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싹 속았수다〉라는 드라마가 인기라는 말을 들었을 때, 지나가다 본 쇼츠에서 양관식의 모습이 우리 아빠랑 너무 겹쳐 보여서 그 드라마를 보지 않으려고 했다. 꼭 작가가 내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나와 똑같은 상황이 너무 많았기에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우리 아빠는 무능했다. 능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엄마를, 내가 어렸을 때부터 나가 일하게 만들었다. 사람이 너무 좋아서 사기도 당했다. 집에 빨간 딱지가 붙기 직전까지 갔다. 그렇게 아빠는 신용불량자가 되어, 생을 다 할 때까지 휴대전화 하나, 통장 하나를 본인 명의로 만들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이 세상에 본인 것은 하나도 없는 채로 살았다.
하지만 남편 노릇은 제대로 못 했을지언정 아빠 노릇은 끝내주게 잘했다. 엄마보다 요리 실력이 월등히 좋아 내가 먹고 싶다는 건 다 해주었고, 드세고 까칠한 엄마보다 온화하고 상냥한 성격에 내게 회초리로 한 대 올리지 못했다. 사춘기 때 엄마랑 싸워 씩씩대고 있으면 아빠가 몰래 다가와 맛있는 걸 입에 넣어 주고 달래 주고 안아 주었다. 그렇게 자라서 그런가, 난 친척들이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같은 얄궂은 질문을 해도 항상 아빠라고 답할 정도였다.
학창 시절엔 친구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아빠였다. 항상 전화가 와 “우리 딸~~” 애교 섞인 목소리로 날 걱정하고 날 사랑했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날엔 시간이 늦는다며 데리러 왔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친구들과 술을 먹을 때도 새벽까지 잠 한숨 안 자고 기다리다가 경기도에서 강남까지 날 데리러 오던 아빠였다.
신김치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 큰 김치통 하나는 꼭 베란다에 나가 있었다. 그 김치통에는 큼지막하게 내 이름 석 자가 쓰여 있었다. 많이 뜨거운 밥을 먹지 못하는 나를 위해 식사 시간 전에 미리 밥을 퍼서 베란다 근처에 두어 바람으로 식혀 주던, 수박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매 여름마다 수박을 깍둑썰기해 밀폐 용기에 담아 정리해 두던 아빠였다. 시장 칼국수를 먹으러 갈 때 신김치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 비닐봉지에 김치를 소량 싸 들고 가서, 칼국수집에 “이거 우리 딸이 생김치를 안 먹어서 조금 가져왔는데, 깔아 놓고 깨끗이 좀 먹고 가도 되겠냐”고 묻던 아빠였다.
그런데 나는 그게 당연한 줄 알고 살았다. 상냥하지 못한 맏딸로 자랐고 그렇게 살았다. 아빠의 등에 크게 혹이 생겼다고 거실에 엎드려 “이것 좀 봐 달라”고 했을 때도 그냥 “아, 뭐 별거 아닌데 왜 그래?” 하고 말았고, 병원에 검사 받으러 간다고 했을 때도 “잘 다녀오라”고만 하고 말았다. 병원에서 결과 들으러 보호자와 함께 오라는 말에 내가 동행하게 되었을 때도, 그때까지도 별생각 없이 귀찮게 나까지 가야 된다며 속으로 불평하며 따라 나섰다.
난 아직도 그 병원 진료실의 풍경이 생생하다. 의사가 검사 결과 암이라고 말하던 그 순간, 내 세상이 그냥 멈춰 버린 것만 같았다. 믿기지가 않았다. ‘뭔 소리야? 우리 아빠가 왜 암이야?’ 살면서 듣도 보도 못한 암의 종류에 머리가 띵해질 무렵, 내 앞에 자그마한 보조 의자에 앉아 있는 아빠의 처진 등을 보는 순간 눈물이 마구 새어 나왔다. 눈물을 참으려 뒤를 돌아봤을 때 그 벽을 채운 책장들의 숫자만 셌다. 울고 싶지 않아서, 누구보다 눈물이 날 건 우리 아빠라는 걸 아니까. 근데 그럴 수가 없었다.
아빠는 그 후 투병 생활을 했다. 수술도 했다. 엄마는 돈을 벌어야 했기에 일을 하러 나갔고, 아빠의 수술 보호자는 대학생이던 내 몫이 되었다. 금방 끝날 거라던 수술은 거의 8시간이 넘게 걸려 내 속을 다 뒤집어 놓았다. 수술이 끝나고 병실로 돌아온 아빠는 춥다는 말만 연신 반복하다가 남동생과 내 이름을 부르며 찾았다. 추후 정신이 돌아온 아빠에게 어떻게 내 이름보다 남동생의 이름이 먼저 나오냐며 면박을 줄 정도로, 아빠는 나를 제일 사랑했다. 그래서 난 내가 꼭 금명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 힘든 항암 치료는 몇 년째 진행했음에도 차도가 없었다. 원래 희귀암이라는 건 다 그런 거라더라. 육종암이라는 거지 같은 암은 근육과 뼈에 생기는 암이라 근육을 타고 전이도 빨랐다.
아픈 아빠는 가끔씩 나에게 무언가를 사 달라고 했다.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대학생이라 돈이 많진 않았다. 근데 사 달라는 게 고작해야 몸에 좋다는 청, 영양제 같은 것들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빠는 정말 많이 무서웠던 것 같다. 평소에는 그런 거 먹지도 않는 사람이 인터넷을 뒤져 가며 본인 몸에 좋을 법한 것들을 딸한테 사 달라고 말하는 그 속이 어땠을까. 지금 생각하면 참, 다 사 주지 못한 내 자신이 원망스럽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원망스러운 건, 아빠가 점점 말라 가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아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들여다보지 못한 내 자신이다.
가족 중 한 명만 아파도 가족 꼴이 말이 안 될 정도로 망가진다. 엄마는 돈을 많이 벌어야 해서 오랜 시간 나가 일했다. 신용불량자인 아빠는 보험도 없었다. 그렇게 밤낮이 바뀐 채로 일한 우리 엄마는 날로 신경질적인 사람이 되어 갔다. 군대에 불려간 남동생은 기껏 나온 휴가에 아빠의 앓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 했고, 나는 취업 준비로 정신없어 아빠를 그 전보다 신경 쓰지 않았다.
아빠는 어느 날, 집을 나갔다. 저기 충청도 쪽에 월세방을 얻어 혼자 지내고 싶다고 했다. 아픈 사람을 어떻게 혼자 두냐고 했더니, 혼자 그나마 공기 좋은 곳에 있는 게 그래도 마음이라도 좀 편할 것 같다고 했다. 아빠가 나가니 우리 집에는 온기가 돌았다. 그게 참 소름 끼치게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흘렀고, 조금 더 상태가 좋지 않아진 아빠는 경기도로 집을 옮겼다. 나는 그새 취업을 했고 독립을 했다. 아빠가 없으니 집에서 엄마와 많이 부딪혔기 때문이다. 그건 우리 집을 조율하는 아빠가 없어서였다.
아빠는 날이 갈수록 야위었지만 그래도 밥은 잘 해 먹고 산다며 날 안심시켰다. 그때 난 남자친구가 있었는데, 어느 날엔 남자친구에게 밥을 사 주고 싶다며 연락을 해 왔다. 무려 한우를 사 준다고 했다. 그렇게 남자친구와 아빠를 함께 만났다. 아빠는 이전에 내 남자친구를 만났을 땐 이것저것 궁금한 걸 물어보더니, 이번에는 그냥 맛있게 먹으라고만 했다. 내가 화장실에 간 사이 아빠는 남자친구한테 “내 딸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했다고, 그로부터 일주일 뒤에 전해 들었다.
일주일 내내 하루에 한 번씩 전화를 해댔다. 별 이유도 없이 매일 전화를 해서 딸의 안부를 물었다. 직장 생활을 하던 내게 그 전화는 날이 갈수록 귀찮은 전화였다. 중반쯤 됐을 땐 내 자취방에 아빠가 왔다. 내가 좋아하는 딸기랑 유산균 음료랑 제로 콜라 12개를 들고, 나와 같이 밥을 먹겠다고 했다. 뭐 먹고 싶은 거 있냐는 내 말에 “너 좋아하는 거 먹자”고 하기에 난 로제 떡볶이를 시켰다. 아빠는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걸 시켜서 나만 좋다고 열심히 먹었다. 그게 아빠와의 마지막 식사일 줄은 몰랐다. 그날 내가 한 가지 잘한 일은 대중교통 타고 돌아가겠다는 아빠를 택시 태워 보낸 일뿐이다.
하루는 폐기물을 내놔야 한다며 스티커 같은 건 어떻게 구하는지 나에게 방법을 물어왔다. 나는 인터넷으로 신청하면 된다며 그걸 도왔다. 그게 아빠가 본인 월셋방을 정리하는 건 줄도 모르고 그걸 도왔다.
4월 2일 금요일 저녁. 이날도 어김없이 전화가 왔다. 난 이때 남자친구와 술을 곁들인 저녁 식사를 끝내고 편히 쉬고 있을 때였다. 전화를 받기가 귀찮았다. 그래서 안 받았다. ‘내일이나 콜백해야지’ 하고 말았고, 그 기억은 잊은 채 주말이 지났다. 월요일엔 여느 때처럼 출근을 했다. 일하고 있던 오전, 갑자기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나 회사에 있는 거 알면서 왜 전화야?’ 하고 받는 순간, 엄마가 숨 넘어갈 듯 울고 있었다. 왜, 왜? 왜 우는지 눈치챘으면서도 아니길 바라는 마음에 소리를 질렀다. “아 왜 그러느냐고!!!! 말을 해야 할 것 아냐!!!!!! 엄마!!!!!!!!!!!”
“ㅇㅇ아… 니 아빠가 죽었어.”
아빠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폭싹 속았수다〉를 보면서 금명이가 부러웠던 순간이 있다. 금명이는 아빠가 본인을 떠나기 하루 전에 밀린 사과를 쏟아낸다. 나는 그런 순간이 없었다. 너무 갑작스럽게 아빠를 떠나보냈다. 장례식 및 장지까지 모든 걸 끝마치고 자취방에 돌아왔을 때, 내 자취방 문에는 우체국으로부터 쪽지가 하나 붙어 있었다. 사람이 없어서 등기우편 배달을 못 했다는 거였다. 그건 아빠의 편지였다. 아빠는 금요일 오후에 우체국으로 가 딸에게 편지를 부쳤다. 아마 그걸 보고 이상함을 느껴 본인의 집에 와, 본인의 죽음을 알 수 있게끔 한 거겠지. 오랜 시간 방치되진 않을까 하는, 본인 딴엔 최대한의 배려를 한 거였다. 전화를 이틀 내내 받지 않는 아빠에게 이상함을 느낀 엄마 덕에 그렇게까지 되진 않았지만 말이다.
나는 후회한다.
내가 금요일에 귀찮아하지 않고 전화를 받았더라면 아빠를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내가 그때 전화를 받아서 아빠의 이상함을 눈치챘다면 아빠를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내가 전화를 받았더라면… 갈 땐 가더라도 아빠가 마음이라도 편하지 않았을까? 일곱 번 온 전화 중 여섯 번을 받았다. 그 마지막 전화만 안 받은 건데, 하늘도 무심하시지 그게 마지막이었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 이 와중에도 일곱 번 중 여섯 번은 받았다고 주장하는 내 자신이 역겹다. 그게 받은 거야? 정말로? 매번 귀찮아했으면서, 눈치 빠른 우리 아빠가 그걸 몰랐을 거라고 생각해? 상냥하게 말 한마디 안 한 천하의 나쁜 년인 주제에 이제 와서 후회해?
아직도 난 아빠와 통화한 6일치 음성 녹음을 가지고만 있다. 들어보진 못한다. 들으면 내 자신이 견딜 수 없을 것만 같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말투로 아빠와 대화했을지 듣기가 너무 무섭다. 그리고 이 통화의 끝이, 결국 마지막에 전화를 받지 않은 나 때문에 벌어졌을 거라고 생각하니 내 자신이 너무 증오스럽다.
안쓰는 내 통장 하나를 아빠가 쓰고 있었는데, 아빠가 죽고 확인해 본 그 통장에는 500만 원가량이 들어 있었다. 그건 아빠가 남긴 전 재산이자, 본인의 장례식 비용에 보탤 돈이었다. 이것도 정말 기가 막혔지만, 더 미치겠는 건 아빠가 근 일주일간 밥을 사 먹은 출금 내역이 없다는 거다. 아빠는 이미 뭘 먹을 수도 없는 상태였던 거다. 뭘 먹지 못하는 상태에서 딸 집에 와서 떡볶이 몇 입 억지로 먹는 척한 거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좋다고 로제 떡볶이를 처먹었다. 내 자신이 증오스럽다.
아빠.
26년 동안 날 너무 많이 사랑해 준 우리 아빠.
내가 잘못했어.
내가 너무 큰 잘못을 했어.
아빠가 나한테 어떻게 해 줬는데, 내가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내가 아빠를 살릴 수 있었을 텐데.
미안해. 정말 많이 미안해. 아빠.
다음 생에는 만나지 말자…다음 생이 있다면, 아빠.
상냥하고 예쁜 마누라 만나서 토끼 같은 착한 딸래미 낳고 오순도순 오래 살아.
이 생에 서러웠던 거 다 누리고 살아.
혼자 쓸쓸히 가게 해서 미안해.
얼마나 무서웠을지 생각하면 너무 아파.
근데 이런 나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만큼 아빠는 아팠잖아.
얼마나 무서웠어… 얼마나….미안해. 너무, 너무 미안해.
평생 미안해….꿈에 나와서 나한테 욕을 해도 좋아.
나한테 나쁜 말만 쏟아내도 좋아.
끝까지 염치없는 딸이라서 너무 미안한데…꿈에 나와 주라.
미안해.
정말 미안해.
사랑해, 아빠.
내가 가져 본 것 중에서 가장 근사하고, 가장 멋있는 우리 아빠.
미안해.
너무 미안해.
미안해…
아빠를 잃고 나서야 알게 된 것들, 어디에도 말 못 하다가 씁니다
〈폭싹 속았수다〉라는 드라마가 인기라는 말을 들었을 때, 지나가다 본 쇼츠에서 양관식의 모습이 우리 아빠랑 너무 겹쳐 보여서 그 드라마를 보지 않으려고 했다. 꼭 작가가 내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나와 똑같은 상황이 너무 많았기에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우리 아빠는 무능했다. 능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엄마를, 내가 어렸을 때부터 나가 일하게 만들었다. 사람이 너무 좋아서 사기도 당했다. 집에 빨간 딱지가 붙기 직전까지 갔다. 그렇게 아빠는 신용불량자가 되어, 생을 다 할 때까지 휴대전화 하나, 통장 하나를 본인 명의로 만들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이 세상에 본인 것은 하나도 없는 채로 살았다.
하지만 남편 노릇은 제대로 못 했을지언정 아빠 노릇은 끝내주게 잘했다. 엄마보다 요리 실력이 월등히 좋아 내가 먹고 싶다는 건 다 해주었고, 드세고 까칠한 엄마보다 온화하고 상냥한 성격에 내게 회초리로 한 대 올리지 못했다. 사춘기 때 엄마랑 싸워 씩씩대고 있으면 아빠가 몰래 다가와 맛있는 걸 입에 넣어 주고 달래 주고 안아 주었다. 그렇게 자라서 그런가, 난 친척들이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같은 얄궂은 질문을 해도 항상 아빠라고 답할 정도였다.
학창 시절엔 친구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아빠였다. 항상 전화가 와 “우리 딸~~” 애교 섞인 목소리로 날 걱정하고 날 사랑했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날엔 시간이 늦는다며 데리러 왔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친구들과 술을 먹을 때도 새벽까지 잠 한숨 안 자고 기다리다가 경기도에서 강남까지 날 데리러 오던 아빠였다.
신김치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 큰 김치통 하나는 꼭 베란다에 나가 있었다. 그 김치통에는 큼지막하게 내 이름 석 자가 쓰여 있었다. 많이 뜨거운 밥을 먹지 못하는 나를 위해 식사 시간 전에 미리 밥을 퍼서 베란다 근처에 두어 바람으로 식혀 주던, 수박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매 여름마다 수박을 깍둑썰기해 밀폐 용기에 담아 정리해 두던 아빠였다. 시장 칼국수를 먹으러 갈 때 신김치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 비닐봉지에 김치를 소량 싸 들고 가서, 칼국수집에 “이거 우리 딸이 생김치를 안 먹어서 조금 가져왔는데, 깔아 놓고 깨끗이 좀 먹고 가도 되겠냐”고 묻던 아빠였다.
그런데 나는 그게 당연한 줄 알고 살았다. 상냥하지 못한 맏딸로 자랐고 그렇게 살았다. 아빠의 등에 크게 혹이 생겼다고 거실에 엎드려 “이것 좀 봐 달라”고 했을 때도 그냥 “아, 뭐 별거 아닌데 왜 그래?” 하고 말았고, 병원에 검사 받으러 간다고 했을 때도 “잘 다녀오라”고만 하고 말았다. 병원에서 결과 들으러 보호자와 함께 오라는 말에 내가 동행하게 되었을 때도, 그때까지도 별생각 없이 귀찮게 나까지 가야 된다며 속으로 불평하며 따라 나섰다.
난 아직도 그 병원 진료실의 풍경이 생생하다. 의사가 검사 결과 암이라고 말하던 그 순간, 내 세상이 그냥 멈춰 버린 것만 같았다. 믿기지가 않았다. ‘뭔 소리야? 우리 아빠가 왜 암이야?’ 살면서 듣도 보도 못한 암의 종류에 머리가 띵해질 무렵, 내 앞에 자그마한 보조 의자에 앉아 있는 아빠의 처진 등을 보는 순간 눈물이 마구 새어 나왔다. 눈물을 참으려 뒤를 돌아봤을 때 그 벽을 채운 책장들의 숫자만 셌다. 울고 싶지 않아서, 누구보다 눈물이 날 건 우리 아빠라는 걸 아니까. 근데 그럴 수가 없었다.
아빠는 그 후 투병 생활을 했다. 수술도 했다. 엄마는 돈을 벌어야 했기에 일을 하러 나갔고, 아빠의 수술 보호자는 대학생이던 내 몫이 되었다. 금방 끝날 거라던 수술은 거의 8시간이 넘게 걸려 내 속을 다 뒤집어 놓았다. 수술이 끝나고 병실로 돌아온 아빠는 춥다는 말만 연신 반복하다가 남동생과 내 이름을 부르며 찾았다. 추후 정신이 돌아온 아빠에게 어떻게 내 이름보다 남동생의 이름이 먼저 나오냐며 면박을 줄 정도로, 아빠는 나를 제일 사랑했다. 그래서 난 내가 꼭 금명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 힘든 항암 치료는 몇 년째 진행했음에도 차도가 없었다. 원래 희귀암이라는 건 다 그런 거라더라. 육종암이라는 거지 같은 암은 근육과 뼈에 생기는 암이라 근육을 타고 전이도 빨랐다.
아픈 아빠는 가끔씩 나에게 무언가를 사 달라고 했다.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대학생이라 돈이 많진 않았다. 근데 사 달라는 게 고작해야 몸에 좋다는 청, 영양제 같은 것들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빠는 정말 많이 무서웠던 것 같다. 평소에는 그런 거 먹지도 않는 사람이 인터넷을 뒤져 가며 본인 몸에 좋을 법한 것들을 딸한테 사 달라고 말하는 그 속이 어땠을까. 지금 생각하면 참, 다 사 주지 못한 내 자신이 원망스럽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원망스러운 건, 아빠가 점점 말라 가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아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들여다보지 못한 내 자신이다.
가족 중 한 명만 아파도 가족 꼴이 말이 안 될 정도로 망가진다. 엄마는 돈을 많이 벌어야 해서 오랜 시간 나가 일했다. 신용불량자인 아빠는 보험도 없었다. 그렇게 밤낮이 바뀐 채로 일한 우리 엄마는 날로 신경질적인 사람이 되어 갔다. 군대에 불려간 남동생은 기껏 나온 휴가에 아빠의 앓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 했고, 나는 취업 준비로 정신없어 아빠를 그 전보다 신경 쓰지 않았다.
아빠는 어느 날, 집을 나갔다. 저기 충청도 쪽에 월세방을 얻어 혼자 지내고 싶다고 했다. 아픈 사람을 어떻게 혼자 두냐고 했더니, 혼자 그나마 공기 좋은 곳에 있는 게 그래도 마음이라도 좀 편할 것 같다고 했다. 아빠가 나가니 우리 집에는 온기가 돌았다. 그게 참 소름 끼치게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흘렀고, 조금 더 상태가 좋지 않아진 아빠는 경기도로 집을 옮겼다. 나는 그새 취업을 했고 독립을 했다. 아빠가 없으니 집에서 엄마와 많이 부딪혔기 때문이다. 그건 우리 집을 조율하는 아빠가 없어서였다.
아빠는 날이 갈수록 야위었지만 그래도 밥은 잘 해 먹고 산다며 날 안심시켰다. 그때 난 남자친구가 있었는데, 어느 날엔 남자친구에게 밥을 사 주고 싶다며 연락을 해 왔다. 무려 한우를 사 준다고 했다. 그렇게 남자친구와 아빠를 함께 만났다. 아빠는 이전에 내 남자친구를 만났을 땐 이것저것 궁금한 걸 물어보더니, 이번에는 그냥 맛있게 먹으라고만 했다. 내가 화장실에 간 사이 아빠는 남자친구한테 “내 딸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했다고, 그로부터 일주일 뒤에 전해 들었다.
일주일 내내 하루에 한 번씩 전화를 해댔다. 별 이유도 없이 매일 전화를 해서 딸의 안부를 물었다. 직장 생활을 하던 내게 그 전화는 날이 갈수록 귀찮은 전화였다. 중반쯤 됐을 땐 내 자취방에 아빠가 왔다. 내가 좋아하는 딸기랑 유산균 음료랑 제로 콜라 12개를 들고, 나와 같이 밥을 먹겠다고 했다. 뭐 먹고 싶은 거 있냐는 내 말에 “너 좋아하는 거 먹자”고 하기에 난 로제 떡볶이를 시켰다. 아빠는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걸 시켜서 나만 좋다고 열심히 먹었다. 그게 아빠와의 마지막 식사일 줄은 몰랐다. 그날 내가 한 가지 잘한 일은 대중교통 타고 돌아가겠다는 아빠를 택시 태워 보낸 일뿐이다.
하루는 폐기물을 내놔야 한다며 스티커 같은 건 어떻게 구하는지 나에게 방법을 물어왔다. 나는 인터넷으로 신청하면 된다며 그걸 도왔다. 그게 아빠가 본인 월셋방을 정리하는 건 줄도 모르고 그걸 도왔다.
4월 2일 금요일 저녁. 이날도 어김없이 전화가 왔다. 난 이때 남자친구와 술을 곁들인 저녁 식사를 끝내고 편히 쉬고 있을 때였다. 전화를 받기가 귀찮았다. 그래서 안 받았다. ‘내일이나 콜백해야지’ 하고 말았고, 그 기억은 잊은 채 주말이 지났다. 월요일엔 여느 때처럼 출근을 했다. 일하고 있던 오전, 갑자기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나 회사에 있는 거 알면서 왜 전화야?’ 하고 받는 순간, 엄마가 숨 넘어갈 듯 울고 있었다. 왜, 왜? 왜 우는지 눈치챘으면서도 아니길 바라는 마음에 소리를 질렀다. “아 왜 그러느냐고!!!! 말을 해야 할 것 아냐!!!!!! 엄마!!!!!!!!!!!”
“ㅇㅇ아… 니 아빠가 죽었어.”
아빠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폭싹 속았수다〉를 보면서 금명이가 부러웠던 순간이 있다. 금명이는 아빠가 본인을 떠나기 하루 전에 밀린 사과를 쏟아낸다. 나는 그런 순간이 없었다. 너무 갑작스럽게 아빠를 떠나보냈다. 장례식 및 장지까지 모든 걸 끝마치고 자취방에 돌아왔을 때, 내 자취방 문에는 우체국으로부터 쪽지가 하나 붙어 있었다. 사람이 없어서 등기우편 배달을 못 했다는 거였다. 그건 아빠의 편지였다. 아빠는 금요일 오후에 우체국으로 가 딸에게 편지를 부쳤다. 아마 그걸 보고 이상함을 느껴 본인의 집에 와, 본인의 죽음을 알 수 있게끔 한 거겠지. 오랜 시간 방치되진 않을까 하는, 본인 딴엔 최대한의 배려를 한 거였다. 전화를 이틀 내내 받지 않는 아빠에게 이상함을 느낀 엄마 덕에 그렇게까지 되진 않았지만 말이다.
나는 후회한다.
내가 금요일에 귀찮아하지 않고 전화를 받았더라면 아빠를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내가 그때 전화를 받아서 아빠의 이상함을 눈치챘다면 아빠를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내가 전화를 받았더라면… 갈 땐 가더라도 아빠가 마음이라도 편하지 않았을까? 일곱 번 온 전화 중 여섯 번을 받았다. 그 마지막 전화만 안 받은 건데, 하늘도 무심하시지 그게 마지막이었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 이 와중에도 일곱 번 중 여섯 번은 받았다고 주장하는 내 자신이 역겹다. 그게 받은 거야? 정말로? 매번 귀찮아했으면서, 눈치 빠른 우리 아빠가 그걸 몰랐을 거라고 생각해? 상냥하게 말 한마디 안 한 천하의 나쁜 년인 주제에 이제 와서 후회해?
아직도 난 아빠와 통화한 6일치 음성 녹음을 가지고만 있다. 들어보진 못한다. 들으면 내 자신이 견딜 수 없을 것만 같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말투로 아빠와 대화했을지 듣기가 너무 무섭다. 그리고 이 통화의 끝이, 결국 마지막에 전화를 받지 않은 나 때문에 벌어졌을 거라고 생각하니 내 자신이 너무 증오스럽다.
안쓰는 내 통장 하나를 아빠가 쓰고 있었는데, 아빠가 죽고 확인해 본 그 통장에는 500만 원가량이 들어 있었다. 그건 아빠가 남긴 전 재산이자, 본인의 장례식 비용에 보탤 돈이었다. 이것도 정말 기가 막혔지만, 더 미치겠는 건 아빠가 근 일주일간 밥을 사 먹은 출금 내역이 없다는 거다. 아빠는 이미 뭘 먹을 수도 없는 상태였던 거다. 뭘 먹지 못하는 상태에서 딸 집에 와서 떡볶이 몇 입 억지로 먹는 척한 거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좋다고 로제 떡볶이를 처먹었다. 내 자신이 증오스럽다.
아빠.
26년 동안 날 너무 많이 사랑해 준 우리 아빠.
내가 잘못했어.
내가 너무 큰 잘못을 했어.
아빠가 나한테 어떻게 해 줬는데, 내가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내가 아빠를 살릴 수 있었을 텐데.
미안해. 정말 많이 미안해. 아빠.
다음 생에는 만나지 말자…다음 생이 있다면, 아빠.
상냥하고 예쁜 마누라 만나서 토끼 같은 착한 딸래미 낳고 오순도순 오래 살아.
이 생에 서러웠던 거 다 누리고 살아.
혼자 쓸쓸히 가게 해서 미안해.
얼마나 무서웠을지 생각하면 너무 아파.
근데 이런 나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만큼 아빠는 아팠잖아.
얼마나 무서웠어… 얼마나….미안해. 너무, 너무 미안해.
평생 미안해….꿈에 나와서 나한테 욕을 해도 좋아.
나한테 나쁜 말만 쏟아내도 좋아.
끝까지 염치없는 딸이라서 너무 미안한데…꿈에 나와 주라.
미안해.
정말 미안해.
사랑해, 아빠.
내가 가져 본 것 중에서 가장 근사하고, 가장 멋있는 우리 아빠.
미안해.
너무 미안해.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