벙어리 삼순이 #8

독백2004.03.14
조회429

벙어리 삼순이 # 8

 


"선호...보고 가는거야?"
"......."

 

내리는 윤주를 뒤로하고 엘리베이터 문 닫힘 버튼을 눌렀다.

 

"잠깐."

 

윤주가 밖에서 열림 버튼을 누르자 닫히던 엘리베이터문을 다시금 열리기 시작했다.

 

"얘기 좀... 하면 안 될까?"
"......."

 

머릿속에서는 수도없이 닫힘 버튼을 누르고 있었지만 내 손은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내 발은 어느새 엘리베이터에서 걸어나가고 있었다.

 

"잘...지냈어?"
"훗. 보시다시피 자-알 지냈지?"
"......."
"자주 오나봐?"
"어?"
"아냐- 할 얘기 없으면 가고- 내가 이래뵈도 바쁜 몸이거든?"
"아니야. 잠깐만..."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려 손가락을 뻗었지만 윤주의 말에 내 손가락은 이내 멈춰섰다.

 

"선호네... 집에 잠깐... 안들어갈래?"
"그러지 뭐-"

 

먼저 걷는 윤주를 따라 선호네 집 앞에 멈춰섰다. 그리고 윤주가 벨을 누르자 선호가 문을 열었
다.

 

"누-나?"

 

윤주는 익숙한 걸음으로 선호네 집 안으로 걸어 들어갔고, 선호는 다시 나타난 나를 보고 조금
놀라는 듯 했다.

 

"누...구...?"
"아. 사정이 있어서 잠깐 우리집에 있게 됐어."
"그...래..."

 

윤주는 삼순이를 보고 좀 놀란 듯 했지만 아무렇지 않게 가벼운 미소를 보이곤 소파에 앉았다.

 

"차좀... 줄래?"
"어? 어어..."

 

윤주의 말에 선호가 주방쪽으로 걸어갔다.

 

"앉아..."

 

짧은 한숨과 함께 윤주의 맞은 편 소파에 털썩 앉았다. 윤주의 옆으로 높이 솓은 삼순이의 옷
상자들... 잠시후 선호가 커피를 내어왔다.

 

"선호야 나 신우랑 둘이 할 얘기 있어..."
"어...그래..."

 

선호는 삼순이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근데 왜 둘이 같은 방으로 들어가는데?

 

"후- 무슨... 얘기부터 해야 할까..."
"......."
"일단... 내가 널 만난 얘기부터..."
"됐어- 다 아는 얘긴 생략하고. 무슨 얘기가 하고싶은 건데?"
"...그럼... 내가 선호를 따라 미국에 간 얘기를 해야겠다..."

 

별로 듣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오해하고 있는 것도 없었고, 이제는 강윤주가 좋아서 미쳐버릴
것 같던 예전의 마음도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 니말대로 선호 부모님이 대단한분이셔. 그렇지만 그것때문에 선호한테 끌린건 아니었
어. 아니 어쩌면 그런마음이 없지않아 있을지도 모르지... 근데...나 선호 정말 좋아했어... 선호
는... 내가 꿈꿔오던 그런 남자였거든. 나와 이상이 같은 사람..."
"뭐-? 의사가 없어서 죽어가는 아프리카 애들 구하겠다는거?"
"...그런것도 있구..."
"훗- 내가 같이 가겠다고 했잖아! 니가 원하면 그 의사가 없어서 별것도 아닌 병으로 죽어가는
애들 있는 곳에 병원이라도 지어주겠다고 했잖아! 근데? 나는 너랑 생각이 다른건가?"
"......."
"이제와서 이런얘기 해서 뭐하겠다는 건지 알수가 없네. 할 얘기 있으면 빙빙- 돌려서 말하지
말고 결론만 말해. 난 딴거 다 제끼고 결론만 중요하게 생각하니까. 그래서 니가 하고 싶은 얘
기가 뭔데?"
"...예전같이... 그래, 처음 만났을 때로... 그때로 돌아갔으면 좋겠어..."

 

눈물이 흐를것 같았다. 때문에 난 내 눈에 맺히는 눈물이 흐를까 고개를 들어 애꿎은 천장을 보
았다.

 

"너 너무 욕심이 많다는 생각 안들어?"
"...알아... 내가 나쁜거... 하지만 나 선호랑 아무 사이도 아닌데 니가 오해하는거 같아서... 그
래서 너랑 멀어진거 같아서 나 너무 힘들어..."
"몇년이 지났더라? 아씨- 기억력이 안좋아서 생각도 안나네. 이제와서 이런얘길 왜 하는건지.
설마 이제 내가 아까워 진거야? 아니지. 그때보다 더 못한 지금에 내가 강윤주씨 눈에 찰리 없
지. 도대체 무슨 이윤데? 이유나 알자?"
"그런식으로 말하지마-"
"나 더 듣다가는 여기 다 엎어 버릴거 같거든? 그러니까 그만 가야겠어."
"신우야-"
"그딴식으로 내 이름부르지마."

 

이를 꽉 물었다. 날 불러주던 그 목소리 그대로인데... 윤주가 날 불러주던 그 목소리 그대로인
데... 지금에 윤주와 내 사이는 그때와 너무도 달라져 있었기때문에 난 그 목소리가, 그 부름이
듣기 싫어졌다. 어쩌면 너무도 듣고 싶고, 그리웠음에도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은걸지도...

 

그대로 선호의 집에서 나와 무작정 차를 끌고 서울 시내 여기저기를 돌아 다녔다. 그리고 한참
을 달리고 정신이 들자 선호의 집에 두고 온 옷이 생각났다. 쉣! 어쨌든 지금에서 다시 선호네
집에 간다는건 말이 안됐다. 때문에 난 집으로 향했다. 텅빈 집... 거실 불만이 환하게 비추고
있는 내 오피스텔. 난 내가 돌아왔을때 아무도 없는 컴컴함이 싫어 나가기 전에 항상 불을 켜
놓는다.

 

안으로 들어와 대충 씻었다. 물론 내가 말한 대충은 간단한 샤워. 난 천하에 왕깔끔 결벽증 황
보신우니까! 아. 지금은 말 장난 할때가 아니지...
오늘은 어쨌든 굉장히 복잡하고 짜증스런 하루였다. 젠장. 그 쉬운 포켓볼도 망쳤고, 윤주를 만
난것도 그렇고, 삼순이. 그래 삼순이때문에도 화가 났다.

 

"아-아--- 아-!!!"

 

미친듯이 소리를 질러댔다. 후우- 한결 편해지는 느낌. 젠장할 삼순이를 만난날부터 하나도 되
는 일이없어!! 그리고 전화가 걸려왔다.

 

"왜-?"
"야임마. 넌 아까 그렇게 나가고 여태껏 연락도 안되고!"

 

그러고 보니 내 손엔 핸드폰이 아니라 내 집 전화기가 들려있었다. 그리고 전화기 발신번호에
표시된 내 핸드폰 번호.

 

"니가 왜 내 핸드폰을 가지고 있냐?"
"니가 놓고 갔잖아! 젠장 내가 술은 괜히 다 쏘구!"
"미친놈. 그걸 니가 왜 쏴?"
"너 때문이잖아! 젠장 니가 그 게임에서 지는 사람이 술값 다 쏘는 거래서 우리주위로 다 몰려
왔었잖아!!! 우쒸. 그래서 내가 쏴야지 별수 있냐. 몇푼 아낄려다 개망신 당할 수도 없고!"
"아 자식! 고만 좀 떽떽대라. 시끄러 죽겠네!"
"내가 지금 소리 안 지르게 생겼냐?!"
"알았다구! 내가 내일 돈 주면 되냐?"
"아씨. 내가 지금 그깟 돈때문에 이러냐?"
"아그럼 뭐?!"
"씨잉- 문열어"
"뭐?"
"문열어!"
"무슨 소리야?"
"너 집에 있나 전화해본거야. 그러니까 문 열라구!"

 

현관문을 열자 울그락 불그락 하는 얼굴로 거친숨을 몰아쉬고 있는 승민이녀석의 얼굴이 보였
다. 젠장. 그냥 열고 들어와서 말하지.

 

"왔으면 벨을 누를거지 왠 전화?"
"계속 집전화 안 받았으니까 그렇지!"
"알았어. 알았다구. 소리 좀 그만쳐!"
"어디 갔었어?"
"니가 내 애인이냐? 귀찮다 임마."
"어디 갔었냐구?!"
"아 씨. 아저씨네 갔다가 선호네 갔었다."
"선호네는 왜?"
"선호네 이유가 있어야 가냐?"
"씨. 난 너 계속 연락이 안 되서 무슨일 났는줄 알았단 마랴."
"미친놈. 징징대기는. 너답지 않아-!"
"너 이자식. 한국 온지 얼마 안됐을때."
"그만해."
"그때 처럼 없어 졌을까봐 얼마나 걱정..."
"그만하라고 했다아-?"
"강윤주."
"이자식이!"

 

난 주먹을 힘껏 뻗어 승민이의 얼굴을 갈겼다. 왜 또 그얘기는 꺼내는거야?!

 

"그때처럼 방황 할까봐. 그때처럼 말없이 사라질까봐.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줄 아냐구?!"

 

스물 다섯 여름... 한국에 처음 왔을때... 그때 선호와 함께 한국에 들른 윤주를 보고 잊었다고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다는걸 알았다. 그래서 난 승민이 녀석에게 말도 없이 사라
졌었다. 1개월 동안의 방황... 난 한달동안 잘 알지도 못하는 한국의 바닷가 근처를 돌며 윤주
를 잊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었다. 승민이 자식은 그때의 일을 얘기하고 있는 거였다.

 

"그만하라구 했잖아..."
"야. 황보신우-!"
"그만해. 다시는 그때같은일 없어."
"제발...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너 내가 선호 다음으로 믿는거 알지?"
"훗."
"왜 니가 선호 다음인지도 알지?"
"씨발 내가 왜 선호 다음인데?"
"그러니까 니가 선호 다음인거 아냐! 너라면 너같은 놈 믿겠냐?"
"안 믿지. 나같아도 나 같은 놈 안 믿어!"
"그래- 아무도 너 같은 놈 안 믿어. 근데 난 믿는다구! 그러니까 너도 나 믿어..."
"내가 나도 안 믿는데 너같은 놈을 믿을거 같냐?"
"...어..."
"어디서 나온 자신감이야? 누가 너같은놈 믿는대?"
"아니. 아무도 안 믿어줘도 너랑 선호자식은 나 믿는다."
"뭐냐고?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이냐고?"
"몰라- 그런거 없어. 그냥 내가 믿으니까 너네도 믿을거라고 생각해."
"황보신우."
"왜 한승민!"
"아무대도 가지마."
"니가 내 애인이냐? 자꾸만 그딴 소리 지껄여라-? 모르는 사람이 보면 게인줄 알겠네. 젠장-"
"야임마 나도 싫어. 내가 미쳤냐? 나 좋다는 여자애들 놔두고 너랑 사귀게?"
"누가 들으면 진짠줄 알겠네."
"췟."

 

결국 승민이 자식이랑 또 한바탕하고 우리의 믿음은 그만큼 또 쌓여갔다.

 

다음날 아침.
내 허리를 감싸고 잠이든 승민이 자식을 떼어내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커튼을 걷자 눈부신 햇
살이 창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으윽- 도대체 몇시나 된거야?
고개를 돌려 벽에 걸린 시계를 보자 10시가 넘어있었다. 젠장할.
물론 바쁜일이 있었던건 아니었다. 이렇다할 직업도 없는 백수가 늦잠을 자던 새벽잠을 자던
누가 상관하겠냐만은 오늘은 12월 6일 토요일이었다. 토요일. 매월 첫째주 토요일은 본가에 가
야했다. 큰아버지댁에 가야했다.

 

"야임마- 일어나."
"우어어- 졸려-"
"이자식아 너네 집에 가서 자!"
"왜 그래- 엄마 졸려어-"
"이자식이 미쳤나. 떨어져 임마!"

 

잠이 덜깬 승민이놈은 날 엄마로 아는 건지 내 몸을 부둥켜 안고 자신의 잠을 깨우려는 날 말리
고 있었다.

 

"야!!!!!"
"어?"

그리고 벌떡 일어난 한승민.

"일어나 임마!"
"뭐야? 내가 왜 여기서 잤지?"
"덜깼냐? 일어나라구!"
"우어어- 졸리다-"
"나 연희동 가야돼."
"본가에?"
"어. 그러니까 일어나 임마."
"어."

 

부랴부랴 씻고 승민이 자식과 집을 나왔다. 젠장 벌써 12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