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절강해Live였던(막10 13 16 유튜브 교회 #활공교회, 설교원본-BAND: 활공교회)
주품이2023.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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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절강해Live였던(막10 13 16 유튜브 교회 #활공교회, 설교원본-BAND: 활공교회)
https://youtu.be/VHyrxLoT1eg
말씀:
13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16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막10: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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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449 예수 따라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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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맥읽기:
제자의 길
1. 사람을 외모로 취해서는 안 됨
(약2 1,9
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9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행10 34 35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35 각 나라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줄 깨달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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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1 26 31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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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품이 주: 오늘 본문과 연관 시키자면 어린이 같은 믿음은 주님 앞에 복종하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제자라는 사람이 사람의 외모를 보고 복음을 전하는 것을 구분한다면 복종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어느 기사를 보며 놀라는 일이 있었습니다. 한국이 좋아 방문한 일본인에게 심한 모욕을 하며 쫓아 버리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원수의 나라라 할지라도 그들을 함부로 대해서는 아니됩니다. 그들에게 오히려 호감을 주어 한국을 선대하는 자가 되게 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리라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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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항상 섬기는 자리에 서야 함
(마20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요13 1 17
12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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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2 7,8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주품이 주: 오늘 본문의 아이들은 율법을 지키기 시작하는 13세 이상의 어린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파이다온은 갓난 아기와 6,7세 이하의 어린이를 의미합니다. 이는 율법의 다스림을 받지 않는 예수님 복음을 새로 받아 들이는 거듭난 즉, 새로 복음으로 태어나는 심령이 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어려운 해석이지만 매우 의미 있는 신학적 해석입니다. 이제는 바리새인처럼 외식하고 대우 받으려는 사람이 아닌 예수님처럼 발 벗고 이웃을 섬기는 사람이 예수님 제자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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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영광을 주님께 돌려야 함
(고전15 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후4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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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1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주품이 주: 어린 아이는 그저 부모님 뜻 대로 복종하고 그저 부모님이 하라고 해서 했을 뿐이에요 할 뿐입니다. 이는 예수님 부활 승천 이후 성령 하나님의 역할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우리가 의를 행하고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것은 성령 하나님의 인도로 구원의 열매를 줍는 것입니다. 마지막 구원의 날 우리의 고백은 하나님께서 하셨어요 라는 감사의 고백만이 있을 따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인도를 위해 우리는 복종하는 어린아이의 맘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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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풀이:
만져 주심을:
a{ptomai(680, 하프토마이)
만지다, 대다, 잡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하프토마이는 하프토(a{ptw, 681)의 중간태이며, '대다, 달다, 먹다, 공격하다'를 의미한다.
5세기전 고전 작가들에게서 이 단어는 여인과의 성관계를 나타내는 말로도 사용되며 또한 '잡다' seize, '공격하다, ~에 관여하다'(concern oneself with, 곧 작품이나 철학 따위에 관여하다)는 뜻을 나타내기도 한다. *마지막으로는 '이해하다'라는 뜻을 나타내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는 치료의 신 아스클레피우스(Asclepius)가 어떻게 만짐에 의해 기적적으로 치료를 하는가를 반어적으로(ironically) 말한다. 아스클레피우스나 세라피스(Serapis), 또는 다른 어떤 신들을 막론하고, 그들에 의한 만짐으로써 치료가되는 여러 설화들은 대개 주후 2세기와 3세기부터 나온다.
(c) 막 3:10이하; 막 6:56에서는 *병고치심에 대한 위대한 기사는 만지심을 수반하는 기적들이다. 병자들은 "능력이 예수께로 나오는"(눅 6:19) 것을 실감하였기 때문에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핍근히" 하였고(막 3:10), 또는 옷이나(마 9:20이하, 병행구, 막 5:27-막 5:30; 눅 8:44이하) 심지어는 옷가라도 만지고자 하였다(막6:56; 마14:36). "부정한" 질병으로 고생하던 여인이나(막 5:27), 또는 질병에 걸려 걸을 수 없었던 갈릴리 사람들처럼(막 6:55)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이라도 만진 자들은 병이 나아 온전하여졌다(마 14:36). 왜냐하면 그들이 알거나 모르거나 간에 영광과 생명의 형체를 만졌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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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5:30과 눅 8:45 이하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누가 자신을 만지므로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아셨다: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마가와 누가는 현대적인 사고와는 맞지 않는 어떤 것을 선언한다. 즉 믿음으로 주님을 만지고자 하는 고유적 힘이다. 예수님께서만이 병자 안에, 자신을 만지고자 하는 믿음을 일깨우실 수 있으시다. 믿지 않는 자는 단지 피상적으로 예수님을 만질 뿐이며(막 5:31)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한다. 예수님께서 자유 의사로 만져주시는 자는 예수님의 신적 능력에 참여하여(막 9:27) 하나님 자신께서도 그에게 돌이키신다. 여인들은 오래된 유대 관습에 따라 서기관들이 하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자신들의 자녀들을 축복하시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주시기를 바라고 자녀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을 때(마 19:13이하, 병행구, 막 10:13-막 10:16; 눅 18:15이하) 이에 대한 기대감을 갖고 있었을까? 아마 그럴지도 모르지만, 이 기사는, 항간의 신앙에서 자주 발견되는 만짐의 마술적 능력에 대한 개념의 여지는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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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품이 주: 만짐에서는 이해하고 치료하는 위대한 일이 동반이 됩니다. 초등학교 때 제가 기마전에 능해 소문이 났기에 반에서 여러 힘 있는 애들이 저에게 도전을 하였습니다. 제가 일진도 아니고 저는 피곤하기에 대충 져주면서 게임을 끝내곤 하였습니다. 항상 지는 저를 아이들은 비웃었을지 모르지만 어느 선한 인상의 아이가 제 어깨를 만져 주었습니다. 싸우기 싫은 제 마음을 이해 하였기 때문입니다. 남 앞에 잘나려는 경쟁은 오히려 내게 독이 될 뿐입니다.
또 남을 만져 줌으로 안마하는 것은 상대를 치료하려는 선한 목적이 있습니다. 이런 만져줌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해 질 때 더욱 영구적인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본문에 예수님의 안수를 받은 아이들은 이해를 받고 후에 훌륭한 제자들이 되었을 거라는 추측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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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아이들을:
paidivon(3813, 파이디온)
어린 아이 very young child, 유아 infant.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파이디온(Hdt. 이래)은 파이스(paiv", 3816)의 지소사로서 7세까지의 '어린 아이, 갓난 아이'를 의미하며, '어린 노예'(남, 여)를 의미하기도 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파이디온은 70인역본에서 히브리어 옐레드(소년 boy, 35회), 나아르(소년, 젊은이, 종, 27회), 벤(아들, 19회), 타프(아이, 7회) 등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일반 세속 헬라어 문헌에서와 마찬가지로 '갓난 아이'(창 17:12; 창 21:7), '어린 아이'(창 21:14), '소년'(창 22:5), 그리고 '사환'(창 22:5), 종 등 나이 어린 자들의 봉사 능력을 강조할 때 자주 사용되었다.
(b) 파이디온은 신약성경의 세 그룹의 구절들에서 왕국과 관련이 된다.
① 막 10:13; 막 10:14; 막 10:15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어린 아이들을 축복하신 것을 언급한다: 13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병행구, 마 19:13, 마 19:14; 눅 18:16, 눅 18:17[15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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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이 어른들로 하여금 어린 아이들을 예수님께로 데려오지못하게 한 것은 예수님께서 피로하심에 대한 그들의 염려에서 기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아마 어린 아이들은 책임성 있는 언행을 하기에 너무 어리다는 의미도 함축되어 있을 것이다. 확실히 그들은 13세의 바르 미츠와(Bar Mitzwah)가 되는 연령에 속해 있지 않았을 것이며 율법의 멍에를 스스로 멜 수 없었을 것이다(참조: J.Bowman, The Gospel of Mark: The New Christian Jewish passover Haggadah).
마가는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참조: 막 10:16; 마 19:15)라는 말을 첨가하고 있다. "이런 자"라는 용어는 문자적으로 '이 어린 아이들과 그 외 어린 아이들을 암시하거나 또는 문자적 의미의 어린 아이가 아닌 어린 아이의 특성을 소유하고 있는 이런 자들'을 암시할 것이다(D.E.Nineham, Sanint Mark).
막 10:15은 두번째 해석이 적절하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이 경우, 예수님의 선언은 제자들의 피상적인 이해를 뒤집고 있다. 인간이 책임성있는 언행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성숙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기보다는 예수님께서는 그 역(逆)이 진실이라는 의미가 담긴 말씀을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린이들에게 속하는 이유는 그들이 가진 어떤 주관적 특질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객관적 무력함에 있다(C.E.B. Cranfield, The Gospel According to Saint Mark). 이 말씀은 요한복음 3장에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거듭남을 대비시키는 가운데 니고데모와 나누었던 대화와 병행되고 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들의 것이라는 예수님의 범주적 말씀은 그들이 교회의 완벽한 구성원이 될 수 있으며 따라서 가입을 위한 성례를 받기에 합당한 자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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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마 18:4에서 어린 아이를 예를 들어 천국에서 큰 자를 설명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병행 기사인 막 9:36, 막 9:37(참조: 막 9:33-막 9:37)과 눅 9:46이하는 이 말씀을 담고 있지 않다. 그리하여 이는 이 말씀이 ① 항목에서 살펴본 구절들에서 끌어낸 한 쌍의 이중 구절임을 암시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거기의 사상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처럼 받아들이는 것이고 여기에서는 어린 아이처럼 되어 천국에 들어가는 것에 관해 말하며 결국 자신을 "이 어린 아이와 같이" 낮추어야 한다는 사상을 담고 있다. 이 어린 아이 같이 낮춘다는 것에서 먼저는 우리를 들어가게 하는 것이요, 다음은 돌이키는 행위의 당연한 계속으로써, 우리가 들어간 후에 우리를 천국에서 점점 크게 만드는, 이 점점 자라는 마음의 겸손이다.
이 낮추는(타이노시스) 것은 소유권을 주장하지 아니하며, 권리를 주장하지 아니하며, 강요하지도 않으며, 주의 뜻과 말씀 아래 깊이 겸손히 허리를 굽히며, 주께 완전히 복종하며 이것으로 행복하며 만족한다.
예수님의 품 속의 어린 아이는 그를 쳐다 보았고, 그를 의지하였고, 그의 하신 일에 만족했다. 이것이 어린 아이의 겸손이요, 공손이었다. 이 아이는 아무 것도 주장하지 않았고, 아무런 공로도 내세우지않았고, 어떤 업적도 자랑하지 않았다. 이것이 아이의 자연 상태였다. 예수님은 천국에서 큰 자의 영적 상태의 실례를 드시기 위해 이 아이의 예를 드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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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품이 주: 13세 이상의 율법의 소년 준행자가 아닌 갓난 아이부터 6,7세 어린 아이같이 되라는 예수님의 교훈은 매우 심오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없이 율법으로 양과 소의 제사로 의로 와지는 세상이 아닌 이제는 다시 태어나 예수님의 제자로 새로 태어나야 하며 또한 자신의 의지가 아닌 성령 하나님께 어린아이같은 심령으로 맡기어 성령 하나님의 인도로 성령의 열매로만 살아가야 할 것으로 새로 살아가야 한다는 심오한 교훈이 담겨 있으리란 의미일 것입니다. 율법에 노예가 아닌 성령님에 충만히 감동된 삶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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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고 오매:
prosfevrw(4374, 프로스페로)
가져오다, 바치다.
1. 고전 헬라어 문헌 및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프로스페로(Pind., Aeschyl., Hdt. 이래)는 프로스(prov", 4314: ~에, ~을 향하여)와 페로(fevrw, 5342: 데리고 가다, 나르다)에서 유래했으며, '~에게 데려오다' 즉 '바치다'를 의미한다.
(a) 70인역본에서 프로스페로는 대개 '제물을 가져오다, 제단에 바치다, 제사를 드리다'를 의미한다.
(b) 요세푸스는 프로스페로를 '가져오다, 대접하다'(음식, 술)는 일반적 의미와 '바친다'(제물)는 제의적 의미로 사용했다.
(c) 필로는 프로스페로를 '가져오다'와 중간태로 '취하다'(음식, 술)는 의미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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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품이 주: 본문의 어린 아이를 데리고 오매는 달리 해석하면 어린 아이들을 제단에 바치다를 의미 할 수 있습니다. 기존에 있는 유대인들은 율법을 준행 해야만 하는 아이인 13세 이상의 어린 아이만이 하나님께 드려져야만을 의미 했기에 이런 어린아이들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받지 않으시리라 예상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정 반대의 결과를 낳습니다. 자기 의대로 살아 가는 자보다 성령 하나님께 모든 걸 맡기는 어린 아이의 삶이 하나님의 나라에 더 적합한 충만히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시대가 다가 오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들이 더 하나님의 제단에 드려지기에 합당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까지 함께 하는 합동 예배는 적절한 것입니다. 일부 이를 행하는 교회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는 성령 하나님께서 어린 아이까지도 깨어나게 하며 무의식 중에라도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때문입니다. 교육이 부족하여 이단에 빠지고 진화론에 빠져 교회를 출석하지 않는 교회에서 이를 방지하기 위해 조금 어렵게 가르쳤다고 저는 교회에서 쫓겨난 경험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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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성령님의 역할을 무시하고 율법주의 사고에 빠진 부모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 의로만 가리키려는 고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담임 목사가 부교역자를 모아 일주 한번 검사 확인 지도하여 구박하는 것도 율법주의 사고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각자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하여 자율적 교권을 실행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후자의 예는 수영로 교회의 고 정필도 목사님의 간증이기도 합니다. 1주 한번의 구박이 아닌 부교역자에게 자율권을 주니 교회가 더 부흥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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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들지:
devcomai(1209, 데코마이)
받다, 받아들이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데코마이(Homer. 이래)는 기본동사이며,
(a) 본래 의미는 '받아 들이다, 받다'이다. 예를 들면 편지, 선물, 보상, 심지어 영혼이 몸을 받아 들이는 것을 나타낸다. 이방 종교에서 예언은 예를 들어, 새가 나는 것을 통해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제물은 신들에 의해 열납되었다고 한다.
(b) '환영하다, 환대하다'라는 의미의 '받아 들이다'(Xen.), 사람을 맞이하는 것, 즉 사람에게 환대를 베푸는 것을 나타낸다.
(c) 어떤 사람이 말하는 것을 '받아 들이다', '듣다', 혹은 '이해하다'를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데코마이는 70인역본에서 약 70회 나오며, 주로 라카흐(취하다)와 라차(기뻐하다)의 역어로사용되었다.
(a) 데코마이는 창 33:10등에서 처럼 '선물을 받다'라는 일상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이런 경우를 제외하면 주로 하나님의 말씀(신 33:3; 렘 9:20)과 행위(즉 교정, 징계 따위의 행위)를 받아들이려고 하는 태세를 의미한다.
예레미야와 스바냐에서 데코마이는 이스라엘의 행위를 법적으로 고소하는 부정적 문맥에 나타난다. 즉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징계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렘 2:30; 렘 5:3; 렘 7:28; 습 3:2)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렘 25:28, 여기에서 심판은 저주의 잔으로 표현되고 있다, 호 4:11). 이리하여 데코마이는 재난에 대한 내키지 않는, 어쩔 수 없는 복종을 의미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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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지혜 문학에서 데코마이는 지적으로, 실존적으로 개방되고 수용적인 경건한 사람의 생활 태도를 표현하고 있다. 즉 지혜로운 사람의 생활 태도를 표현하고 있다. 즉 지혜로운 사람은 지혜의 말씀을 받아 들이며(잠 4:10), 계명에 유의하며(잠 10:8), 징계를 달게 받으며(잠 16:17), 지식을 받아 들인다(잠 21:11). 예언자들의 희생제물에 대한 지속적인 비판으로 인하여(참조: 렘 6:20) 지혜 문학에서는 비제의적이며 윤리적인 의미를 얻게 되었다. "선을 행함이 의로운 길의 시작이니 이는 제물을 드리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더 기쁘게 받으심이라"(잠 16:7; 참조: 잠 15:8, 잠 15:28).
(c) 데코마이는 '받다', '가지다'를 의미한다.
① "공문을 받아가지고", 행 22:5,
② "편지를 받다", 행 28:21,
③ "하나님의 나라를 받들다", 하나님의 나라의 은혜의 참예자가 되다, 막 10:15; 눅 18:17,
④ "생명의 도를 받아", 행 7:38,
⑤ "너희의 받지 아니하는 다른 복음", 고후 11:4,
⑥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고후 6:1,
⑦ '배우다': 빌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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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품이 주: 여기서는 어린 아이와 같이 복음을 받아 들이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모습인지를 드러냅니다. c에 그 구체적 모습을 봅니다. 공문과 편지를 받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을 매일 묵상함을 의미합니다. 다음은 그 말씀의 도를 성령님의 인도를 잘 따르고 다른 복음 거짓 복음을 받지 않아 은혜를 헛되지 받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 잘 믿다가 무당 방언에 빠지는 교회가 수두룩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온전히 영접한 삶이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또, 구원파와 같이 양과 소의 제사의 율법을 선행과 연결을 시키어 악행을 반복하여 회개를 죄악 시 하는 사이비도 있습니다. 하지만 양소제사의 율법은 성령의 열매인 사랑, 희락, 화평등과 아무 연관이 없으며 오히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라는 말씀같이 거룩과 사랑은 예수님의 믿음과 하나인 것을 봅니다. 성경 해석을 엉터리로 하는 사이비는 기도를 통한 성령님의 조명과 문맥, 원어, 역사, 신학을 공부하지 않는 맹신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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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에 능한 바울을 하나님께서 가장 많이 사용하신 것은 무지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의도입니다. 나는 무지한 맹종을 가르치려는 목회자는 아닌지 항상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 감정에만 의지한 그냥 믿어 하지만 다른 복음을 믿으라는 악의는 아닌지 항상 배우며 점검해야 합니다.
본문의 구절 강해는 다음 주에 잇도록 하겠습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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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성령 하나님을 순수히 복종하여 따르는 어린 아이같은 신앙이 되기를 원합니다. 내가 나에게만 사회에게만 따름이 아닌 항상 성령 하나님의 거룩과 사랑의 인도로 성령 하나님께서 개입한 저와 사회인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게 충만히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다른 복음이 아닌 늘 바울같이 지정의가 온전히 되게 배우며 주님 안에 모든 것을 다 갖추어 실족하지 않도록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구절강해Live였던(막10 13 16 유튜브 교회 #활공교회, 설교원본-BAND: 활공교회)
https://youtu.be/VHyrxLoT1eg
말씀:
13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16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막10:13-16
//
찬송가: 449 예수 따라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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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맥읽기:
제자의 길
1. 사람을 외모로 취해서는 안 됨
(약2 1,9
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9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행10 34 35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35 각 나라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줄 깨달았도다,
/
고전1 26 31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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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품이 주: 오늘 본문과 연관 시키자면 어린이 같은 믿음은 주님 앞에 복종하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제자라는 사람이 사람의 외모를 보고 복음을 전하는 것을 구분한다면 복종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어느 기사를 보며 놀라는 일이 있었습니다. 한국이 좋아 방문한 일본인에게 심한 모욕을 하며 쫓아 버리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원수의 나라라 할지라도 그들을 함부로 대해서는 아니됩니다. 그들에게 오히려 호감을 주어 한국을 선대하는 자가 되게 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리라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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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항상 섬기는 자리에 서야 함
(마20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요13 1 17
12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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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2 7,8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주품이 주: 오늘 본문의 아이들은 율법을 지키기 시작하는 13세 이상의 어린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파이다온은 갓난 아기와 6,7세 이하의 어린이를 의미합니다. 이는 율법의 다스림을 받지 않는 예수님 복음을 새로 받아 들이는 거듭난 즉, 새로 복음으로 태어나는 심령이 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어려운 해석이지만 매우 의미 있는 신학적 해석입니다. 이제는 바리새인처럼 외식하고 대우 받으려는 사람이 아닌 예수님처럼 발 벗고 이웃을 섬기는 사람이 예수님 제자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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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영광을 주님께 돌려야 함
(고전15 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후4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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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1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주품이 주: 어린 아이는 그저 부모님 뜻 대로 복종하고 그저 부모님이 하라고 해서 했을 뿐이에요 할 뿐입니다. 이는 예수님 부활 승천 이후 성령 하나님의 역할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우리가 의를 행하고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것은 성령 하나님의 인도로 구원의 열매를 줍는 것입니다. 마지막 구원의 날 우리의 고백은 하나님께서 하셨어요 라는 감사의 고백만이 있을 따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인도를 위해 우리는 복종하는 어린아이의 맘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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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풀이:
만져 주심을:
a{ptomai(680, 하프토마이)
만지다, 대다, 잡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하프토마이는 하프토(a{ptw, 681)의 중간태이며, '대다, 달다, 먹다, 공격하다'를 의미한다.
5세기전 고전 작가들에게서 이 단어는 여인과의 성관계를 나타내는 말로도 사용되며 또한 '잡다' seize, '공격하다, ~에 관여하다'(concern oneself with, 곧 작품이나 철학 따위에 관여하다)는 뜻을 나타내기도 한다. *마지막으로는 '이해하다'라는 뜻을 나타내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는 치료의 신 아스클레피우스(Asclepius)가 어떻게 만짐에 의해 기적적으로 치료를 하는가를 반어적으로(ironically) 말한다. 아스클레피우스나 세라피스(Serapis), 또는 다른 어떤 신들을 막론하고, 그들에 의한 만짐으로써 치료가되는 여러 설화들은 대개 주후 2세기와 3세기부터 나온다.
(c) 막 3:10이하; 막 6:56에서는 *병고치심에 대한 위대한 기사는 만지심을 수반하는 기적들이다. 병자들은 "능력이 예수께로 나오는"(눅 6:19) 것을 실감하였기 때문에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핍근히" 하였고(막 3:10), 또는 옷이나(마 9:20이하, 병행구, 막 5:27-막 5:30; 눅 8:44이하) 심지어는 옷가라도 만지고자 하였다(막6:56; 마14:36). "부정한" 질병으로 고생하던 여인이나(막 5:27), 또는 질병에 걸려 걸을 수 없었던 갈릴리 사람들처럼(막 6:55)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이라도 만진 자들은 병이 나아 온전하여졌다(마 14:36). 왜냐하면 그들이 알거나 모르거나 간에 영광과 생명의 형체를 만졌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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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5:30과 눅 8:45 이하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누가 자신을 만지므로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아셨다: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마가와 누가는 현대적인 사고와는 맞지 않는 어떤 것을 선언한다. 즉 믿음으로 주님을 만지고자 하는 고유적 힘이다. 예수님께서만이 병자 안에, 자신을 만지고자 하는 믿음을 일깨우실 수 있으시다. 믿지 않는 자는 단지 피상적으로 예수님을 만질 뿐이며(막 5:31)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한다. 예수님께서 자유 의사로 만져주시는 자는 예수님의 신적 능력에 참여하여(막 9:27) 하나님 자신께서도 그에게 돌이키신다. 여인들은 오래된 유대 관습에 따라 서기관들이 하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자신들의 자녀들을 축복하시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주시기를 바라고 자녀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을 때(마 19:13이하, 병행구, 막 10:13-막 10:16; 눅 18:15이하) 이에 대한 기대감을 갖고 있었을까? 아마 그럴지도 모르지만, 이 기사는, 항간의 신앙에서 자주 발견되는 만짐의 마술적 능력에 대한 개념의 여지는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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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품이 주: 만짐에서는 이해하고 치료하는 위대한 일이 동반이 됩니다. 초등학교 때 제가 기마전에 능해 소문이 났기에 반에서 여러 힘 있는 애들이 저에게 도전을 하였습니다. 제가 일진도 아니고 저는 피곤하기에 대충 져주면서 게임을 끝내곤 하였습니다. 항상 지는 저를 아이들은 비웃었을지 모르지만 어느 선한 인상의 아이가 제 어깨를 만져 주었습니다. 싸우기 싫은 제 마음을 이해 하였기 때문입니다. 남 앞에 잘나려는 경쟁은 오히려 내게 독이 될 뿐입니다.
또 남을 만져 줌으로 안마하는 것은 상대를 치료하려는 선한 목적이 있습니다. 이런 만져줌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해 질 때 더욱 영구적인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본문에 예수님의 안수를 받은 아이들은 이해를 받고 후에 훌륭한 제자들이 되었을 거라는 추측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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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아이들을:
paidivon(3813, 파이디온)
어린 아이 very young child, 유아 infant.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파이디온(Hdt. 이래)은 파이스(paiv", 3816)의 지소사로서 7세까지의 '어린 아이, 갓난 아이'를 의미하며, '어린 노예'(남, 여)를 의미하기도 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파이디온은 70인역본에서 히브리어 옐레드(소년 boy, 35회), 나아르(소년, 젊은이, 종, 27회), 벤(아들, 19회), 타프(아이, 7회) 등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일반 세속 헬라어 문헌에서와 마찬가지로 '갓난 아이'(창 17:12; 창 21:7), '어린 아이'(창 21:14), '소년'(창 22:5), 그리고 '사환'(창 22:5), 종 등 나이 어린 자들의 봉사 능력을 강조할 때 자주 사용되었다.
(b) 파이디온은 신약성경의 세 그룹의 구절들에서 왕국과 관련이 된다.
① 막 10:13; 막 10:14; 막 10:15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어린 아이들을 축복하신 것을 언급한다: 13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병행구, 마 19:13, 마 19:14; 눅 18:16, 눅 18:17[15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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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이 어른들로 하여금 어린 아이들을 예수님께로 데려오지못하게 한 것은 예수님께서 피로하심에 대한 그들의 염려에서 기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아마 어린 아이들은 책임성 있는 언행을 하기에 너무 어리다는 의미도 함축되어 있을 것이다. 확실히 그들은 13세의 바르 미츠와(Bar Mitzwah)가 되는 연령에 속해 있지 않았을 것이며 율법의 멍에를 스스로 멜 수 없었을 것이다(참조: J.Bowman, The Gospel of Mark: The New Christian Jewish passover Haggadah).
마가는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참조: 막 10:16; 마 19:15)라는 말을 첨가하고 있다. "이런 자"라는 용어는 문자적으로 '이 어린 아이들과 그 외 어린 아이들을 암시하거나 또는 문자적 의미의 어린 아이가 아닌 어린 아이의 특성을 소유하고 있는 이런 자들'을 암시할 것이다(D.E.Nineham, Sanint Mark).
막 10:15은 두번째 해석이 적절하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이 경우, 예수님의 선언은 제자들의 피상적인 이해를 뒤집고 있다. 인간이 책임성있는 언행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성숙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기보다는 예수님께서는 그 역(逆)이 진실이라는 의미가 담긴 말씀을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린이들에게 속하는 이유는 그들이 가진 어떤 주관적 특질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객관적 무력함에 있다(C.E.B. Cranfield, The Gospel According to Saint Mark). 이 말씀은 요한복음 3장에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거듭남을 대비시키는 가운데 니고데모와 나누었던 대화와 병행되고 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들의 것이라는 예수님의 범주적 말씀은 그들이 교회의 완벽한 구성원이 될 수 있으며 따라서 가입을 위한 성례를 받기에 합당한 자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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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마 18:4에서 어린 아이를 예를 들어 천국에서 큰 자를 설명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병행 기사인 막 9:36, 막 9:37(참조: 막 9:33-막 9:37)과 눅 9:46이하는 이 말씀을 담고 있지 않다. 그리하여 이는 이 말씀이 ① 항목에서 살펴본 구절들에서 끌어낸 한 쌍의 이중 구절임을 암시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거기의 사상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처럼 받아들이는 것이고 여기에서는 어린 아이처럼 되어 천국에 들어가는 것에 관해 말하며 결국 자신을 "이 어린 아이와 같이" 낮추어야 한다는 사상을 담고 있다. 이 어린 아이 같이 낮춘다는 것에서 먼저는 우리를 들어가게 하는 것이요, 다음은 돌이키는 행위의 당연한 계속으로써, 우리가 들어간 후에 우리를 천국에서 점점 크게 만드는, 이 점점 자라는 마음의 겸손이다.
이 낮추는(타이노시스) 것은 소유권을 주장하지 아니하며, 권리를 주장하지 아니하며, 강요하지도 않으며, 주의 뜻과 말씀 아래 깊이 겸손히 허리를 굽히며, 주께 완전히 복종하며 이것으로 행복하며 만족한다.
예수님의 품 속의 어린 아이는 그를 쳐다 보았고, 그를 의지하였고, 그의 하신 일에 만족했다. 이것이 어린 아이의 겸손이요, 공손이었다. 이 아이는 아무 것도 주장하지 않았고, 아무런 공로도 내세우지않았고, 어떤 업적도 자랑하지 않았다. 이것이 아이의 자연 상태였다. 예수님은 천국에서 큰 자의 영적 상태의 실례를 드시기 위해 이 아이의 예를 드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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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품이 주: 13세 이상의 율법의 소년 준행자가 아닌 갓난 아이부터 6,7세 어린 아이같이 되라는 예수님의 교훈은 매우 심오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없이 율법으로 양과 소의 제사로 의로 와지는 세상이 아닌 이제는 다시 태어나 예수님의 제자로 새로 태어나야 하며 또한 자신의 의지가 아닌 성령 하나님께 어린아이같은 심령으로 맡기어 성령 하나님의 인도로 성령의 열매로만 살아가야 할 것으로 새로 살아가야 한다는 심오한 교훈이 담겨 있으리란 의미일 것입니다. 율법에 노예가 아닌 성령님에 충만히 감동된 삶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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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고 오매:
prosfevrw(4374, 프로스페로)
가져오다, 바치다.
1. 고전 헬라어 문헌 및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프로스페로(Pind., Aeschyl., Hdt. 이래)는 프로스(prov", 4314: ~에, ~을 향하여)와 페로(fevrw, 5342: 데리고 가다, 나르다)에서 유래했으며, '~에게 데려오다' 즉 '바치다'를 의미한다.
(a) 70인역본에서 프로스페로는 대개 '제물을 가져오다, 제단에 바치다, 제사를 드리다'를 의미한다.
(b) 요세푸스는 프로스페로를 '가져오다, 대접하다'(음식, 술)는 일반적 의미와 '바친다'(제물)는 제의적 의미로 사용했다.
(c) 필로는 프로스페로를 '가져오다'와 중간태로 '취하다'(음식, 술)는 의미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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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품이 주: 본문의 어린 아이를 데리고 오매는 달리 해석하면 어린 아이들을 제단에 바치다를 의미 할 수 있습니다. 기존에 있는 유대인들은 율법을 준행 해야만 하는 아이인 13세 이상의 어린 아이만이 하나님께 드려져야만을 의미 했기에 이런 어린아이들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받지 않으시리라 예상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정 반대의 결과를 낳습니다. 자기 의대로 살아 가는 자보다 성령 하나님께 모든 걸 맡기는 어린 아이의 삶이 하나님의 나라에 더 적합한 충만히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시대가 다가 오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들이 더 하나님의 제단에 드려지기에 합당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까지 함께 하는 합동 예배는 적절한 것입니다. 일부 이를 행하는 교회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는 성령 하나님께서 어린 아이까지도 깨어나게 하며 무의식 중에라도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때문입니다. 교육이 부족하여 이단에 빠지고 진화론에 빠져 교회를 출석하지 않는 교회에서 이를 방지하기 위해 조금 어렵게 가르쳤다고 저는 교회에서 쫓겨난 경험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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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성령님의 역할을 무시하고 율법주의 사고에 빠진 부모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 의로만 가리키려는 고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담임 목사가 부교역자를 모아 일주 한번 검사 확인 지도하여 구박하는 것도 율법주의 사고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각자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하여 자율적 교권을 실행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후자의 예는 수영로 교회의 고 정필도 목사님의 간증이기도 합니다. 1주 한번의 구박이 아닌 부교역자에게 자율권을 주니 교회가 더 부흥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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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들지:
devcomai(1209, 데코마이)
받다, 받아들이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데코마이(Homer. 이래)는 기본동사이며,
(a) 본래 의미는 '받아 들이다, 받다'이다. 예를 들면 편지, 선물, 보상, 심지어 영혼이 몸을 받아 들이는 것을 나타낸다. 이방 종교에서 예언은 예를 들어, 새가 나는 것을 통해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제물은 신들에 의해 열납되었다고 한다.
(b) '환영하다, 환대하다'라는 의미의 '받아 들이다'(Xen.), 사람을 맞이하는 것, 즉 사람에게 환대를 베푸는 것을 나타낸다.
(c) 어떤 사람이 말하는 것을 '받아 들이다', '듣다', 혹은 '이해하다'를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데코마이는 70인역본에서 약 70회 나오며, 주로 라카흐(취하다)와 라차(기뻐하다)의 역어로사용되었다.
(a) 데코마이는 창 33:10등에서 처럼 '선물을 받다'라는 일상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이런 경우를 제외하면 주로 하나님의 말씀(신 33:3; 렘 9:20)과 행위(즉 교정, 징계 따위의 행위)를 받아들이려고 하는 태세를 의미한다.
예레미야와 스바냐에서 데코마이는 이스라엘의 행위를 법적으로 고소하는 부정적 문맥에 나타난다. 즉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징계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렘 2:30; 렘 5:3; 렘 7:28; 습 3:2)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렘 25:28, 여기에서 심판은 저주의 잔으로 표현되고 있다, 호 4:11). 이리하여 데코마이는 재난에 대한 내키지 않는, 어쩔 수 없는 복종을 의미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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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지혜 문학에서 데코마이는 지적으로, 실존적으로 개방되고 수용적인 경건한 사람의 생활 태도를 표현하고 있다. 즉 지혜로운 사람의 생활 태도를 표현하고 있다. 즉 지혜로운 사람은 지혜의 말씀을 받아 들이며(잠 4:10), 계명에 유의하며(잠 10:8), 징계를 달게 받으며(잠 16:17), 지식을 받아 들인다(잠 21:11). 예언자들의 희생제물에 대한 지속적인 비판으로 인하여(참조: 렘 6:20) 지혜 문학에서는 비제의적이며 윤리적인 의미를 얻게 되었다. "선을 행함이 의로운 길의 시작이니 이는 제물을 드리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더 기쁘게 받으심이라"(잠 16:7; 참조: 잠 15:8, 잠 15:28).
(c) 데코마이는 '받다', '가지다'를 의미한다.
① "공문을 받아가지고", 행 22:5,
② "편지를 받다", 행 28:21,
③ "하나님의 나라를 받들다", 하나님의 나라의 은혜의 참예자가 되다, 막 10:15; 눅 18:17,
④ "생명의 도를 받아", 행 7:38,
⑤ "너희의 받지 아니하는 다른 복음", 고후 11:4,
⑥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고후 6:1,
⑦ '배우다': 빌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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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품이 주: 여기서는 어린 아이와 같이 복음을 받아 들이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모습인지를 드러냅니다. c에 그 구체적 모습을 봅니다. 공문과 편지를 받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을 매일 묵상함을 의미합니다. 다음은 그 말씀의 도를 성령님의 인도를 잘 따르고 다른 복음 거짓 복음을 받지 않아 은혜를 헛되지 받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 잘 믿다가 무당 방언에 빠지는 교회가 수두룩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온전히 영접한 삶이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또, 구원파와 같이 양과 소의 제사의 율법을 선행과 연결을 시키어 악행을 반복하여 회개를 죄악 시 하는 사이비도 있습니다. 하지만 양소제사의 율법은 성령의 열매인 사랑, 희락, 화평등과 아무 연관이 없으며 오히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라는 말씀같이 거룩과 사랑은 예수님의 믿음과 하나인 것을 봅니다. 성경 해석을 엉터리로 하는 사이비는 기도를 통한 성령님의 조명과 문맥, 원어, 역사, 신학을 공부하지 않는 맹신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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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에 능한 바울을 하나님께서 가장 많이 사용하신 것은 무지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의도입니다. 나는 무지한 맹종을 가르치려는 목회자는 아닌지 항상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 감정에만 의지한 그냥 믿어 하지만 다른 복음을 믿으라는 악의는 아닌지 항상 배우며 점검해야 합니다.
본문의 구절 강해는 다음 주에 잇도록 하겠습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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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성령 하나님을 순수히 복종하여 따르는 어린 아이같은 신앙이 되기를 원합니다. 내가 나에게만 사회에게만 따름이 아닌 항상 성령 하나님의 거룩과 사랑의 인도로 성령 하나님께서 개입한 저와 사회인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게 충만히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다른 복음이 아닌 늘 바울같이 지정의가 온전히 되게 배우며 주님 안에 모든 것을 다 갖추어 실족하지 않도록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