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의 휠체어 뒤에 남은 계절

ㅇㅇ2026.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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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 전, 그는 그저 외로움을 나눌 따뜻한 기도를 함께할 친구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화면 너머에서 들려온 아내의 목소리는 처음부터 배우자를 찾는 절박함으로 뜨거웠다. 평범했던 그의 일상에 그녀가 성큼 들어왔던 그날, 그는 자신의 생애 첫 경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파도’처럼 휩쓸려 당하고 말았다. 당혹감과 찝찝함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그를 더 강하게 옭아맨 것은 그녀의 짐가방이었다.
​“받아주지 않으면 갈 곳이 없어요. 교회 마당에서라도 살 거예요.”
​그는 차마 그 가냘픈 위협을 외면할 만큼 모질지 못했다. 뇌전증으로 쓰러져 거품을 무는 그녀를 안아 보듬었을 때, 그는 자신의 인생이 이 아픈 사람의 보호자가 되는 길로 접어들었음을 직감했다. 최저시급을 받는 공장 일로도 그녀를 고시원에 재우고 자신은 퇴근길에 그녀를 데리러 가며, 그는 ‘사랑’이라는 단어보다 ‘책임’이라는 단어를 먼저 가슴에 새겼다.
​인생의 잔인한 장난은 둘째 아이가 태어나고 6개월 만에 찾아왔다. 골절 사고로 인한 마비. 12년 전, 그는 자신의 다리를 잃고 휠체어에 앉게 되었다. 하지만 휠체어 바퀴가 굴러가는 궤적 위에도 쉼표는 없었다. 자신의 몸을 가누기도 힘든 상태에서 아내의 수술과 입원을 수없이 간병했고, 아이들의 기저귀를 갈았다. 어느덧 집안 형편 때문에 아내가 더 아픈 건 아닐까 자책하는 마음까지 깊게 파였다.
​7~8년 전부터 아내의 문은 닫혔다. 뜨거웠던 시작이 무색하게, 그녀는 더 이상 그의 손길을 원하지 않았다. 거부당하는 남자의 비참함을 억누르며 그는 야동 속 허상에 자신을 가두었고, 자책감 속에 홀로 밤을 견뎠다. 그렇게 마음이 메말라가던 어느 날, 훌쩍 자란 딸아이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165cm. 163cm인 자신의 키를 훌쩍 넘겨버린 딸의 성장. 그것은 축복이어야 했으나, 상처 입은 그에게는 독이 섞인 의문이 되었다.
‘그날, 그녀가 나를 택한 건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안전한 도피처가 필요해서였을까?’ ‘이 아이는 정말 나의 결실일까, 아니면 내가 평생 속으며 키운 남의 열매일까?’
​의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머리를 조여왔다. 휠체어를 타고는 단 한 칸의 계단도 오르지 못하는 무력한 현실 앞에서, 그는 16년 전의 그날로 돌아가 자꾸만 묻고 싶어진다.
​하지만 차가운 금속 휠체어를 밀어온 그의 거친 손바닥에는 16년의 진실이 박혀 있다. 유전자가 무엇이든, 키가 몇 센티미터이든, 그 아이를 이만큼 키워낸 것은 휠체어 위에서 부서져라 바퀴를 굴린 그의 땀방울이었다. 그는 이용당한 바보가 아니라, 누구보다 치열하게 사랑하고 책임진 한 사람의 영웅이었다.
​이제 그는 가파른 의심의 언덕을 내려와, 계단 없는 평평한 길 위에서 잠시 쉬고 싶다. 16년 만에 처음으로, 누군가의 보호자가 아닌, 장난감을 좋아하던 소년 같은 자신을 찾아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