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퀴 위에서

럽이2006.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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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퀴 위에서

주근옥

아내와 내가
연극 관람을 위하여
극장 문을 열고 들어서니까
어둠 속에서
안내 방송 소리만 들린다

시민 여러분
지금 흉악범 셋이
시내로 잠입하였습니다
이들은 양심 강탈 범으로서
사형 선고를 받고 복역 중
오늘 정오 형무소 담을 넘어
탈주하였습니다
시민 여러분은 즉시 귀가하여
문을 꼭 잠그고
양심을 잘 간수하시기 바랍니다
이들의 인상착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십이 넘은 중년의 남자
그의 얼굴은 말같이 생겼습니다
마른 편도 뚱뚱한 편도 아닌
그저 알맞게 단단한 체구이며
이름은 마가입니다
육십이 될까 말까 한 남자
그는 비교적 뚱뚱한 편이고
머리가 벗겨졌으며
눈이 큰 것이 특징이며
이름은 우가입니다
이십이 갓 넘은 청년
미남형이며 행동이 민첩합니다
이들을 목격하신 분은
가까운 파출소나
경찰서에 신고하시기 바랍니다

방송 소리와 섞여
기관차의 엔진 소리가 들린다
이윽고 철문이 열리는 소리
무엇인가 툭 떨어지는 소리
어둠 속에서 킥킥거리는 소리
갑자기 손전등이 비쳐진다
소리가 뚝 그친다
불빛이 뚜벅뚜벅 무대로 올라가
좌우로 비쳐본다
불이 깜박거린다
그는 손전등을 탁탁 두드리고
자기의 얼굴을 비춘다
비로소 열차원임을 알 수 있다
또 한번 좌우를 훑고 퇴장
문이 드르륵 닫히는 소리
또 킥킥거리는 소리
기관차가 서서히 움직인다
그 소리는 차츰 높아져
고조를 이루다가 천천히 낮아져
배음으로 깔리며 희미하게
무대의 윤곽이 드러난다

마가가 엉금엉금 기어 나오며
호박이 덩굴째 떨어졌다
이게 바로 호박이라는 거야
우가도 기어 나오며
아냐, 호박은 둥근 거야
이렇게 모나지 않았어
이보다 훨씬 작지
마가가 그 트렁크 위에 앉아
아직도 때를 못 벗고 있어
썩는 냄새가 나는 겉가죽을
못 벗고 있어
저리 가 저리 가
우가도 등을 맞대고 앉으며
고향은 얼마나 머냐
그 따윈 알아 뭘 해
우리의 정신은 고향에 있지
지금 그걸 가지러 가는 거야
구가가 갑자기 일어선다
마가 우가, 놀라 펄쩍 뛰었다가
주저앉는다
구가 말이 옳다, 그렇지?
그 그래,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가만, 구가 말도 틀리다
가지러 간다는 것은
다시 온다는 뜻도 포함돼 있어
아냐, 난 아주 고향에서 살 테야
그렇지 그래
우린 아주 고향에서 사는 거야
이 기계의 나라보단
물도 바람도 하늘도 다 맑을 거야
거긴 폐하도 없지
폐하가 뭐냐?
기계가 바로 폐하야
우린 그의 백성이었지
폐하여, 사약을 받고 죽은
내 아비의 일생을 상환하라
가발을 쓰고 잠입한 어둠을
그 계열을 색출하라
마가 우가 구가 셋이서
색출하라

셋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다가
손뼉을 치며 웃는다
문득 그친다
트렁크를 중심으로 몸을 돌돌 말아
뒹굴며 퍼졌다가 다시 모인다
고향은 얼마나 머냐?
어둠이 끝나는 곳이지
굉장히 멀대
나도 한번 안 가봤으니까
잘은 몰라
이제 출발했으니까
정차하는 곳이 바로 거기겠지
아냐, 거긴 간이역이야
이 차도 쉬어야 할 거 아냐?
배를 내밀고 임산부처럼
여자가 탈지도 몰라
우리 그 여자를 태우자
그건 안 돼
타려고 하면 발로 차버릴 거야
이렇게 자리도 넓은데
텅텅 비었는데
왜 그러냐?
몰라서 묻니?
애 밴 여자가 타면 아기를 낳고
그럼 애가 울음을 터뜨리거든
애 울음 딱 질색이야
귀를 막는다
그렇지, 그래, 나도 그랬어
앵앵 울었지, 슬퍼서 마구
정말 울려고 한다
그럼 우린 잡히는 거야
아까 너 봤지?
그게 바로 폐하가 보낸 놈이야
우리 잡으려고
틀림없어
그놈도 폐하가 준 옷을 입었어
잡히면 발목을 묶이게 돼
쇠사슬로 말씀야
발목을 만진다
마가와 우가를 번갈아 보며
발목이 아프다, 여태 안 나았어
그 봐, 이번엔 목을 잡아맬지도 몰라
정신 바짝 차려
히히, 정신은 고향에 있지
틀렸다, 그 말은 틀렸다
난 입을 꾹 다물 테야
모두 내 말에 반박이니
아주 꼭 매 버릴 테야
그럴수록 더욱 좋구
구가야, 걱정 마라
어둠은 길고도 짧다
그 끝엔 아침이 있지
그곳이 바로 고향이야
그럼 이 차는 상행이냐?
하행이야
병신들, 상행도 하행도 아냐
그저 가는 거야
아침해는 산 위에 있잖아?
멍청이, 바다 밑에 있어
유리창에도 있고 접시 물에도 있고
아무 데고 다 있다
아냐, 아침해는
결국 어둠 끝에 있지
맞다, 맞다
셋은 발을 구르며 빙빙 돈다
점점 속도가 빨라지며
절정에 이르렀다가
모두 나자빠진다
희열의 육체언어

트렁크 위로 기어오르며
아, 답답하다
목이 마르다
공기가 탁하다
문을 좀 열자
눈을 부라리며
뭐라구? 안돼
밖은 더 깜깜하다
그 어둠 밀려들면
우린 장님이 되는 거야
동전 하나 던져 줄 사람 없지
그래도 조금만 열자
숨이 막혀 죽겠다
숨을 크게 쉬어라
눈을 크게 떠라
조금만 참으면 된다
그게 약이다
구가는 숨을 크게 쉰다
마가 우가는 구가에게
빨려들기라도 하듯
숨을 몰아쉰다
안 되겠다, 조금만 열어 주자
우가가 최고다
안 돼 안 돼
좀 봐주자
구가, 후면의 문을 열려고 뛰어간다
그러나 마가가 그의 발목을 잡아챈다
고꾸라진다 다시 일어나
무대 정면으로 뛰어나온다
마가가 쫓아 나온다
우가가 그의 발목을 잡아챈다
고꾸라진다
둘은 엎치락뒤치락 뒹군다
구가는 무대의 끝, 그러니까
객석 쪽 상상의 문을 열려고 애쓴다
열리지 않는다
손으로 고리를 잡고 두 발로 버린다
드디어 조금씩 열리기 시작한다
갑자기 높아지는 기관차의 소음
경적이 울린다
마가, 우가가 허리를 끌어안고 있어
버둥거리며
빨리 닫아
조금만 기다려
이왕 열린 거니까
숨이 더 콱콱 막힌다
곧 괜찮아질 거야
우린 마지막이다
어둠 속에 묻히고 만다
장님이 된다
닫아, 어서 닫아
어둠이 때론 빛이 된다
난 그 속에 가고 싶다
이대로 뛰어내릴까?
맘대로 해
우가는 마가의 허리를 풀어놓고
뛰어나오며
안 돼, 고향은 아직도 먼데
무슨 짓이냐?
우가, 구가를 잡아당긴다
마가는 잽싸게 달려와
문을 닫아 버린다
기관차의 소음도 작아져
다시 배음으로 깔린다
우가, 트렁크 위에서
머리를 가랑이 속에 묻고 앉아있는
구가의 주위를 맴돈다
이것은 일련의 사건이다
분석해 보아야 해
철저히 캐야돼
마가도 따라서 돈다
어디서 왔는가
누가 보냈는가
누구의 음몬가
원한 관곈지도 몰라
돈이 문젤까?
치정일까?
치사하다
더럽다
아니꼽다
메스껍다
퇘퇘
가만, 너 내가 보이냐?
그 그래 그렇다니까, 왜 그래?
다시 돌며, 이상한데
따라 돌며, 너야말로 이상하구나
우린 눈이 안 멀었어
멀어야 원칙인데
원칙이 어딨어?
만들면 되는 거지
이제 다 된다 뭣이든
그럴까?
내 말만 들어라
잘 될 거다, 자알 될 거야
참 너 땜에 놓칠 뻔했다
우린 수사 중이었지
우뚝 서며, 그랬어 참
어떻게 생긴 놈일까?
쥐새끼 같을 거야
아냐, 돼지 같을 거야
그리고 겉으론 점잔을 뺄 거야
비계덩어리로 위선을 감추고, 징그럽게
허, 자넨가?
기억이 잘 안 나는 걸
원체 많은 사람을 대하니까
허허허, 그럴 거야
눈알에 욕정을 잔뜩 품고
김양, 오늘 저녁은 더 예뻐 보여
어디 손 좀 만져볼까?
하고 거절을 당하면
왜 내가 너무 늙어서?
허허허, 그럴 거야 징그럽게
곰 같은 놈
여우같은 놈
놈은 기쁨이 절정에 올랐을 때만
찾아오거든
아까도 그랬어
그전에도 그랬어
놈은 발자국도 없이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진단 말씀야
하여간 찾아서 코를 꿰야 돼
목을 비틀어 매야지
그러면 두 손을 싹싹 빌 거야
손이 닳아 없어지면 발로 빌 거야
발도 닳아 없어지면?
징징 울 거야
히히, 재밌다
참 고소하다
가자, 잡으러 가자
가만, 놈은 원래 힘이 세거든
우리들 힘으론 안 될 거야
놈은 유도를 했지
태권도를 했지
레슬링도, 권투도,
우리 이럴 게 아니라
구가를 데리고 가자
그렇지, 그게 좋겠다
셋은 둘보다 힘이 세지
히히, 놈도 이제 마지막이다
끝장이다
둘은 좋아라 손뼉을 치다가
문득 구가를 본다
자고 있다
우가가 살금살금 다가가서
구가의 코에 귀를 기울인다
잠들었어
꿈꾸나봐
중얼거리는 걸
어떻게 할까?
하여간 깨우자
지금 한참 좋은가 본데
절정에 올랐을까?
그건 몰라
한번 봐
요리조리 구가의 앞뒤를 살피다가
얼굴을 들여다보며
잘은 모르지만
아직 그렇진 않은가 본데
됐다, 됐다, 깨우자
놈이 가까이 왔을 거야
우리가 선수를 치자
놈이 우리끼리 찢고 할퀴며
싸우게 만들기 전에 해치우자
그러자, 가만 어떻게 깨운다?
걱정 마, 내가 깨울 테니
단추만 누르면 돼
마가, 쭈그리고 앉아서
구가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안 되겠는걸
방법과 절차를
다시 논의해야 되겠어
고려해 봐야 되겠어
신중을 기해야 돼
여론도 생각해야지
이권도, 체면도
우가, 문득 생각에 잠긴다
마가, 우가를 바라본다
내게 맡겨, 내가 할 테야
내게 맡겨, 자신 있어
내가 할 테야
내가 할 테야
비켜, 비켜,
둘은 서로 잡아당긴다
그러다가 하나가 되어
구가에게로 넘어진다
구가, 갑자기 큰 소리를 지르며
펄쩍 뛰었다가 도망친다
무대를 크게 빙빙 돌다가
구석에 가서 기대고
둘을 바라본다
겁에 질린 눈
둘은 일어나 구가에게로 간다
오지마, 오면 쏠 테야
손으로 권총을 쏘는 시늉을 하며
거기 서
마가와 우가는 어리둥절하다
너희들은 날 없애려고 음모를 꾸몄지?
난 다 알아
우가는 내 팔을 비틀고
마가 넌 시퍼런 칼을
내 목에 대고 있었어
식은땀이 온몸을 적셨겠구나
오줌도 쌌겠구나
살려달라고 애걸했겠구나, 비굴하게
아냐, 난 아픔이
오래 계속 되냐구 물었지
자식 겁도 없구나
그런 건 말씀야, 간단하지
순간에 숨통을 끊어 버리니까?
아픔이 오래 계속되도록
눈알부터 뺄 걸 그랬다
손가락부터 끊어 버리는 건데
난 죽었어, 결박당한 채 죽어 있어
피를 콸콸 쏟으며 쓰러진
한 발 다가서며, 그건 꿈이야
우가도 다가서며, 병신 그건 꿈이다
오지마, 거기 서, 쏠 테야
난 아직 아픔을 느끼고 있어
피를 콸콸 쏟으며 쓰러진
내 얼굴이 똑똑히 보여
우린 널 죽이려고 하지 않았다
너의 도움을 얻으려고 했지
범인을 잡으러 가려는 참이었지
놈은 말씀야, 저어
아주 고약한, 저어
우가야 네가 말해
마가나 나뿐이 아니라
그렇지, 우리뿐 아니라
우가, 더 가까이 다가서며
우리 모두의 적이지
마가도 다가서며
우리의 적이지
놈을 잡으려는 것은
위대한 원정이지
위대한 결단이지
어느덧 둘은 구가에게 다가가 있다
구가의 손이 맥없이 풀린다
그들은 서로 껴안는다
셋은 무대 중앙으로 힘차게 걸어 나온다
그때 우렁찬 북소리가 울린다
그들은 의장대처럼 흩어졌다가 모이고
모였다가 흩어지며 무대 전체를 돌고
다시 트렁크 앞에 모인다
있을 만한 곳은 다 뒤졌어
이젠 우리의 역량으론 안 되겠는걸
좀 더 연구해야 되겠다
저명한 교수를 초빙해다가
병신들, 정작 찾아야 할 곳은 안 찾고
난 샅샅이 뒤졌어
안 찾은 곳이 있다면 내 책임이 아니야
나도 마찬가지야
구가 넌 원래 개론만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놈야
너야말로 의심할 바가 많아
히히 맞아 구가의 주머니엔
법학개론 철학개론 하여간 개론만
이쪽 저쪽 다 넣고 다녔지
난 봤어
그런 게 아냐
진리는 항상 우리 곁에 있어
저 말도 개론에 있지
침묵
저어… 말씀야…
개론에 있는 소리라면 관 둬
아냐 그런 게 아니라 저어…
마가와 우가는 마주보며 웃는다
우리 딴 데로 가서 얘기하자
무슨 말인데
하여간 따라와
구가는 무대 후면으로
둘을 데리고 간다
그들의 귀에 무어라 속삭인다
알았지?
둘은 끄덕인다
구가, 좌측을 가리키며
마가 넌 이쪽으로 돌아
우측을 가리키며
우가 넌 이쪽으로 돌아
난 정면으로 갈 거야
조심해 마음 단단히 먹어
겁먹어서는 안 돼
준비 됐어?
그들은 끄떡인다
자, 그럼 시작이다
셋은 트렁크를 향해
조심스레 좁혀 가기 시작한다
발을 옮길 때마다
불길한 북소리가 울린다
드디어 트렁크 주위에 모인다
모두 공격태세다
구가가 먼저 트렁크를 열기 시작한다
갑자기 무대가 어두워지며
그들에게만 둥그렇게
스포트라이트가 던져진다
셋은 내용물을 꺼내든다
마가는 남자 옷을
우가는 여자 옷을
구가는 가면과 열쇠꾸러미를 꺼내든다
그들은 좋아서 뛰며 깔깔거린다
발을 구르며 빙빙 돌기 시작한다
점점 빨라지며 절정에 이르렀다가
스포트라이트 밖으로 나가 넘어진다
침묵
무대가 밝아진다
일어서며, 이상한데?
일어서며, 너도 그러냐?
나도 그래
전에 숨이 찼는데
나도 그랬지
나도 그랬지
놈을 해치웠기 때문에 그런가봐
해치우긴 뭘 해치워
놈은 도망쳤어
옷만 벗어놓고
그래도 마찬가지야
이제 놈은 발붙일 곳이 없어졌으니까
도망친 건 해치운 거나 마찬가지야
또 올 수 있는 한 그 생각은 틀려
그 가능성까지도 해치우는 건데
가능성은 불가능성도 포함돼 있어
기우야 걱정 마 쓸데없이
구가 말이 옳다
구가 때문에 우린 끝까지
즐거워질 수 있게 됐다
침략도 없고
모략도 없고
내막도 없고
다 없다
없다
셋은 함께 손을 잡는다
만세, 만세, 만세
손을 높이 추겨 든다
근데 말이다
우리 이거 한번씩 입어 보자
그거 좋은 생각이다
만약 놈이, 만약이다
둘의 눈치를 본다
그래 말해 봐
놈이 다시 온다 하더라도
우릴 몰라 볼 거야, 그렇지?
허나 이걸 어떻게 입더라
병신, 이렇게 이렇게
입는 시늉을 하다가
우가야, 네가 가르쳐 줘
그래 내가 먼저 입어 볼 테니
그대로만 해
웃옷부터 입는다
단추 구멍이 뒤로 간 여자 옷이다
마가도 따라서 입는다
신사복을 거꾸로 입는다
구가는 우가의 단추를 먼저 채워주고
마가의 단추를 채운다
우가가 스커트를 입는다
마가는 우가의 눈치를 보며
바지를 입는다는 것이
한 가랑이에 두 발을 넣으려고 한다
기우뚱거린다
넘어진다
다시 일어나 반복한다
우가와 구가가 부축하며
제대로 잘 끼워준다
그러나 단추 구멍이 뒤로 갔다
그들의 모습은 정말 우스꽝스럽다
이젠 다 됐다
다 된 거냐?
요리조리 살피며
정말 그럴 듯한데?
근데 네 옷이 없구나
참 그렇구나
염려 마 이걸 쓰면 되거든
구가, 가면을 쓴다
그것도 괜찮은데?
구가 갑자기, 어흥
둘은 질겁하고 나자빠진다
벗으며, 어때? 쓸 만하지?
일어서며, 그 그래 쓸 만하군
열쇠꾸러미를 보이며
이건 더 쓸 만하지
어떤 문이든 다 열 수 있지
필요할 때 말해
야, 그거 좋다
야, 그놈 어지간히 급했던 모양이다
이런 걸 다 놓고 가다니
어디 나도 좀 보자
안 돼, 꼭 필요할 때만 말해
야, 마누라 주면 되게 좋아하겠다
우리 여편넨 좋아서 잠도 안 잘 거야
히히 나도 마찬가지야
마가, 생각에 잠긴다
우가, 생각에 잠긴다
기관차의 속도가 점점 줄어든다
이제 간이역이야
조금만 더 가면 고향이야
우린 제 정신을 찾게 되는 거야
아냐, 간이역은 또 있어
뭐라고? 병신들
열쇠를 들어 보이며
이것 때문에 환장했구나
아니 그 옷을 입더니 환장했어
벗어 빨리 벗어
여편네 줄 테야
난 쓸 만한 옷이 하나도 없어
아주 내가 입을 테야
좋다, 그럼 옷을 벗는 놈에게
열쇠를 준다 아주 주는 거야
우가, 마가의 눈치를 본다
마가, 우가의 눈치를 본다
싫으냐?
열쇠꾸러미를 높이 추겨 든다
우가가 손을 내민다
마가도 손을 내민다
구가는 더 높이 추켜든다
먼저 벗는 놈에게 준다
어느덧 기관차도 멈췄다
여기가 바로 간이역이다
고향은 다음 역이다
둘은 슬금슬금 뒷걸음치기 시작한다
후면의 철문에 가서 기댄다
서로 같은 동작
구가를 노려본다
이제 마지막으로 말한다
옷을 벗는 놈에게
이 열쇠꾸러미를 준다
둘은 철문을 재빨리 열고 소리친다
싫어, 싫어, 싫어, 싫어
난 맨발로 걸어갈 거야
나도 맨발로 고향에 갈 테야
둘은 뛰어내린다
구가의 손이 힘없이 내려진다
주저앉는다, 고독해진다
그것을 물리치려고 몸부림친다
갑자기 객석으로 뛰어내린다
여러분
도망친 저 두 놈은
곧 경찰에게 붙잡혀
쇠고랑을 차게 되고
물 고문 전기고문 거꾸로 매달기
아니면 다리병신 허리병신 발기불능
아니면 도망치다가 총알에 심장이 뚫리거나
아니지 산길 숲길 샛길 오솔길 아예 몰라
철길로만 달리다가 기차 바퀴에 깔려
개죽음이 될지 모릅니다
여러분
저와 함께 고향에 가실 분 없습니까?
자리도 넓습니다
걷는 것보다 훨씬 빠릅니다
꿈도 꿀 수 있고요, 없습니까?
아내 앞에 와서
부인은 어디까지 가십니까?
열쇠꾸러미를 보이며
이건 어떤 문이든 열 수 있습니다
가면을 보이며
이건 얼굴을 감쪽같이 감출 수 있고요
저와 동행할까요?
고향에 가기만 하면
부인도 제 정신을 찾을 수 있어요
가시겠습니까?
대답이 없다
그는 실의에 빠진다
객석을 헤치고 나온다
무대로 다시 오른다
객석을 향해
마지막 이 기회를 놓치는군요
마지막 이 기회를…
그는 쓰러진다
다시 고독이 엄습한다
몸부림친다
벌떡 일어나 가면을 쓰고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때 객석에서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무대로 올라가 그와 함께
춤을 추기 시작한다
이윽고 무대가 꽉 채워지고
춤사위가 절정에 이르다가
일시에 모두 쓰러진다
무대가 갑자기 어두워진다
잠시 후, 손전등이 비춰진다
열차원이다
그는 트렁크가 열려 있음을 발견하고
올라와 무대를 골고루 비춰본다
무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지 못 한다
트렁크를 닫는다
처음에 놓였던 자리에 잘 놓는다
다시 무대를 훑어 비추고 퇴장
드르륵 철문이 닫힌다
기관차가 서서히 출발하기 시작한다
그 소리는 처음에 들리던
안내 방송 소리와 함께 어울리다가
점점 높아져 고조를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