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수리나무 그늘을 지나며

누렁이2006.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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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수리나무 그늘을 지나며

김석환

백운대 정상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그 관문을 지나가려면 누구나
주머니 속에 숨겨 둔 추억 몇 닢
털어 녹음 한 장씩 구입해야 한다
불볕 화살도 죽창처럼 퍼붓는 소낙비도
여린 잎 방패들로 되쏘거나
녹여 내리는 상수리나무 요새
찌그러진 깡통 숨을 몰아쉬며
낙인 같은 상표를 지운다
차바퀴 파찰음에 막장까지 쫓기며
게릴라전을 벌이던 비둘기
마지막 비행을 마치고 돌아와
허무의 전리품을 내려놓는다
우듬지 더듬어 가는 바람의 발자국
그 맑게 흐르는 실로폰 음계에
헝클어진 깃털을 씻는다
뿌리 근처에 쌓인 낙엽을 헤집는다
오래 잠들 자리 찾는 걸까
모든 빛을 흡수하며 번식하는 어둠 속에
사제도 제단도 없이 치루는 성례식
늦잠을 깬 상수리나무 열매
심지 돋우어 푸른 촛불을 밝힌다
겹겹 잎으로 엮어 지은 방주
천장을 뚫고 손전등을 비추며 누군가
녹음의 농도를 재어 보곤 한다

상수리나무 그늘을 지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