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빠, 남자친구, 저까지 셋이서 저녁식사를 했습니다.
저번달부터 결혼 얘기가 나와서 각자 상대 부모님들과 한 번씩 식사 자리가 있었고, 그 이후로 저희 아빠가 남자친구를 한번 더 보고 싶다고 셋이서만 식사를 같이 하자고 해서 어제 만났습니다.
남자친구는 술을 싫어하고, 저와 아빠는 술을 좋아하지만 저는 운전해야 하기도 하고 굳이 술 싫어하는 남친이 있는데 마시고 싶지 않아서 아빠만 드셨습니다.
가벼운 반주 정도로만 드실 거라 생각했는데 주량만큼 드시더라구요... 나중에 저랑 같이 둘이서만 마셔도 될 텐데 굳이 이 자리에서 그러셔야 하나 싶기도 한 상태로 식사를 시작했습니다.
2시간 정도 식사를 했는데, 남자친구랑 대화하는 동안 개인적인 부분까지도 몇 번이나 지시하는 듯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1. 이직하지 마라, 주말부부하더라도 하던 일 하는 게 맞다, 있는 자리에서 행복하게 살면 된다
(지금 남친 직업으로는 주말부부를 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서 이직 관련은 서로 대화중인 부분이고, 둘 다 주말부부할 생각은 없습니다)
2. 연금 들어라, 노후준비는 미리미리 하는 거다, 내가 나중에 잘 살 수 있게 계속 도와줄 테니까 내가 알려주는 것만 따르면 된다
3. 4년제 사이버대학 나와라, 강요는 아닌데 요즘 사회가 사이버라도 대학 안 나오면 나중에 후회한다, 일하면서 충분히 할 수 있다
(남자친구도 공무원인데 고졸입니다. 저는 대학교 1학년 다니는 중에 합격해서 자퇴했는데 솔직히 고졸과 크게 다를 바 없으니 학력차이가 크게 나는 것도 아니라 생각해요. 아빠는 저랑 학력차이보다는 남친 스스로 다른 사람들에 자격지심 가질까 봐 걱정돼서 얘기하는 거라고 하셨어요)
크게 생각나는 건 이 정도인데, 중간중간에도 지시하는 말이 아니더라도 계속 가르치는 투로 얘기를 하셨습니다. 내가 살아보니 ~하게 사는 게 좋더라, 이럴 땐 ~해야 한다 등등 남친이 다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도 이런 식으로 대화가 흘러가더라구요
식사 내내 아빠 조금씩 말리면서 남친 눈치 보느라 자리가 너무 불편했는데, 식사가 끝나고 나오는 길에 일이 터졌습니다.
식사하는 사이에 비가 많이 와서 엄마가 우산을 가지고 데리러 오셨는데, 돌아가는 길에 아빠가 오늘 언제 들어올거냐고 물으시길래 시간을 알려주니 갑자기 언성을 높이면서 둘이 너무 자주 좀 만나지 말라고 큰 소리로 말씀하시더라구요. 각자 자기 시간도 있고 해야지 매일같이 보고 하는 게 말이 되냐는 식으로 말씀하셨어요
저한테만 따로 얘기해도 될 말을 굳이 길에서 혼내듯이 얘기를 하니까 저도 참던 게 터져서 됐다고 그만 좀 하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지방이라 사투리 억양이 심해서 더 예의없고 날카롭게 들렸을 거예요.
그러고 몇 시간 후에 남친 데려다주고 집에 왔더니 부모님께서 두 분 다 우시면서 소리를 지르셨어요.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자식이 길거리에서 눈을 부라리면서 소리지르는 걸 들어야 되냐고, 우리 그렇게 무시당해도 되는 사람 아니라고. 길거리에서 너무 비참하셨다고 합니다. 이제 마음의 문을 닫을 테니 알아서 살라고 하셨어요.
소리지른 건 제가 백번 잘못한 게 맞고 죄송하다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이유 때문에 식사 자리 내내 쌓이던 게 터지면서 소리지르게 된 거라고 하니까 들을 필요 없다고 나가라고 하시더라구요. 그게 어젯밤 일이고 아침에 출근한다고 그 이후 대화는 없습니다.
아빠가 한 얘기가 정말 부모님으로서 딸 남친한테 할 수 있는 얘기고, 전혀 부담스럽게 들을 말이 아닌 걸까요? 남자친구는 자꾸 괜찮다고 하는데 저는 반대 입장이었으면 너무 싫었을 것 같아서... 제가 과하게 대처한 건지 궁금합니다.
추가글 작성합니다.
자극적인 소재도 아니고 시원한 사이다 이야기도 아닌데 생각보다 댓글이 많이 달려서 깜짝 놀랐습니다.
귀중한 시간 할애해가며 의견 남겨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모질게 말씀해주셔서 오히려 더 큰 자극을 받아 행동을 다시 돌아볼 기회가 되었습니다. 덕분에 제 미성숙한 부분에 대해 많이 반성했고, 앞으로 어떻게 행동하면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퇴근한 후 일찍 집에 들어와 아빠와 많이 대화했고, 제가 말씀드린 내용을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1. 아빠가 얘기한 것들이 어떤 내용이었든 간에 부모님께 함부로 행동하는 것은 백번 내 잘못이며 그 점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죄송하다. 부모님을 무시하거나 하찮게 생각해서 그런 행동이 나온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감정을 조절하지 못했다. 이건 부모님뿐만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이렇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상처받으셨을 생각을 하니 나까지 너무나 속상하고 죄송했다.
2. 다만 아빠가 식사 중 얘기한 것들은 어른으로서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라 생각하시고 말씀하셨겠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다르다. 가족인 나에게는 몰라도 남자친구는 아빠 말을 따르고 가르침을 받아야 할 아랫사람이 아니라 한 명의 완전한 성인이고 누군가의 소중한 아들이다. 내가 만약 시부모님께 이런 말을 들었으면 결혼을 다시 생각해볼 수도 있을 정도로 불쾌했을 것 같다. 이 부분은 아빠도 다시 한번 생각해보셨으면 좋겠다.
처음에는 아빠도 마음에 상처를 많이 입으셨는지 상견례도 가지 않을 것이며 앞으로 알아서 살라고만 하시다가, 제 말을 듣고는 어느 정도 수긍하시면서 간섭으로 느껴질 줄 몰랐다며 앞으로는 조금이라도 부담이 될 만한 말은 저를 거쳐서 남자친구의 의견을 묻기로 했습니다. 벌써부터 앞서나가 이미 가족이라는 생각을 가지신 것 같다고, 앞으로 가족이 되더라도 조심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사는 곳은 경상도입니다. 몇 년 전까지도 명절에 할머니댁을 가면 남녀가 따로 식사를 했을 정도로 매우 보수적인 지역에 살고 있습니다.
어릴 적에 명절마다 외할아버지가 술에 취해 아빠에게 몇 시간동안 정치나 경제 등 매우 많은 부분에서 가르침이라는 명목의 훈수와 지적을 하시던 기억이 납니다. 아빠는 한 번도 싫은 티를 내지 않고 몇 시간이고 자리에 앉아 적극적으로 할아버지의 말씀에 호응해주셨습니다. 몇 년 전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자그마치 20년이 넘는 시간을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그 정도의 말씀은 당연히 할 수 있는 말이라 여기셨을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어제의 행동이 옳았다고 무작정 감싸는 것은 아니고, 제 나름대로 아빠를 이해하려 노력하던 중 다다른 생각입니다. 정말로 모르셔서 그러셨을 수 있겠으며, 저와 남자친구가 행복하길 바라서 하신 말씀이지 절대 괴롭히려고 하신 말씀은 아니라는 걸요. 그렇지만 앞으로는 이런 일이, 특히 남자친구에게 부담이 가는 일이 절대 없도록 할 예정입니다. 꾸준히 저희 세대의 사정을 설명드리고 이해시켜드리려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추태를 보였음에도 괜찮다고 이해해준 남자친구에게도 고맙고 또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려고 합니다. 내일 만나면 무엇이 미안한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자세히 얘기할 생각입니다.
끝으로 댓글 달아주신 모든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하다는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특히 남성분들이 많이 댓글 달아 주셔서, 아빠의 입장과 남자친구의 입장 모두를 어느 정도 이해해볼 수 있었습니다. 전해주신 조언들 잊지 않고 항상 새겨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