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우물

누렁이2006.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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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우물

한혜영

항상 끈이 짧은 두레박이었다 열한 살
덜 자란 팔의 길이로 안간힘 쓰며 퍼 올렸던
그리움, 아버지는 우물 속에 안전하게 숨어 있는
빨치산 대장 같아서 좀처럼 길어 올려지지가
않았다 마흔 해 다 되어 가도록 웃자라버린
억새의 시퍼런 울음소리만 들려주었을 뿐

두레박 속에는 어쩌다 아버지가
동생의 탈 것으로 보내는 사슴과 내 몫의
머리핀으로 나비가 들어있기도 하였지만
그것은 박제된 것이었으므로 만지자마자
바스락 소리를 내며 부서져 내리곤 했다
아버지는 진작에 우물을 떠나 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피할 수 없던 의심이
낡은 줄을 심하게 흔들어대었지만 두레박은
여전히 까딱까딱 내려갔고 닿을 듯 말 듯
수면 위에서 매번 안타깝게 매달렸다

그러다 마침내 절대적으로 상심할 만한 장면
하나와 마주쳤다 아버지의 새 여자가 된 달이
만삭이 된 몸을 닦는 모습, 그것을 보는 순간
두레박줄은 기어이 뚝 끊어져버리고 말았으나
그렇다고 우물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등뒤에서 수런거리는 동네사람들의 음성이
산발적으로 들려오기 시작했다 오래된 우물은
이제쯤 폐쇄되어야 마땅하다고 저 귀신같은
여자아이는 우물과 함께…… 그 소리에 나
산자락을 타는 불길처럼 황급히 달아나고 있었으나
열한 살에서 성장을 멈춘 작은 주먹 안에는
아직도 불끈 움켜쥐고
절대로 놓지 못하는 끈 하나가 있는 것이다

오래된 우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