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와 계단 (11)

dana2004.03.18
조회482

문이 닫히자 마자, 수완은 버럭 소리를 지른다.

"이게 뭐 하는거죠? 정 상무님께 그렇게 말하면 안되죠."

"뭐가? 뭐가 안 된다는거지?
우리가 여기 같이 있는 목적은 그렇게 보이기 위함인데......
아니였던가?"

"굳이 정 상무님께......"

수완의 말을 낚아채며 동식이 이야기 한다.
"정 상무님을 몰라서 그래?
이 바닦의 기지국이잖아. 모든 정보를 제공하는......
아마 나중에는 우리가 이야기를 만들어낼 필요도 없을걸.
정 상무님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우리 이야기를 만들어 놨을테니까."

 

수완은 버튼을 누르는 부분에 서 있고, 동식은 바깥이 보이는 유리쪽에
기대어 서 있다.

"왜 굳이 그래야하죠?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커플도 있지만,
서로 잡아먹지 못해서 으르렁거리는 커플도 있어요."

"물론 그렇겠지. 상대방의 괴로움이나 고통을 서로 즐기는 커플.
새디스트 같은 커플 말야.
전에도 말했듯이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그 사람들이 나쁘다는 말은 아냐.

나한테 편견을 버리라고 훈계할 것 같은 표정은 짓지말라고.

나 역시 연애에는 여러 방식이 있다는 것을 알아.

하지만, 난 그런쪽에는 흥미없어.
어디로 갈꺼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였죠?"

 

"별거 아니야. 서로에 대한 정보가 필요할 것 같아서......"

 

"우린 서로 떨어져 있었잖아요. 난 한국에 있는것도 오래 되었고,
얼굴은 가끔씩 봤다고 하면 되죠. 그런것들은 그때그때 임기응변으로
하죠. 사람들이 더욱 신비스러워 할 테니까. 신경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좋아. 나와 일하는 것이 불쾌한가 보군."

 

"세상 모든 사람이 다 내 마음에 들 수는 없죠. 이따가 만나죠."

 

"핸드폰 번호 알려줘요. 이따가 연락할게."
수완은 지갑에서 명함을 꺼낸다.

"그쪽은요?"

동식이 명함을 살피다가 다시 인상을 쓰면서 그녀를 바라본다.

"아직도 그쪽인거요? 나처럼 적당한 호칭을 찾으시오."

 

"없어요."

 

"내 이름이 마음에 안드는건가? 그쪽, 댁 이런 호칭보다는 좀더 유연한
호칭이 있을텐데......"

 

"핸드폰 번호 알려줄껀가요, 아닌가요?"

 

"뭐라고 입력할꺼요? 내 이름을......"

 

"강동식이요. 그게 그 쪽이름이니까."

 

"핸드폰 이리줘봐요."
동식은 수완의 핸드폰을 갖고 번호를 저장하더니 돌려준다.

"뭐라고 쓴 거죠?"
수완이 핸드폰을 받으면서 살펴본다.
번호는 000번에 저장을 해 놓았다. 이름은 러버(lover)

수완은 어이가 없어서 동식을 쳐다본다.

아무도 저장시키지 않았던 번호. 언젠가 만날 좋은 사람을 위해 남겨둔 거였다.

동식은 유심히 보는 것을 깨닫고 다시 한 번 미소를 짓는다. 
수완은 막연히 한숨을 짓는다.

 

"어디로 갈꺼요?"

 

"인사동 가본지가 오래되서 좀 걸어다녀 볼려고요.
이따가 늦지 않도록 하죠."

수완은 동식이 인사할 시간도 주지 않고 로비를 성큼성큼 걸어서 나가버린다.
동식은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수완의 명함을 조용히 만져본다.

 


수완은 지하철을 타고 인사동으로 갔다.
여러 가지 상품들을 구경도 하고,
맘에 드는 물건을 흥정해서 사기도 하고,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후 호텔로 다시 돌아와서 준비를 했다.


성지 그룹의 모임 장소로 가는 동안 둘 사이에는 묘한 긴장이 흘렀다.
수완에게 연락을 한 후 데리러 가는 동안 동식은 잔뜩 기대했었다.
'이 여자가 이번에는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수완은 어깨가 드러나는 검정색 원피스를 입었다.
어떤 장신구도 달지 않은 깔끔한 스타일이었다.
머리는 시폰 스타일로 틀어올려져 있었다.
또한, 아방가르드 식의 치마와 작은 펜던드가
단아하면서도 깔끔한 이미지를 만들어 주었다.

동식은 그녀의 모습에 만족스러웠다.
삼촌의 눈은 대단했다. 머리와 외모가 되는 여자를 골라내시다니......

하지만, 그녀가 차를 타려던 순간,
그가 내밀었던 손을 잡지 않으려고 피하려던 그녀가
휘청 하면서 오히려 그의 품에 뛰어든 꼴이 되어버렸다.
동식도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안았고, 둘은 서로 안고 있는 모습이 되어버렸다.
그녀가 황급히 일어서려다 다시 휘청하게 되었고,
이번에는 동식도 중심을 잡지 못해서 보도 블록으로 둘다 쓰러지게 되었다.
우습게도 그녀가 그의 품에 안긴채로 묘한 자세가 되어버렸다.

둘다 일어서서 차를 타려는 순간 그녀가 뭐라고 중얼거리는 것이 들렸다.
욕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여러 가지 소리를 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발목을 삐끗한 것이었다.

그에게서 최대한 떨어지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그녀의 모습은 보기에도 애처로웠다.

어느새 모임 장소에 도착했다.
수완쪽의 문을 동식이 열어주자, 수완은 눈을 감고 머리를 뒤로 기대고 있었다.

"내가 안고 들어가기라도 바라는 건가?"
수완이 눈을 뜨고 독기 품은 눈빛을 보낸다.

"이거봐요. 마음의 준비 좀 하구요."

 

"있는 그대로 자신에게 좀 솔직해져봐. 간단하고 쉬운 문제인데......
날 좋아한다고 생각하라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하니까."

'실제로도 좋아하는지 모르겠고.......'

 

그녀는 한숨을 쉰 후 차에서 조용히 내린다.
동식이 팔을 내밀자 그녀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팔짱을 낀다.

"지금부터는 진짜 약혼한 사이인거야.
잊지말고 제대로 하자고......
난 고등학교랑 대학때 연극부였어.
꽤 잘했지. 지금도 그런 상황이라고 생각하면 마음먹기 쉬울꺼야."

 

"위로죠? 고맙네요. 별 도움은 안되는 것 같지만......."

 

"당신도 잘 할 수 있어. 가능성이 보였거든......."

동식은 팔짱 낀 수완의 손을 꼭 잡으며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