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저는 올해 26세된 대학생이고요 여기 들어오는 여러분들처럼 다른사람들 사는얘기들을 읽으며 나와 비슷한 또래에 나보다 더 어려운 환경의 사람들도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다는걸 깨닫고 용기내서 일어 나려하는 사람중 한명입니다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그냥 여기에 있는사람들이 다 내 친구들이라 생각하고 얘기를 중얼거려보고 싶었습니다 친구들 앞에선 항상 분위기를 주도하고 재미있는 모습만 보여주고 싶어서 솔직하게 힘들때도 다 털어놓지를 못하겠습니다 게다가 여기 올라오는 분들 글을 보면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도 많으셔서 나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항상 그렇게 생각해왔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늘은 글을 써봅니다 1992년 초등학교 2학년 3월달의 일입니다. 저의 학창시절을 통틀어 지각한번도 없었던 출석기록에 유일한 조퇴1회 그날은 어머니께서 집을 나가셔서 아버지랑 어머니를 찾으러 외갓집에 간날이었습니다 저희 가족은 세식구 저는 외동아들입니다. 어렸을때부터 저는 부모님이 싸우는걸 보면서 자라왔습니다. 항상 아버지가 소리치시고 집안살림살이들이 부숴지고 그럴때마다 저는 가슴이 콩알만해져 아무말도 못하고 너무 무섭기만 했습니다. 저희 아버지께서는 매우 엄격하셔서 아버지말씀은 무조건 복종이었고 부모님싸움에 끼어들 엄두도 내지 못하였습니다. 어머니가 집을 나가시기 전 아버지가 바람을 피셨습니다. 그 현장을 초등학교 2학년인 나와 어머니가 둘이서 찾았습니다. 왜 어머니가 그때 저를 데리고 가셨었는지… 아버지가 차를몰고 나가실 때 바로 정면에서 차를보자마자 저는 옆에 주차되어있는 차속으로 숨었습니다. 너무 생생합니다. 그때의 심장의 떨림도 아직 기억이 납니다 그 뒤에 아버지가 집에서 어머니를 구타하시고 칼로 위협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글만 읽으면 아버지가 엄청 나쁜사람처럼 보이지만 저는 한번도 그렇게 생각한적이 없었 습니다. 저도 어머니한테 칼을 들이댈 때 운다고 따귀를 맞았습니다. 그날일은 나이를 먹을수록 저에게 괴로움을 줍니다. 이렇게 글로 써보니 마치 남의 일같이만 느껴집니다 하도 이런 기사들을 많이 접하게되는 요즘세상이니까요 어머니는 결국 집을 나가셨고 아버지랑 둘이 생활하던 시절 노래방에서 아버지가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이런 가사의 노래를 불렀던것도 기억이 나는데 어린 맘 에 그 가사가 너무나 슬프게만 느껴졌고 또 저는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 바람핀 여자와 저녁을 먹은적도 있습니다. 어느 갈비집에서. 그게 공식적(?)으로 만난 저의 아버지의 어머니외의 여자 첫번째입니다. 저는 초등학교 1,2학년 기억을 더듬으면 다른것들은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하지 못합니다 다만 제가 지금 쓴 이 내용은 너무나 생생합니다. 아마 평생 저의 기억에 남겠죠. 조퇴후 외갓집에 가서 아버지가 외삼촌앞에서 무릎을 꿇고 따귀를 맞는장면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몇주뒤 어머니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아마 이때 어머니께서 돌아오시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저는 있을수도 없었겠죠 그렇게 몇 년 같이살다가 이번엔 아버지가 집을 나가셨습니다. 아버지가 하시던 일의 돈 문제 때문에 서류상으로도 이번엔 이혼을 하셨습니다. 가끔 한두달에 한번씩 집에 오시곤 했는데 저는 자세한 내용은 성인이 되어 알게되었습니다. 매년 학교에서 아버지 직업을 쓰는 뭐 그런게 있었던것으로 기억합니다. 이때마다 저는 거기다 뭐라고 써야할지 매번 어머니께 물어봤습니다. 딱히 직업이 없으셨기 때문에 그중에서 제가 어린시절 제가 제일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직업이 사채업자 였습니다. 그것은 처음으로 뭐라도 쓸수있는 확실한 직업명 이었거든요. 중학교 2학년때. 제가 얼마나 어리석고 세상모르는 순진한 녀석이었는지 아실수 있으실겁니다 2001년 고등학교 2학년 여름입니다. 타지에서 일하시는 아버지를 뵙기위해 혼자 그곳에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또 새로운 아버지의 여자를 만나게되었습니다. 그 여자에게 용돈도 받았습니다. 지금은 너무나 후회스럽지만 아버지가 받으라고 했기 때문에… 저는 아버지말은 항상 복종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여자네 집에가서 하루 잠도잤습니다 그 처음본 여자랑 아버지가 같은방에서. 거긴 저보다 두살어린 그 여자분 딸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고2 였기 때문에 충분히 도덕적 판단을 할 수 있는 나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뜻에 따랐습니다. 너무 괴롭습니다. 이 얘긴 저희 어머니께 한번도 한적없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도 알고계셨겠죠.. 몇 년뒤 21살 입대전입니다. 아버지는 하시는 일이 2,3년에 한번씩 계속 바뀝니다. 이때도 새로운 한 아주머니를 만났습니다. 이제벌써 세번째 여자입니다. 아버지가 이 사람은 돈이 많은 여자랬습니다. 때로는 사람을 나에게 유리하게 이용할줄 아는것도 세상사는 방법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희집은 항상 경제적으로 어려웠고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해서 가정을 지키시려고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번엔 예전처럼 바람피는 것이 아니고 돈때문에, 우리 가족을 위해서 라는 논리 였습니다. 저의 학비를 대기위해서라고… 어머니를 생각하면 너무나 가슴아픕니다. 그렇게 입대를 하였습니다 저는 성균관대학교에 다닙니다. 공부를 위해 학교다니는 것이 아니라 학교를 다니기 위해 공부했습니다. 장학금을 못받으면 학교를 다닐수가 없기 때문에. 다행히 복학후 4학기연속 전액장학금을 받을수있었습니다. 학교를 다닐수 있게 해준것만으로도 세상에 감사해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방출신이기 때문에 1학년때부터 알바를 안하고 공부만 했던 학기도 없었습니다. 어머니께서 50대의 나이에 원래 약하신 몸으로 지금도 파출부일을 하십니다. 그러니 모든상황이 저에겐 필사적 일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심적으로 의지할곳이 아무데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또 일이 터져버렸습니다. 저의 과거에대해 쓰다보니 정작 지금 문제에 대해서는 쓰지도 못했네요.. 지금의 문제에 대해 쓸지 말지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보고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끝까지 읽어주신 분이 계시다면 저로써는 그것만으로도 힘이될것같습니다 3
친한 친구에게도 아직 하지못한 얘기들..
안녕하세요 저는 올해 26세된 대학생이고요
여기 들어오는 여러분들처럼 다른사람들 사는얘기들을 읽으며 나와 비슷한 또래에
나보다 더 어려운 환경의 사람들도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다는걸 깨닫고 용기내서 일어
나려하는 사람중 한명입니다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그냥 여기에 있는사람들이 다 내 친구들이라 생각하고 얘기를 중얼거려보고 싶었습니다
친구들 앞에선 항상 분위기를 주도하고 재미있는 모습만 보여주고 싶어서
솔직하게 힘들때도 다 털어놓지를 못하겠습니다
게다가 여기 올라오는 분들 글을 보면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도 많으셔서 나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항상 그렇게 생각해왔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늘은 글을 써봅니다
1992년 초등학교 2학년 3월달의 일입니다. 저의 학창시절을 통틀어 지각한번도 없었던
출석기록에 유일한 조퇴1회
그날은 어머니께서 집을 나가셔서 아버지랑 어머니를 찾으러 외갓집에 간날이었습니다
저희 가족은 세식구 저는 외동아들입니다. 어렸을때부터 저는 부모님이 싸우는걸 보면서
자라왔습니다. 항상 아버지가 소리치시고 집안살림살이들이 부숴지고 그럴때마다 저는
가슴이 콩알만해져 아무말도 못하고 너무 무섭기만 했습니다.
저희 아버지께서는 매우 엄격하셔서 아버지말씀은 무조건 복종이었고 부모님싸움에
끼어들 엄두도 내지 못하였습니다.
어머니가 집을 나가시기 전 아버지가 바람을 피셨습니다. 그 현장을 초등학교 2학년인
나와 어머니가 둘이서 찾았습니다. 왜 어머니가 그때 저를 데리고 가셨었는지…
아버지가 차를몰고 나가실 때 바로 정면에서 차를보자마자 저는 옆에 주차되어있는
차속으로 숨었습니다. 너무 생생합니다. 그때의 심장의 떨림도 아직 기억이 납니다
그 뒤에 아버지가 집에서 어머니를 구타하시고 칼로 위협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글만
읽으면 아버지가 엄청 나쁜사람처럼 보이지만 저는 한번도 그렇게 생각한적이 없었
습니다. 저도 어머니한테 칼을 들이댈 때 운다고 따귀를 맞았습니다. 그날일은 나이를
먹을수록 저에게 괴로움을 줍니다. 이렇게 글로 써보니 마치 남의 일같이만 느껴집니다
하도 이런 기사들을 많이 접하게되는 요즘세상이니까요
어머니는 결국 집을 나가셨고 아버지랑 둘이 생활하던 시절 노래방에서 아버지가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이런 가사의 노래를 불렀던것도 기억이 나는데 어린 맘
에 그 가사가 너무나 슬프게만 느껴졌고 또 저는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 바람핀 여자와
저녁을 먹은적도 있습니다. 어느 갈비집에서. 그게 공식적(?)으로 만난 저의 아버지의
어머니외의 여자 첫번째입니다.
저는 초등학교 1,2학년 기억을 더듬으면 다른것들은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하지 못합니다
다만 제가 지금 쓴 이 내용은 너무나 생생합니다. 아마 평생 저의 기억에 남겠죠.
조퇴후 외갓집에 가서 아버지가 외삼촌앞에서 무릎을 꿇고 따귀를 맞는장면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몇주뒤 어머니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아마 이때 어머니께서 돌아오시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저는 있을수도 없었겠죠
그렇게 몇 년 같이살다가 이번엔 아버지가 집을 나가셨습니다. 아버지가 하시던 일의
돈 문제 때문에 서류상으로도 이번엔 이혼을 하셨습니다. 가끔 한두달에 한번씩 집에
오시곤 했는데 저는 자세한 내용은 성인이 되어 알게되었습니다.
매년 학교에서 아버지 직업을 쓰는 뭐 그런게 있었던것으로 기억합니다. 이때마다
저는 거기다 뭐라고 써야할지 매번 어머니께 물어봤습니다. 딱히 직업이 없으셨기
때문에 그중에서 제가 어린시절 제가 제일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직업이 사채업자
였습니다. 그것은 처음으로 뭐라도 쓸수있는 확실한 직업명 이었거든요. 중학교 2학년때.
제가 얼마나 어리석고 세상모르는 순진한 녀석이었는지 아실수 있으실겁니다
2001년 고등학교 2학년 여름입니다. 타지에서 일하시는 아버지를 뵙기위해 혼자 그곳에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또 새로운 아버지의 여자를 만나게되었습니다.
그 여자에게 용돈도 받았습니다.
지금은 너무나 후회스럽지만 아버지가 받으라고 했기 때문에… 저는 아버지말은
항상 복종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여자네 집에가서 하루 잠도잤습니다
그 처음본 여자랑 아버지가 같은방에서.
거긴 저보다 두살어린 그 여자분 딸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고2 였기 때문에 충분히 도덕적 판단을 할 수 있는 나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뜻에 따랐습니다. 너무 괴롭습니다. 이 얘긴 저희 어머니께 한번도 한적없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도 알고계셨겠죠..
몇 년뒤 21살 입대전입니다. 아버지는 하시는 일이 2,3년에 한번씩 계속 바뀝니다.
이때도 새로운 한 아주머니를 만났습니다. 이제벌써 세번째 여자입니다.
아버지가 이 사람은 돈이 많은 여자랬습니다. 때로는 사람을 나에게
유리하게 이용할줄 아는것도 세상사는 방법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희집은 항상 경제적으로 어려웠고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해서 가정을 지키시려고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번엔 예전처럼 바람피는 것이 아니고 돈때문에,
우리 가족을 위해서 라는 논리 였습니다. 저의 학비를 대기위해서라고…
어머니를 생각하면 너무나 가슴아픕니다. 그렇게 입대를 하였습니다
저는 성균관대학교에 다닙니다. 공부를 위해 학교다니는 것이 아니라 학교를 다니기
위해 공부했습니다. 장학금을 못받으면 학교를 다닐수가 없기 때문에.
다행히 복학후 4학기연속 전액장학금을 받을수있었습니다.
학교를 다닐수 있게 해준것만으로도 세상에 감사해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방출신이기 때문에 1학년때부터 알바를 안하고 공부만 했던 학기도 없었습니다.
어머니께서 50대의 나이에 원래 약하신 몸으로 지금도 파출부일을 하십니다.
그러니 모든상황이 저에겐 필사적 일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심적으로 의지할곳이 아무데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또 일이 터져버렸습니다.
저의 과거에대해 쓰다보니 정작 지금 문제에 대해서는 쓰지도 못했네요..
지금의 문제에 대해 쓸지 말지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보고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끝까지 읽어주신 분이 계시다면 저로써는 그것만으로도 힘이될것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