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30대 중반, 세상의 풍파를 온몸으로 맞서온 한 가정의 가장이다. 최근 한 생명을 품에 안고 보니, 잊고 살았던 삶의 조각들이 파도처럼 밀려와 가슴을 적신다. '흙수저'라는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던 나의 지난날들, 그 아프고도 찬란했던 여정을 익명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조심스럽게 꺼내어 본다. 비록 이 글이 단 한 사람의 눈에도 띄지 않을지라도, 내 영혼의 깊은 곳을 헤집어 쓰는 이 기록은 나 자신에게 가장 솔직한 고백이자 치유가 될 것이다. 보편적인 듯 보편적이지 않았던 나의 어린 시절부터, 이제는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된 현재까지. 나는 이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찾고 싶은 걸까. 어쩌면 그 답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 자체가 나의 회고록이 될 것이다.
1장: 어린 날의 흔적들 – 뿌리 깊은 상처
나의 시작은 메마른 단칸방이었다. 네 식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던 그 비좁은 공간, 화장실조차 집 밖에 있어 새벽녘 찬 공기를 가르며 나가야 했던 그곳. 고작 3~4평 남짓한 그 작은 방은 내게 가난이라는 첫인상을 강렬하게 남겼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방 두 칸짜리 반지하로 옮겨갔지만, 습기 가득한 여름과 함께 바퀴벌레, 쥐들이 불청객처럼 드나들던 곳이었다. 정리되지 않은 물건들이 가득했던 그 공간은 내 기억 속에 흐릿한 잔상으로만 남아있다. 어쩌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아픔이었거나, 21년에 앓았던 자가면역뇌염이 그 잔인한 장면들을 지워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여섯 살 터울의 누나와 나는 초등학교 내내 지독하게 싸웠다. 서로를 마주하는 것조차 역겨울 정도였다. 사춘기 시절, '나'라는 존재가 존중받지 못하는 서러움이 반항심으로 폭발했던 것 같다. 하지만 기묘하게도, 성인이 되면서 우리는 그 누구보다 서로에게 의지하는 존재가 되었다. 마치 길 잃은 두 영혼이 서로를 알아본 것처럼. 지금 생각해보면 누나가 없었다면, 아마도 나의 삶은 더 큰 나락으로 떨어졌을지 모른다.
이제 나의 가족, 그 아픈 인연들을 이야기하려 한다.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에 늑막염으로 갈비뼈 두세 개를 제거하는 큰 수술을 받으셨다. 어린 눈에는 그 옆구리로 폐와 장기가 훤히 보이는 모습이 징그럽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그저 **'아픈 아버지'**라는 잔혹한 사실만 남았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어머니가 소독약으로 아버지의 폐가 보이는 옆구리를 소독하던 모습은,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가장 선명한 그림이다. 병든 몸을 술로 달래며 자녀에게는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던 그 차가운 모습만이 내 기억 속에 박혀있다. 한 번은 이웃 경찰과 주먹다짐을 벌여 경찰이 출동했던 아득한 기억도 있다. 아버지는 그렇게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다 50대 중반, 재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셨다. 20대 중반의 나는 슬펐지만, 가족 누구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은 채 '호상'이라는 공감대를 느꼈다. 막대한 치료비와 수술비가 우리를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보릿고개 시절을 온몸으로 견뎌낸 분이셨다. 30대나 40대쯤 기독교에 깊이 빠지셨는데, 유교 사상과 뒤섞인 그 신앙은 때로 나를 이해할 수 없게 만들었다. 경제적인 능력은 없었고, 집안일마저 꼼꼼하지 못해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저장 강박을 가지고 계셨다. "모든 건 내가 기도해서 된 거야", "하나님께 기도해야 잘되지", "이것도 다 시련이야" 같은 말들은 당신의 무능력을 신앙으로 덮으려는 듯 보였다. 사춘기 시절의 나는 폭력적인 아버지에게 대항하지 못하고 울고 기도만 하는 어머니를 보며 '약자'라는 이름표를 붙였다. 그러나 이제 한 아이의 부모가 되어보니, 그 시절의 우리는 그저 **'낳음 당한 자식'**일 뿐이었다는 비참한 생각마저 든다. "손가락 빨고 자랐냐?", "엄마 없는 애들보다 낫지 않느냐?", "부모가 있으니 성인까지 큰 것이다"라는 말들은 모성애나 부성애 대신 자기 연민만 가득했던 어머니의 그림자를 보여준다.
2장: 파고드는 경험들 – 벗어날 수 없는 굴레
초등학교 6학년, 어머니가 시장에서 싸게 사 오신 나이키 잠바를 2~3주 내내 갈아입지도 못하고 입고 다녔을 때의 일이다. 친구가 "너 거지 새끼지? 옷도 없고 맨날 똑같은 것만 입는데요?"라며 놀렸던 그 순간은 내 영혼에 깊은 흉터를 남겼다. 그 트라우마 때문인지,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아르바이트를 하며 옷에 미친 듯이 집착했다. 남들에게 깔끔하고 깨끗하게 보이고,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 애썼다. 자격지심에 갇혀 학창 시절 내내 불안에 떨었던 기억은 너무나 선명하다.
중고등학교 때는 경제난으로 차상위계층에 분류되어 동사무소에서 정기적으로 쌀을 받아오고 시의 도움을 받으며 생활했다. 또 하나의 잊지 못할 트라우마는, 차상위계층 교육비 지원을 신청하라고 손을 들라고 했을 때였다. 반에서 나 말고는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나만, 나만이 차상위계층이었다. 그게 뭔지도 몰랐다. 모두들 그렇게 사는 줄 알았었다. 그때 느꼈던 형언할 수 없는 부끄러움과 수치심은 나를 갉아먹었다. 혹시나 초등학교 때처럼 놀림받을까 봐 조마조마하며 살았다. 중학교 수학여행(제주도)에 가지 못했던 것도 당연히 돈 때문이었다. 그 참담한 현실을 감추기 위해 "너무 가기 싫다, 그냥 너무 싫다"며 발버둥 쳤고, 나처럼 가지 못한 두세 명의 친구들과 함께 모두가 떠난 학교에 등교했던 기억은 쓰디쓴 자격지심으로 남았다.
3장: 관계의 숲에서 – 희망의 씨앗을 심다
어린 시절의 가족 관계는 내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지만, 역설적으로 단단한 생존 의지를 심어주었다. 누나와의 지독한 싸움은 서로에게 고통이었지만, 성인이 되어 우리는 서로의 유일한 피난처가 되었다. 우리는 그 끔찍한 집을, 그 구질구질한 가난을 탈출하고 싶다는 하나의 염원으로 똘똘 뭉쳤다. 성인이 되자마자 누나와 나는 매달 수십만 원씩 피땀 흘려 돈을 모았다. 20대 중반, 기존 전세금에 우리가 모은 돈을 더해 작은 빌라 한 채를 기적처럼 매매했다. 그 집은 단순히 거주 공간을 넘어, 가난과 고통으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의미했다.
나 역시 20대 중후반에 결혼하며 마침내 그 집을 벗어나 나만의 독립된 세상을 만들었다. 이리저리 이직하며 악착같이 돈을 모아 지금의 아내를 만났고, 우리는 마침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였다. 누나도 내가 결혼하기 3~4년 전에 먼저 결혼했다. 우리는 서로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 것이다. 그 굴레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 아내를 만나고 가정을 꾸리면서, 나는 비로소 '정상적인' 가족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고 경험하게 되었다. 부족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아내와 함께라면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는 강한 믿음이 내 안에서 자라났다.
4장: 삶의 빛깔을 찾아서 – 뼈저린 깨달음
30대 중반,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된 지금, 내 안에는 수많은 감정의 파고가 인다. 어릴 때는 나만 이렇게 비참하게 사는지, 가족이라는 존재가 매일같이 원망스럽고 부끄러웠다. 지금도 솔직히 가족이 자랑스럽지는 않다. 그러나 내가 아버지가 되어보니, 책임감이라는 거대한 무게가 어깨를 짓누른다. 나의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를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당연한 의무감이 때로는 나를 괴롭히기도 한다. '우리 부모는 왜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적이 없을까?' 이 질문은 마치 가시처럼 내 심장에 박혀 쉬지 않고 찔러댄다.
나는 왜 그렇게 슬프고 비참한 기억만 가득했던 걸까? 중고등학교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하며 내 생활비, 학비, 급식비를 내가 감당한 것이 왜 이토록 억울하게 느껴질까? 우리 부모는 왜 제대로 배우지 못했을까? 왜 그만큼 책임감이 없었을까? 아니, 모든 부모가 그랬을까? 이 끊임없는 질문들은 나를 잠식한다.
나는 나름 정말 악착같이 살려고 노력했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빨리 돈 벌어야 잘 살 수 있다'는 절박한 생각에, 그리고 '대학교 가면 돈이 더 드니 취업해서 집에 보태라'는 부모님의 말에 따라,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이직은 했지만 6개월 이상 쉬어본 적이 없다. 심지어 30대 초반에는 회사를 다니며 전문대학교 졸업장을 땄다. 성인이 되어서도 현재까지 많은 돈은 아니지만 집에 매달 돈을 보내고 있다. 내 삶의 많은 부분이 생존과,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책임감으로 채워져 있었다.
5장: 오늘, 그리고 앞으로 –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나는 일반 회사에 다니며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다. 40대를 향해가는 이 시점, 작년에는 꿈만 같던 청약에 당첨되었고, 무엇보다 소중한 아이를 품에 안았다. 회사 생활도 큰 탈 없이 이어가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이 나를 더욱 감성적으로 만든다. '과연 나는 잘 살아왔는지?' 아무도 읽지 않을지 모르는 이 글에, 나는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묻는다.
누군가는 나에게 "정말 잘했어, 고생했어. 얼마나 힘들었을까. 혼자 이겨내느라 수고 많았어"라는 따뜻한 위로가 절실하다. 혼자 남은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없다는 사실이 내 머릿속에서 극심한 괴리감을 일으키며 나를 괴롭힌다. 사는 게 대체 무엇일까...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삶을 계속해서 이어나갈 것이다. 과거의 아픈 흔적들이 나를 이루는 조각들이었듯이, 현재와 미래의 모든 경험들이 또 다른 나를 완성해나갈 것이라 믿는다. 나의 아이에게는, 이 모든 아픔을 물려주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하며.
30대 흙수저의 인생 회고록..(내용 길어용..)
나는 30대 중반, 세상의 풍파를 온몸으로 맞서온 한 가정의 가장이다. 최근 한 생명을 품에 안고 보니, 잊고 살았던 삶의 조각들이 파도처럼 밀려와 가슴을 적신다. '흙수저'라는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던 나의 지난날들, 그 아프고도 찬란했던 여정을 익명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조심스럽게 꺼내어 본다. 비록 이 글이 단 한 사람의 눈에도 띄지 않을지라도, 내 영혼의 깊은 곳을 헤집어 쓰는 이 기록은 나 자신에게 가장 솔직한 고백이자 치유가 될 것이다. 보편적인 듯 보편적이지 않았던 나의 어린 시절부터, 이제는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된 현재까지. 나는 이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찾고 싶은 걸까. 어쩌면 그 답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 자체가 나의 회고록이 될 것이다.
1장: 어린 날의 흔적들 – 뿌리 깊은 상처나의 시작은 메마른 단칸방이었다. 네 식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던 그 비좁은 공간, 화장실조차 집 밖에 있어 새벽녘 찬 공기를 가르며 나가야 했던 그곳. 고작 3~4평 남짓한 그 작은 방은 내게 가난이라는 첫인상을 강렬하게 남겼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방 두 칸짜리 반지하로 옮겨갔지만, 습기 가득한 여름과 함께 바퀴벌레, 쥐들이 불청객처럼 드나들던 곳이었다. 정리되지 않은 물건들이 가득했던 그 공간은 내 기억 속에 흐릿한 잔상으로만 남아있다. 어쩌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아픔이었거나, 21년에 앓았던 자가면역뇌염이 그 잔인한 장면들을 지워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여섯 살 터울의 누나와 나는 초등학교 내내 지독하게 싸웠다. 서로를 마주하는 것조차 역겨울 정도였다. 사춘기 시절, '나'라는 존재가 존중받지 못하는 서러움이 반항심으로 폭발했던 것 같다. 하지만 기묘하게도, 성인이 되면서 우리는 그 누구보다 서로에게 의지하는 존재가 되었다. 마치 길 잃은 두 영혼이 서로를 알아본 것처럼. 지금 생각해보면 누나가 없었다면, 아마도 나의 삶은 더 큰 나락으로 떨어졌을지 모른다.
이제 나의 가족, 그 아픈 인연들을 이야기하려 한다.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에 늑막염으로 갈비뼈 두세 개를 제거하는 큰 수술을 받으셨다. 어린 눈에는 그 옆구리로 폐와 장기가 훤히 보이는 모습이 징그럽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그저 **'아픈 아버지'**라는 잔혹한 사실만 남았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어머니가 소독약으로 아버지의 폐가 보이는 옆구리를 소독하던 모습은,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가장 선명한 그림이다. 병든 몸을 술로 달래며 자녀에게는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던 그 차가운 모습만이 내 기억 속에 박혀있다. 한 번은 이웃 경찰과 주먹다짐을 벌여 경찰이 출동했던 아득한 기억도 있다. 아버지는 그렇게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다 50대 중반, 재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셨다. 20대 중반의 나는 슬펐지만, 가족 누구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은 채 '호상'이라는 공감대를 느꼈다. 막대한 치료비와 수술비가 우리를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보릿고개 시절을 온몸으로 견뎌낸 분이셨다. 30대나 40대쯤 기독교에 깊이 빠지셨는데, 유교 사상과 뒤섞인 그 신앙은 때로 나를 이해할 수 없게 만들었다. 경제적인 능력은 없었고, 집안일마저 꼼꼼하지 못해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저장 강박을 가지고 계셨다. "모든 건 내가 기도해서 된 거야", "하나님께 기도해야 잘되지", "이것도 다 시련이야" 같은 말들은 당신의 무능력을 신앙으로 덮으려는 듯 보였다. 사춘기 시절의 나는 폭력적인 아버지에게 대항하지 못하고 울고 기도만 하는 어머니를 보며 '약자'라는 이름표를 붙였다. 그러나 이제 한 아이의 부모가 되어보니, 그 시절의 우리는 그저 **'낳음 당한 자식'**일 뿐이었다는 비참한 생각마저 든다. "손가락 빨고 자랐냐?", "엄마 없는 애들보다 낫지 않느냐?", "부모가 있으니 성인까지 큰 것이다"라는 말들은 모성애나 부성애 대신 자기 연민만 가득했던 어머니의 그림자를 보여준다.
2장: 파고드는 경험들 – 벗어날 수 없는 굴레초등학교 6학년, 어머니가 시장에서 싸게 사 오신 나이키 잠바를 2~3주 내내 갈아입지도 못하고 입고 다녔을 때의 일이다. 친구가 "너 거지 새끼지? 옷도 없고 맨날 똑같은 것만 입는데요?"라며 놀렸던 그 순간은 내 영혼에 깊은 흉터를 남겼다. 그 트라우마 때문인지,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아르바이트를 하며 옷에 미친 듯이 집착했다. 남들에게 깔끔하고 깨끗하게 보이고,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 애썼다. 자격지심에 갇혀 학창 시절 내내 불안에 떨었던 기억은 너무나 선명하다.
중고등학교 때는 경제난으로 차상위계층에 분류되어 동사무소에서 정기적으로 쌀을 받아오고 시의 도움을 받으며 생활했다. 또 하나의 잊지 못할 트라우마는, 차상위계층 교육비 지원을 신청하라고 손을 들라고 했을 때였다. 반에서 나 말고는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나만, 나만이 차상위계층이었다. 그게 뭔지도 몰랐다. 모두들 그렇게 사는 줄 알았었다. 그때 느꼈던 형언할 수 없는 부끄러움과 수치심은 나를 갉아먹었다. 혹시나 초등학교 때처럼 놀림받을까 봐 조마조마하며 살았다. 중학교 수학여행(제주도)에 가지 못했던 것도 당연히 돈 때문이었다. 그 참담한 현실을 감추기 위해 "너무 가기 싫다, 그냥 너무 싫다"며 발버둥 쳤고, 나처럼 가지 못한 두세 명의 친구들과 함께 모두가 떠난 학교에 등교했던 기억은 쓰디쓴 자격지심으로 남았다.
3장: 관계의 숲에서 – 희망의 씨앗을 심다어린 시절의 가족 관계는 내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지만, 역설적으로 단단한 생존 의지를 심어주었다. 누나와의 지독한 싸움은 서로에게 고통이었지만, 성인이 되어 우리는 서로의 유일한 피난처가 되었다. 우리는 그 끔찍한 집을, 그 구질구질한 가난을 탈출하고 싶다는 하나의 염원으로 똘똘 뭉쳤다. 성인이 되자마자 누나와 나는 매달 수십만 원씩 피땀 흘려 돈을 모았다. 20대 중반, 기존 전세금에 우리가 모은 돈을 더해 작은 빌라 한 채를 기적처럼 매매했다. 그 집은 단순히 거주 공간을 넘어, 가난과 고통으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의미했다.
나 역시 20대 중후반에 결혼하며 마침내 그 집을 벗어나 나만의 독립된 세상을 만들었다. 이리저리 이직하며 악착같이 돈을 모아 지금의 아내를 만났고, 우리는 마침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였다. 누나도 내가 결혼하기 3~4년 전에 먼저 결혼했다. 우리는 서로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 것이다. 그 굴레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 아내를 만나고 가정을 꾸리면서, 나는 비로소 '정상적인' 가족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고 경험하게 되었다. 부족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아내와 함께라면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는 강한 믿음이 내 안에서 자라났다.
4장: 삶의 빛깔을 찾아서 – 뼈저린 깨달음30대 중반,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된 지금, 내 안에는 수많은 감정의 파고가 인다. 어릴 때는 나만 이렇게 비참하게 사는지, 가족이라는 존재가 매일같이 원망스럽고 부끄러웠다. 지금도 솔직히 가족이 자랑스럽지는 않다. 그러나 내가 아버지가 되어보니, 책임감이라는 거대한 무게가 어깨를 짓누른다. 나의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를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당연한 의무감이 때로는 나를 괴롭히기도 한다. '우리 부모는 왜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적이 없을까?' 이 질문은 마치 가시처럼 내 심장에 박혀 쉬지 않고 찔러댄다.
나는 왜 그렇게 슬프고 비참한 기억만 가득했던 걸까? 중고등학교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하며 내 생활비, 학비, 급식비를 내가 감당한 것이 왜 이토록 억울하게 느껴질까? 우리 부모는 왜 제대로 배우지 못했을까? 왜 그만큼 책임감이 없었을까? 아니, 모든 부모가 그랬을까? 이 끊임없는 질문들은 나를 잠식한다.
나는 나름 정말 악착같이 살려고 노력했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빨리 돈 벌어야 잘 살 수 있다'는 절박한 생각에, 그리고 '대학교 가면 돈이 더 드니 취업해서 집에 보태라'는 부모님의 말에 따라,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이직은 했지만 6개월 이상 쉬어본 적이 없다. 심지어 30대 초반에는 회사를 다니며 전문대학교 졸업장을 땄다. 성인이 되어서도 현재까지 많은 돈은 아니지만 집에 매달 돈을 보내고 있다. 내 삶의 많은 부분이 생존과,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책임감으로 채워져 있었다.
5장: 오늘, 그리고 앞으로 – 그럼에도 불구하고현재 나는 일반 회사에 다니며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다. 40대를 향해가는 이 시점, 작년에는 꿈만 같던 청약에 당첨되었고, 무엇보다 소중한 아이를 품에 안았다. 회사 생활도 큰 탈 없이 이어가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이 나를 더욱 감성적으로 만든다. '과연 나는 잘 살아왔는지?' 아무도 읽지 않을지 모르는 이 글에, 나는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묻는다.
누군가는 나에게 "정말 잘했어, 고생했어. 얼마나 힘들었을까. 혼자 이겨내느라 수고 많았어"라는 따뜻한 위로가 절실하다. 혼자 남은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없다는 사실이 내 머릿속에서 극심한 괴리감을 일으키며 나를 괴롭힌다. 사는 게 대체 무엇일까...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삶을 계속해서 이어나갈 것이다. 과거의 아픈 흔적들이 나를 이루는 조각들이었듯이, 현재와 미래의 모든 경험들이 또 다른 나를 완성해나갈 것이라 믿는다. 나의 아이에게는, 이 모든 아픔을 물려주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