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바라기-24-

까미유2004.03.19
조회995

 

제 24 화


준하는 아까부터 서재실에서 나오질 않고 있다. 노크를 하고 들어가 본다.

오랫동안 먼지만 날리던 카메라를 꺼내 만져 보고 있다.


-정말...할 생각이니?

-응...

-언제부터 시작할 거야?

-곧...

-준하야...


준하가 본다. 몇 달 사이에 우리는 정말 십년은 늙어 버린 것 같다. 준하의 얼굴에서

이제 빛을 보지 못한다. 준하에게 나 역시 그렇게 보이겠지...


-오늘은....지니선배 안 만나?


대답하지 못하고 카메라만 쳐다 본다.


-나 때문에 신경 쓰이니?


준하가 고개를 젓는다.


-그럼 나한테 미안해서 그러니?


역시 대답은 없다. 나는 이제 분노도, 증오도, 억울함도...느끼지 못한다. 너무 덤덤해져버린

것 같다. 준하는 다를 것이다. 앞으로도 내게..죄를 짓는 기분이 들 것이고, 나를 볼 때마다

아플 것이고...가끔 눈물도 흘릴 것이다. 나는 잊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가끔 불현듯 떠오르

긴 하겠지만...그렇게 아파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준하는 나를 잊을 수 없을 게다.

평생을 아파할지도 모른다. 상처는 받는 사람보다도 주는 사람에게 더 큰 법이다. 그 상처가

오랫동안 낫지 않는 것도 그럴 것이다.

우리는 정말...이렇게 끝나고 마는 것일까.



***

정작 작업에 매달릴 생각으로 시작했던 것들이 어느 사이에 정지되었다.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제대로 완성된 작품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박교수에게

서 전화가 걸려 왔었다. 오겠다는 걸 오지 말라구 했다. 어쩌면 박교수가 내게 퍼붓는

말들이 너무나 명백하고, 단호해서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그것들은 토씨 하나 틀린 것이

없이 내게 흉기가 되어 날아온다. 전혀 방어가 되지 않는다. 공격만 있을 뿐이다.

준하에게 전화를 걸어 본다. 며칠 째 그 아이에게서 전화가 걸려 오지 않았다. 나는

초조했고....겁이 났다. 뻔뻔하지만....이왕 뻔뻔해지기로 한 거...열 번, 스무 번도 못할까

그런 마음이 앞선다.


-잘 지내니?

-네...미안해요, 내가 먼저 전활 했어야 했는데...

-아냐...기다리라고 했잖니....

-뭐했어요?

-암 것두 안했어....


너만 기다리고 있었어...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우린 그런 말을 하면 안된다.

아직은...그런 말들이 우리에게 금기된 채 그 금기가 깨어지길 기다릴 뿐이다.


-나, 사진 일 맡게 됐어요.

-그래? 잘 됐다.

-곧 시작해야 할 것 같아요...

-바쁘겠구나...그럼.

-인물 사진이라서...여기저기 좀 다녀야 할 것 같아요. 한달은 족히 걸릴 거에요...

-그래...그렇겠구나.

-다음 주쯤에 떠날 생각이에요. 같이....갈래요?

-그래두...되니?

-가기 전에....하은이와 얘길 해야 해요. 다....정리되면...그리고, 떠날 채비가 되면

  전화할게요. 그때까지만...기다려요.


나는 대답을 못하고 고개만 주억거린다. 그래, 기다릴게. 그보다 더한 시간을 기다리라고

해도 난, 기다릴 자신있어....전화를 끊고 눈물을 훔치는데 박교수가 들어온다.

나는 그를 보지 않는다. 외투를 입고 가방을 든다. 어떻게든 그를 피하고 싶다.


-내가...그냥 모른 척, 두 사람 축복이라도 해주면 좋겠지, 당신?


나는 무시하고 그를 지나쳐 나가려 한다. 그가 내 팔을 거칠게 잡아 당긴다. 순간

휘청거린다. 난, 그를 원망스런 눈으로 쏘아본다.


-내가 이러지 않아도 당신이 어떻게 될지 눈에...빤히 보여, 보여서 이러는 거야.

  당신이 길을 잘못 들어섰는데 내가...그걸 그냥 보고만 있어야 해? 왜, 굳이

  가시밭길을 가겠다는 거야?

-내 발이 가시가 찔려 피가 나고....그래서, 걸을 수가 없어도....나는 그 길을

  가야 해요. 이미 난...깊숙히 들어와 버렸어요..다시 돌아간다해도...그 돌아가

  는 길은 내가 걸어왔던 가시밭길이에요. 역시...나는 상처를 받겠죠...내 눈에도

  이제 끝이 보이려고 해요. 그 길이 끝나는 순간...꽃이 만발한 들판이길

  바란 적은 없어요. 더 이상 나아갈 길이 없는 낭떠러지가 나온다고해도...

  가 보고 싶어요....그게 내 사랑이에요.

-하은씨는 그렇다쳐....당신, 숨어 살거야? 서준하, 그리고 당신...동창들 아무렇지

  않게 만날 수 있어? 그래, 동창들도 안보면 그만이라구 해. 일로 맺어진 사람들..

  그 사람들에겐 뭐라고 할거야? 그들이 두 사람을 볼 때마다 서준하의

  조강지처를 떠올릴 거라는 거 몰라?...입을 대겠지. 한국 사람들 남의 일이라면

  제 일보다도 발벗고 나서는 무서운 사람들이야...그들 눈이 얼마나 무서운지

  정말, 당신 모른다고 하진 않겠지?....그들도 피할래? 아무도 모른 곳으로

  도망가서 살거야? 어디...프랑스? 이태리?...서준하가 당신한테 간다구 해도....

  하은씬 살아. 사는데 아무 문제없이 당당하게 살아져...그런데 두 사람은

  아냐...평생을 남의 눈치 보면서 살아야 돼....그게 사는 거니?


나는 그 자리에서 그만 털썩 주저 앉는다. 이럴수는 없다....나쁜 자식....날,

너무 괴롭히지마....그것두 생각 못했을까....답이 없었다. 알면서도 그것까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정작 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쏟아지자

나는 모든 것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답은 이미 나와 있으므로....

나는 주저 앉아 울기 시작했다. 여섯 살 난 계집아이처럼 소리까지

내지르며 통곡을 한다. 나더러 어떡하라구...그래서 나더러 어떡하라구...



***

-2주 있다 다시 한 번 오세요. 아기가 제대로 자리를 잡았는지, 또 산모 건강은

양호한지 몇가지 검사도 해야 해요. 기분...어때요?

-좋아요 아주...아무 문제 없겠죠?

-지금까진 그래요. 검사가  다 끝나봐야 알겠지만....잘 먹고, 잘 자고...마음 편하게

  가지는 게 중요해요. 이하은씨 닮으면 아주 이쁜 아기가 나올 것도 같은데...참,

  다음 번엔 남편 분하구 같이 와요. 요즘 통 안보이네요...

-네에....그럴게요.


병원을 나오면서 나는 준하를 생각한다. 준하를 많이 닮은 아이였음 좋겠다.

준하야....너두 기뻐할까. 우리 아이가...내 뱃속에서 지금 잠을 자고 있대. 너랑...

함께 병원가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신기해하면서...그렇게 살고 싶다.

택시를 타고 엄마집으로 간다.

집에 도착했을 때 엄만 때아닌 국수는 뭐냐구 그런다. 그러면서도 국수를 준비해

놓았다. 허겁지겁 국수를 다 비운다.


-참, 별일이다. 국수를 다 찾고...

-그러게...갑자기 국수가 너무 먹고 싶더라구요. 고마워 엄마.

-준하도 오라구 그러지....준하꺼까지 말아놨는데.

-어...좀 바뻐 요즘. 사진 일 시작했거든요.

-얼굴이 많이 상했다....어디 아프니?

-아니...너무 건강해서 탈이지 뭐....이따 육수만 좀 싸줄래요?

-포장해놨어 이미.

-그래두 우리 엄마 밖에 없다...내 말도 잘 들어주고. 엄마....내가 만약에

  미운 짓을 하게 되더라도....나 미워 안할거지?

-밉다가도 안쓰럽게 느껴지는 게 피붙이야.

-내가 만약에.....좀 말도 안되는 일을 저질러두....엄만 내 편에 설거죠?

-왜 그래, 무슨 일이야?

-그냥...그냥....


***

나는 오래, 오래 생각한다. 불도 켜지 않은 채 쇼파에 앉아 오래...오래 생각한다.

생각하면....눈물만 쏟아진다. 서럽고....외롭고....아파서. 휴대폰이 울린다. 어둠 속에서

휴대폰의 액정에 불이 들어온다. 준하다....나는 선뜻 받지 못한다. 그리고 끝내

받지 않았다. 서준하가 당신한테 간다구 해도....하은씬 살아. 사는데 아무 문제없이

당당하게 살아져...그런데 두 사람은 아냐...평생을 남의 눈치 보면서 살아야

돼....그게 사는 거니? 박교수의 말을 떠올린다. 머리 끝에서부터 금이 가기 시작한다.

쩍하고 금이 가는 소리가 난다. 가슴안에서도 금이 가기 시작한다. 나는....이제

무너진다.


***

하은이 언제 왔는지 벌써 잠이 들어 있다. 잠이 들기엔 이른 시간인데...아무래도

많이 피곤했나 보다. 아님...그렇게라도 고통을 줄여 보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서재로 들어가 여행지 책자를 들춰본다. 오지라고 생각되는 곳은 정보가

많이 없다. 그냥 찾아 들어가볼 수 밖에....책을 덮고 지니선배에게 전화를 걸어본다.

받지 않는다. 오후부터 그녀와 연락이 되지 않는다. 서재에서 나와 안방으로

들어간다. 하은은 여전히 잠들어 있다. 마음이 좋지 않다....나는 흔들리는 마음을

잡기 위해서 다시 방을 나온다. 서재로 들어가 책자와 여러 가지 물건들을

찾아 가방안에 넣는다. 그리고 다시 지니선배에게 전화를 건다. 받지 않는다.


***

잠에서 깼다. 너무 일찍 잠자리에 든 탓일까. 준하가 옆에 없다. 아직 들어오지

않은 걸까. 안방을 나와 서재실 문을 열어본다. 준하는 서재실 한쪽 구석에서

잠이 들었다. 책상 옆에 놓인 가방을 본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다.

너...날 떠날 준비를 하는 거니...이렇게 조금씩....조금씩 날...떠날 준비를

하는 거야?...결국 내가 널...보내줘야 하는가 보다. 안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꺼내

온다. 준하에게 덮어준다. 많이 지친 얼굴이다...사랑한다면서...지니선밸 사랑한다

면서 넌...왜 하나도 행복해하지 않니. 얼굴이 그게 뭐야....


***

입덧 때문에 식빵을 굽는다. 도저히 김치 냄새를 맡을 수가 없다. 우유를 데우고

잼을 꺼내 놓고 준하를 부른다. 면도도 하지 않아 얼굴이 까칠해 보인다.


-준하야 면도 좀 해.


쭈삣거리다 욕실로 들어간다. 잠시후 말끔해진 모습으로 준하가 나와 식탁 앞에

앉는다.


-이쁘다, 훨씬 잘생겼어. 진작에 그러지...


빵에 잼을 발라 준하앞에 놓아준다. 준하는 먹지 않는다.


-준하야...먹어. 입맛이 없대래두...먹어둬. 당분간...내가 아침 못 챙겨줄지도 몰라.

-하은아...


준하가 내게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어한다. 아무래도 나는 들어야 할 것 같다.


-얘기해.

-나, 담주부터 일 시작해....그럼 한 달정도는 서울에 없을 거야....

-그래, 알았어. 니가....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 너 없는동안 나두...준비할게.


준하는 여전히 먹질 않는다.


-준하야....

-어...


준하의 목소리가 매인다.


-지니선배두...같이 가니?


대답이 없다. 그렇구나...내가 괜한 걸 물었구나.


-내가...내가 만약에...널 보내지 않겠다 그러면....넌, 어떡할거야? 그래두...가겠지?


준하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진다. 나는 이제 눈물도 안난다...아직도 믿어지지가 않아서.



***

조깅을 하고 돌아오는데 지니가 현관앞에 서 있다. 밤새 한숨도 못 잔 것 같다.

눈가가 검게 그늘이졌다. 그녀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간다. 그녀는 마치 금새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로 쇼파에 몸을 묻고 있다. 따뜻한 우유를 건네 준다.


-내가 왜, 당신을 사랑하게 됐는 줄 알아?


그녀는 넋을 잃은 사람처럼 앞만 응시하고 있다.


-당신 눈, 눈 때문이었어....저렇게 깊을 수도 있구나....그런 생각을 했었어.

  그런데...요즘 당신 눈은...깊지가 않아. 항상 뭔가에 흔들려서 불안해 보였어....

  난, 자신 있다고, 무엇이든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어. 지금까지 그래왔으니까.

  근데...당신은 안되더라구. 내 것이 될 수 없더라구.....내가 당신을 자꾸 탐내면..

  나두 당신이 서준하를 탐내는 것과 다를 바 없겠지?....이봐, 요즘 내가 당신 때문에

  흥미도 없던 드라마라는 걸 보게 돼. 거기서 그런 말을 하더라구...당신을 얻는다는

  것이 세상을 얻는 것보다 더 힘들다고....내가 요즘 그래.

-내 곁에....있어줄래요?


그녀를 본다. 그녀는 여전히 초점 없는 얼굴로 앞만 응시한다. 그녀의 손에 우유잔이

불안하게 들려 있다.


-준하를...보낼 수 있을 때까지만....어디가지 말구...내 옆에 꼭 있겠다구...약속해줘요.

-보낼 수....있어?


그녀가 힘없이 고개를 젓는다.


-자신없지만...난, 안된다면서요?....다들 안된다고 그러는데....내가...잡고 있음....

  안되는 거잖아요. 죽을 것 같아도.....참아볼게요. 당신 말대루....그 길을 걷는 게

  너무....너무 힘들어요. 걸리는 게...너무 많아.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그녀는 여전히 앞만 응시한다.


-이럴 땐...내가 무슨 말을 해야하는지를...배우지 못했어. 떼어 놓긴 했는데....

  그 다음엔 어떻게 해야 하지?

 

그녀옆에 가서 앉는다. 그리고 우유잔을 탁자위에 놓고 그녀를 안는다.

당신을 내가 이렇게 만든 것처럼 마음이 무겁군....이럴 수 밖에 없었어. 당신이

더 잘 알잖아. 그녀는 가만히 있다. 그냥 눈물만 흘리면서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