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장(驛長)의 가을

누렁이2006.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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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장(驛長)의 가을

유종인

1

아무리 살아도 죽음은 닳아질 뿐이다 여름은
늘 냉가슴으로 가득 채운 열차 칸칸을
사람들에게 열어줬을 뿐이데, 열차와 승강장 사이가
너무 넒은 우리의 관계 사이로
앳된 학생이나 겉늙은 취객이 빠져 치여 죽기도 했다
죽음조차 너무 헐거워져 어떤 경악과 충격 속에도 시간은
레일 없이도 잘도 지나갔다 한숨 속에 이미 수만 채의
한여름 구름떼가 스러져갔다 늙은 역장의 가을날
하루는 역무실 뒤쪽 칸나가 붉게 달아오르는
숨결을 자꾸 제 청춘의 좁은 단칸방으로 몰아가는 것이었으나
이내 바스락거리며 말라가는 넓은 잎사귀에서
미세한 틈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틈은 점점 넓어져가서
갱년기의 아내가 말기 癌으로 먼 산에 가버리는 동안
그의 담배 연기에선 바위처럼 무거운 산들이 떠다니기도 했다
누구에게도 개찰할 수 없는 그리움은 역장의 금빛 帽標처럼
새삼 반짝였으나 가을빛은 아무리 닦아도 낡아 보였다
어디 가서 몸을 팔고 온 여자처럼 어딘가
순결이 빠진 세월에 건듯 한 발을 걸치고 미심쩍은 눈길의
엉덩이마저 미련처럼 뭉개두기도 했으나 역장의 눈빛은
아직도 모든 처음에 살았다고, 붉은 칸나가 시들고 거기
깃든 장난 심한 사마귀떼마저 흩어진 어느 저물녘
고구마처럼 굵은 球根 속에서 새삼 둥글어지는 마음을 보았다


2

종착역을 알았으나, 이미 그 시발역부터 길을 잃은 채
잠처럼 떠내려온 게 아닐까, 역장의 가을은
驛舍 상공을 떠도는 수천 마리 말잠자리떼의 환란으로
더욱 분주해지고 가난은 열차가 밟고 가는 돌멩이 속에도
숭숭 바람구멍을 뚫어버리는 적막!
잘린 칸나 대궁을 한데 모아 검은 枕木들 곁에서 태우며
저녁은 자꾸 개오동나무 뒤쪽으로 가 숨고 그 뒤에 먼지를
잔뜩 흔들어 모은 수양버들이 잠시 고개를 드는 듯 누가
여기다 나를 버렸어요, 누가 여기다 나를 살게 했어요!
저녁 바람에 흔들려오는 불빛이 새삼 솜털 같은 취기를 부를 때
아내는 활활 타는 저 칸나 속에서 악다구니 살려달라 소리쳐
부르다, 제발 꽃처럼 피어나 당신을 안았으면 싶었다
유혹 없는 하루 이틀, 마지막 하루살이떼가 들끓는 어둠 속
역장의 가슴엔 회한으로 쓴 책들이 한 장 두 장 낙엽처럼
찢겨 불길 속으로, 숨은 내력은 아무것도 부르지 못한다
미처 도망치지 못한 갈색 버마재비 한 마리
어딘가 알을 뿌려놨겠지, 역장은 피를 토하며 스러지는
먼 노을이 달걀처럼 잦아지는 어둠을 오래오래 귀로
듣는다. 주름 가득한 이마를 일렁여보는 잠시 역장의
손에는 누구에게 줄 것인가 한 장의 오래된 사진이
기억의 빛, 그 꽃으로 웃었으나 마른 칸나 대궁으로 지핀
불길은 처음부터 알았다 제가 스러지고 품고 가야할 사랑!
모든 마지막은 영원처럼 시작돼야 마땅하다는 것을
불타는 칸나의 입은 그때 벌어지기 시작했다 사진은
어둠처럼 먹히고 기억은 하얗게 바래 흩어졌다


3

역장의 가을은
돌아오는 길을 아주 떠나버리게 하는 길 위에
서는 거였다 제복을 벗고 바위처럼 무거운 모자를
환멸의 선반 위에 얹어두었다 먼지들이 벌써 천년처럼
내려앉았다 가슴에 둔 붉은 칸나꽃이 숨은 뿌리도 캐내
마른 돌밭 위에 버렸다 털리고 싶어서 모든 것을 털렸다
한눈 파는 것은 세상에 지는 거였지만 한눈을 팔고
깊어진 눈과 흰머리를 드러내고 가벼워진 몸엔 추억의 외투마저 걸쳤다
가서 돌아오지 앟는 길, 누군가 따라온다면 그게
죽음을 무릅쓴다는 걸 각오하게 가을 전체로 다가온 몸을
가벼이 움직였다 붉고 푸른 깃발을 흔들어주던 플랫폼에서의
신호와 안전은 어디에도 없다 가는 길 가지 않으면 사라지는
구름과 바람의 生을 그는 온몸에 입고 마음에 덧칠 하나
하지 않은 채 모든 길들에게 인연을 걸었다 역장은 더 이상
수신호도 없이 마주치는 노인과 아이들에게 따뜻하고 아득한
미소를 날려줄 뿐이었다 역장의 가을은
어느 해에나 다가왔지만 그 계절은 중년의 그늘에서
피어나 시름의 얼굴을 살피기도 전에 말라죽은 칸나 뿌리로 남기도 했다
저 아득한 곳, 구름이 몸을 낮추는 곳에
역장의 미소가 햇살처럼 바람에 흩날리는 게 보였다

역장(驛長)의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