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살

쓰니2025.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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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 불러서 같이 놀래?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1월이었다. 친구와 만나기로 한 식당에서 처음 너를 만났다.

처음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같은 동네에 사니, 밥 친구, 술 친구로 지내라며 소개 받게 되었다.

몇 번의 술자리와 가벼운 식사를 지나 치기 어린 마음이었던 건 지

금세 고백을 하고 연인이 되었다.


하지만 만남은 오래가지 않았다.

짧은 인연의 시작이 문제였는지,

막 성인이 된 미숙함 때문이었는지,

사소한 이유로 다툼은 잦아졌고

그렇게 스무 살의 첫 연애는 아주 짧게 스쳐 지나갔다.


그땐 내가 너를 진짜 좋아했던 건지,

아니면 ‘이제 성인이니까 옆에 누군가 있어야 한다’는

얄팍한 감정이었는지 조차 확신이 없었다.

금세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라 쉽게 생각했다.


그래도 처음 며칠은 괴로워했던 것 같다.

주변 지인들에게 술을 얻어 마시고, 술에 취해 이야기를 토해내고,

내 감정과 생각이 어떠했는지,

매일같이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며 술에 취해 말을 토해냈다.


몇 달이 지나고,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널 다시 만났다.

우연이라기엔 너무 맞춰진 만남이었지만—

돌이켜보면, 나를 보며 한숨 쉬던 친구가 슬쩍 연락을 해둔 것 같았다.

우리는 어색하게 마주앉아 근황을 주고받았다.

너는 지금 새로운 사람과 만나고 있으며 잘 지낸다고 했다.

너의 얘기를 들으며

나는 ‘또 한동안 술통에 빠지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 앞으로도 종종 연락하고 지내자

그 날의 그 마지막 한 마디가 고맙고 또 씁쓸했다.



해가 지나 스물한 살이 되었고, 입대를 앞두고 있었다.

어떻게 너에게 그 사실을 말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말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별다른 정리도 없이, 조용히 연락을 멈추고 입대하는 차에 올랐다.





자대에서 첫 전화를 한 날, 나는 전화기 앞에서 네 번호를 적은 노트를 오래 들여다봤다.


사실 번호는 이미 외우고 있었다.


괜히 가족에게 먼저 전화하고, 다른 친구에게 전화하며, 계속 빙빙 돌았다.


그래도 결국 수화기를 들어 너에게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 응 잘 지내?



- 어 나야 잘 지내지.. 요즘 학교 일이 많아서 바쁘네



가볍게 대답하며 이런얘기, 저런얘기, 수화기 넘어로 피곤한 기색과 함께 내뱉는 목소릴 가만히 듣고 있었다.





- 내가 누군지 말 안했는데, 알겠어?



- 음..글쎄 누군지 확신은 안하지만, xx이 아냐?




잊지 않았구나, 다행이다




군 생활 동안, 우리는 간간히 연락하며 서로의 일상을 나눴다.



휴가 나가면 가끔 만나기도 했다.





전역 후엔 자연스럽게 연락이 뜸해졌다.


나는 복학생으로 바쁘게 지냈고, 너도 첫 직장에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학교 수업 때문에 방문한 전시관에서 너를 다시 보게 되었다.



- 너 그 전시관에서 일한다고 하지 않았어? 오늘 수업 때문에 거기 가.


네 답장은 금방 왔다.


- 단체 방문 리스트에 너네 학교 이름 있길래 혹시 올까 했어.


그 문자를 보는 순간, 가슴 한쪽이 묘하게 울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너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전시실을 거의 다 돌아볼 때쯤 나는 너를 아직 보지 못했다.


그래서 다시 문자를 보냈다.


- 어디야? 거의 다 봤는데 너 안 보이는데.



문자를 보내고 나니

한쪽 구석에 작은 문을 통해 내려가는 지하 전시실 입구가 보였다.



괜히 발걸음이 빨라졌다.





지하 전시실은 1층보다 더 조용했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은은한 조명 아래, 작품 설명 패널들이 정돈된 줄을 이루고 있었고,


그 사이에서 검은 제복에 가까운 근무복을 입은 너를 발견했다.



너는 다른 관람객에게 작품 설명을 마치고 돌아서던 순간이었다.




먼발치에서 처음 너를 봤는데,


정말 이상하게도 몇 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게 느껴지지 않았다.


스무 살 그때의 너가 그대로 시간을 건너온 느낌이었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멈췄다.


순간 공간이 조용해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너만 또렷하게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너는 작게 미소를 보였다.



- 작품 설명좀 해주시죠?



관람객인 척, 작품에 관심 있는 척 말을 걸었다.





그때 뒤에 있던 학교 후배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 오빠, 큐레이터 언니 꼬시는 거예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내 얼굴이 바로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당황해서 손사래 치며


- 아냐, 그냥 친구야… 친구.


그렇게 횡설수설했다.





너는 다시 가볍게 웃었다.



그 웃음이, 예전의 너와 정말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웃음이었고


그걸 보는 순간 마음 한켠이 괜히 아렸다.




짧게 근황을 나누고 나서


나는 다시 전시를 따라 이동했지만,


솔직히 그때부터 전시 내용은 머릿속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학교로 돌아가는 버스에 앉자마자 나는 다른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 미치겠다. 몇 년 만에 다시 봤는데 나 또 뒤숭숭해





그 뒤로도 우리는 참 오래 연락을 이어왔다.


간간히 술 한잔도 하며


서로의 연애 얘기, 고민도 나누고,


일상에 대한 이야기와 가정사도 털어놓고,


아무에게나 말 못 할 이야기들을 서로에게는 편하게 이야기했다.



연락이 끊겨도 며칠 안 가서 누군가 먼저 연락했다.


긴 시간동안, 그게 습관처럼 자연스러워졌다.





얼마 전, 너는 내게 장난스럽게 말했다



- 마흔 돼서도 만나는 사람 없으면 장가 올래 ?



- 그래 뭐, 내가 청소 하나는 기깔나게 할 수 있어



장난스럽게 대답했지만



너의 말 한마디에 스무 살 겨울의 나로 돌아가버린 것 같았다.



편한데 긴장되고, 웃으면서도 가슴 한쪽이 묘하게 조여오는 그 느낌.


나는 아직도 너 앞에서만 그런다.





너에게 나는 친한 친구일 뿐이지만,


딱 그 만큼의 감정인 걸 알지만



나는 지금도 네 말 한마디, 네 반응 하나에 감정이 휘몰아친다.





스무 살의 헤어짐 이후로 15년 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정말 긴 시간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 너를 마음에 담아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