紳士) 한 무리가 항상 모여서 무뢰한들처럼 도박에 혈안이 되어 있곤 했다. 도박장에 던져지는 돈은 매일 5, 6만 원을 내려가지 않았는데, 이지용은 11만 원을 한꺼번에 던지기도 하였다. 요즈음 돈으로 환산한다면 억대 도박판이 매일 벌어진 셈이다. 나라가 망하여 백성은 굶주리는데 그는 도박귀족으로서 도박판에 엎어져 있었다. 그에게는 이미 귀공자의 청아한 풍모도 없고 위용도 찾아볼 수 없었으며 풍격도 없었다. 다만 도박배들과 무리지어 무뢰한의 대열에 끼어가고 있는 이지용일 따름이었다. 그가 조선 왕실의 종친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도박장에서는 믿기 어려웠다.
고종의 종친으로서 입신
이지용의 본관은 전주이며 전북 완산에서 태어났다. 초명은 은용(垠鎔)이며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 즉 사도세자의 5대손이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형인 흥인군 이최응(李最應)의 손자이며 이희하(李熙夏)의 아들인데 완영군 이재긍(李載兢)에게 입양되었으니 고종의 종질이 된다. 1887년 정시(庭試)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쳤다. 1895년에는 칙명으로 신사 수십 명과 함께 일본을 유람, 문물제도를 시찰하고 돌아왔으며, 1898년 황해도 관찰사가 되고 이듬해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900년 궁내부 협판이 되고 다시 이듬해 주일전권공사를 거쳐 의정부 찬정에 올랐으며, 1903년에 다시 주일전권공사로 부임하였다. 벼슬살이를 하는 동안 그는 뇌물을 받고 군수직 15개를 팔아 탄핵을 받는 등 결코 깨끗지 못한 인물로 통했다. 그의 할아버지 이최응은 매관매직으로 재물을 모아 9개나 되는 곳간에 온갖 보화를 가득 쌓아두는 것으로 장안에 유명했는데, 이지용도 그런 집안의 전통을 따른 것이라 볼 수도 있겠다. 한편 주일공사를 여러 차례 지낸 덕에 주한일본공사관과 밀통하였고 결국 1만 엔의 로비 자금에 넘어가서 한일의정서 체결에 도장을 찍고 만다.
'한일의정서' 체결로 일본 침략에 문을 열어주다
이지용은 1904년 2월 23일 외부대신 서리로서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와 한일의정서를 협정·조인하였다. 한일의정서는 일본에게 군사용 부지를 허용하고 일본군 사령관의 서울 주둔을 허락함으로써 조선을 일본의 대륙침략을 위한 군사기지로 내준 조약으로서, 일본에게는 5월의 '대한시설강령', 8월의 '제1차 한일협약'과 함께 1905년 11월의 '을사보호조약'으로 가는 교두보로서의 의미를 지녔다.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예상외로 일본군이 가는 곳마다 승리하자 조선 정계의 민심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간 한반도를 둘러싸고 러시아와 일본이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일본이 러시아의 만주 철병을 요구하며 전쟁을 도발하고 뤼순(旅順)·인천 해전에서 대첩을 거두기 시작하자, 조선 조정도 일본에 대하여 호의를 표명해 오던 박제순, 윤웅렬(尹雄烈), 이도재(李道宰), 권재형(權在衡) 등으로 내각의 주요 인물을 바꾸었다. 이 때 이지용도 외부대신 서리라는 중책에 앉게 되었다. 그리고 주한일본공사관은 그간 막대한 자금으로 매수해놓은 이지용이 외부대신이 되자 아주 손쉽게 한일의정서를 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른바 '한일공수동맹'이라 불리는 한일의정서 제4조의 내용을 보자. "대일본제국 정부는 제3국의 침해나 내란으로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영토 보전에 위험이 있을 경우 속히 필요한 조치를 행함이 가하다. 대한제국 정부는 대일본제국의 행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충분한 편의를 제공해야 한다. 대일본제국은 전항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임의로 수용할 수 있다." 또 제5조에서는 "대한제국 정부와 대일본제국 정부는 상호간에 승인 없이 차후 본 협정의 취의를 위반하는 협약을 제3국과 맺지 못한다."라고 못 박고 있다. 이 조약에 의해 조선은 꼼짝없이 일본의 군사기지로 전락해 버린 것이었다. 이후 2월 25일경부터 일본 군마와 병사들은 경성에 진주하기 시작했다. 인천에서 입경한 군대가 줄잡아 5만여 명, 군마가 1만여 필이었는데, 대궐 주변과 각 성문, 창덕궁, 문희묘, 원구단, 저경궁, 광제원, 관리서 등 모두 18개처를 군영으로 삼고, 서문 밖 민가 수백 채를 헐어서 마구간을 만들었다. 또 5강(한강, 동작진, 마포, 서강, 양화진) 연안에 천막을 치고 침처(寢處)를 만들었으니 밥 짓는 연기가 수백 리까지 퍼졌다. 또 3남 각 지방에도 일본군이 속속 도착하여 각처에 전선을 가설하고 병참을 설치했다. 남로(南路)는 동래에서 대구로, 남해에서 남원으로, 군산에서 전주로 향하여 세 방향으로 진군하였다. 또한 서로(西路)는 평양·삼화, 북로(北路)는 원산·성진에서 상호간의 거리를 110리로 하여 점차 랴오둥(遼東)을 향해 나아갔다. 가는 곳마다 민가에 주둔하거나 군수에게 군수품을 청하니 민심이 소요했다. 백성들은 난을 피하여 성이 텅텅 비고 군수는 관직을 버리고 상경하였다. 4월에는 주차군사령부를 설치하고 8월에는 2개 사단 가량 되는 조선주차군을 확대·재편함으로써 조선 방위를 담당한다 하였고, 9월에는 육군 중장 하세가와 요시미지(長谷川好道)가 '천황' 직속의 사령관에 임명되어 경성에 부임하였다. 또한 7월에는 군용 전선 및 철도선 보호라는 명목으로 치안유지를 주차군이 담당한다고 조선 정부에 통고하더니, 1905년 1월에는 경성과 그 주변의 치안경찰권을 조선 경찰 대신 일본군이 장악한다는 군령을 발포하였다. 군사방위권, 치안권이 모두 일본 군대의 수중으로 넘어가는 순간들이었다. 일본 공사는 일찍이 이용익(李容翊)이 주도하여 건설하려 했던 경의철도 부설권을 일본 회사에게 양여하도록 조선 조정에 강요하였으니, 이는 하루빨리 경의철도를 건설하여 군수 운반을 민활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숭례문에서 한강에 이르는 곳에 멋대로 구역을 점령하고서는 '군용지'라 이름 붙이고 푯말을 세웠으며 우리나라 사람들의 출입을 금하였다. 조선 땅 어디든지 빼앗고자 하는 땅이 있으면 군용지라 하면서 강탈해간 것이었다. 이에 온 국민의 비난은 당연히 의정서 체결의 당사자인 이지용과 그의 참서관 구완희(具完喜)에게 쏟아졌다. 그들을 매국노로 규탄하고 그들의 집에 폭탄을 던지기까지 하였다. 이에 당황한 일본은 일본 순사 10여 명을 항상 이지용에게 붙여서 그의 신변을 보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시 추밀원 의장이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특파대사로 우리나라에 보내 이른바 친선을 강조하면서 무력으로 시위를 진압하였다. 이토를 보낸 데 대한 답사로 우리나라에서도 3월 26일 이지용을 일본국 보빙대사(報聘大使)로 특파하였다. 그런데 이지용은 일본에 가서 훈1등욱일대수장(勳一等旭日大綬章)을 받는다. 의정서 체결의 공로를 일본이 모르는 체하지 않은 것이리라. 귀국한 뒤에도 그는 법부대신, 규장각 학사, 판돈녕 부사, 교육부 총감 등을 거쳐 1905년 농상공부 대신, 내부대신 등 요직을 역임하고 1905년 11월에는 특명대사로 다시 일본에 가서 욱일동화대수장(旭日桐花大綬章)을 수여받으니, 이 두번째 훈장은 바로 '을사보호조약'에 도장 찍은 공로에 대한 보상이었다.
을사조약 체결, "내가 아니면 누가 하랴"
의정서 체결에 이어 1905년 11월 17일 이지용이 당시 내부대신으로서 을사조약에도 '가'(可)를 하고서 돌아와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나는 오늘 병자호란시의 지천(遲川) 최명길(崔鳴吉)이 되고자 한다. 국가의 일을 우리가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大韓季年史}, 171면). 최명길은 병자호란시 주화론자로서 종사를 지키고자 했지만 이지용이 을사조약에 서명하여 지키고자 한 것은 일신의 영달과 재물이 아니었을까. 그 얘기를 듣는 사람마다 침 뱉고 욕하면서 가소롭다 하였음은 물론이고 격앙된 군중은 그의 집을 방화하였다. 그런데도 이지용은 11월 29일 이토의 귀국에 맞추어 열렸던 송별연에 각부 대신과 함께 참석하고 돌아와서는 고종황제에게 말하기를, "이토의 말이 통감이 오는 것은 단지 외교를 감독할 뿐이며 기타 정무는 절대로 간섭하지 않겠다. 하고, 만약 여러 사람이 한마음으로 정무를 잘 처리하면 1년이 되지 않아 당연히 국권을 돌려줄 것이다라고 합니다.' 하면서 거짓으로 고종을 안심시켰다. 그런 그가 1906년 10월 특파대사가 되어 일본에 간 것은 이토가 한국에 더 오래 머물러 줄 것을 청원하기 위해서였다. 을사조약 당시 내부 참서관으로 있던 조남익이라는 사람은 이지용과 도저히 같은 부서에서 일할 수 없다고 하면서 직에 나가지 않았고 또 교체를 원하면서도 이지용에게 청원하는 것이 수치스러워 자신의 집에 조용히 누워 있었다 한다.
일본인들과 놀아난 부인 이옥경의 친일 행각
이지용에게는 뛰어난 미모의 아내 이옥경(李玉卿:원성은 홍씨)이 있었다. 그녀는 1906년 한일부인회를 조직하였는데, 이는 일본 공사관원 하기와라 슈이치(萩原守一) 및 구니와케 쇼타로(國分象太郞)의 처와 궁내대신 민영철(閔泳喆), 외부대신 이하영(李夏榮), 학부대신 이재극(李載克), 한성판윤 박의병(朴義秉) 등 상류층 고관들의 부인 다수가 참여한 친일 부인단체로서 이옥경이 부회장을 맡았다. 이옥경은 특히 영리하고 예뻐서 일본인들에게 인기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하기와라와 정을 통했다가 또 구니와케와 통하고 뒤에는 하세가와와 정을 통하니 하기와라는 이를 분하게 여겼다. 그는 자신이 일본으로 귀국할 때 이옥경이 전송을 나와 입을 맞추자 그녀의 혀끝을 깨물어 상처를 입혔다. 이옥경은 아픈 것을 참고 돌아왔으나 장안 사람들은 작설가(嚼舌歌)를 지어 그녀를 조소했다. 또한 그녀가 여러 일본인을 바꿔가며 서로 좋아하고 일본인 또한 그것을 질투하는 등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장안에 널리 퍼지기도 하였다.(황현, {매천야록}) 그녀는 또 일본어와 영어를 할 줄 알았으며 양장을 하고 이지용과 함께 팔짱을 끼고 돌아다녔다. 또한 인력거를 타면 얼굴을 내놓고 궐련을 피우며 양양하게 돌아다녀서 행인들이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처음에는 이지용이 허랑방탕하다고 누차 고종의 견책을 받았으나, 그녀가 고종의 계비인 엄비(嚴妃)의 처소를 드나들면서 고종의 뜻을 회복시켜 이지용이 드디어 요직에 등용되었으니, 그녀의 방자한 행동을 이지용은 금할 수 없었다. 당시 세상 사람들은 "종척대가가 의(儀)를 좀먹어 먼저 망하니 외국인에 대하여 우리를 예의지국이라 칭하면 부끄럽지 않겠는가" 하고 탄식하였다 한다. 한편 미모와 기개가 모두 뛰어나기로 소문난 산홍이라는 진주 기생이 있었는데, 이지용이 천금을 가지고 그녀를 찾아가서는 첩이 되어줄 것을 요청하였다. 산홍은 사양하여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대감을 '오적'의 우두머리라 하는데, 첩은 비록 천한 기생이라고는 하나 스스로 사람 구실을 하고 있는데 무슨 까닭으로 역적의 첩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의 권력과 재물로도 한 미인의 기개를 사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또 이지용의 아들 이해충(李海忠)이 일본에 가서 학교에 입학하려 하였더니 유학생들이 "우리들이 비록 타국에 있지만 역적의 아들과 함께 배울 수는 없다" 하고 내쫓아 입학을 할 수 없었다. 이지용이 직접 일본에 건너가서 수백 원을 기부하며, 유학생들의 여비를 보조하려 하였지만 유학생들은 "우리들은 비록 역적의 재물을 쓰지 않아도 이제까지 죽지 않았다"라고 준엄히 거부하였다. 1907년 3월 오기호(吳基鎬), 나인영(羅寅永) 등 을사오적 암살단이 이지용을 죽이러 갔을 때 이지용은 용산 강정에 있었다. 이지용 암살을 맡은 사람이 가서 엿보니 사동(寺洞)에서의 권중현 암살 미수사건이 이미 전화로 보고 되어서 병정 60여 명이 급히 달려와 호위하고 있었으므로 역시 죽이지 못하였다. 사람들은 모두들 안타까운 탄식을 토했다.
도박에 탕진한 백작 수당 3000원
1907년 봄 대구의 서상돈(徐相敦), 김광제(金光濟) 등이 단연회(斷煙會)를 설치하고 국채보상기금을 모금하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국채 총액 1300만 원을 갚기 위해 인구 2000만이 모두 담배를 끊으면 1인당 1개월에 담뱃값으로 새 화폐 20전씩을 거둘 수 있고 그렇게만 하면 석 달 안에 국채 원금을 다 갚을 수 있다는 취지였고 전국적으로 큰 호응이 있었다. 고종과 황태자도 이에 호응하여 권련을 멀리하자 각급 학교 생도들과 군인들도 모두 이구동성으로 "우리 주상께서 그렇게 하시는데 하물며 우리들이랴" 하고 담배를 끊었다. 이에 일본인들이 이지용을 협박하여 이를 금지시키게 하려 하였으나 이지용은 "우리 국민들이 나를 오적의 괴수로 지목하고 있어 몸 둘 곳이 없소. 다른 일은 금할 수 있으나 오직 이것만은 가히 금할 수 없소"라고 하였다. 정미조약에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과 통감부의 이토가 조인할 때도 이지용은 나서기를 사양하며 "우리는 을사조약을 맺은 이래 위로는 황제를 우러러 뵈올 수 없고 아래로는 백성을 대할 수 없어 제대로 허리를 펴서 얼굴을 쳐들 수도 없는 형편인데 오늘에 이르러 또 이 안을 담당하는 것은 어렵지 않느냐" 하고서 조인에서 빠졌다. 한일의정서 체결, 을사조약 서명 등으로 인하여 역적 괴수로 지목된 후 방화, 암살 위협, 갖은 모욕 등에 겁을 먹어서인지, 아니면 더 이상 친일의 오명을 뒤집어쓰지 않아도 일본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고 판단해서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1907년 5월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고 박람회 시찰을 위해 세 번째 도일하여, 다음해 2월에 대훈(大勳)에 특서되어 이화대수장(李花大綬章)을 받았다. 1910년 한일'합방' 때는 일본 정부로부터 백작의 작위를 받고 연 수당 3000원을 받아 도박에 탕진하다가 1928년 사망했다.
◦ 1905년 군부대신으로 '을사조약' 조인 ◦ 1910년 한일'합방' 공로로 훈1등 자작 ◦ 1910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명성황후의 환심을 사 출세의 길로
이근택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의 조인에 찬성한 을사오적 중의 한 명으로, 친일매국노로 국민의 지탄을 받아 왔다. 그러나 이근택이 처음부터 친일적인 행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고종의 측근으로서 근황주의자이며 친 러시아적인 인물로 간주되었었다. 그런 그가 왜 친일을 할 수밖에 없었고, 왜 을사오적의 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는가는 그의 정치적 노정을 통해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근택은 문벌 있는 가문의 출신이 아니었다. 그는 1865년 충청북도 충주의 한 무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후 그가 향리에 있을 때인 1882년 임오군란이 발생하였는데, 이때 명성황후가 충주로 피난오자, 그는 매일 신선한 생선을 명성황후에게 바쳤다. 이 공으로 명성황후가 환궁한 뒤 1883년에 남행선전관으로 임명되었다. 왕실과의 직접적인 인연으로 출세의 길이 열린 것이다. 그는 1884년 무과에 합격한 뒤 1894년까지는 지방관 등을 거치면서 중앙에 진출할 기회를 모색하였다. 1896년 2월 고종이 그의 거처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기는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조선은 본격적으로 러시아와 일본의 각축장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환궁을 요구하는 여론이 거세지고, 뿐만 아니라 환궁을 모의하는 등의 여러 가지 사건이 발생하는 등 친러파와 친일파의 미묘한 정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당시 이근택은 친위대 제3대대장으로 있었다. 이근택은 이창렬(李彰烈) 등과 함께 국왕의 환궁을 도모하였다. 이들은 명성황후의 1주기를 기하여 고종이 명례궁에 나와서 친히 제사를 지내는 기회를 이용하여 왕의 환궁을 이루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모의는 이용태(李容泰)의 고발로 실패하였고 이근택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제주도에 유배된 이근택은 대한제국이 수립되던 1897년에 민영기(閔泳綺)에 의해 석방되어 한성판윤, 경무사를 역임하였다. 이후 대한제국 시기에 이근택이 요직을 역임할 수 있었던 것은 아주 우연한 계기를 통해서였다. 이근택이 일본상점에 들렀다가 우연히 수대(繡帶:허리띠)가 있는 것을 보고, 명성황후의 것이라 판단하여 일본인에게서 6만 냥을 주고 사서 고종에게 헌상하였다.(황현, {매천야록}) 이로 말미암아 고종의 총애를 얻게 된 이근택은 대한제국 시기 주요 요직을 거치면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는 주로 경무사, 경위원 총관, 헌병사령관, 원수부 검사국장 등 경찰·군사부문에서 활약하였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황실 중심의 근대화정책이 수행되었는데, 군사·경찰부문에서는 이근택이 책임을 지고, 재정·외교부문에서는 이용익(李容翊)이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근택은 이용익 등과 함께 고종의 측근으로서 근황주의적인 인물이었고 대한제국시기 정권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친러파 전력을 씻기 위해 더욱 열성적으로 친일
당시 국내외적인 상황은 조선을 사이에 두고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우위권 쟁탈전이 계속되는 형국이었는데, 이근택, 이용익 등을 주축으로 한 대한제국 정부는 대외관계에서 친러·반일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고종과 당시의 정부대신들은 1895년 민비시해사건 이후 배일 감정을 지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은 러시아의 적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어서 친 러시아적인 경향이 강하였다. 이근택과 같이 일본의 침략정책에 반대하는 입장에 서 있던 사람은 이용익이었다. 비록 두 사람은 정쟁 관계에 있었지만, 러일 양국 사이에서 한국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중립적인 정책을 취해야 하며, 러시아나 미국 등 열국의 보호 하에서의 한국의 독립을 지향하고자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일본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친러적인 입장이었던 이근택은 고종에게 일본은 러시아와 개전할 처지도 못되고 설령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러시아의 승리는 필연적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시국이 급박할 경우에는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할 것을 청하는 등(外務省 編, {日本外交文書} 37권 1책) 일본보다는 러시아세력에 의지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이근택은 김인수(金仁洙)를 러시아에 파견하여 조선에서 일본의 패퇴는 일전(一戰)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한다는 뜻을 전하는가 하면, 차병(借兵)을 요청하는 서한을 러시아 총독 알렉셰이프 대장에게 비밀리에 보내기까지 하였다. 한편 이근택을 비롯한 대한제국 정부의 대신들이 친러적 경향을 띠면서 일본의 침략정책에 반대하는 것은 일본 측으로서는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일본이 곧 있게 될 러시아와의 전쟁을 유리한 국면으로 이끌고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들 친러·반일적인 정부대신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일본은 요주의 인물인 이들의 행동을 탐지하는 등, 이들을 매수하려고 하였다. 나아가 일본은 고종의 측근인 이근택, 이용익 등을 매수하여 자국에 협력하게 하려 들었다. 일본은 그 동안 매수·회유해 온 이지용을 더욱 독려하는 한편, 강력하게 배일적인 입장을 취해오던 이용익을 일본으로 납치하였다. 그리고 다소 친일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던 이근택을 여러 차례 협박하여 일본에 반대하지 못하게 한 뒤, 군사적인 위협을 가하면서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에 조인할 것을 강요했다. 이 의정서는 명목상 한국의 독립을 위한 것이라고 하나 실제로는 한국의 주권을 완전히 빼앗아 식민지화하는 초석을 다지기 위한 것이었다. 러일전쟁의 발발과 일본에 의한 '한일의정서'의 체결로 한국민의 배일감정은 더욱 심화되었고, 이 같은 정부대신에 대한 회유·납치는 대신들을 친일적인 경향으로 돌아서게 만들었다. 더구나 이근택을 비롯한 이들 정부대신들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우세해지면서 일본의 침략정책에 협조하는 세력들로 변해갔다. 이미 1903년 9월부터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는 을미사변 때의 망명자에 대한 처분건 등을 내세워 정부대신 이지용, 민영철(閔泳喆), 이근택 등을 매수하는 데 본격적으로 착수하였다. 이지용은 1만 원에 매수되어 궁중의 비밀을 낱낱이 일본공사에게 보고하면서 조약 체결에 열심히 협력하였고, 당시까지 배일적이던 이근택은 일본의 위협을 받게 됨에 따라 생각을 바꾸어 서서히 친일적인 경향으로 돌아서기 시작하였다. 비록 이근택이 친러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다 해도 그로서는 완전히 일본과의 관계를 도외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러시아에 보호를 요청하면서도 일본 측으로부터 또한 신용을 잃지 않으려 하였던 측면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가 단지 협박·매수 때문에 일본의 침략정책에 협조하기 시작했을까. 그것은 권모술수에 능하고 정치적 수완이 탁월하였던 이근택이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을 감지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즉, 이근택이 비록 친러적인 입장을 표방하고 있었을지라도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력이 점점 강화됨에 따라, 이근택 자신의 출세에 일본세력을 이용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근택은 이미 일본에 매수되어 친일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던 이지용이나 민영철 등과 관계를 긴밀히 유지하기 시작하였고 이것이 전환점이 되어 이근택은 일본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기 시작하였다. 러일전쟁이 일본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자 일본은 '한일의정서'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서, 1904년 8월 22일에 '외국인 고빙(雇聘)조약'을 강요, 체결하여 고문정치를 단행하였다. 마침내 일본은 1905년 11월 대신들을 매수하거나 위협을 통해 비밀리에 '을사조약'을 강요함으로써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여 소위 보호국으로 만들어 식민지화의 옥쇄를 더욱 조이기 시작하였다. 이근택도 일본 측에 매수되어 적극적으로 조약 체결에 협조하였는데, 친러적인 혐의로 일본공사의 눈 밖에 나 있던 터라 오히려 열성적이었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이지용으로 하여금 일본공사관과 계속 연결을 유지하게 한다든가, 자신의 동생 이근상(李根湘)으로 하여금 일본공사관 사람들과 자주 접촉을 하게 하는 등, 친러적인 요소가 남아 있다는 혐의를 받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드디어 친러파라는 혐의를 풀고 을사조약 조인 이전인 9월 군부대신직에 오르게 되면서, 이근택의 친일행위는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즉, 그는 30만원이라는 기밀비를 일제로부터 받고 궁중과 부중의 모든 기밀사항을 정탐하여 일본에게 제보하는 등의 일도 서슴지 않게 되었다. 이근택은 을사조약의 조인에 협조한 공으로 조약이 체결된 그 다음해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勳一等)을 얻고 태극장(太極章)을 받았다.
을사오적 중에서도 가장 교활하고 악독하기로 소문나
이근택의 친일성향에 대해 황현은 이를 다음과 같이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근택은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지(長谷川好道)와는 형제의를 맺었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게 의탁하여 의자(義子)가 되었다.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었으며 일본 신발까지 신고 일본 수레에 앉아 항상 일본군의 호위를 받으며 출입하였다. 한 야인의 눈에 비친 이근택의 모습이다. 이렇게 일본이라는 보호막을 두르고 일본에 부화뇌동하였으니, 을사조약이 체결된 직후 그는 자객의 습격을 받아 중상을 입기도 한 것이다. '을사보호조약'의 체결을 알게 된 국민들은 일본의 침략성을 규탄하고 조약 체결에 찬성한 대신들을 공박하는 등 그 분노가 극에 달했다. 일제히 궐기하여 조약의 무효를 부르짖고 오적을 규탄하는 유생, 관료들의 상소투쟁이 연이어 일어났다. 또한 오적에 대한 암살기도가 계속 모의되는 등 민중의 적극적인 저항도 일어났다. 이근택은 오적 중에서도 가장 교활하고 악독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기에 기산도(奇山度) 같은 애국의사들로부터 습격을 받았다. 기산도는 이근택의 집을 출입하던 사관학도였는데, 이근택이 을사조약의 조인에 찬동한 소행에 분노하여 전(前) 경무사 구완희(具完喜), 전 경무관 이세진(李世鎭) 등 수십 명의 자객을 모집하여 이근택을 암살하려 하였다. 그들은 칼을 품고 가서 이근택을 죽이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 후 을사오적에 대한 암살기도가 나인영(羅寅永), 오기호(吳基鎬) 등에 의해 계획되기도 하였다. 이는 일본의 침략에 대한 국민들의 규탄과 울분이 조약을 체결한 매국노를 피습하거나 암살하려는 일로 표출되었던 것이다. 심지어 이근택의 노비도 상전의 친일행위에 분노할 정도였다. 조약이 체결되던 날, 퇴궐한 이근택은 가족을 불러놓고 궁중에서 신조약을 조인하던 광경을 설명하였다. 이근택은 자신이 백성을 위하여 조약서에 가(可)함이라고 썼고, 일본의 신임을 얻어 대 훈공을 얻게 되었으니, 이로부터 권세를 더욱더 누릴 수 있게 되었다고 득의만만하였다. 그러면서도 이근택은 "내 다행히 죽음을 면했다"라고 하였다. 이때 마침 비녀(婢女) 한 명이 부엌에 있다가 그 소리를 듣고 부엌칼을 집어 들고 뛰어나왔다. 이근택이 한규설(韓奎卨)의 딸을 며느리를 삼았을 때, 그 며느리가 데리고 온 속칭 교전비(轎前婢)였던 그녀는 "이근택아! 네놈이 대신이 되어 나라가 위태한데도 죽지 아니하고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하느냐. 너는 참으로 개돼지만도 못하구나. 내 비록 천인이라 하더라도 어찌 개돼지의 종이 되겠는가. 내 힘이 약해서 능히 너를 만 토막으로 참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차라리 옛 주인에게 돌아가겠다."고 소리치고 한규설의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황현, {매천야록}) 또한 한 취객이 그의 수레를 당기며 흘겨보고 말하기를 "네가 왜놈이라 하는 이근택인가. 오적의 괴수로 그 영화와 부귀가 이에서 그치는가" 하니 이근택이 크게 노하여 그를 결박 지어서 경찰서로 보냈다. 그 취객은 모진 고문으로 기절하였다가 밤이 깊어 깨어나서 말하기를 "네놈은 반드시 나를 죽일 것이다. 나 또한 명백히 욕질을 하였으니 죽어도 통쾌하다. 저들의 손에 죽느니 스스로 죽자" 하고 드디어 의복을 찢어 목을 매어 자결했다고 한다.(황현, {매천야록}) 이와 같이 이근택은 민중의 분노와 지탄을 받으면서 일본세력을 배경으로 하여, 내각에서는 한 대신에 불과하면서도 궁중에서는 수상 이상의 권력을 행사하였다. 그의 오만불손함은 통감의 진의라 하면서 자신을 신임하던 고종을 기만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안하무인격인 이근택의 이러한 태도와 아울러 을사오적에 대한 민중의 분노와 지탄이 더욱더 거세지자, 이근택은 한때 파면되어 관직을 잃기도 했다. 이에 이근택은 이토, 하세가와, 아카시(明石塚) 등을 만나 잃어버린 군부대신직을 되찾고자 운동을 하고 다녔다. 이 당시의 신문에는 이근택의 엽관행각들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전(前) 군부대신 이근택이 이미 체직된 직위를 얻고자 운동한다는데, 송병준에게 소개하여 일본인 하세가와 대장에게 청하려 하였지만 첫 번째는 송병준이 접견하고 두 번째는 거절하여 만나지도 못하였고…….({황성신문}, 1906. 12. 3) 전 군부대신 이근택이 통감관저에 갔다가 접견도 못하였고 하세가와 대장을 방문하였는데 역시 접견 못하였고…….({대한매일신보}, 1907. 10. 8) 중추원 고문 이근택이 통감부 아카시 장관에게 비밀 교섭하여 대신직을 얻기 위해 운동중이고…….({대한매일신보}, 1909. 6. 21) 중추원 고문 이근택이 이토 추밀원장이 도한(渡韓)한 후 대신 한자리라도 얻으려고…….({황성신문}, 1909. 7. 6) 이근택, 이근상은 대신자리라도 얻으려고 한다.({경향신문}, 1910. 3. 25) 이 기사들은 한 출세지향적인 인간이 권력의 자리에서 쫓겨났을 때, 다시 그 자리에 오르고자 몸부림치는 비열한 모습을 적절히 보여주는 대목들이다. 이러한 그의 친일 행위는 1910년 8월 한일'합방'까지 이어져, 일본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대가로 일본으로부터 훈1등 자작과 미국 공채 5만 원을 받았으며, '병합' 후에는 그 해 10월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이 되었다가, 종4위 훈1등으로 1919년 12월 17일 사망하였다. 이근택의 작위는 아들 이창훈(李昌薰)이 습작함으로써 대를 이어 일본의 '충량한 신민'이 되었다. 이와 함께 이근택의 형인 이근호(李根澔), 아우인 이근상 등도 한일'합방'과 동시에 자작의 작위를 받았다. 이는 당시의 친일행각이 한 개인뿐만 아니라, 일가친척의 차원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으로써, 특기할 만한 일이다.
일본에게 나라를 팔이먹은 배신자들 을사오적
紳士) 한 무리가 항상 모여서 무뢰한들처럼 도박에 혈안이 되어 있곤 했다. 도박장에 던져지는 돈은 매일 5, 6만 원을 내려가지 않았는데, 이지용은 11만 원을 한꺼번에 던지기도 하였다. 요즈음 돈으로 환산한다면 억대 도박판이 매일 벌어진 셈이다. 나라가 망하여 백성은 굶주리는데 그는 도박귀족으로서 도박판에 엎어져 있었다. 그에게는 이미 귀공자의 청아한 풍모도 없고 위용도 찾아볼 수 없었으며 풍격도 없었다. 다만 도박배들과 무리지어 무뢰한의 대열에 끼어가고 있는 이지용일 따름이었다. 그가 조선 왕실의 종친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도박장에서는 믿기 어려웠다.
고종의 종친으로서 입신
이지용의 본관은 전주이며 전북 완산에서 태어났다. 초명은 은용(垠鎔)이며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 즉 사도세자의 5대손이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형인 흥인군 이최응(李最應)의 손자이며 이희하(李熙夏)의 아들인데 완영군 이재긍(李載兢)에게 입양되었으니 고종의 종질이 된다.
1887년 정시(庭試)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쳤다. 1895년에는 칙명으로 신사 수십 명과 함께 일본을 유람, 문물제도를 시찰하고 돌아왔으며, 1898년 황해도 관찰사가 되고 이듬해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900년 궁내부 협판이 되고 다시 이듬해 주일전권공사를 거쳐 의정부 찬정에 올랐으며, 1903년에 다시 주일전권공사로 부임하였다.
벼슬살이를 하는 동안 그는 뇌물을 받고 군수직 15개를 팔아 탄핵을 받는 등 결코 깨끗지 못한 인물로 통했다. 그의 할아버지 이최응은 매관매직으로 재물을 모아 9개나 되는 곳간에 온갖 보화를 가득 쌓아두는 것으로 장안에 유명했는데, 이지용도 그런 집안의 전통을 따른 것이라 볼 수도 있겠다. 한편 주일공사를 여러 차례 지낸 덕에 주한일본공사관과 밀통하였고 결국 1만 엔의 로비 자금에 넘어가서 한일의정서 체결에 도장을 찍고 만다.
'한일의정서' 체결로 일본 침략에 문을 열어주다
이지용은 1904년 2월 23일 외부대신 서리로서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와 한일의정서를 협정·조인하였다. 한일의정서는 일본에게 군사용 부지를 허용하고 일본군 사령관의 서울 주둔을 허락함으로써 조선을 일본의 대륙침략을 위한 군사기지로 내준 조약으로서, 일본에게는 5월의 '대한시설강령', 8월의 '제1차 한일협약'과 함께 1905년 11월의 '을사보호조약'으로 가는 교두보로서의 의미를 지녔다.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예상외로 일본군이 가는 곳마다 승리하자 조선 정계의 민심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간 한반도를 둘러싸고 러시아와 일본이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일본이 러시아의 만주 철병을 요구하며 전쟁을 도발하고 뤼순(旅順)·인천 해전에서 대첩을 거두기 시작하자, 조선 조정도 일본에 대하여 호의를 표명해 오던 박제순, 윤웅렬(尹雄烈), 이도재(李道宰), 권재형(權在衡) 등으로 내각의 주요 인물을 바꾸었다. 이 때 이지용도 외부대신 서리라는 중책에 앉게 되었다. 그리고 주한일본공사관은 그간 막대한 자금으로 매수해놓은 이지용이 외부대신이 되자 아주 손쉽게 한일의정서를 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른바 '한일공수동맹'이라 불리는 한일의정서 제4조의 내용을 보자. "대일본제국 정부는 제3국의 침해나 내란으로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영토 보전에 위험이 있을 경우 속히 필요한 조치를 행함이 가하다. 대한제국 정부는 대일본제국의 행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충분한 편의를 제공해야 한다. 대일본제국은 전항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임의로 수용할 수 있다." 또 제5조에서는 "대한제국 정부와 대일본제국 정부는 상호간에 승인 없이 차후 본 협정의 취의를 위반하는 협약을 제3국과 맺지 못한다."라고 못 박고 있다. 이 조약에 의해 조선은 꼼짝없이 일본의 군사기지로 전락해 버린 것이었다.
이후 2월 25일경부터 일본 군마와 병사들은 경성에 진주하기 시작했다. 인천에서 입경한 군대가 줄잡아 5만여 명, 군마가 1만여 필이었는데, 대궐 주변과 각 성문, 창덕궁, 문희묘, 원구단, 저경궁, 광제원, 관리서 등 모두 18개처를 군영으로 삼고, 서문 밖 민가 수백 채를 헐어서 마구간을 만들었다. 또 5강(한강, 동작진, 마포, 서강, 양화진) 연안에 천막을 치고 침처(寢處)를 만들었으니 밥 짓는 연기가 수백 리까지 퍼졌다.
또 3남 각 지방에도 일본군이 속속 도착하여 각처에 전선을 가설하고 병참을 설치했다. 남로(南路)는 동래에서 대구로, 남해에서 남원으로, 군산에서 전주로 향하여 세 방향으로 진군하였다. 또한 서로(西路)는 평양·삼화, 북로(北路)는 원산·성진에서 상호간의 거리를 110리로 하여 점차 랴오둥(遼東)을 향해 나아갔다. 가는 곳마다 민가에 주둔하거나 군수에게 군수품을 청하니 민심이 소요했다. 백성들은 난을 피하여 성이 텅텅 비고 군수는 관직을 버리고 상경하였다.
4월에는 주차군사령부를 설치하고 8월에는 2개 사단 가량 되는 조선주차군을 확대·재편함으로써 조선 방위를 담당한다 하였고, 9월에는 육군 중장 하세가와 요시미지(長谷川好道)가 '천황' 직속의 사령관에 임명되어 경성에 부임하였다. 또한 7월에는 군용 전선 및 철도선 보호라는 명목으로 치안유지를 주차군이 담당한다고 조선 정부에 통고하더니, 1905년 1월에는 경성과 그 주변의 치안경찰권을 조선 경찰 대신 일본군이 장악한다는 군령을 발포하였다. 군사방위권, 치안권이 모두 일본 군대의 수중으로 넘어가는 순간들이었다.
일본 공사는 일찍이 이용익(李容翊)이 주도하여 건설하려 했던 경의철도 부설권을 일본 회사에게 양여하도록 조선 조정에 강요하였으니, 이는 하루빨리 경의철도를 건설하여 군수 운반을 민활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숭례문에서 한강에 이르는 곳에 멋대로 구역을 점령하고서는 '군용지'라 이름 붙이고 푯말을 세웠으며 우리나라 사람들의 출입을 금하였다. 조선 땅 어디든지 빼앗고자 하는 땅이 있으면 군용지라 하면서 강탈해간 것이었다.
이에 온 국민의 비난은 당연히 의정서 체결의 당사자인 이지용과 그의 참서관 구완희(具完喜)에게 쏟아졌다. 그들을 매국노로 규탄하고 그들의 집에 폭탄을 던지기까지 하였다. 이에 당황한 일본은 일본 순사 10여 명을 항상 이지용에게 붙여서 그의 신변을 보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시 추밀원 의장이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특파대사로 우리나라에 보내 이른바 친선을 강조하면서 무력으로 시위를 진압하였다.
이토를 보낸 데 대한 답사로 우리나라에서도 3월 26일 이지용을 일본국 보빙대사(報聘大使)로 특파하였다. 그런데 이지용은 일본에 가서 훈1등욱일대수장(勳一等旭日大綬章)을 받는다. 의정서 체결의 공로를 일본이 모르는 체하지 않은 것이리라. 귀국한 뒤에도 그는 법부대신, 규장각 학사, 판돈녕 부사, 교육부 총감 등을 거쳐 1905년 농상공부 대신, 내부대신 등 요직을 역임하고 1905년 11월에는 특명대사로 다시 일본에 가서 욱일동화대수장(旭日桐花大綬章)을 수여받으니, 이 두번째 훈장은 바로 '을사보호조약'에 도장 찍은 공로에 대한 보상이었다.
을사조약 체결, "내가 아니면 누가 하랴"
의정서 체결에 이어 1905년 11월 17일 이지용이 당시 내부대신으로서 을사조약에도 '가'(可)를 하고서 돌아와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나는 오늘 병자호란시의 지천(遲川) 최명길(崔鳴吉)이 되고자 한다. 국가의 일을 우리가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大韓季年史}, 171면). 최명길은 병자호란시 주화론자로서 종사를 지키고자 했지만 이지용이 을사조약에 서명하여 지키고자 한 것은 일신의 영달과 재물이 아니었을까. 그 얘기를 듣는 사람마다 침 뱉고 욕하면서 가소롭다 하였음은 물론이고 격앙된 군중은 그의 집을 방화하였다.
그런데도 이지용은 11월 29일 이토의 귀국에 맞추어 열렸던 송별연에 각부 대신과 함께 참석하고 돌아와서는 고종황제에게 말하기를, "이토의 말이 통감이 오는 것은 단지 외교를 감독할 뿐이며 기타 정무는 절대로 간섭하지 않겠다. 하고, 만약 여러 사람이 한마음으로 정무를 잘 처리하면 1년이 되지 않아 당연히 국권을 돌려줄 것이다라고 합니다.' 하면서 거짓으로 고종을 안심시켰다. 그런 그가 1906년 10월 특파대사가 되어 일본에 간 것은 이토가 한국에 더 오래 머물러 줄 것을 청원하기 위해서였다.
을사조약 당시 내부 참서관으로 있던 조남익이라는 사람은 이지용과 도저히 같은 부서에서 일할 수 없다고 하면서 직에 나가지 않았고 또 교체를 원하면서도 이지용에게 청원하는 것이 수치스러워 자신의 집에 조용히 누워 있었다 한다.
일본인들과 놀아난 부인 이옥경의 친일 행각
이지용에게는 뛰어난 미모의 아내 이옥경(李玉卿:원성은 홍씨)이 있었다. 그녀는 1906년 한일부인회를 조직하였는데, 이는 일본 공사관원 하기와라 슈이치(萩原守一) 및 구니와케 쇼타로(國分象太郞)의 처와 궁내대신 민영철(閔泳喆), 외부대신 이하영(李夏榮), 학부대신 이재극(李載克), 한성판윤 박의병(朴義秉) 등 상류층 고관들의 부인 다수가 참여한 친일 부인단체로서 이옥경이 부회장을 맡았다. 이옥경은 특히 영리하고 예뻐서 일본인들에게 인기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하기와라와 정을 통했다가 또 구니와케와 통하고 뒤에는 하세가와와 정을 통하니 하기와라는 이를 분하게 여겼다. 그는 자신이 일본으로 귀국할 때 이옥경이 전송을 나와 입을 맞추자 그녀의 혀끝을 깨물어 상처를 입혔다. 이옥경은 아픈 것을 참고 돌아왔으나 장안 사람들은 작설가(嚼舌歌)를 지어 그녀를 조소했다. 또한 그녀가 여러 일본인을 바꿔가며 서로 좋아하고 일본인 또한 그것을 질투하는 등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장안에 널리 퍼지기도 하였다.(황현, {매천야록})
그녀는 또 일본어와 영어를 할 줄 알았으며 양장을 하고 이지용과 함께 팔짱을 끼고 돌아다녔다. 또한 인력거를 타면 얼굴을 내놓고 궐련을 피우며 양양하게 돌아다녀서 행인들이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처음에는 이지용이 허랑방탕하다고 누차 고종의 견책을 받았으나, 그녀가 고종의 계비인 엄비(嚴妃)의 처소를 드나들면서 고종의 뜻을 회복시켜 이지용이 드디어 요직에 등용되었으니, 그녀의 방자한 행동을 이지용은 금할 수 없었다. 당시 세상 사람들은 "종척대가가 의(儀)를 좀먹어 먼저 망하니 외국인에 대하여 우리를 예의지국이라 칭하면 부끄럽지 않겠는가" 하고 탄식하였다 한다.
한편 미모와 기개가 모두 뛰어나기로 소문난 산홍이라는 진주 기생이 있었는데, 이지용이 천금을 가지고 그녀를 찾아가서는 첩이 되어줄 것을 요청하였다. 산홍은 사양하여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대감을 '오적'의 우두머리라 하는데, 첩은 비록 천한 기생이라고는 하나 스스로 사람 구실을 하고 있는데 무슨 까닭으로 역적의 첩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의 권력과 재물로도 한 미인의 기개를 사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또 이지용의 아들 이해충(李海忠)이 일본에 가서 학교에 입학하려 하였더니 유학생들이 "우리들이 비록 타국에 있지만 역적의 아들과 함께 배울 수는 없다" 하고 내쫓아 입학을 할 수 없었다. 이지용이 직접 일본에 건너가서 수백 원을 기부하며, 유학생들의 여비를 보조하려 하였지만 유학생들은 "우리들은 비록 역적의 재물을 쓰지 않아도 이제까지 죽지 않았다"라고 준엄히 거부하였다.
1907년 3월 오기호(吳基鎬), 나인영(羅寅永) 등 을사오적 암살단이 이지용을 죽이러 갔을 때 이지용은 용산 강정에 있었다. 이지용 암살을 맡은 사람이 가서 엿보니 사동(寺洞)에서의 권중현 암살 미수사건이 이미 전화로 보고 되어서 병정 60여 명이 급히 달려와 호위하고 있었으므로 역시 죽이지 못하였다. 사람들은 모두들 안타까운 탄식을 토했다.
도박에 탕진한 백작 수당 3000원
1907년 봄 대구의 서상돈(徐相敦), 김광제(金光濟) 등이 단연회(斷煙會)를 설치하고 국채보상기금을 모금하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국채 총액 1300만 원을 갚기 위해 인구 2000만이 모두 담배를 끊으면 1인당 1개월에 담뱃값으로 새 화폐 20전씩을 거둘 수 있고 그렇게만 하면 석 달 안에 국채 원금을 다 갚을 수 있다는 취지였고 전국적으로 큰 호응이 있었다. 고종과 황태자도 이에 호응하여 권련을 멀리하자 각급 학교 생도들과 군인들도 모두 이구동성으로 "우리 주상께서 그렇게 하시는데 하물며 우리들이랴" 하고 담배를 끊었다.
이에 일본인들이 이지용을 협박하여 이를 금지시키게 하려 하였으나 이지용은 "우리 국민들이 나를 오적의 괴수로 지목하고 있어 몸 둘 곳이 없소. 다른 일은 금할 수 있으나 오직 이것만은 가히 금할 수 없소"라고 하였다.
정미조약에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과 통감부의 이토가 조인할 때도 이지용은 나서기를 사양하며 "우리는 을사조약을 맺은 이래 위로는 황제를 우러러 뵈올 수 없고 아래로는 백성을 대할 수 없어 제대로 허리를 펴서 얼굴을 쳐들 수도 없는 형편인데 오늘에 이르러 또 이 안을 담당하는 것은 어렵지 않느냐" 하고서 조인에서 빠졌다. 한일의정서 체결, 을사조약 서명 등으로 인하여 역적 괴수로 지목된 후 방화, 암살 위협, 갖은 모욕 등에 겁을 먹어서인지, 아니면 더 이상 친일의 오명을 뒤집어쓰지 않아도 일본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고 판단해서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1907년 5월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고 박람회 시찰을 위해 세 번째 도일하여, 다음해 2월에 대훈(大勳)에 특서되어 이화대수장(李花大綬章)을 받았다. 1910년 한일'합방' 때는 일본 정부로부터 백작의 작위를 받고 연 수당 3000원을 받아 도박에 탕진하다가 1928년 사망했다.
⊙ 참고문헌 ⊙
◦ 黃 玹,{梅泉野錄}.
◦ 尹孝定,{風雲韓末秘史}.
◦ 鄭 喬,{大韓季年史}.
◦ 大村友之丞,{朝鮮貴族列傳}, 1910.
◦ 細井肇,{現代漢城の風雲と名士}, 1910.
이근택 (李根澤, 1865∼1919)
◦ 1905년 군부대신으로 '을사조약' 조인
◦ 1910년 한일'합방' 공로로 훈1등 자작
◦ 1910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명성황후의 환심을 사 출세의 길로
이근택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의 조인에 찬성한 을사오적 중의 한 명으로, 친일매국노로 국민의 지탄을 받아 왔다. 그러나 이근택이 처음부터 친일적인 행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고종의 측근으로서 근황주의자이며 친 러시아적인 인물로 간주되었었다.
그런 그가 왜 친일을 할 수밖에 없었고, 왜 을사오적의 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는가는 그의 정치적 노정을 통해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근택은 문벌 있는 가문의 출신이 아니었다. 그는 1865년 충청북도 충주의 한 무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후 그가 향리에 있을 때인 1882년 임오군란이 발생하였는데, 이때 명성황후가 충주로 피난오자, 그는 매일 신선한 생선을 명성황후에게 바쳤다. 이 공으로 명성황후가 환궁한 뒤 1883년에 남행선전관으로 임명되었다. 왕실과의 직접적인 인연으로 출세의 길이 열린 것이다. 그는 1884년 무과에 합격한 뒤 1894년까지는 지방관 등을 거치면서 중앙에 진출할 기회를 모색하였다.
1896년 2월 고종이 그의 거처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기는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조선은 본격적으로 러시아와 일본의 각축장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환궁을 요구하는 여론이 거세지고, 뿐만 아니라 환궁을 모의하는 등의 여러 가지 사건이 발생하는 등 친러파와 친일파의 미묘한 정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당시 이근택은 친위대 제3대대장으로 있었다. 이근택은 이창렬(李彰烈) 등과 함께 국왕의 환궁을 도모하였다. 이들은 명성황후의 1주기를 기하여 고종이 명례궁에 나와서 친히 제사를 지내는 기회를 이용하여 왕의 환궁을 이루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모의는 이용태(李容泰)의 고발로 실패하였고 이근택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제주도에 유배된 이근택은 대한제국이 수립되던 1897년에 민영기(閔泳綺)에 의해 석방되어 한성판윤, 경무사를 역임하였다.
이후 대한제국 시기에 이근택이 요직을 역임할 수 있었던 것은 아주 우연한 계기를 통해서였다. 이근택이 일본상점에 들렀다가 우연히 수대(繡帶:허리띠)가 있는 것을 보고, 명성황후의 것이라 판단하여 일본인에게서 6만 냥을 주고 사서 고종에게 헌상하였다.(황현, {매천야록})
이로 말미암아 고종의 총애를 얻게 된 이근택은 대한제국 시기 주요 요직을 거치면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는 주로 경무사, 경위원 총관, 헌병사령관, 원수부 검사국장 등 경찰·군사부문에서 활약하였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황실 중심의 근대화정책이 수행되었는데, 군사·경찰부문에서는 이근택이 책임을 지고, 재정·외교부문에서는 이용익(李容翊)이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근택은 이용익 등과 함께 고종의 측근으로서 근황주의적인 인물이었고 대한제국시기 정권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친러파 전력을 씻기 위해 더욱 열성적으로 친일
당시 국내외적인 상황은 조선을 사이에 두고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우위권 쟁탈전이 계속되는 형국이었는데, 이근택, 이용익 등을 주축으로 한 대한제국 정부는 대외관계에서 친러·반일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고종과 당시의 정부대신들은 1895년 민비시해사건 이후 배일 감정을 지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은 러시아의 적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어서 친 러시아적인 경향이 강하였다.
이근택과 같이 일본의 침략정책에 반대하는 입장에 서 있던 사람은 이용익이었다. 비록 두 사람은 정쟁 관계에 있었지만, 러일 양국 사이에서 한국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중립적인 정책을 취해야 하며, 러시아나 미국 등 열국의 보호 하에서의 한국의 독립을 지향하고자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일본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친러적인 입장이었던 이근택은 고종에게 일본은 러시아와 개전할 처지도 못되고 설령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러시아의 승리는 필연적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시국이 급박할 경우에는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할 것을 청하는 등(外務省 編, {日本外交文書} 37권 1책) 일본보다는 러시아세력에 의지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이근택은 김인수(金仁洙)를 러시아에 파견하여 조선에서 일본의 패퇴는 일전(一戰)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한다는 뜻을 전하는가 하면, 차병(借兵)을 요청하는 서한을 러시아 총독 알렉셰이프 대장에게 비밀리에 보내기까지 하였다.
한편 이근택을 비롯한 대한제국 정부의 대신들이 친러적 경향을 띠면서 일본의 침략정책에 반대하는 것은 일본 측으로서는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일본이 곧 있게 될 러시아와의 전쟁을 유리한 국면으로 이끌고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들 친러·반일적인 정부대신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일본은 요주의 인물인 이들의 행동을 탐지하는 등, 이들을 매수하려고 하였다. 나아가 일본은 고종의 측근인 이근택, 이용익 등을 매수하여 자국에 협력하게 하려 들었다.
일본은 그 동안 매수·회유해 온 이지용을 더욱 독려하는 한편, 강력하게 배일적인 입장을 취해오던 이용익을 일본으로 납치하였다. 그리고 다소 친일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던 이근택을 여러 차례 협박하여 일본에 반대하지 못하게 한 뒤, 군사적인 위협을 가하면서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에 조인할 것을 강요했다. 이 의정서는 명목상 한국의 독립을 위한 것이라고 하나 실제로는 한국의 주권을 완전히 빼앗아 식민지화하는 초석을 다지기 위한 것이었다.
러일전쟁의 발발과 일본에 의한 '한일의정서'의 체결로 한국민의 배일감정은 더욱 심화되었고, 이 같은 정부대신에 대한 회유·납치는 대신들을 친일적인 경향으로 돌아서게 만들었다. 더구나 이근택을 비롯한 이들 정부대신들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우세해지면서 일본의 침략정책에 협조하는 세력들로 변해갔다.
이미 1903년 9월부터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는 을미사변 때의 망명자에 대한 처분건 등을 내세워 정부대신 이지용, 민영철(閔泳喆), 이근택 등을 매수하는 데 본격적으로 착수하였다. 이지용은 1만 원에 매수되어 궁중의 비밀을 낱낱이 일본공사에게 보고하면서 조약 체결에 열심히 협력하였고, 당시까지 배일적이던 이근택은 일본의 위협을 받게 됨에 따라 생각을 바꾸어 서서히 친일적인 경향으로 돌아서기 시작하였다. 비록 이근택이 친러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다 해도 그로서는 완전히 일본과의 관계를 도외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러시아에 보호를 요청하면서도 일본 측으로부터 또한 신용을 잃지 않으려 하였던 측면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가 단지 협박·매수 때문에 일본의 침략정책에 협조하기 시작했을까.
그것은 권모술수에 능하고 정치적 수완이 탁월하였던 이근택이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을 감지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즉, 이근택이 비록 친러적인 입장을 표방하고 있었을지라도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력이 점점 강화됨에 따라, 이근택 자신의 출세에 일본세력을 이용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근택은 이미 일본에 매수되어 친일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던 이지용이나 민영철 등과 관계를 긴밀히 유지하기 시작하였고 이것이 전환점이 되어 이근택은 일본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기 시작하였다.
러일전쟁이 일본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자 일본은 '한일의정서'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서, 1904년 8월 22일에 '외국인 고빙(雇聘)조약'을 강요, 체결하여 고문정치를 단행하였다. 마침내 일본은 1905년 11월 대신들을 매수하거나 위협을 통해 비밀리에 '을사조약'을 강요함으로써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여 소위 보호국으로 만들어 식민지화의 옥쇄를 더욱 조이기 시작하였다.
이근택도 일본 측에 매수되어 적극적으로 조약 체결에 협조하였는데, 친러적인 혐의로 일본공사의 눈 밖에 나 있던 터라 오히려 열성적이었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이지용으로 하여금 일본공사관과 계속 연결을 유지하게 한다든가, 자신의 동생 이근상(李根湘)으로 하여금 일본공사관 사람들과 자주 접촉을 하게 하는 등, 친러적인 요소가 남아 있다는 혐의를 받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드디어 친러파라는 혐의를 풀고 을사조약 조인 이전인 9월 군부대신직에 오르게 되면서, 이근택의 친일행위는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즉, 그는 30만원이라는 기밀비를 일제로부터 받고 궁중과 부중의 모든 기밀사항을 정탐하여 일본에게 제보하는 등의 일도 서슴지 않게 되었다.
이근택은 을사조약의 조인에 협조한 공으로 조약이 체결된 그 다음해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勳一等)을 얻고 태극장(太極章)을 받았다.
을사오적 중에서도 가장 교활하고 악독하기로 소문나
이근택의 친일성향에 대해 황현은 이를 다음과 같이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근택은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지(長谷川好道)와는 형제의를 맺었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게 의탁하여 의자(義子)가 되었다.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었으며 일본 신발까지 신고 일본 수레에 앉아 항상 일본군의 호위를 받으며 출입하였다.
한 야인의 눈에 비친 이근택의 모습이다. 이렇게 일본이라는 보호막을 두르고 일본에 부화뇌동하였으니, 을사조약이 체결된 직후 그는 자객의 습격을 받아 중상을 입기도 한 것이다.
'을사보호조약'의 체결을 알게 된 국민들은 일본의 침략성을 규탄하고 조약 체결에 찬성한 대신들을 공박하는 등 그 분노가 극에 달했다. 일제히 궐기하여 조약의 무효를 부르짖고 오적을 규탄하는 유생, 관료들의 상소투쟁이 연이어 일어났다. 또한 오적에 대한 암살기도가 계속 모의되는 등 민중의 적극적인 저항도 일어났다. 이근택은 오적 중에서도 가장 교활하고 악독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기에 기산도(奇山度) 같은 애국의사들로부터 습격을 받았다. 기산도는 이근택의 집을 출입하던 사관학도였는데, 이근택이 을사조약의 조인에 찬동한 소행에 분노하여 전(前) 경무사 구완희(具完喜), 전 경무관 이세진(李世鎭) 등 수십 명의 자객을 모집하여 이근택을 암살하려 하였다. 그들은 칼을 품고 가서 이근택을 죽이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 후 을사오적에 대한 암살기도가 나인영(羅寅永), 오기호(吳基鎬) 등에 의해 계획되기도 하였다. 이는 일본의 침략에 대한 국민들의 규탄과 울분이 조약을 체결한 매국노를 피습하거나 암살하려는 일로 표출되었던 것이다.
심지어 이근택의 노비도 상전의 친일행위에 분노할 정도였다. 조약이 체결되던 날, 퇴궐한 이근택은 가족을 불러놓고 궁중에서 신조약을 조인하던 광경을 설명하였다. 이근택은 자신이 백성을 위하여 조약서에 가(可)함이라고 썼고, 일본의 신임을 얻어 대 훈공을 얻게 되었으니, 이로부터 권세를 더욱더 누릴 수 있게 되었다고 득의만만하였다. 그러면서도 이근택은 "내 다행히 죽음을 면했다"라고 하였다.
이때 마침 비녀(婢女) 한 명이 부엌에 있다가 그 소리를 듣고 부엌칼을 집어 들고 뛰어나왔다. 이근택이 한규설(韓奎卨)의 딸을 며느리를 삼았을 때, 그 며느리가 데리고 온 속칭 교전비(轎前婢)였던 그녀는 "이근택아! 네놈이 대신이 되어 나라가 위태한데도 죽지 아니하고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하느냐. 너는 참으로 개돼지만도 못하구나. 내 비록 천인이라 하더라도 어찌 개돼지의 종이 되겠는가. 내 힘이 약해서 능히 너를 만 토막으로 참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차라리 옛 주인에게 돌아가겠다."고 소리치고 한규설의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황현, {매천야록})
또한 한 취객이 그의 수레를 당기며 흘겨보고 말하기를 "네가 왜놈이라 하는 이근택인가. 오적의 괴수로 그 영화와 부귀가 이에서 그치는가" 하니 이근택이 크게 노하여 그를 결박 지어서 경찰서로 보냈다. 그 취객은 모진 고문으로 기절하였다가 밤이 깊어 깨어나서 말하기를 "네놈은 반드시 나를 죽일 것이다. 나 또한 명백히 욕질을 하였으니 죽어도 통쾌하다. 저들의 손에 죽느니 스스로 죽자" 하고 드디어 의복을 찢어 목을 매어 자결했다고 한다.(황현, {매천야록})
이와 같이 이근택은 민중의 분노와 지탄을 받으면서 일본세력을 배경으로 하여, 내각에서는 한 대신에 불과하면서도 궁중에서는 수상 이상의 권력을 행사하였다. 그의 오만불손함은 통감의 진의라 하면서 자신을 신임하던 고종을 기만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안하무인격인 이근택의 이러한 태도와 아울러 을사오적에 대한 민중의 분노와 지탄이 더욱더 거세지자, 이근택은 한때 파면되어 관직을 잃기도 했다.
이에 이근택은 이토, 하세가와, 아카시(明石塚) 등을 만나 잃어버린 군부대신직을 되찾고자 운동을 하고 다녔다. 이 당시의 신문에는 이근택의 엽관행각들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전(前) 군부대신 이근택이 이미 체직된 직위를 얻고자 운동한다는데, 송병준에게 소개하여 일본인 하세가와 대장에게 청하려 하였지만 첫 번째는 송병준이 접견하고 두 번째는 거절하여 만나지도 못하였고…….({황성신문}, 1906. 12. 3)
전 군부대신 이근택이 통감관저에 갔다가 접견도 못하였고 하세가와 대장을 방문하였는데 역시 접견 못하였고…….({대한매일신보}, 1907. 10. 8)
중추원 고문 이근택이 통감부 아카시 장관에게 비밀 교섭하여 대신직을 얻기 위해 운동중이고…….({대한매일신보}, 1909. 6. 21)
중추원 고문 이근택이 이토 추밀원장이 도한(渡韓)한 후 대신 한자리라도 얻으려고…….({황성신문}, 1909. 7. 6)
이근택, 이근상은 대신자리라도 얻으려고 한다.({경향신문}, 1910. 3. 25)
이 기사들은 한 출세지향적인 인간이 권력의 자리에서 쫓겨났을 때, 다시 그 자리에 오르고자 몸부림치는 비열한 모습을 적절히 보여주는 대목들이다.
이러한 그의 친일 행위는 1910년 8월 한일'합방'까지 이어져, 일본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대가로 일본으로부터 훈1등 자작과 미국 공채 5만 원을 받았으며, '병합' 후에는 그 해 10월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이 되었다가, 종4위 훈1등으로 1919년 12월 17일 사망하였다.
이근택의 작위는 아들 이창훈(李昌薰)이 습작함으로써 대를 이어 일본의 '충량한 신민'이 되었다. 이와 함께 이근택의 형인 이근호(李根澔), 아우인 이근상 등도 한일'합방'과 동시에 자작의 작위를 받았다. 이는 당시의 친일행각이 한 개인뿐만 아니라, 일가친척의 차원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으로써, 특기할 만한 일이다.
⊙ 참고문헌 ⊙
◦ {皇城新聞}.
◦ {大韓每日申報}.
◦ 黃 玹, {梅泉野錄}.
◦ 鄭 喬, {大韓季年史}.
◦ 外務省 編, {日本外交文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