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책상에 앉아서 책의 바랜 날들을 천천히 넘기네 페이지 속에 수런대던 햇살 부신 굴참나무 숲 가슴 열고 내려오네 누군가 미처 다 쓰지 못하고 두고 간 책의 제목이 산기슭에 길게 누워서 세상 모퉁이 돌아오는 사람을 유심히 바라보네 바람에 굴참나무 이파리 너울거리듯 무릎에 내려놓은 문장의 긴 울림이 가슴에 너울거리네 언젠가 두꺼운 장정에 서 있던 이름이 머뭇거리는 내 손을 잡아 나무들 깊은 시름에 빠져 있는 어두운 숲 속으로 인도하네 가지 쭉쭉 뻗어 나가는 생각 지긋한 나무들 사정 없이 할퀴고 드는 넝쿨들과 함께 어우러져있어 눈이 부시네 전속력으로 달리는 생의 밖으로 힘껏 던져버리지 못 한 풀 빳빳한 기억들이 내 속에도 가시 덤불처럼 헝클어져 있네 아프게 돌아보는 제 몸조차 찌르며 덤벼드는 저 날카로운 넝쿨들은 누구를 할퀴며 여기까지 뻗어왔을까 앞이 캄캄해 밤인지 낮인지 구별할 수 없었네 다만 어딜 다녀오는 길인지 무리져있는 설상화들이 맨발 서늘하게 식히는 향기만 숲 속에 진동했다네
어떤 오후
어떤 오후
정주연
낡은 책상에 앉아서 책의 바랜 날들을 천천히 넘기네
페이지 속에 수런대던
햇살 부신 굴참나무 숲 가슴 열고 내려오네
누군가 미처 다 쓰지 못하고
두고 간 책의 제목이 산기슭에 길게 누워서
세상 모퉁이 돌아오는 사람을 유심히 바라보네
바람에 굴참나무 이파리 너울거리듯
무릎에 내려놓은 문장의 긴 울림이 가슴에 너울거리네
언젠가 두꺼운 장정에 서 있던 이름이 머뭇거리는 내 손을 잡아
나무들 깊은 시름에 빠져 있는 어두운 숲 속으로 인도하네
가지 쭉쭉 뻗어 나가는 생각 지긋한 나무들
사정 없이 할퀴고 드는 넝쿨들과 함께 어우러져있어 눈이 부시네
전속력으로 달리는 생의 밖으로
힘껏 던져버리지 못 한 풀 빳빳한 기억들이
내 속에도 가시 덤불처럼 헝클어져 있네
아프게 돌아보는 제 몸조차 찌르며 덤벼드는
저 날카로운 넝쿨들은 누구를 할퀴며 여기까지 뻗어왔을까
앞이 캄캄해 밤인지 낮인지 구별할 수 없었네
다만 어딜 다녀오는 길인지 무리져있는 설상화들이
맨발 서늘하게 식히는 향기만 숲 속에 진동했다네
그 때 서가엔
햇살 한참 비껴가고 있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