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어질 때(On Falling)

phantom2026.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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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어질 때(On Falling)

서 있는 것은 삶을 바꾸는 성취입니다. 유아가 처음으로 혼자 일어서는 순간은 네 발로 걷던 것에서 두 발로 걷는 것으로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긁히고 멍들고 상처 입는 과정을 통해 걷기와 달리기가 넘어짐을 통제하고 극복하는 방식임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어린 아이는 자신의 의지를 지키는 데서 존엄성을 느끼고, 저항에 맞서 굳건히 서는 데서 용기를 얻기 시작합니다.

또한 서 있는 행위는 종교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많은 회당에서 성궤 위에는 "네가 누구 앞에 서 있는지 알라(Know before Whom you stand)"는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전통 유대교 예배의 중심 기도문은 단순히 '아미다'(Amidah), 즉 '서서 드리는 기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 앞으로 세 걸음을 내디디고, 무릎을 꿇었다가 다시 똑바로 서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유대인들은 다양한 자세로 기도하지만, 곧게 서서 드리는 기도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 있기 때문에 때로는 넘어지기도 합니다. 이는 유대인의 기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굽히고 절하며 심지어 욥처럼 땅에 엎드리기도 합니다. 시편 30편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공포를 묘사하며 기도의 안무를 표현합니다.

시편 6-8절은 이렇게 읽힐 수 있습니다: "한때 나는 평온하고 확신에 차서 스스로 생각했노라, 나는 결코 미끄러지거나 넘어지지 않으리라. 하나님, 당신의 뜻은 내가 화강암 산처럼 서 있는 것이었으나, 당신이 얼굴을 숨기시자 나는 두려움에 비틀거리며 쓰러졌노라."

넘어짐은 사실 생명체와 무생물이 존재하는 조건이다. 서 있다는 것은 그 조건에 대한 일시적인 저항이다: 나는 바람에 쓰러지지 않겠고, 시간에 시들지 않겠으며, 오히려 내 자리를 지키고 싸우리라.

서양의 상상 속에서 넘어짐은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금단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초래된 인류의 비극적 추락을 묘사하는 방식입니다. 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죄가 세상에 죽음을 가져왔으며, 기독교 교회는 신자들이 그 죄를 속죄하고 따라서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합니다.

유대교는 죽음이 그 자체로 일종의 넘어짐이지만, 삶에서 소중하고 필수적인 부분임을 시사합니다. 탈무드의 현자 랍비 메이어(Meir)는 창세기의 창조 서술 마지막 구절 —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매우(מְאֹד, Me'od: 메오드) 좋았더라." (창세기 1:31)을 이렇게 읽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보라, 죽음이(מוֹת, mot:모흐트) 매우 좋으니라."

삶 그 자체처럼, 죽음 역시 선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가장 행복한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고 말했습니다. 사람이 지붕이나 나무에서 떨어질 때 자신의 무게를 느끼지 않고 오히려 공중에 떠 있거나 날아가는 듯한 경험을 한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그러니 넘어짐은 순수한 기쁨입니다—땅에 부딪히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아이작 뉴턴과 달리 아인슈타인은 중력의 본질이 충돌이 아니라 물체의 자유낙하에서 드러난다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지구는 태양 주위를, 달은 지구 주위를 끊임없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우주 자체가 떨어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는 그의 시 「가을」에서 아인슈타인의 통찰을 대변하는 듯합니다:

잎사귀는 떨어지네, 멀리서 떨어지듯,

하늘에 시든 먼 정원들처럼;

그들은 느리고도 오래 머무르며 내려앉네.

밤에는 무거운 지구마저 떨어지네

별들 사이에서 고독 속으로.

이리하여 모든 것이 떨어지네. 내 이 손도 떨어질 것이며

보라! 다른 손도—이것이 법칙이라네.

그러나 이 떨어짐을 붙잡는 분이 계시니

그분의 손에 무한히 부드럽게 안겨 있네.

넘어짐 속에서 우리는 존재의 자유와 흐름을 맛보며, 떠다니고 날고 내버려 두는 믿음을 찾고 잃습니다. 우리는 어머니 자궁의 양수 속에서 떠다니기 시작했지만, 거기서 준비됐든 아니든 중력과 마음과 사지의 무거움 속으로 나아와 추락에 대한 큰 두려움을 배웁니다.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잠들기도 하고 병들기도 합니다. 함정에 빠지기도 하고, 황홀경에 빠지기도 하며, 절벽에서 떨어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하며, 속임수에 넘어가기도 하고, 습관과 오류와 기분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넘어짐에 대한 해결책은 없을지 모릅니다. 다만 더 잘 넘어지는 법을 배우는 것, 걷는 것이 춤추듯 존재의 넘어짐과 함께하는 놀이라는 점을 더 깊이 깨닫는 것뿐입니다. 서 있는 계절도 있고 넘어지는 계절도 있으며, 우리의 저항과 항복 모두 어딘가, 누군가에 의해 부드럽게 품어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영원히 알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지칭하는 위대하고 필수적인 우회적 표현 중 하나는 히브리어 '아도나이'(אֲדֹנָי)입니다. 문자 그대로 '나의 주님'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내가 이 단어를 말할 때면, 영어 표현 '모르겠어요(I don’t know.)'가 들려옵니다. 넘어질 때면 어디에, 혹은 과연, 언제 착지할지 알 수 없습니다. 의문이 쌓여갈수록 답은 명확해집니다:

잘 모르겠습니다.(I don’t know. = Adonai, אֲדֹנָי).

By Rabbi James Ponet (emeritus Jewish chaplain at Yale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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