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트로의 도착을 축하하는 행사가 끝나자 모쉐는 백성을 재판하는 본연의 업무로 돌아갑니다. 이를 본 이트로는 모쉐에게 그의 방식이 비효율적이라고 충고합니다. 모쉐 혼자서 모든 사람을 개별적으로 재판해서는 백성을 다스릴 수 없으니, 질서 있는 사법 제도를 확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트로가 이러한 조언을 해야 했던 이유는 의아스럽습니다. 유대 조상들은 행정이나 사법 제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막 유목민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사막 출신이 아닙니다. 그들은 오랜 세월 동안 이집트에서 살았는데, 이집트는 관료주의가 잘 발달하고 수백 년의 국가 행정 경험을 가진 정부가 있는 조직적인 국가였습니다.
원시 부족 사회가 국가를 세울 때 행정 및 사법 제도에 익숙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스라엘 건국 당시에도 초대 크네세트 의원 중 의회 경험이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모쉐는 파라오의 궁궐에서 자랐습니다. 어린 시절 내내 왕궁을 드나들었기에 국가 운영 방식을 알고 있었고, 이트로의 조언은 그에게 낯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모쉐는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을 때 실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을까요? 왜 이트로가 와서 조언을 해줄 때까지, 명백히 필요한 조직적인 법률 제도를 수립하는 것을 미뤘을까요?
실질적인 관점에서도 모쉐가 백성을 어떻게 다스릴 생각이었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온 나라를 이끌고 수백만 명의 백성 각자의 삶을 지도해야 했을 뿐 아니라,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특별한 문제들까지 해결해야 했습니다. 현실적으로 사람들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워 효과적인 법률 체계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모쉐의 지도력 아래 백성들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창구를 갖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다툼 없는 삶은 불가능합니다. 사람들은 특별한 이유가 없더라도 서로 싸울 방법을 항상 찾아낼 것입니다.
게다가 모쉐는 백성의 재판관일 뿐만 아니라 랍비이기도 했습니다. 모든 다툼과 분쟁, 그리고 금전적인 소송이 없었다 하더라도, 그가 백성의 모든 율법적 질문에 답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질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냄비를 고기 담는 데 써야 할지 우유 담는 데 써야 할지, 안식일에 특정 행위가 금지되는지 허용되는지, ,메주자의 내용이 제대로 쓰였는지 등등. 밤낮으로 이러한 질문에 답한다 해도 충분하지 않을 것입니다.
작은 마을의 랍비 딸이 결혼하면서 케투바( 유대교 결혼 계약서)에 남편이 랍비로 일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추가해 달라고 요청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의 아버지 집에는 아침 일찍부터 한밤중까지 항상 사람들이 북적거렸고, 그녀는 그런 생활을 더 이상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파라샤 이트로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60만 명이 넘었습니다. 각 사람이 가끔씩만 질문한다고 해도 질문의 수는 엄청나게 많았을 것입니다. 모쉐가 모든 질문에 "예" 또는 "아니오"로만 대답한다고 해도, 질문이 수천 건에 달하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모쉐가 스스로 떠맡은 이 막중한 임무를 생각하면, 그가 다른 일에 시간을 낼 수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심지어 파라샤 초반에 장인어른께 인사드리는 것 조차 그의 바쁜 일정에서 귀중한 시간을 빼앗았을 것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상황은 사람들의 입장에서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모쉐 앞에 길게 늘어선 사람들의 줄과, 우리가 관공서에서 흔히 겪는 끝없는 대기 시간을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쉐는 어떻게 이런 방식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었을까?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 선지자였으면 좋겠다.”
모쉐는 실용적인 고려 사항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다른 관점에서 비롯된 고려 사항에 따라 행동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사건은 모쉐에게 원칙의 문제였습니다. 모쉐와 이트로의 의견은 어떤 방법이 더 효과적인지에 대한 실용적인 문제에서는 다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유대 민족 내부에 일종의 위계질서를 구축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지에 대해 의견 차이를 보였습니다.
이트로의 제안이 시사하는 바는 유대 민족 내에 계급 체계를 확립하는 것입니다. 즉, 누군가 질문이나 문제가 생기면 자신을 책임지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고, 이 책임자 역시 그보다 높은 직책을 가진 사람이 있으며, 이런 식으로 모쉐에 이르기까지 위계질서가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높은 계급의 사람과 낮은 계급의 사람이 존재하는 상황이 만들어집니다.
그러나 모쉐는 그러한 구조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개인적인 성향에서든, 문제 자체를 고려했을 때든 마찬가지였습니다.
모쉐는 계급이나 신분으로 백성을 나누는 것에 반대하는 모습을 시내산에서의 계시 때에도 보여주었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모쉐에게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면 우리가 듣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마십시오. 우리가 죽을까 두렵습니다.”라고 간청했던 일화가 그 예입니다. (출애굽기 20:16).
신명기에는 이 사건이 더 자세히 묘사되어 있는데, 모쉐에게 이 요청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쉐는 이 생각을 받아들이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이 옳았다”는 확증을 받아야 했습니다. (신명기 5장 25절). 모쉐는 모든 유대인은 최고의 경지에 이르기를 열망했습니다. 모쉐는 이상적으로 이스라엘의 모든 구성원이 자신이 받았던 것처럼 완벽하게 전능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토라를 받아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예호슈아가 엘닷(Eldad)과 메닷(Medad)이 진영에서 예언하고 있다고 달려와 모쉐에게 전했을 때, 모쉐는 비슷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모쉐는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 예언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민수기 11:29). 모쉐가 이렇게 대답한 것은 예의나 겸손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대로였기 때문입니다. 엘닷과 메닷이 예언한 것처럼, 모쉐도 60만 명의 예언자가 있기를 바랐습니다.
이것은 단지 모쉐의 개인적인 소망만이 아닙니다. 토라 자체에서도 유대 민족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이 위대한 민족은 참으로 지혜롭고 총명한 민족입니다.” (신명기 4:6). “지혜롭고 총명한” 민족 전체라는 개념은 유대 신앙 체계의 기본 원칙입니다.
거의 모든 사회와 문화에는 학식 있는 자와 무지한 자 사이의 계급 구분이 존재하며, 심지어 이것이 이상적인 사회 구조로 여겨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유대 민족의 열망은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이상적으로 모든 사람이 지혜롭고 총명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구성원은 가능한 최고 수준에 도달해야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유대 민족과 다른 사회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유대인에게는 더 이상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이해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직접 대화하신 시나이 산에서도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아무런 차별 없이 함께했습니다.
이 원칙은 유대의 전통 문헌에서 다양한 형태로 자주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탄나 데베이 엘리야후(תנא דבי אליהו)》 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삼아, 남자든 여자든, 종이든 여종이든, 성령은 그 사람의 행위에 따라 각 사람 위에 임할 것임을 선포한다.” (세데르 엘리야후 라바 10). 모든 사람은 자신의 행위에 따라 성령이 임하는 수준에 이를 자격을 얻을 수 있습니다.
모쉐의 정책은 모든 백성이 평등하다는 원칙에 기반합니다. 그의 관점에서 계층적인 통치 체계는 유대 민족의 평등을 파괴할 것입니다. 고라(Korah)가 선포했듯이 “모든 백성이 거룩하고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시니” (민수기 16:3), 어찌 백성을 서로 다른 계급으로 나눌 수 있겠습니까? 모쉐는 어떤 사람도 열등하다는 이유로 자신에게 직접 나아오는 것을 막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백성을 직접 심판하겠다고 주장했습니다.
어째서 어떤 사람이 “50인의 지도자”나 “100인의 지도자”로 격하되어야 합니까? (출애굽기 18:21). 모든 사람은 모쉐에게 직접 나아올 만큼 중요한 존재입니다. 모쉐가 조직적인 구조를 만들지 않은 것은 그것이 생각나지 않아서가 아니라,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주장은 백성 사이에 계급이 생긴다면 어떤 사람들은 새로운 지도자로 추대되겠지만, 많은 사람들은 보잘것없는 평민으로 전락하여 지위가 낮아지고 비하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거룩하며,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계신다"라는 견해에 반하는 것입니다.
영혼에 대한 믿음
유대 민족 내에 계급을 세우는 발상은 모쉐에게 너무나 큰 문제였기에,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고통뿐 아니라("너는 반드시 지쳐 쓰러질 것이다" (출애굽기 18:18)), 그 체계의 필연적인 붕괴까지도 기꺼이 감수하려 했습니다. 그러한 사법 및 통치 체계가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했지만, 모쉐는 그것이 자신에게는 원칙의 문제였기에 가능한 한 오랫동안 유지하려고 애썼습니다.
실제로 이트로의 제안은 실행됩니다. 이트로는 훨씬 더 현실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고, 모쉐가 시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의 견해에는 상당한 상식이 깔려 있습니다. 어떻게 모든 사람이 동등한 위치에 있는 국가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평등이라는 개념 자체가 비현실적입니다. 마찬가지로 평등이라는 개념에 기반한 민주주의를 살펴보면, 사실상 비논리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중요한 지적입니다. 오늘날 서구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다른 무엇보다 소중히 여겨지는 이상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민주주의는 비현실적인 체제이자 비논리적인 이념입니다. 배가 아플 때 세 사람에게 의견을 묻거나 국회에 가서 투표를 통해 치료법을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국회에 120명의 현명하고 분별력 있는 의원이 앉아 있다고 하더라도, 한 명의 의사가 그들의 의견에 반대한다면 사람들은 국회의원들이 아니라 그 의사의 의견에 의존하게 됩니다. 상식적으로 전문가의 의견이 대중의 의견보다 더 가치 있게 여겨져야 합니다.
이는 의학적 문제뿐만 아니라 훨씬 더 큰 문제에도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일반인이 복잡한 국제 외교나 경제 정책 문제를 결정할 수 있다는 생각은 근본적으로 비논리적입니다. 사람들의 지혜나 능력이 모두 동등하다는 생각 또한 명백히 잘못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외모, 성격, 지능 등 모든 면에서 서로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쉐의 경우, 평등의 원칙은 지성이나 이성과는 무관한 영혼에 대한 그의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영혼은 추상적이고 영적이며, 무엇보다 신성한 것입니다. 영혼의 차원에서는 누가 더 높고 누가 더 낮은지를 판단할 기준이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은 거룩하다"라고 진정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누구도 질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트로의 조언에 따른 권한 위임은 본질적으로 형식적인 것이며, 상급자와 하급자 사이의 구분은 실질적인 것이지 필수적인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현재 여러 계급으로 나뉘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수천 명의 지도자"가 되었다고 해서 "십 명의 지도자"보다 백 배 더 현명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계급을 정해야 하는 이유는 그렇지 않으면 혼란이 초래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물론 이 백성까지도 결국 지쳐 쓰러질 것입니다."
이로부터 우리가 배울 수 있는 한 가지 교훈은 토라에 따르면 질문받을 수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탈무드는 “아버지와 아들, 스승과 제자조차도 토라를 공부할 때는 서로 원수가 된다”라고 말합니다. (키두신 30b). 탈무드는 토라를 함께 공부하다가 지붕이 흔들릴 정도로 논쟁하는 두 친구의 경우처럼 훨씬 간단한 예를 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탈무드는 바로 아버지와 아들, 또는 스승과 제자의 예를 들어, 아들은 아버지를 공경해야 하고 제자는 스승을 공경해야 하지만, 그들의 의견에 동의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가르치고자 했습니다. 아버지와 스승을 공경해야 한다는 것은 단지 그들에게 존경심을 보여야 한다는 의미일 뿐, 그들에게 질문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존중이란 질문을 할 때 예의를 갖춰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공공장소에서는 상대방에게 창피를 주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시대든 이전 시대든 그 누구도 질문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힐렐(Hillel)과 샴마이(Shammai)사이의 유명한 논쟁이 있는데, 이는 미크베(מִקְוֶה)를 사용하기에 부적합하게 만드는 물의 양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 논쟁은 두 직공이 분뇨문으로 들어와 증언했을 때 비로소 해결되었는데, 이들은 쉐마야(Shemayah)와 아브탈리온(Avtalyon)이 세 번째 양을 규정했다고 증언했습니다. (샤밧 15a). 이 일화에서 법은 그 시대를 이끈 두 현자의 견해에 따라 결정된 것이 아니라, 예루샬라임에서 가장 천한 곳 출신인 두 천한 직공이 인용한 의견에 따라 결정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위대한 민족은 참으로 지혜롭고 총명한 백성이다”라는 구절은 실질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누구나 질문할 수 있으며, 누구도 질문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설령 누군가가 70년 동안 토라를 부지런히, 깊이 있게, 그리고 거룩하게 연구했다 하더라도, 토라가 오직 그 사람만의 손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점에서 이트로의 조언이 채택된 후에도, 그것은 단지 실질적인 틀을 마련했을 뿐, 본질적인 틀을 제시하지는 못했습니다. 궁극적으로 모쉐가 주장했던 원칙은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토대를 이루는 진정한 철학적 구조로 남아 있습니다.
만약 가능하기만 하다면, 모쉐의 원래 판단 방식과 질문에 대한 답변 방식이 실제로도 구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사탕을 주워 돌려줘야 하는지를 묻든, 부족장이 영토 분쟁 해결을 원하든, 모든 질문이 모쉐에게 직접 전달될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에는 한계가 있으며, 그러한 시스템은 존속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모쉐의 체계가 지닌 본질적인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실현 가능성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트로의 체계가 도입되고 모든 것이 정리된 후에도(그리고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우리는 결국 모쉐의 방식이 처음부터 옳았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평등주의자 모쉐
평등주의자 모쉐
이트로의 조언
이트로의 도착을 축하하는 행사가 끝나자 모쉐는 백성을 재판하는 본연의 업무로 돌아갑니다. 이를 본 이트로는 모쉐에게 그의 방식이 비효율적이라고 충고합니다. 모쉐 혼자서 모든 사람을 개별적으로 재판해서는 백성을 다스릴 수 없으니, 질서 있는 사법 제도를 확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트로가 이러한 조언을 해야 했던 이유는 의아스럽습니다. 유대 조상들은 행정이나 사법 제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막 유목민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사막 출신이 아닙니다. 그들은 오랜 세월 동안 이집트에서 살았는데, 이집트는 관료주의가 잘 발달하고 수백 년의 국가 행정 경험을 가진 정부가 있는 조직적인 국가였습니다.
원시 부족 사회가 국가를 세울 때 행정 및 사법 제도에 익숙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스라엘 건국 당시에도 초대 크네세트 의원 중 의회 경험이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모쉐는 파라오의 궁궐에서 자랐습니다. 어린 시절 내내 왕궁을 드나들었기에 국가 운영 방식을 알고 있었고, 이트로의 조언은 그에게 낯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모쉐는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을 때 실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을까요? 왜 이트로가 와서 조언을 해줄 때까지, 명백히 필요한 조직적인 법률 제도를 수립하는 것을 미뤘을까요?
실질적인 관점에서도 모쉐가 백성을 어떻게 다스릴 생각이었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온 나라를 이끌고 수백만 명의 백성 각자의 삶을 지도해야 했을 뿐 아니라,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특별한 문제들까지 해결해야 했습니다. 현실적으로 사람들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워 효과적인 법률 체계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모쉐의 지도력 아래 백성들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창구를 갖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다툼 없는 삶은 불가능합니다. 사람들은 특별한 이유가 없더라도 서로 싸울 방법을 항상 찾아낼 것입니다.
게다가 모쉐는 백성의 재판관일 뿐만 아니라 랍비이기도 했습니다. 모든 다툼과 분쟁, 그리고 금전적인 소송이 없었다 하더라도, 그가 백성의 모든 율법적 질문에 답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질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냄비를 고기 담는 데 써야 할지 우유 담는 데 써야 할지, 안식일에 특정 행위가 금지되는지 허용되는지, ,메주자의 내용이 제대로 쓰였는지 등등. 밤낮으로 이러한 질문에 답한다 해도 충분하지 않을 것입니다.
작은 마을의 랍비 딸이 결혼하면서 케투바( 유대교 결혼 계약서)에 남편이 랍비로 일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추가해 달라고 요청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의 아버지 집에는 아침 일찍부터 한밤중까지 항상 사람들이 북적거렸고, 그녀는 그런 생활을 더 이상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파라샤 이트로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60만 명이 넘었습니다. 각 사람이 가끔씩만 질문한다고 해도 질문의 수는 엄청나게 많았을 것입니다. 모쉐가 모든 질문에 "예" 또는 "아니오"로만 대답한다고 해도, 질문이 수천 건에 달하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모쉐가 스스로 떠맡은 이 막중한 임무를 생각하면, 그가 다른 일에 시간을 낼 수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심지어 파라샤 초반에 장인어른께 인사드리는 것 조차 그의 바쁜 일정에서 귀중한 시간을 빼앗았을 것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상황은 사람들의 입장에서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모쉐 앞에 길게 늘어선 사람들의 줄과, 우리가 관공서에서 흔히 겪는 끝없는 대기 시간을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쉐는 어떻게 이런 방식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었을까?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 선지자였으면 좋겠다.”
모쉐는 실용적인 고려 사항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다른 관점에서 비롯된 고려 사항에 따라 행동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사건은 모쉐에게 원칙의 문제였습니다. 모쉐와 이트로의 의견은 어떤 방법이 더 효과적인지에 대한 실용적인 문제에서는 다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유대 민족 내부에 일종의 위계질서를 구축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지에 대해 의견 차이를 보였습니다.
이트로의 제안이 시사하는 바는 유대 민족 내에 계급 체계를 확립하는 것입니다. 즉, 누군가 질문이나 문제가 생기면 자신을 책임지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고, 이 책임자 역시 그보다 높은 직책을 가진 사람이 있으며, 이런 식으로 모쉐에 이르기까지 위계질서가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높은 계급의 사람과 낮은 계급의 사람이 존재하는 상황이 만들어집니다.
그러나 모쉐는 그러한 구조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개인적인 성향에서든, 문제 자체를 고려했을 때든 마찬가지였습니다.
모쉐는 계급이나 신분으로 백성을 나누는 것에 반대하는 모습을 시내산에서의 계시 때에도 보여주었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모쉐에게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면 우리가 듣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마십시오. 우리가 죽을까 두렵습니다.”라고 간청했던 일화가 그 예입니다. (출애굽기 20:16).
신명기에는 이 사건이 더 자세히 묘사되어 있는데, 모쉐에게 이 요청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쉐는 이 생각을 받아들이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이 옳았다”는 확증을 받아야 했습니다. (신명기 5장 25절). 모쉐는 모든 유대인은 최고의 경지에 이르기를 열망했습니다. 모쉐는 이상적으로 이스라엘의 모든 구성원이 자신이 받았던 것처럼 완벽하게 전능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토라를 받아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예호슈아가 엘닷(Eldad)과 메닷(Medad)이 진영에서 예언하고 있다고 달려와 모쉐에게 전했을 때, 모쉐는 비슷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모쉐는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 예언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민수기 11:29). 모쉐가 이렇게 대답한 것은 예의나 겸손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대로였기 때문입니다. 엘닷과 메닷이 예언한 것처럼, 모쉐도 60만 명의 예언자가 있기를 바랐습니다.
이것은 단지 모쉐의 개인적인 소망만이 아닙니다. 토라 자체에서도 유대 민족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이 위대한 민족은 참으로 지혜롭고 총명한 민족입니다.” (신명기 4:6). “지혜롭고 총명한” 민족 전체라는 개념은 유대 신앙 체계의 기본 원칙입니다.
거의 모든 사회와 문화에는 학식 있는 자와 무지한 자 사이의 계급 구분이 존재하며, 심지어 이것이 이상적인 사회 구조로 여겨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유대 민족의 열망은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이상적으로 모든 사람이 지혜롭고 총명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구성원은 가능한 최고 수준에 도달해야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유대 민족과 다른 사회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유대인에게는 더 이상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이해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직접 대화하신 시나이 산에서도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아무런 차별 없이 함께했습니다.
이 원칙은 유대의 전통 문헌에서 다양한 형태로 자주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탄나 데베이 엘리야후(תנא דבי אליהו)》 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삼아, 남자든 여자든, 종이든 여종이든, 성령은 그 사람의 행위에 따라 각 사람 위에 임할 것임을 선포한다.” (세데르 엘리야후 라바 10). 모든 사람은 자신의 행위에 따라 성령이 임하는 수준에 이를 자격을 얻을 수 있습니다.
모쉐의 정책은 모든 백성이 평등하다는 원칙에 기반합니다. 그의 관점에서 계층적인 통치 체계는 유대 민족의 평등을 파괴할 것입니다. 고라(Korah)가 선포했듯이 “모든 백성이 거룩하고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시니” (민수기 16:3), 어찌 백성을 서로 다른 계급으로 나눌 수 있겠습니까? 모쉐는 어떤 사람도 열등하다는 이유로 자신에게 직접 나아오는 것을 막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백성을 직접 심판하겠다고 주장했습니다.
어째서 어떤 사람이 “50인의 지도자”나 “100인의 지도자”로 격하되어야 합니까? (출애굽기 18:21). 모든 사람은 모쉐에게 직접 나아올 만큼 중요한 존재입니다. 모쉐가 조직적인 구조를 만들지 않은 것은 그것이 생각나지 않아서가 아니라,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주장은 백성 사이에 계급이 생긴다면 어떤 사람들은 새로운 지도자로 추대되겠지만, 많은 사람들은 보잘것없는 평민으로 전락하여 지위가 낮아지고 비하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거룩하며,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계신다"라는 견해에 반하는 것입니다.
영혼에 대한 믿음
유대 민족 내에 계급을 세우는 발상은 모쉐에게 너무나 큰 문제였기에,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고통뿐 아니라("너는 반드시 지쳐 쓰러질 것이다" (출애굽기 18:18)), 그 체계의 필연적인 붕괴까지도 기꺼이 감수하려 했습니다. 그러한 사법 및 통치 체계가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했지만, 모쉐는 그것이 자신에게는 원칙의 문제였기에 가능한 한 오랫동안 유지하려고 애썼습니다.
실제로 이트로의 제안은 실행됩니다. 이트로는 훨씬 더 현실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고, 모쉐가 시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의 견해에는 상당한 상식이 깔려 있습니다. 어떻게 모든 사람이 동등한 위치에 있는 국가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평등이라는 개념 자체가 비현실적입니다. 마찬가지로 평등이라는 개념에 기반한 민주주의를 살펴보면, 사실상 비논리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중요한 지적입니다. 오늘날 서구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다른 무엇보다 소중히 여겨지는 이상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민주주의는 비현실적인 체제이자 비논리적인 이념입니다. 배가 아플 때 세 사람에게 의견을 묻거나 국회에 가서 투표를 통해 치료법을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국회에 120명의 현명하고 분별력 있는 의원이 앉아 있다고 하더라도, 한 명의 의사가 그들의 의견에 반대한다면 사람들은 국회의원들이 아니라 그 의사의 의견에 의존하게 됩니다. 상식적으로 전문가의 의견이 대중의 의견보다 더 가치 있게 여겨져야 합니다.
이는 의학적 문제뿐만 아니라 훨씬 더 큰 문제에도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일반인이 복잡한 국제 외교나 경제 정책 문제를 결정할 수 있다는 생각은 근본적으로 비논리적입니다. 사람들의 지혜나 능력이 모두 동등하다는 생각 또한 명백히 잘못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외모, 성격, 지능 등 모든 면에서 서로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쉐의 경우, 평등의 원칙은 지성이나 이성과는 무관한 영혼에 대한 그의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영혼은 추상적이고 영적이며, 무엇보다 신성한 것입니다. 영혼의 차원에서는 누가 더 높고 누가 더 낮은지를 판단할 기준이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은 거룩하다"라고 진정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누구도 질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트로의 조언에 따른 권한 위임은 본질적으로 형식적인 것이며, 상급자와 하급자 사이의 구분은 실질적인 것이지 필수적인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현재 여러 계급으로 나뉘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수천 명의 지도자"가 되었다고 해서 "십 명의 지도자"보다 백 배 더 현명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계급을 정해야 하는 이유는 그렇지 않으면 혼란이 초래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물론 이 백성까지도 결국 지쳐 쓰러질 것입니다."
이로부터 우리가 배울 수 있는 한 가지 교훈은 토라에 따르면 질문받을 수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탈무드는 “아버지와 아들, 스승과 제자조차도 토라를 공부할 때는 서로 원수가 된다”라고 말합니다. (키두신 30b). 탈무드는 토라를 함께 공부하다가 지붕이 흔들릴 정도로 논쟁하는 두 친구의 경우처럼 훨씬 간단한 예를 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탈무드는 바로 아버지와 아들, 또는 스승과 제자의 예를 들어, 아들은 아버지를 공경해야 하고 제자는 스승을 공경해야 하지만, 그들의 의견에 동의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가르치고자 했습니다. 아버지와 스승을 공경해야 한다는 것은 단지 그들에게 존경심을 보여야 한다는 의미일 뿐, 그들에게 질문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존중이란 질문을 할 때 예의를 갖춰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공공장소에서는 상대방에게 창피를 주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시대든 이전 시대든 그 누구도 질문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힐렐(Hillel)과 샴마이(Shammai)사이의 유명한 논쟁이 있는데, 이는 미크베(מִקְוֶה)를 사용하기에 부적합하게 만드는 물의 양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 논쟁은 두 직공이 분뇨문으로 들어와 증언했을 때 비로소 해결되었는데, 이들은 쉐마야(Shemayah)와 아브탈리온(Avtalyon)이 세 번째 양을 규정했다고 증언했습니다. (샤밧 15a). 이 일화에서 법은 그 시대를 이끈 두 현자의 견해에 따라 결정된 것이 아니라, 예루샬라임에서 가장 천한 곳 출신인 두 천한 직공이 인용한 의견에 따라 결정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위대한 민족은 참으로 지혜롭고 총명한 백성이다”라는 구절은 실질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누구나 질문할 수 있으며, 누구도 질문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설령 누군가가 70년 동안 토라를 부지런히, 깊이 있게, 그리고 거룩하게 연구했다 하더라도, 토라가 오직 그 사람만의 손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점에서 이트로의 조언이 채택된 후에도, 그것은 단지 실질적인 틀을 마련했을 뿐, 본질적인 틀을 제시하지는 못했습니다. 궁극적으로 모쉐가 주장했던 원칙은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토대를 이루는 진정한 철학적 구조로 남아 있습니다.
만약 가능하기만 하다면, 모쉐의 원래 판단 방식과 질문에 대한 답변 방식이 실제로도 구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사탕을 주워 돌려줘야 하는지를 묻든, 부족장이 영토 분쟁 해결을 원하든, 모든 질문이 모쉐에게 직접 전달될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에는 한계가 있으며, 그러한 시스템은 존속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모쉐의 체계가 지닌 본질적인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실현 가능성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트로의 체계가 도입되고 모든 것이 정리된 후에도(그리고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우리는 결국 모쉐의 방식이 처음부터 옳았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By Rabbi Adin Even-Israel (Steinsaltz)
Art by Sefira Lightst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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