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에 첫 연애하고 헤어졌는데 기분이 참 묘하네요

RA2025.04.09
조회10,914
어디 털어놓을 사람도 없고, GPT한테 말 거는 것도 막막해서 그냥 글로라도 남겨봅니다.
 
저는 30대 초반까지 모태솔로였습니다.
 
이성적인 매력도 없었고, 여자에 대한 두려움도 컸습니다.
 
그러던 중 대외활동을 하면서 여자친구와 같은 부서의 파트너가 되었고, 어쩌다보니 자주 대화를 나누게 됐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심한 여자 울렁증이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여자친구와는 대화가 잘 통했습니다.
 
단순한 업무 파트너 사이였지만, 제 고민을 이야기하면 언제나 다양한 각도에서 저를 응원해주었고, 그덕분에 자존감이 많이 높아졌습니다.
 
그러다 약 5개월 정도 통화만 하다가, 여자친구가 제 집 근처에서 약속이 있어 오게 되었고,
 
어느새 자연스럽게 손을 잡고 공원을 함께 걷고 있더라고요.
 
저는 고백을 해본 적이 없어서, 여자친구가 "우리 사귀는 거 맞아" 하고 말하길래, 손잡은 날을 1일로 정하자고 합의했습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여자친구는 이전 연애에서 많이 힘들었고, 그래서 한동안 연애를 할 생각이 없었고,
 
부모님도 연애를 하지 말라고 했다고 합니다. 
 
제가 이상형은 아니었는데, 특이하게 벌레를 잡는 모습에 반해서(...) 관심이 생겼고,
 
제가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모습에 대해 '저 생각을 바꿔주고 싶다'는 일종의 오기가 생겼다고 하더라고요.
 
같이 지내다 보니 의외로 제가 좋아하는 프라모델을 여자친구도 좋아했고, 신앙도 똑같았습니다.
 
그렇다보니 제가 프라모델 사면 자랑할 수 있는게 좋더라고요.
 
여자친구는 엄청 헌신적으로 챙겨주더라고요
 
제가 잠을 잘 못 자니까 자장가를 불러주기 위해 노래를 배워오고, 
 
몸이 약하다고 영양제를 잔뜩 사오고, 
 
일이 안 풀려 힘들어할 땐 1시간 거리를 달려와 제 앞에 있어주던 사람이었습니다.
 
성격이 예민한 제 화도 다 받아줬던 사람이었고,
 
제가 게임하느라 전화끊어야된다 하면 꼭 이기라고 해주고,
 
제가 프라모델 사고 싶다 그러면 몇개월이 지나도 신제품 나오면 꼭 사주는 애였습니다.
 
국내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던 저도, 여자친구 덕분에 한 달에 한 번은 여행을 다녔던 것 같습니다.
 
서로가 첫 잠자리였고, 첫날엔 당황해서 피임도 제대로 못 해 새벽에 약국에 간 적도 있었습니다.
 
잠자리는 서로에게 의무감처럼 다가와서 즐겁다기보단 일종의 챌린지 같았고요. 그렇게 큰 즐거움은 아니었습니다.
 
900일 정도 연애를 하면서 저는 자존감도 회복됐고, 이직도 잘 됐고, 인간관계도 조금씩 더 다양해졌습니다.
 
그 시기에 여자친구는 시험 준비를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이직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6개월쯤은 쉴 수 있는 거 아니냐"던 게, 어느덧 1년, 1년 반이 지났는데도
 
계속 이해만 해달라는 말에 점점 납득이 어려워졌습니다.
 
결국 현실적인 결혼관의 차이가 느껴지더라고요.
 
여자친구는 가난하더라도 서로 끝까지 믿어주는 게 결혼이라고 생각했고,
 
저는 집안 사정상 현실적인 경제활동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겼습니다.
 
제가 힘들어서 전화를 하면 항상 받아주고, 제 말에 맞춰주던 모습들이 지금 생각하면,
 
저에게 너무 맞추다 보니 자기 자신을 놓쳤다는 걸 나중에 말해주었습니다.
 
제 성향을 이해하고 따라오느라, 정작 본인의 시험공부도, 취업준비도 못했더라고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면서, 모진 말들이 오갔고, 결국 1000일을 채우지 못하고 헤어졌습니다.
 
"우리는 인연이었지만, 그 시기에 서로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었고, 서로를 많이 격려해줬다." 그렇게 통화하고 마지막 날에 만났습니다.
 
처음 만났던 공원에서 다시 만나 함께 걷고 밥도 먹었는데, 여전히 재미있었고, 여전히 잘 통했고, 
 
여자친구는 여전히 저를 많이 좋아하는 게 보였습니다.
 
이별을 먼저 말한 건 여자친구였고, 엉엉 우는 저를 꼭 안아주면서, "최고의 남자였다. 정말 좋은 사람만날거다. 좋은 사람 만날 수 있도록 기도하겠다" 하고 떠났고요
 
헤어진 지 보름 정도 지났습니다.
 
솔직히 말해, 헤어지면서 많이 울었지만 한편으로는 '잘 헤어졌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해방감이 아니라, '내가 이 사람을 붙잡고 있는 거 같다'는 마음이 들었거든요.
 
이게 서로에게 더 나은 방향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까지도 이별에 대한 후회는 없습니다. 다만, 생각은 계속 납니다.
 
외모가 아주 이상형은 아니었지만, 순간순간 느껴졌던 따뜻함, 언제나 응원해주던 모습들
 
그 모든 게 제 일상에 들러붙어있는것 같습니다
 
제가 만약 다른 연애를 하게 되어도, 그 사람은 아마 진심으로 저의 행복을 빌어줄 사람입니다.


제가 힘들다고 하면, 지금도 도와주려 할지도 모릅니다.
 
저희가 커플 앱을 썼는데, 여자친구에게 사진을 다 다운받으면 말해달라고 했어요.
 
제가 연결 끊기를 하겠다고 했는데, 정해둔 날이 2주나 지났는데도 아직 연락이 없습니다.
 
바로 어제, 평생 본 적 없던 사주를 보게 됐는데요. 
 
그 친구와 저는 감정적으로 강하게 끌리는 사주지만, 현실적인 방향성은 다른 운이라고 하더라고요.
 
둘 다 업이 깊어서 만난 인연이라, 평생 잊을 수 없을 거고,
 
나중에 다른 사람을 만나더라도 추억의 소중한 한페이지, 혹은 각자의 삶의 기준점으로 남을 사주라고 했습니다.
 
서로 성장하면 재회의 가능성이 보이는데,
 
이 재회는 운명이라기보단 제가 선택하냐마냐가 중요하다하더라고요.
 
다만 감정적으로 선택하면 안된다고 했습니다.
 
요즘은 주변에서 하나둘씩 새로운 사람을 소개시켜주는데 정말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게 맞을지,
 
시간이 지난 뒤, 성장해서 다시 붙잡아야 할지
 
그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는 있을지, 여러 생각이 듭니다.
  
정말 평생 잊지 못할 사람인 건 확실합니다.

그게 아쉬움 때문인지, 미련인지, 아니면 진짜 소중해서인지는 고민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