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하고 긴 얘기지만 처음부터 시작해보겠음
부모님은 시작부터 어긋났던 것이 아닐까 싶다. 유복한 집안에서 오빠들 사이 자랑스러운 내 동생 어여쁜 공주님 대우 받던 엄마와 궁핍한 집안일지언정 우리 귀한 장손 온 집안이 떠받들어 모시던 아빠가 만났다. 젊은 청춘에 불꽃 튀는 사랑도 하고 또 다투기도 했다. 엄마의 헤어지자는 말에 아빠가 칼을 꺼내들었다던가 어디 건물의 옥상으로 올라갔다던가. 엄마 없이는 목숨을 버리겠다는 아빠의 협박이 유효한 뭐 그런 관계였다. 그러나 "사랑"이 장미빛 미래를 보장하지는 않았다. 외할머니의 반대를 무릅쓰며 결혼까지 갔으나 집안의 독재자 위치에 익숙하던 아빠는 순종보다 자기 목소릴 내길 선택한 엄마와 잦은 충돌을 만들었고 이는 숱한 폭언과 폭행으로 이어진다. 엄마가 밤에 전등을 켜면 전기세 나간다고 불을 끄고 이웃에게 연일 며느리 험담을 해대던 시어머니의 공격도 상당히 유효했을 것이다. 그 와중에 생계를 위해 고된 일을 해야만 했고 첫 아이는 그렇게 화장실에서 온 줄도 모르게 가버렸다.
그러고 태어난게 나였다. 한겨울 엄마가 꼬박 하루가 넘는 시간을 차가운 수술대 위에서 이빨을 딱딱거릴 정도로 벌벌 떨게 하며 태어난게 나였다. 원죄라는게 있다면 그 기원이 여기일까. 그 고생을 시킨 내가 처음에는 꼴도 보기 싫었지만 결국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한다고 엄마는 자기 자식을 열심히 키웠다. 아빠도 나의 첫 공주님을 위해 못할게 무엇이 있으랴. 항시 붙어 놀아주고 먹여주고 오물이 묻은 천 귀저기도 전부 직접 빨았다. 쑥쑥 자라나는 아이에게 필요없다고 주변에서 특히 엄마가 극구 말려도 지갑을 털어 내게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가장 좋은 신을 신겼다. 그렇게 공을 들이는데도 결국 내가 울 때에는 엄마 품만 찾았다며 아빠는 내심 서운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아이도 있고 고생하는 딸아이가 가여웠는지 외할머니는 얼마의 돈을 융통해주어 엄마 아빠가 시내에서 제법 규모 있는 여관을 운영할 수 있도록 했다. 그 후에는 또 노래방을 차리는 데에 보탬을 주시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많은 일이 있었다. 기억은 못하지만 아마 엄마 아빠는 어느날에는 세상 다정한 부부였다가 어느날에는 부모님의 원수라도 되는 양 했을 것이고 또 어느날에는 데면데면 서로를 지겨워하면서도 못내 한 자리에서 밥술을 떴을 것이다. 내가 아는 그들의 모습이 과거에도 그러하였다면. 그런 부모의 모습이 아이에게 정신을 온전히 잡고 있기에는 어려운 환경이었는지 나는 얼마간 말을 완전히 잃어 유치원 선생님과 주변의 어른들의 걱정을 사기도 하고 잠깐 엄마 친구를 따라 맛있는 걸 먹고 돌아왔다가 내가 유괴된줄 알고 난리가 난 집에서 뛰쳐나온 부모님을 마주하기도 하였다. 생각해보면 어려서부터 부모님에게 걱정을 많이 끼치던 아이였다. 건강이 좋지 못해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도 아이를 위한 병원비는 꼭 따로 빼두어야만 했고 한 번 정신이 팔리면 혼자 멋대로 움직여 길을 잃고는 같이 장을 보러 나간 엄마의 진땀을 쏙 뺐다. 초등학교에 막 입학했을 무렵에는 어떻게 그 나이에도 불량한 아이가 있었는지 왜소한 체격과 조용한 성격 탓에 만만한 내가 코묻은 용돈을 빼앗기기도 해서 엄마가 학교에 찾아가기도 했다. 오토바이에 치여 하늘을 날은 적도 있는데 두개골 위로 피가 고여 피부가 풍선처럼 말캉해져 혼자 재밌어해 몸 상태 때문에 수술도 못하고 자연치유되기만을 기다리던 부모님은 속이 타지 않았을까. 아빠와의 갈등을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이혼을 결심한 채로 집을 나갔던 엄마는 몇 날 며칠이고 울며 엄마를 찾아대는 나 때문에 결국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그러는 와중에 동생도 태어났었다. 나는 나 밖에 모르던 아이였다. 마트에 가면 미미나 쥬쥬 인형이 갖고 싶어 안달이 나고 집에 오면 인형들을 목욕시킨 후 죄 머리를 잘라 팔다리를 이리저리 달리 붙여 예쁘게 단장시키는 걸 좋아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로보트를 사야한다고 내가 졸랐다고 한다. 동생을 줘야한다면서. 무슨 소린가 하던 부모님은 후에 임신 사실을 알게되었고 그게 또 마침 남자아이였다고 한다. 동생이 세상에 나온게 어찌나 기뻤는지 가만히 앉아 팔을 벌리고 엄마 아빠를 채근하곤 했다. 내가 동생을 들어올려 안을 능력은 없으니 엄마아빠가 아가를 내 품에 내려놔달라는 것이었다. 개구쟁이 동생이 초등학교에 갓 입학해서 자기 친구와 불화가 생겼다는 얘기를 듣고 나는 어울리지 않게 친구 한 명을 데리고 동생네 반을 찾아가기도 했다. 말주변이 없어 별다른 말은 못하고 사이좋게 지내라, 한게 다였지만. 집에서는 무슨 이유였는지 아빠가 거세게 화를 내며 동생을 때리려고 한 적이 있는데 엄마가 그 앞을 막아서며 얼른 동생 데리고 방에 들어가라고 해서 동생을 챙겨 안방으로 도망가 문을 잠그기도 했다. 동생을 꼭 끌어안고 밖에서 문을 쾅쾅 두드리며 소리치는 아빠에게 뭐라고 말했던 것도 같은데 기억나는 것은 오렌지 빛이 도는 갈색 나무문과 은색 동그란 손잡이를 그저 빤히 쳐다보고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예쁘게 여기다가 언제부터는 동생을 집 안에 한 대 있는 컴퓨터를 쟁탈하기 위한 경쟁자로 상정하였다. 틈만 나면 다투고 서로 욕을 하였다. 내 기억에는 없지만 동생이 물놀이 중 물에 빠져 죽겠다 싶어 허우적 거리는데 멀리서 내가 사촌들과 동생을 바라보며 꺄르르 웃기도 했다고 한다. 부디 악의를 갖고 죽음을 방조하려 한 것이 아니길. 중학생 즈음 되어서는 서로 상대를 긁을 수 있는 만큼 긁어대서 싸움이 격해졌는데 한 번은 동생을 한껏 약올리고 내 방에 들어와 문을 잠그고 버티는 중 동생이 칼인지 가위인지로 방문을 찍어대며 문 열라고 소리치던 탓에 겁먹었으면서도 누나로서 아닌 척 태연하려 했던 것 같다. 하얀 페인트칠이 패여 벗겨진 문은 일상 속에서 잊혀져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있다.
그리고 언제부터였을까. 초등학교 때인지 중학교 때인지 엄마가 내게 속을 터놓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우선 재정상황이 있었다. 기업인들이나 정치인들의 사례를 보건대 어려서 부터 집 안의 재정상황을 함께 알고 흐름을 보는게 경제 관념을 심어주는 데에 좋다고 생각을 하였던 것 같다. 하지만 대체로 들려주는 이야기는 가계 부채가 얼마나 되어서 이걸 갚는 데에 얼마나 큰 힘이 드는지 수입이 얼마여서 이만큼 적금을 하고 있는데 와중에 아빠가 이런 데에 낭비를 하고 저런 데에 낭비를 한다 하는 얘기였다. 필연적으로 아빠와 친가에 대한 얘기가 잇는다. 친할머니와 고모들이 어떻게 자신을 괴롭혔는지, 아빠가 어떤 말을 하고 어떻게 때렸다거나 자신의 머리를 대야에 쳐박아 물고문을 했다는 등의 이야기였다. 엄마가 이런 내밀한 이야기 까지 나에게 하다니, 나는 이제 엄마가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이 된걸까? 하는 저열한 마음도 들었던 것 같다. 엄마를 지켜주고 싶었다. 한푼이라도 아껴야하는 사정에 뭐 하나 사달라 말을 꺼내기도 면구스러워하는 중 나이키 신발을 사달라 노스페이스 잠바를 사달라 해서 얻어내는 철 없는 동생을 보면 속이 타기도 했다. 나는 최신형 핸드폰 대신 저가폰을 손에 쥐어주는 엄마에게 억울해 화가 가득 찬 눈초리를 보내는 것 밖에는 못 했는데. 엄마에게는 이혼을 해라, 아빠한테 이렇게 말해봐라, 저렇게 말해봐라, 이렇게 행동해봐라 내가 쥐어짜낼 수 있는 모든 해결 방법을 전달했다. 엄마 아빠가 온 아파트 단지를 울려댈 고성을 지르며 싸울 때에도 그 사이에서 최대한 중립적인 척 아빠의 성미를 건드리지 않고 온건하게 행동을 교정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아빠만 비난할 수 없어 쓸 데 없이 엄마를 트집 잡으며 엄마에게도 이 다툼의 책임을 일부 물었다. 하지만 둘 다 그 자리만 모면할 뿐 매번 다르면서도 같은 이유로 다르면서도 같은 싸움을 반복했다. 나의 목소리와 고민은 허공에 흩어저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너무 좌절스러워 한 번은 괜히 동생 방에 찾아가 엉엉 울었는데 그 애가 뭘 알았을까. 누나가 왜 저러지 하는 냉담한 반응에 그냥 혼자 눈물을 그치고 다시 내 방으로 돌아갔다.
아빠는 물장사를 하며 단속 오는 경찰들이 못마땅하다고 서에 사시미 칼을 들고가 책상 내려찍으며 협박했다는 것을 자랑삼아 얘기하는 사람이었다. 엄마는 (비유적으로) 그런 칼끝이 본인을 향할 때에 지체 없이 반항하고 경찰서에 신고하는 사람이었다. 동생은 운 나쁘게도 오토바이 절도가 걸려 경찰에 잡힌 적이 있다. 생각해보니 공권력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지닌 집안이다. 그 와중에 나만 너무 평범했나.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아빠도 세월이랄만한 시간이 지나니 조금씩 바뀌었다. 조금 유순해지고 격렬한 화는 최대한 자제하며 사치를 줄이고 원래도 끔찍히 여기던 가족에 애착을 더욱 더했다. 엄마 또한 변했다. 특히 아빠가 한 번 병으로 쓰러지고 생사의 고비를 맞이하여 당신이 이 집안의 가장이 되어야겠다 마음먹는 순간 남편의 잠시간의 부재를 알고 엄마를 만만하게 대하던 사람들을 보며 더욱 그러했다. 모난 돌들을 깎아내려 본인을 더욱 단단하고 거칠게 만들려 했나. 원하는 만큼 이상을 실현시키지 못한 데에 대해 울분과 체념을 가슴 깊이 가득 담아두었나. 엄마는 근시안적으로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 하나 밖에 안 보여 이에 집착하다가도 무력하게 그 표현을 포기해버리고 또 다시 악에 받친 자신의 모습에 어쩔줄 몰라했다. 그 고난과 역경을 뚫고 이런 성취를 이뤄낸 자신이 있는데 누릴 혜택 다 누리며 자라난 아이가 뻔히 보이는 완만한 길을 두고 게으름 부리며 일탈하는 걸 크게 답답해하기도 했다. 자식들이 제 모자람을 아는 상태에서 엄마의 구속 아닌 구속은 사람을 미쳐버리게 하기 딱 알맞았던 것 같다. 다른 여러 상황과 맞물려 시간 차를 두고 나의 독립과 동생의 자살시도로 이어졌다.
많은 일이 있은 후 가족이 서로 어느 정도의 물리적 거리를 유지하게 되며 서로 애틋하게 여기는 마음을 키우고 평화의 시기를 지냈다. 나는 기념일마다 굳이 필요 없다는 꽃이나 선물 용돈을 챙기고 동생도 밥벌이를 한다고 매번 비싼 식당을 예약해 가족에게 시간을 냈다. 엄마 아빠도 자식들에게 뭐라도 하나 더 챙겨주겠다 열심히였다. 그러다 엄마가 나 아주 어린 시절에 내가 너무 건방지고 외골수가 되기 딱 좋다고 했다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사실 이 문득은 내게 꽤나 자주 왔다. 착하고 겸손하게 살아야지, 예쁜 딸이 되어야지, 그때마다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자기실현적 예언이 그리스가 아닌 땅에서도 적용되는 걸까. 나는 의미 없이 얕은 우울을 항시 두르고 사는 사람이다. 잘난 것도 없으면서 아닌 척 착하게, 밝고 쾌할하게 사느라 내 의견을 말하는 방법도 몰랐고 내 감정을 말하는 방법도 몰랐다. 그렇게 내뱉지 못한 모든 것들이 두서없이 터져버린 것일까. 이제 뭐가 됐든 그냥 견디는게 몹시도 버거운 것 같다. 계기는 동생과의 사소한 말다툼이었다. 남녀차별이 통계로 증명되고 실제 내가 갖가지 성추행과 차별적인 언사를 접했는데 동생 본인 역시 본인이 접해온 세상에선 여자가 남자를 등쳐먹으려고 혈안이 되어있어 남자가 그다지도 안쓰러운가보지. 실은 본인과 친구들이 타인 등쳐먹으며 큰돈 쉽게쉽게 벌고 있으면서. 와중에 돈을 줘도 돈을 안 줘도 다리 벌리는 천박한 여자들이 널려있고 세상에 퐁퐁녀 맘충과 김여사 빨갱이들이 판치는 세상이니 얼마나 답답했을지. 엄마도 물장사 하는 중 창녀건 창남이건 숱하게 봐왔을테고 아들도 간혹 창녀를 만나고 오는데 성매매야 뭐 한끼 식사와 다를 바 없는 일상 아닐지. 그냥 이야기 하는 중에 뭔가 탁 풀려버린 것 같다. 가족이라고 서로 사랑한다고 모든 걸 포용해야만 하나? 나도 부족한 점 불편한 점이 많이 있을텐데 그들 역시 그걸 굳이 감내해야할 필요가 있을까?
가족과 연을 끊겠다고 결심하고 몇 달이 지났다. 동생은 한 번도 연락이 없지만 엄마아빠는 종종 같이 밥 먹자 한 번 만나자 전화를 해온다. 연락을 전부 끊었다가 엄마아빠가 알고 있는 내 모든 영역에 찾아와 내 행방을 묻고 다니기 시작해 전화만 받아 바쁘다 안된다 기계적인 대답만 한다. 본인들이 뭘 잘못했냐 어떻게 해야 전처럼 잘 지낼 수 있냐 묻는데 나도 모르겠어 말을 아낀다. 명절이라고 계속 전화와 문자로 연락을 시도하는 부모님이 그저 거북하다. 나는 이제 그들한테 내어줄 감정 한 톨 남지 않았는데.
여느때와 같이 무기력해지거나 우울감을 느낄 때도 있지만 회사도 잘 다니고 친구들이랑도 여기저기 놀러다닌다. 원하는 만큼 꾸준히는 아니지만 취미생활도 하고 운동도 하고 공부도 한다. 일상이 평화롭게 잘 흘러간다. 나를 위해 삶을 살아가는 느낌이다. 굳이 가족을 여기에 욱여넣어야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