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바라기-20-

까미유2004.03.17
조회861

 

제 20 화


병실에 도착했을 땐 지니선배는 잠이 들어 있었다. 오랫동안 얼굴을 들여다본다.

이렇게 생겼었구나...새삼 그녀의 얼굴이 또렷히 보인다. 이렇게 아플 거면서...

이렇게 아파할 거면서...박교수가 들어와 내 어깨를 두드린다. 박교수를 따라

밖으로 나간다.


-나도 질투라는 게 생기더군...난 그런 거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알리고

  싶지 않았지만...그럴 수 밖에 없었어.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다른 남자 때문에

  저렇게 아파하는 걸 보는 것만큼 비참한 게 또 있을까....당신..참 재주도 좋아.

  어떻게 했길래...저 여잘 저렇게 만들었지?


그의 말에 악의는 없었다. 매우 낮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한다.


-그래도...난 포기 같은 건 하지 않을 거야. 당신이 어떻게 해줄 수 없다면...난,

끝까지 그녀 곁에 남아 있을 거니까. 오늘은 내가 이만 빠지지...하지만 다음엔

결코 당신을 부르는 일이 없을 거야.


그가 복도 끝으로 사라진다. 뚜벅뚜벅....하은에게 전화를 한다.


-나야...조금 늦을 것 같애.

-무슨 일인데?  많이 늦니?

-나중에...가서 얘기할게.

-그래...기다릴게.


전화를 끊는다. 병실문을 열고 들어간다. 그녀는 여전히 잠이 들어 있다.


-내가...어떻게 할까요. 차라리...내 발목을 붙잡고 가지말라고...그런 말이라도

어디, 해봐요. 선밴...자꾸 달아나려고만 하고...나는 그러는 선배를 잡지 못하고....

나를 기다리는 하은인....


말문이 막힌다. 눈물이 날 것 같다. 어차피...누군가 상처는 안고 살아야 하네...그게

자네겠는가, 여자겠는가...어느쪽이 더 견딜 수 있을 것 같은가...이영달의 말을

떠올린다. 나두...행복해지고 싶어. 다른 사람들이 느끼고 사는 것들...나두

느끼면서 그렇게...살고 싶다. 지나선배의 말을 다시 떠올린다....지금까지 시간이

흘러도 넌, 내가 항상 사랑 받고 있다는 걸 느끼게 해 준 사람이야.

그래서 난, 행복해....준하야, 고마워. 그리구 많이, 많이 사랑해. 너만 볼거야...너만

사랑할거구...다시 하은의 말을 떠올린다. 머릿속이 터져 나갈 것 같다.


-선배가 가르쳐 줘요...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 내내 나는 불안했다. 혹시라도 준하가 지니선배를 만난 건 아닌지..

유미의 말도 귀에 들리지 않는다.


-얘, 하은아...


유미를 바라본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니?

-어?...어. 아냐..암 것두.

-준하씨가 좀 늦네요...


그녀의 남편이 묻는다.


-늦을거에요...내가 늦는다구 했잖아. 담에 하자니까...죄송해요.

-아닙니다..뭐 다음에 다시 한 번 뵙고 인사하죠 뭐.


이 자리가 끝나기 전에 돌아와줬으면...잠깐 화장실에 갔다 오겠다며 휴대폰을 들고

나간다. 지니선배에게 전화를 걸어 볼까 한참을 망설인다. 그러나 버튼을 누른다.

전화는 받지 않는다....다시 걸어볼까 하다 그만 둔다. 화가 난다...내가 정말 왜 이러지..

신경질이 나면서 눈물이 나려 한다.



***

-여긴...어떻게 왔니?


잠에서 깨어 났을 때 준하가 침대 머리맡에 앉아 있었다.


-많이 아파요?

-괜찮아...여긴 왜 왔어?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머리를 쓸어 올린다. 아무 것도 먹지 않아서인지 기운이 없다.


-그만 가....나 죽을 병 걸린 거 아냐. 박교수가 쓸데없는 짓을 했구나..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준하를 똑바로 볼 수가 없다.


-그만 돌아가...다신...만나지 않기로 했잖니.

-보고....싶어서 왔어요.


가슴이 울컥한다. 그러나 여기서 무너지면 안된다. 한 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게 마련이다.


-미쳤구나 너...이제 막 살기루 했니?


준하가 고개를 숙인다.


-곰곰히 생각해봤어요...어떻게 하면 내가...후회하지 않을까. 어느 쪽을 선택하든...

난, 후회할 거에요. 여지가 없어요...평생을 가슴 안에 선밸 묻고 하은이와 사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그런 생각도 해봤어요...그런데..그럴 수가 없어요. 나를 속이고, 하은일

속이고...내 감정에 솔직해지고 싶어요. 그냥...흐르는대로, 원하는대로...가보기로 했어요.

막지 말아요...막는다고 해서 막아지는 게 아니에요...어차피...상처는 우리 세 사람...다

안게 된 거에요....사람이 좋은 걸...그 사람이 너무 좋은 걸....어떻게 참아요...이렇게

참아지지가 않는데....어떻게 자꾸 참아보라구만 해요. 그러면...참아져요?....잊혀져요?

난, 그게 안되요. 선배가...말해봐요. 어떻게 하면 참아지는지.


나는 고개를 돌린다. 눈물이 쏟아진다. 욕심이 자꾸 생긴다...난 정말 나쁜 년이다.


-여기까지 오면서도 난...결정하지 못했어요. 내 우유부단함이 선배나, 하은이에게

상처만 더 줄 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선밸...웃게 하고 싶어요. 그동안

나, 때문에 웃음을 잃었던 시간만큼만이라도....그렇게 웃게 하고 싶어요.

-하은이한테...말할 수 있어? 지금 내게 한 말...그대로 할 수 있니?


준하는 아무 말도 못한다.


-난, 널 잘 알아...넌 그렇게 못해. 하은일 아프게 하고...니가 내 앞에서 웃을 수 있

을 거라 생각 안해. 그럼...난 널 보는 동안 내내....웃지 못할거야.


준하가 운다. 소리없이 눈물만 자꾸 흘린다.


-그럼...우린 불행할거야. 그리고....후회하겠지. 니 옆에 있는 여자가...하은이 아니었다면

난, 진작에 널 꼬드겼을지도 몰라. 나랑...나랑 사랑하자구.


준하의 머리를 만진다. 어쩌다 너같은 애가 나랑 꼬여서 이렇게까지 됐니...내가...내가

정말 부끄럽다 너한테.


-조금만...기다려 줄래요?...내가 어떤 결정을 하든...그때까지만...참고 기다려

줄래요?


순간 나는 이 아일 놓치기 싫은 이기심이 생겼다. 누가 뭐래도 좋다...내게 돌을 던진다면

그래..그 돌 내가 다 맞을게...단 하루만이라도...너랑 마음 놓고 사랑해봤음 좋겠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다. 날...용서해줘 하은아...



***

준하는 자정이 다 된 시간에 들어왔다. 피로에 지친 듯한 표정으로 욕실로 들어가는

준하를 보면서 나는 순간 외롭다는 걸 느낀다. 나는 일부러 밝은 표정을 보인다.

아무 것도 묻지 않는다. 아니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다. 우린 여전히 아무일 없이

행복하게 살고 있다. 그렇게 믿고 싶다. 욕실에서 준하가 나와 옷을 갈아 입는 동안

야채주스를 만든다. 그리고 그걸 준하에게 내민다. 쭈삣하게 받아 들더니 마시지도

않고 쇼파에 앉아 있다.


-조금 전에 가을 옷을 정리했어. 내일부터 옷 두껍게 입고 다녀야겠더라...갑자기

기온이 떨어졌어...안 마셔?

-마셔


기운없이 대답하고는 마신다. 얼른 사탕을 준다.


-암 것두 넣지 않아서 쓰지?


컵을 받아 들고 주방으로 간다. 되도록 길게 그와 마주하고 싶지 않다.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두려웠음으로.


-내일은 청담동 가는 거 알지?


준하는 대답이 없다. 주방에서 나왔을 때에도 준하는 여전히 그 자세다.


-안 잘거니? 그러고 밤 샐거야?

-하은아...

-나, 졸려. 그만 자자.


안방문을 열고 들어간다. 가디건을 벗고 침대 속으로 들어 간다. 준하가 들어온다.

그리고 등을 보이며 침대에 걸터 앉는다.


-할 말...있어.

-내일 해...오늘은 좀 피곤해.

-지금...들어줘.


화가 난다. 심장이 두근 거리고 온 몸에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느낌이다. 나는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어 버린다. 아무 것도 듣지 않을 거야...


-미안해...내가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그리고 난 다음에 말하는 거야. 들어줘...


눈물이 난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듣고 싶지 않은데 자꾸 내 귀는 예민하게

반응한다. 바보...


-가벼운 것일지도 모른다...그런 생각도 해봤어. 그래서 기다려 봤어...시간이 조금

지나면 금새 사라질지도 모른단 생각을 했어. 그런데...아니야. 가벼운 게 아니었어.

가볍지 않은데...너한테 속이고 싶지 않았어...거짓말을 할 수도 있었어...그러면 난

계속 거짓말을 해야 하고...넌 날 자꾸 의심하게 될거야...


입술이 떨리고 눈물은 멈춰지지 않는다. 나는 이불을 꽉 문다.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


-안 보면...보고 싶고, 그 사람 생각하면...먹지도 못하겠고...잠도 안와....이거...단순한

병이 아니다 싶었어....달래도 보고, 화를 내기도 하고...때려 주기도 했는데....자꾸

내 마음이...나하구 다르게 움직여.


나는 이불을 재치고 일어난다. 분노가 머리 끝까지 차오른다.


-너, 내 앞에서 사랑 고백이라도 하는 거니 지금?


버럭 소리를 지른다. 준하의 어깨가 떨린다.


-그래서 뭐?...그게 어쨌다구? 내가...오냐, 그래 너 힘들겠구나...어쩌겠니 좋으면

가라...그러길 바래? 너...나 사랑한 거 아니었니? 말해봐...너 나 사랑해서 결혼했

던 게 아냐?


준하는 아무 말이 없다.


-내가 널 더 좋아하긴 했지만...너두 나...사랑한다구 생각했었어. 니가 말하는

사랑은 도대체 어느쪽이니? 어떤게 진실이야?....넌...지금...사랑이라고 믿고

싶은 거야...지니선배한테 느끼는 연민 같은 것이 사랑일거라고 착각하는 거야.

시간이 지나면...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달라질거야. 그땐 알거야...그건 사랑이

아니었다는 걸. 준하야....이러지마....나한테 이러지마.


울부짖으며 애원하듯 말해도 준하는 아무 말이 없다. 말없이 등만 보이고 앉아 있다.


-나 좀 봐....나 좀 봐줄래?


준하가 고개를 젓는다.


-못 보겠어....미안해서....볼 수가 없어.


준하가 울음을 터뜨린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 내리며 운다.


-나...머리 아퍼. 내일...내일 얘기하자 우리. 하루만 더 생각해...더 생각하고 다시

얘기하자...신중하게 다시 생각해. 많이 생각하고 말해....


누워 이불을 덮고 운다. 나한테 이럴 수는 없다...먹을 수가 없다고?....잠을 잘 수가 없다고?....나두 너 때문에 잠을 잘 수도, 먹을 수도 없어....난, 안보이니. 이제 난...너에게 정말

보이지 않는 거야....나쁜 자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