁니다...하은이도 저와 마찬가지입니다.

-혹시 연락이 오면 제게 꼭 연락 좀 주십시요..

-네, 제가 어떻게든 찾아 보겟습니다...

 

박교수는 아마도 지니선배에게 마음을 보이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듯 지니선배를

걱정할 수는 없을테니까.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강수현과의 인터뷰는 처음부터 기분이 상한채로 시작되었다. 별로 좋은 기분이 아닌채로

시작된 인터뷰가 흥미로울 수는 없었다.

그녀는 소문처럼 까따로운 인상을 풍겼으며 어쩐지 화가라고 하기엔 뭔가 허술한 부분이 있었다.

그녀가 내뿜는 담배연기는 자꾸만 내 신경을 건드렸다.

 

-작품은 그 사람의 심리적, 지적, 환경, 성품들을 그대로 대변하는 것이죠....뭐, 붓이나 들고

  있으면 나름대로 자신이 마치 대단한 예술가나 되는 줄 아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요.

 

그녀는 도대체 인터뷰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대충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떠들어댔다.

나는 이 시간이 빨리 흐르기를 바랬다.

 

-대학 어디 나왔어요?

 

대뜸 그녀가 묻는다.

 

-00대 나왔습니다.

-그래요?...내가 아는 사람두 거기 출신인데. 그러고 보니 엇비슷한 나이겠네..

-저, 강수현씨께서 추구하고자 하는 작품이 19세기에..

-혹시, 유지니씨를 아나요?

 

그녀가 나의 말을 싹둑 잘라 먹는다.

 

-저는 인터뷰를 하러....지금 누구라고 했습니까?

-유지니요...학교에서 꽤나 유명세를 치렀다구 했는데...모르진 않을거고...

-지니선배와 어떻게 아시는 분이십니까?

 

그녀는 아주 재미있다는 듯이 조소를 띄운다.

 

 

 

***

판플렛이나 매스컴에서 보았던 동해의 촛대바위는 생각만큼이나 감흥을 주지 못했다.

아주 평이한 듯한 모습이지만 표지판에 내걸린 촛대바위의 사진은 정말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생각보다 관광객들이 적었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나는 항상 촛대바위가 보이는

산 중턱의 벤치에 앉아 지평선을 바라보다 내려 오곤 했다.

아주 오래 전 혁의 손에 이끌려 여기까지 내려 온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내가 보는 앞에서

첨벙첨벙 바닷속으로 걸어 들어 갔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나의 말에 그는 화가 난 사람처럼 그렇게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한참동안 실랑이를 벌였던 것 같다.

 

-나를 사랑하라고는 하지 않겠어, 다만...내가 널 사랑하는 것만은 막지 마라.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이었다. 내가 차를 세우라고 소리만 치지 않았어도...

어쩌면 그는 그렇게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차, 세워....세우란 말야. 좋아...세우지 않겠다면 뛰어내릴 거야.

-어디 맘대로 해봐 그럼.

 

혁이는 끝까지 차를 세우지 않았고 나는 있는 차문을 열려고 바둥댔다. 그러는 나를 혁이는

완강하게 막았고 그렇게 실랑이를 벌이다 사고가 난 것이었다. 나는 죽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죽었다. 그의 장래식 날 나를 싸늘하게 노려보던 그의 누나의 얼굴이 다시금 떠오른다.

 

-사랑하지도 않았으면서 왜, 미련을 갖게 만들어?

 

전시회장에서 만난 그의 누나가 내게 그렇게 물었다.

 

-난 정말 그게 궁금했지...혁인 나와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오누이였어. 몰랐니?...너의 죄가

  뭔지 알어? ...기대를 갖게 했다는거, 너의 그 우유부단함이 혁일 죽음으로 몰아 넣었어...너 때문에

  난,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어. 그런데도 넌....너무나 당당하게 살아 있다는 거야.

 

내가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 그녀의 말처럼 혁이에게 기대를 갖게 만들었을까 내가....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이제는 아프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나를 아프게 하는 것은

준하라는 상처와 혁이라는 상처라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된다.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다.

자신하지 말았어야 했다...

꺼져 있던 휴대폰을 켠다... 준하의 번호를 떠올린다. 그러나 전화할 수가 없다.

 

 

 

***

-박교수님한테서 전화 왔었어. 선배 찾았대.

-어디서?...괜찮대?

 

준하가 많이 놀랬나보다.

 

-동해라던데...혹시 예전에 혁이선배 사고 났을 때 거기 아니었나?

 

준하는 아무 말이 없다.

 

-준하야...

-찾았다니까 다행이지 뭐. 별일 없었음 된거야...박교수님이랑 함께 있다니까 우린 걱정 안해도

  되겠다.

-그래두 너, 걱정 되는 눈치야.

-아냐...놀랬어 조금.

-아무 일 없겠지?

-그럴거야. 아우, 배고파. 우리 이제 밥 먹자.

-비비는 거 어때?

-좋지.

 

준하와 나는 양푼이에 밥을 넣고 온갖 반찬을 집어 넣어 쓱삭쓱삭 비벼서 볼이 터져라 먹어댔다.

가끔 준하와 내가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 중에 하나다. 기분이 울적할 때도 마찬가지다.

오후에 학원으로 한약을 들고 엄마가 다녀 가셨다.

엄만 도무지 포기라는 것이 없다. 나 역시 그런 엄마를 닮긴 했지만 매달마다 꼬박꼬박

거르지 않고 한약을 달여 오시곤 한다. 손주가 그립다면서...

요즘 준하는 말을 잘 안듣는다. 배란기에 맞춰서 잠자리를 해야 하는데 매번 빠져 나갈 궁리만

한다. 생각해보면 나는 아무 잘못이 없다. 아이가 생기지 않는 건 순전히 준하의 게으름 때문이다.

 

-오늘 그날인거 알지?

-벌써 그렇게 됐어?

-벌써?...기분 나빠지려 그러네.

-아니...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화났어?

-엉, 조금씩 나려 그래. 그러니까 빠져 나갈 궁리 하지 말어...너 이러는 거 나만 자꾸 나쁜 여자

  만드는 거야. 누가 보믄 나 밝힘증 있는 여잔 줄 알어.

-그랬니...싫어서 그런게 아닌데....

 

준하가 가만히 내 손을 잡는다.

 

-니가..부담 느낄까봐...괜히 마음이 조급해져서...불안하니까 그러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하고...

  내가 미안하잖아...우리 부모님때문에...너 매일 그런 거 신경써야 하고 그러니까...

-그런 거 아냐...나두 갖고 싶어서 그래.

-그럼, 나 씻구 올까?

-킥킥...그래, 이쁘게 씻고 와.

 

 

 

***

그녀는 지쳤는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동안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녀를 깨울 수도 없었다. 한강 둔치에 차를 세워두고 그녀가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갑자기 그녀를 알고 싶어졌다. 도대체 이 여자에게 무슨 매력이 있어서 난생처음으로 이런

기분에 휩싸이게 되는 걸까. 남자와 여자는 섞여 있으면 안된다. 섞여 있는 동안

서로에게 차곡차곡 정이 쌓이게 마련이다. 어느 쪽에서 먼저 터뜨리느냐에 달렸다.

나는 아무래도 강수현을 의심했다. 전시회장에서 그녀를 만난 사람은 강수현이 밖에 없었으니까.

속을 뒤집고 파헤쳐 보면 누구나 똑같은 상처 따위들인데...이 여잔 뭔가 다를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깨우지 그랬어요...여기가 어디에요?

-서울.

-지금 몇시에요?

-자정이 다 됐어.

-너무 늦었네...미안해요 나때문에.

-미안하면 나한테 얘기 좀 해주지 않을래 당신.

-....말하기 싫어요. 해봐도 답은 없고....

-당신, 그렇게 안보이는데 생각보다 벽을 많이 쌓고 사는 것 같아.

-그런 거 없어요. 그냥....머리 아퍼 바람 쐬러 간건데...땡땡이친 건 잘못했지만.

-시말서 쓸 준비해.

-각오하고 있어요. 쉬고 싶은데...집에 가서 자고 싶어요.

-완전 운전기사 취급이네 이 아줌마...내가 오늘은 참는다. 에너지 충전하면 내일 싸우자구.

-좀 봐줘요 박교수님..

-어림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