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바라기-16-

까미유2004.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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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6 화



***

며칠 째 지니선배가 나타나지 않았다. 휴대폰은 꺼져 있고, 작업실은 비어 있었다.

그 날 밤 아무래도 그런 말은 하지 않는 것이 나을 뻔했다. 내가 아무래도 미쳤던가 보다.

이번 일로 그녀와의 관계가 껄끄러워진 것은 아닐까...

하은과 함께 백화점을 돌고, 점심을 먹고, 산책을 하는 것으로 주말이 끝이 났다.

하은이 자꾸 면박을 준다. 요즘 자꾸 뭘 그렇게 빠뜨리고 다니느냐고 말이다.




***

돌아오는 차안에서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평생을 얼굴도 마주하지 말자고 그러던

큰 집에서 심경의 무슨 변화가 있었는지 엄마를 직접 불러 들였을까.

엄만 그게 지금 궁금한 것일게다. 여전히 큰 집의 오빠나 언니는 우리를 시큰둥했고,

못마땅한 얼굴로 내내 엄마를 대하던 큰어머니는 시종일관 침묵을 지켰다.


-호텔로 가요?

-내가 갈 곳이 어딨겠니 그럼.


평생을 첩이란 소릴 듣고 살기 싫다고 이태리로 날아가버린 사람이 새삼 아버지의 죽음으로

없던 정이 솟아날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한때는 당신도 사랑이란 걸 믿었을 것이다.

호텔에 도착했을 때 엄마는 바에 가서 술이라도 한 잔하자며 나를 잡았다.


-넌, 여기 아예 눌러 앉을 셈이야?

-모르겠어.

-피 붙이라고는 하나 없는데...있던 늬 아비마저 죽고, 여기 정 붙일 사람이 어디 있다고.

-거기라고 별수 있어?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혼자였다. 세상 어딜 가도 맘 붙일 만한 곳이 없었어...팔자에 그러더라.

 평생을 외롭게 산다고.


엄마를 본다. 새삼 많이 늙었구나 라는 생각을 한다. 꽃피던 젊은 시절이 있었을텐데...

엄말 이해하지 못했던 지난 날들이 떠오른다.


-늬 아버질...만나는 게 아니었어. 이제와서 이런 말 할 필요는 없지만....


준하를 떠올린다. 마음이 좋지 않다. 이런 걸 동병상련이라고 하나....


-넌...만나는 사람 없니?

-그렇지 뭐.

-젊은 시절 다 보내고, 늙어서 힘없을 때 누가 널 쳐다 보기라도 한다니.


며칠 전 준하의 말을 떠올린다. 선밸..보면 심장이 멈춰요....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겁이 덜컥 났다. 기어이...내가 일을 내고 마는구나 하는 생각에.

어떻게 그 아일 다시 볼까.


-너는 나처럼 그런 미련한 사랑 하지 마라...


휴대폰이 울린다. 준하다. 받을까 망설인다.


-받어봐. 난..그만 올라가 쉴랜다.


엄마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나서야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저에요, 준하.

-어, 그래.

-무슨 일 있어요?...요새 들어오지도 않고...전화도 안되고..

-일이 좀...생겼었어.

-지금...시간 좀 내줄래요? 어디에요 거기가?



전화를 끊고 삼십분쯤 지나서야 준하가 도착했다. 준하를 기다리는 동안 술을

조금 마셨더니 취기가 오른다.


-많이 마셨어요?

-조금...괜찮아, 정신 놓지 않았어. 멀쩡해.


준하가 머리에 꽂힌 하얀 나비를 본다.


-무슨 일, 있었어요?

-어...아버지가 돌아가셨어. 오늘이 출상이었거든.


준하는 말이 없다. 술잔을 비우고 다시 잔을 채운다.


-준하야...


준하는 나를 보지 않는다.


-우리...

-선배, 알아요...나, 벌 받을 거에요. 내 죄가 무엇인지 조금씩...알 것 같아요.

  그래서...그 죄, 피해보려구 노력 중이에요.


마음이 울컥한다.


-하은이...그 애한테 내가 이러면 안된다는 것도 너무나 잘 알아요...몰랐어요. 내가 선배한테

  이런 감정을 가지게 될진. 그런데 그게...너무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영지를

  본다고 하면서도...사실 난, 선배를 보고 있었던 것 같아요. 대학때 선밸 처음 만난

  순간부터....그땐 그게 그렇게 심각한 건지, 아니, 진실을 몰랐던 것 같아요.

-너무....늦었어, 준하야.

-네...알아요. 너무...시간이 많이 흘러 버렸어요.


조금만 일찍 알았더라면...너도, 나도 이렇게 꼬이진 않았을텐데...술 잔에 얼음을 꽉꽉 채운다.

준하는 한동안 말이 없다.


-내가....욕심을 부릴 거라면...진작 그랬을 거야.

-왜...단 한번도 선배의 진심을...말하지 않았어요?

-그건...네 곁에 항상 그림자가 있었으니까. 내가 감히 엄둘 내지 못했던 거지...자신이 없었어.

  보기 좋게 거절 당하는 게 사실...겁이 났을 수도 있었겠지.


씁쓸하게 웃는다. 그러게..내가 조금만 더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면..


-조심하자, 서로에게.


준하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아직은...깊이 발을 들여 놓은 게 아니니까...다시 돌아 나갈 수 있어. 그치?


다시 준하는 고개를 끄덕인다. 대체 내가 너랑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거니...




***

한동안 나는 작업실에서 지냈다. 엄만 출국을 했고, 그동안 준하에게서 전화는 걸려 오지 않았다.

나는 작업에 몰두했고, 조금씩 마음의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느닷없이 박교수가 찾아왔다.

그의 얼굴이 까칠했다. 그에게 커피를 내어 준다.


-문전박대할 줄 알았더니...

-잘...지내죠?

-그렇게 보여?....먹을 수가 없어, 잠도 못자. 당신, 때문이라는 거 알지?

-그러지마요.

-그게..내 맘대로 되는 건가? 당신은 그래?


나는 아무 말도 못한다.


-당신, 왜 나는 안되는 건지 이유를 한 번 들어보자구.


물끄러미 그를 바라본다.


-사랑하는데 이유가 없는 것처럼....받아 들이지 못하는데에도 이유는 없어요.

-그 이유, 내가 한 번 말해볼까?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 서며 박교수가 말을 잇는다.


-당신, 그거 알아? 당신 얼굴에...모든 게 너무나 드러나 있다는 걸....그러다 금새

 들키고 말지...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난..알아. 시간이 흐르면 노골적으로 당신의

 얼굴에 드러나기 시작할 거야...그러면 그 다음엔 어떡할 셈이지?


그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나는 아무 말 없이 차를 마신다.


-이하은이라고 했나...당신이 마음에 두고 있는 남자의 여자가.


나는 너무 놀라 그를 바라본다.


-놀랄 거 없어. 그 누구도 내게 말해준 게 아니라, 당신이 내게 알려준거야. 당신...위험해.

  그러다 금새 들키고 말거야.

-무슨 말이...하고 싶은 거에요.

-도대체 왜 온거야?....왜, 서준하 옆에 다시 온거야?


손이 떨린다. 나는 그를 노려본다. 그러다 고개를 돌린다.


-함부로 말하지 말아요...내 발로 어디든 갈 수 있어요. 그것도 허락 받아야 되나요?

-당신을 탓하려는 게 아냐. 당신...그 가슴 안에 서준하가 아닌 다른 누구라해도 상관없어.

  하지만...그 안에서만, 그리워해. 욕심을 더 이상 부리지 말란 얘기야.





***

요근래 지니선배의 얼굴을 한참 보지 못한 것 같다. 내가 그동안 너무 무심했던 걸까.

지니선배에게 전화를 걸어 본다.


-선배, 요즘 연애해요?

-무슨 말이야?

-얼굴 못 본지가 언젠지 까마득해, 어디서 자요?

-어, 작업실...요즘 내가 좀 바빴어.

-언제 볼 수 있는 건데?...오늘은 들어와서 같이 저녁 먹어요. 준하한테두 일찍 들어오라구 했어요.

-글쎄...

-내가 쳐들어가, 그럼?

-그럴게 그럼, 옷가지도 몇 벌 가지러 가야 되니까.

-나중에 봐요 그럼.


언제부터인가 지니선배는 농담 같은 걸 전혀 하지 않는다. 예전엔 농담도 썩 잘하곤 했었는데...

고민이 생겼나.

***

준하는 조금 늦는다고 한다. 오랜만에 지니선배가 좋아하는 해물탕도 준비하고 소주도

준비했는데 이럴 때 꼭 김 빠지게 한다. 이층에서 내려와 식탁앞에 앉는 지니선배의 얼굴이 헬쓱하다.


-사람 얼굴이 왜 그 모양이야?

-왜, 흉하니?

-어, 밖에서 그러고 사니까 꼴이 그 모양이지. 왠만하면 집에 들어와서 자요.

 나두 준하도 걱정하는데 선밴, 맨날 외박이나 하고. 응? 들어오기다.

-노력할게.


지니선배의 잔에 술을 채운다. 내 잔에도 술을 채워 기분 좋게 건배한다. 역시 소주는 정말 쓰다.


-선배, 요즘 무슨 고민있어?

-어?....아니, 고민은 무슨...

-예전처럼 살갑게 대하지도 않고...요즘 좀 서운해요 선배한테.

-미안해...작업 끝날 때까지만 봐주라.

-준하두 요즘 좀 그래요. 예전에 처음 준하 만났을 때, 그때를 보는 것 같아요.

  말도 적어지구...농담두 잘 안하구.


그때 차가 들어와 멈춰서는 소리가 들린다.


-얘두 양반은 안돼.


일어나 현관 앞으로 나간다. 현관 문을 열고 준하가 들어온다.


-좀 늦을 거라더니.

-어, 그렇게 됐어.

-손만 씻구 와라, 우리 이제 막 시작했어.

-그래.


주방에서 선배가 나온다.


-왔..니?

-네.


준하가 안방으로 들어가고 선배와 나는 주방으로 들어간다. 잔을 비우고 다시 탕을 데우고

나서야 준하가 들어온다. 준하의 잔에 술을 채운다.


-밥 줄까?

-아니...언제 왔어요?

-너보다 훨씬 전에 왔어, 내가 좀 혼냈지. 잘했지?...참, 박찬영이라는 사람하고 무슨

  사이에요 선배?

-어?....어, 그냥..

-선배, 동해 갔을 때 그 사람이 애 많이 썼어요. 담에 그 분 초대해서 넷이 저녁 한 번 해요.

-글쎄....생각해볼게.

-맘이 아주 없는 건 아니죠 선배?

-곤란하게 그런 걸...왜 자꾸 물어.


준하가 툭 내뱉는다.


-알았어, 안 물을게요. 곤란했어요 선배?

-조금...


정말 오랜만의 저녁식사다. 지니선배도, 준하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여기 함께 있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