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꿀꿀이 바구미 14장 - 완결

카엔2004.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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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우리가 헤어지다니 믿을 수가 없어.” 밤이가 말했다.

“슬퍼 하지마. 넌 똑똑하고 좋은 벌레였어.”

“벌레라고 하지마. 난 밤이야.”

“그래. 밤이야. 헤어지다해도 네가 밤이었음을 잊지 않을께.”

“영영 못 만나게 될지도 몰라.”

“오늘은 서로에게 소중한 벌레였음을 증표로 남기는 의식을 하자.”

“어떻게?”

“이렇게 같이 있으면서 서로의 존재를 기억에 새기는 것이지.”

“넌 정말 좋은 벌이었어.”

“너도 좋은 밤이었어.”




오지 않길 바라던 날은 기어코 오고야 말았다.



‘이렇게 된 이상 최선을 다해보자.’



비장한 각오로 월청의 집으로 출발했다.


집으로 가는 택시 안이었다.



‘이 시간에 웬 전화? 이모가 걸었나?’



주리였다.



- 밖이야?



시끄러운 소음이 들린 모양이었다.



“응. 무슨 일이야? 아침부터.”


- 멀대 상태가 더 안 좋아졌대. 지금 중환자실에 있다고 연락이 왔어.



‘중환자실? 멀대가?’



멀대와 중환자실이라는 말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말이었다.


두 단어를 함께 듣게 되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 듣고 있어? 왜 대답을 안해. 나 지금 출발할 거야. 너도 바로 와.


“난 못가.”


- 무슨 소리야? 여봉이가 다 죽어간다고.


“미안해. 나랑 연락이 안됐다고 말해줘. 이따 오후에 갈게.”


- 혜림아!



전화를 끊고는 전원까지 꺼버렸다.


혹시나 멀대가 죽었다는 소식을 받게 될까 너무나 두려웠다.



‘침착해야해. 슬퍼하면 집중이 흐트러질지도 모르잖아.’



큰 알사탕이 목에 걸려있는 것 같았다.


묵직한 느낌.


차라리 사탕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목에 손을 넣어서라도 꺼낼 수 있는 사탕이라면 당장 꺼냈을 것이다.


하지만 녹지도 않는 덩어리는 점점 커져만 갔다.



‘멀대는 참 좋은 아이에요. 앞으로 착한 일도 많이 할 아이라구요. 나쁜 사람들도 많잖아요. 아무 선물도 하지 않은 제게 핸드폰도 사주고 숏다리도 사줬어요. 아직 돈 십만원도 못줬다구요. 다른 남자한테 눈 돌린 저를 받아준 착한 아이에요. 이제 막 만나기 시작했는데 이러기가 어디 있어요. 화장한 모습을 보지 않고, 남자를 위해 화장을 하는 여자의 마음을 볼 줄 아는 따뜻한 애라구요. 그런 애를 왜 데려가려고 해요. 차라리 양다리 걸치는 정우를 데려가세요.’



누군가에게 말을 하고 있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멀대는 데려가지 말아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월청의 집에 다다랐을 때는 눈물 범벅이 된 상태였다.


마음을 가라앉아 보려고 노력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빨리 시작해 주세요. 빨리요.”



월청 도사를 보자마자 울부짖었다.


사람들은 놀라는 눈치였지만 무슨 일인지는 묻지 않았다.


월청 도사는 노인들이 갖고 있는 깊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을 보자 다소 안정이 되었다. 무수한 세월과 고통을 통과해온 눈이었다.


그 눈은 모든 고통은 지나가는 것이라고 그러기에 차분히 맞서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 보였다.



“준비는 되었나?”



월청 도사가 물었다.


오히려 준비가 안 된 것은 내 쪽이었던 것이었다.



“준비하겠습니다.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방안에는 월청 도사와 나뿐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두세 명 정도 보조를 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시작하지.”



월청 도사가 정신 집중을 시작했다.


참으로 진중한 표정이었다.


월청의 주변에 서서히 검은 안개 같은 것들이 모이는 것이 느껴졌다.



‘검은 기운. 그래서 흑술이라 불리는군. 나도 서둘러야지.’



정신을 모으고 할아버지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젠 할아버지가 소멸된다고 해도 아쉬운 마음도 들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온갖 잡생각들이 집중을 방해했다.


멀대를 처음 만났던 날, 병원에서 잠을 자고 있던 모습, 손에서 느껴졌던 체취, 몸에서 나던 병원 냄새, 이마에서 나던 멀대의 땀 냄새, 말라있던 입술의 감촉, 화순 언니, 얼굴을 데이던 숙희 언니 그리고 꿈에서 봤던 폐가의 영혼들. 머리가 뒤죽박죽이었다.



“지금 뭘 하는 게야? 집중해야지. 딴 생각은 집어치워.”



월청 도사가 호통을 쳤다.



‘이러면 안돼. 멀대가 아프다고 하잖아. 정신 차려, 강혜림!’



스스로를 타일렀다.


정신을 다시 모았다.


아까보다는 집중력이 더 생긴 듯 했다.


그러나 곧 멀대가 아파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 혜림아, 나 아파. 너무 아파.


[아파 하지마. 이제 곧 끝나. 조금만 기다려.]


- 여태껏 널 기다렸는데. 더는 너무 힘이 든다. 미안해. 이젠 버틸 힘이 없어.


[안돼, 멀대야. 가면 안돼. 날 버리고 가는 게 어디 있어? 안돼. 안된다구.]


- 미안해.



모든 근육이 힘을 잃고 풀어진 듯 했다.


바로 앉아 있기도 너무 힘이 들었다.



“혜림양!”



도사의 호통에 정신이 들었다.



“마음이 흔들리는 건가? 하지 않겠다면 혼자 하겠네.”



너무 화가 난 듯한 표정이었다.



“아닙니다. 마음이 혼란스러워서 실수를 했습니다. 다시 해보겠습니다. 술을 좀 가져다 주십시오.”



월청도사는 술을 달라는 뜬금없는 청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술을 내오라고 시켰다.


수레가 곧 술을 가져왔다.


과실주였다.



‘머루향이 난다. 취하기에 좋은 술이군.’



나이 지긋한 노인 앞에서 고개도 돌리지 않고 다섯 잔을 연거푸 마셔댔다.


과실주라 해도 술은 술인지라 연거푸 마시니 목에서 넘기기가 쉽지 않았다.


공복이라 효과는 빨리 나타나는 듯 했다.


속이 뜨거워진 느낌이 들었다.



“이제 됐는가?”


“두 잔만 더하겠습니다.”



무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마음이 급하여 효과를 빨리 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눈을 감았다.


아까보다 마음이 느긋해진 것이 확실했다.



[어서 오세요. 할아버지.]



시간이 조금 지나자 서서히 할아버지의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나타나자마자 뜨거운 기운을 모으는 듯 했다.


삽시간에 방의 기온이 올라갔다.



‘예전보다 더 강해졌나봐.’



눈을 떠보니 월청은 할아버지의 모습에도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집중을 더 배가하는 듯 검은 기운이 더 짙게 모이기 시작했다.


그 기운은 천천히 그러나 흩어짐 없이 할아버지를 감싸나갔다.


검은 기운은 얼음장 같은 차가움이 아니라 서늘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기운이 할아버지를 감싸자 방안 기온도 내려가는 듯 했다.



‘월청 도사도 꽤 강하군.’



하지만 곧 뜨거운 기운이 폭발할 듯 진동하는 것이 느껴져 왔다.


그 진동으로 유리창이 깨질 듯 흔들렸다.


그것이 터지기라도 하면 방안의 모든 것을 태울 것 같았다.



[가세요. 이제 할아버지가 갈 곳은 없어요]



애처로울 정도로 힘을 쓰고 있는 할아버지가 너무나 미워보였다.



[방해...하면... 너라도 용서치... 않아...]



갑자기 몇 덩이의 기운이 월청 도사가 아닌 나를 향해 날아들기 시작했다.


아무 방어가 없었던 나는 앉은 자리에서 불덩이를 맞고는 옆으로 꼬꾸라졌다.



“으윽.”




14-2



숨을 쉬기도 힘들었다.



‘가슴이 답답해.’



가까스로 숨을 쉬었을 때는 코에서 입에서 뜨거운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모든 내장기관이 뜨거워 진 것 같았다.


몸 밖이 아니라 몸 안이 뜨거우니 더 미칠 것 같았다.



‘멀대가 느낀 고통이 이것이었구나.’



몸이 아픈 것보다도 멀대가 지금 이런 고통을 당하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제 그만하라구요. 이렇게 한다고 해도 아무도 죽지 않아요.”



[죽일...테다... 전부...]



불 한 덩이가 또 날아들었다.


너무도 빨라지만 너무나 정확하게 보였다.



‘피할 수 있어.’



그것은 착각이었다.


너무나 선명해 보였기에 든 착각이었다.


이미 누운 채 움직일 수도 없었기에 느린 속도였다고 해도 피할 방법은 없었다.


불덩이는 정확하게 가슴으로 날아들었다.



“욱.”



누워있던 나의 입에서 빨간 피가 흘러내렸다.




월청 도사는 공격이 나를 향해 있는 틈을 타 기운을 모은 듯 했다.


검은 기운이 방안 가득 넘치고 있었다.


점점 짙어져 가는 기운으로 잠시 후에는 한치 앞도 내다보기 힘들어졌다.


그제서야 할아버지도 기운이 꺾긴 듯했다.



[으으...]



할아버지는 숨을 쉬기 곤란한 사람처럼 보였다.


이미 힘을 많이 썼던 모양인지 기운이 점점 약해져 갔다.



“이제 가요. 사람들 괴롭히지 말고 사라져요.”



할아버지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이젠 할아버지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끔찍이 싫었다.



‘내가 원래 이러려는 게 아니었어. 할아버지가 만든 일이라고. 사람들을 죽이려던 할아버지 잘못이라고.’



[아악!]



할아버지가 소리를 질렀다.


끔찍한 비명이었다.


귀를 막았지만 영의 소리라 소용이 없었다.


비명 소리는 오랫동안 그칠 줄을 몰랐다.



‘이제 마지막인가?’



방에는 서늘한 기운만 느껴질 뿐 더운 기운은 없었다.


이미 시야에 보이지도 않았고, 영의 민감한 기운을 느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기에 잘을 알 수 없었지만 비명 소리가 약해지는 것으로 보아 이젠 끝났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편히 보내지 못해서 죄송해요.’



긴장이 풀리자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끝났다라고 생각했을 때, 갑자기 방문이 열렸다.



‘뭐야, 대체?’



검은 기운이 열린 문을 통해 빠져나가고 있었다.



“당장 멈추세요.”



‘수암의 목소리인데?’



수암과 두 남자가 방으로 들어왔다.



‘왜 멈추라는 거야? 이제 다 끝나가는데.’



“안돼요. 멈추지 마세요. 다른 사람들은 당장 나가요. 이제 다 끝나간단 말이에요.”



나는 소리쳤다. 하지만 수암은 월청을 흔들며 정신집중을 방해했다.



“하지마. 하지 말란 말이야. 도와주지도 않을 거면서 왜 그래?”



나는 수암의 다가가 등짝을 있는 힘껏 때렸다.


입에서 흐르는 피가 수암의 등을 빨갛게 물들었다.



“혜림아! 진정해. 이러지 않아도 다른 방법이 있어.”



수암은 때리는 손을 잡아 저지했다.



“아버지! 이제 그만 하세요.”



수암과 같이 들어온 아저씨가 월청에게 말했다.



‘아버지? 그러면 기암 선생?’



“자식까지 버리고 간 놈이 여기는 웬일이냐?”



나는 처음으로 월청 도사의 놀라는 표정을 보았다.



“다케다의 아들을 데리고 왔어요.”



‘다케다의 아들? 죽었다고 했는데.’



“키노모토 타케시입니다.”



서툰 한국말로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아들이란 말이 어울리지 않는 노인이었다.



“아버지, 시간이 없어요. 제가 정신을 모아 다케다와 접촉을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기암의 말을 수암이 거들었다.


월청 도사는 탐탁치 않다는 반응이었지만 고집을 피울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무언으로 이들의 요구를 승낙했다.


기암 선생은 좌정을 하고 두 손을 모았다.


수암이 타케시씨에게 준비를 하라고 말을 했는지 타케시씨도 무릎을 꿇었다.



잠시 후 기암 선생의 입이 열렸다.



“네가 내 아들이냐?”



기암 선생의 말을 수암이 타케시씨에게 일본 말로 통역을 했고, 타케시씨가 말하면 한국말로 통역해 기암선생에게 전달을 했다.



“맞다고 합니다.”


“죽었다고 들었는데.”



또 기암 선생이 말했다.



“어머니가 집을 나오면서 데리고 나오셨다고 합니다.”


“왜 집을 나왔지?”


“아들까지 죽는 꼴을 볼 수가 없었다고 말하네요. 죽었다고 말한 것은 그래야 찾을 생각을 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답니다. 집 나간 며느리를 찾지는 않을 테니까요.”


“똑똑한 여자였지.”



기암 선생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아마도 할아버지가 옛날 생각에 말을 잃은 듯 보였다.


타케시씨도 아버지의 영혼과 대화를 하는 것을 실감했는지 목을 놓아 울고 있었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아버지’를 부르며 우는 것 같았다.


육십년만의 가족 상봉이라니 나로서는 그 감정이 어떨지 감히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냥 타케시씨의 목소리에서 그것은 꽤나 서러운 느낌이구나하는 생각이 들뿐이었다.



“어머니는?”



기암 선생의 입이 다시 열렸다.


목소리가 약간 떨리는 것 같았다.



“평생 아버지를 기다리셨답니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편안히 가셨다구요. 그리고 유언으로 가문에 관련된 일이지라도 절대 복수는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답니다.”


“복수를 하지 말라?”


“복수는 복수를 낳을 뿐이라고. 그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용서를 하라고 말했답니다.”


“남자들이 못한 일을 여자가 해냈군.”



할아버지의 노여움이 아들의 영혼과 관련이 컸던 만큼 살아있는 아들을 보자 살기도 많이 누그러진 듯 기운이 온화해진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복수는 그만 두시라고 말하네요. 고바야시 가문과도 이제는 사이좋게 지낸답니다. 지금의 복수는 자손들에게 해를 입힐 뿐이라고 합니다. 민씨 일가와도 오늘 담판을 짓고 가겠다고 합니다. 이제 자신의 몫이니까 편하게 쉬시랍니다.”


“결국 나도 복수를 못하게 해버리다니 정말 영리한 여자야.”



기암 선생의 표정이 웃는 듯 보였다.



“정말 좋은 어머니셨답니다. 그리고 시신을 일본에 모시고 가겠답니다.”


“이제 고국으로 가는 건가?”



모든 것이 다 정리된 듯 했다.


타케시씨의 말대로 이제는 살아있는 자들의 몫만 남은 것이었다.



“나도 이제야 쉴 수 있겠군.”



‘이제 편히 쉬세요.’



할아버지가 편히 가게 되어 너무나 기뻤다.



“혜림양, 미안하네.”


“미안하다는 말 하지 마세요.”


“내가 너무 괴롭혔지.”


“제가 더 죄송합니다.”


“피곤해. 진짜 가야겠어.”



정말 목소리가 지친 듯 들렸다.



“내 시신을 어머니 곁에 묻어 주거라.”


“알겠다고 합니다.”


“다들 고맙다.”



할아버지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허공으로 사라지셨다.





14-3






“일본까지 가서 데리고 온 것인가?”



월청 도사가 타케시씨에게는 시선을 주지 않고 수암에게 물었다.


민가와 키노모토가의 만남인 만큼 껄끄러워 하는 듯 했다.



“예.”


“자네가 왜 그 고생을 했지?”


“화의를 청하는 것이지요.”


“화의라? 사업가가 다 됐군.”


“화의를 받아주신다면 기암 선생님과 함께 일하고 싶습니다.”


“그거야 집 나간 자식이니 내 알바 아니네.”


“알겠습니다.”


“얘기 중에 미안한데 나 좀 일으켜줘.”



내가 수암에게 말했다.



‘여자가 피를 흘리고 있는데 한가롭게 사업 얘기나 하다니.’



“어, 미안.”


‘미안하면 다야?’


“나 병원에 가야해.”


“알았어. 데려다 줄게.”


“멀대가 있는 병원에 데려다 줄 수 있어?”



수암은 멈칫하는 듯 했다.



“끝까지 잔인하구나.”



그 말이 가슴을 아프게 했다.


수암은 천천히 부축하며 일으켜 세웠다.



“안 되겠다. 엎혀.”



‘엎혀야 하나? 다른 도리는 없겠지. 이거 너무 미안하게 됐는걸.’



넓고 편하진 않았지만 따뜻한 느낌이었다.



‘그간 굶기를 잘했지.’



이미 남의 떡인데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다.




수암은 멀대가 있는 병실까지는 들어가지 않겠다고 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맙고, 미안했다.



“여기래. 들어 가봐.”


“고마워.”



이제 돌아서는 일만 남았는데 뒷모습을 보이고 싶지가 않았다.


오늘만큼은 내가 그의 뒷모습을 봐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가. 들어갈게.”


“그래.”



수암이 천천히 돌아섰다.


그리고는 한걸음씩 멀어져갔다.



“오빠!”



수암을 불러 세웠다.



“오늘 너무 멋지더라.”



“내가 원래 멋져.”



수암은 내게 웃음을 보이고는 다시 제 갈 길을 갔다.


웃으며 헤어져 준 오빠가 너무 고마웠다.



멀대가 입원해 있는 곳은 다행히 일반 병실이었다.


상태가 좋아진 모양이었다.



“여봉아!”



문을 열고 들어가자 주리와 정우가 있었다.



“웬 피야?”



아이들은 내 몰골에 놀라 입도 못 다물었다.



‘옷이 피범벅이 된 것도 모르고 있었네.’



“여봉이는?”


“지금 자고 있어. 많이 좋아졌대.”


“다행이다.”



주리가 정우에게 눈치를 주며 끌고 나갔다.



‘눈치 빠른 기집애.’



멀대는 좋은 꿈을 꾸고 있는지 웃으며 자고 있었다.


그 모습이 참 실없어 보였다.



‘바보 멀대. 뭐가 그리 좋으냐?’



먹는 꿈을 꾸는지 입을 오물대는 것이 너무나 귀여웠다.



‘깨물어 주고 싶구나. 아무도 없는데 깨물어 버릴까?’



천천히 입술을 멀대쪽으로 가져갔다.


그런데 병원 소독약 냄새가 너무 강하게 나는 듯 했다.



‘속이 울렁거리네. 아까 먹은 술 때문인가?’



화장실로 갈 겨를도 없이 난 바닥에다 쏟고 말았다.


그 시끄러운 소리에 멀대가 잠에서 깨어났다.


멀대가 본 것은 피 묻은 옷을 입고 병실에서 술 먹고 토악질을 하고 있는 혜림이었다.



“미안. 술을 좀 마셨어.”



멀대는 일어나더니 내 등을 두드려 주며 말했다.



“나 구하느라 그런 거지? 고마워. 아까부터 몸이 편해지는 것 같더라.”



멀대의 말에 대답을 할 수 있는 형편이 되지 않았다.



“우에, 우웩.”


“말하지 말고. 빨리 토하기나 해.”



그 때 멀대의 어머니가 들어오셨다.


어머니가 본 것은 피 묻은 옷을 입고 병실에서 술 먹고 토악질을 하고 있는 혜림이와 친절히 등을 두드려주고 있는 멀대였다.




어느새 밤이 익어가는 계절이 되었다.


멀대를 만나고 두 번째로 계절이 바뀐 것이었다.



나중에 영민씨를 통해서 들은 이야기로는 월청 도사도 자식들에게는 흑술을 전수할 생각이 없었다고 했다.


무거운 짐을 자기 혼자로 끝내고 싶어 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폐가에 있던 영혼들에게도 흑술을 쓰지 않았다고 했다.


근래 들은 이야기 중 가장 반가운 이야기였다.



“혜림아, 밤 먹어!”


“무슨 밤이야?”


“수암이네 엄마가 자기 집 밤이 열렸다고 가지고 가라고 전화를 다해주더라. 그 언니는 옛날이랑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다니까.”


“치. 그 집이야 먹을 것이 많으니까 이런 거 안 먹는다구. 버리기 아까우니까 불렀겠지.”


“너 그 집 밤나무 봤어?”


“응. 뒤뜰에 있던데. 장독대 옆에 있잖아.”


“그 나무가 너 옛날 살던 집에 있던 나무야.”


“뭐?”


“너희 엄마랑 친구라고 했잖아. 언니 죽었을 때 그 언니가 밤나무는 자기가 가지고 가겠다고 했거든. 그때는 왜 유난을 떠나 했는데 너 먹이라고 다 따가지고 손질까지 해서 불렀더라.”



‘우리 집에 있던 그 밤나무라고?’



밤은 작고 볼품이 없었지만 내게는 너무나 특별한 밤이었다.



“너 안 먹을 거야?”


“조금 있다가 멀대 올 거잖아. 그때 같이 먹을래.”


“이게 시집도 안간 이모 앞에서 못하는 짓이 없네.”


“다른 먹을 거 줄 게 없으니까 그렇지.”


“그러니까 네가 돈을 빨리 벌어.”



‘조카한테 돈 벌어오라고 하는 이모는 우리 이모밖에 없을 거야.’



잠시 후 멀대가 놀러왔다.



“여봉아, 밤 먹어.”



나는 칼로 반을 갈라서 티스푼이랑 같이 주었다.



“밤이 참 달다. 네 입술처럼.”



멀대는 불타는 눈빛을 보냈다.



“뭐야, 닭살이다.”



밤을 자르고 있는데 밤에서 벌레가 나왔다.



“으. 징그러. 벌레 먹었나봐.”


“왜, 통통한 게 너처럼 귀여운데.”


“한 마리도 아니구, 두 마리야.”



멀대는 벌레를 보며 웃고 있었다.



‘독특한 취향을 갖고 있군.’



“나 다음에 밤벌레로 태어나도 좋을 것 같아. 이렇게 너랑 한 밤에 살 수 있으면 말이야.”


“또 닭살 시작이다. 밤이나 먹으셔.”


“이따 나가서 뭐하고 놀까?”



우리는 이렇게 두 번째 계절을 웃고, 떠들며 보내고 있다.


세 번째 계절도 네 번째 계절도 내가 살아갈 모든 계절을 멀대와 웃고 떠들며 보낼 것이다.


   

- 읽어 주신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