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3개 계명(מִצְווֹת, 미쯔보트) 중, 파라샤 테루마(תְּרוּמָה)에 나오는 성막 건축을 위한 귀중한 소유물 헌납 계명은 자발성이라는 요소로 차별성이 있으며, 이는 일반적으로 명확한 할라카(הֲלָכָה, 유대법)의 성격을 벗어납니다. 성막(מִשְׁכָּן, 미쉬칸) 건축을 위한 헌금은 의무가 아닐 뿐만 아니라, 자유로운 마음과 너그러운 마음에서 비롯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승인을 받을 만한 헌금이 됩니다: "마음을 내어 기꺼이 드리는 자마다.“
미쉬칸이란 무엇인가?
미쉬칸이란 무엇이며, 무엇이 이 순수한 의지의 행위를 요구하나요? 성전의 이동식 선구자인 미쉬칸은 지붕이 없습니다. 사막의 천막처럼 염소 가죽으로만 덮여 있습니다. 내부는 더 정교하게 꾸며져 있으며, 아론 하브리트(אָרוֹן הַבְּרִית, 언약궤), 루호트 하브리트(לוחות הברית, 언약의 돌판), 메노라, 슐탄(שֻׁלְחָן,상), 금 제단, 그리고 다른 제사장 의복과 부속품들이 있습니다. 토라에 이 구조물에 대해 무려 450절이나 할애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는 미쉬칸의 목적을 하나님의 우주 창조 배경 속에서 바라봄으로써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와 에덴 동산 이야기는 토라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다양한 상호 관계—그 본질과 역학, 기대와 실망, 안정의 시기 및 유배의 시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성막은 중대한 기능을 수행합니다. 우주의 창조가 인간을 위한 신적 행위였다면, 성막의 창조는 그 보완으로서 우주의 창조주를 향한 인간의 행위였으며, 그분께서 이 세상에 거처를 마련하시도록 초대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그분의 광대한 우주 안에 자신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들이 나를 위하여 성소를 지으리니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리라" (출애굽기 25:8).
인간이 하나님을 위한 집을 마련한다는 이 개념은 결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드라쉬(탄후마 키-티사 10)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하나님이 모쉐에게 하신 세 가지 말씀이 그를 두려움에 떨게 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모쉐에게 '그들이 나를 위하여 성소를 지을 것이라' 하셨을 때"였다. 모쉐는 물었습니다: "오 전능하신 분이여, '보라, 하늘과 땅도 주를 모실 수 없사오니(열왕기상 8:27)'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나를 위하여 성소를 지을 것이라' 하실 수 있습니까?“
흥미롭게도 미드라쉬는 모쉐가 예루살렘 성전 봉헌식 당시 솔로몬 왕의 말을 인용했다고 전하는데, 이는 성막이 세워진 지 500년 후의 일이었습니다.
이후 미드라쉬는 솔로몬이 제기한 또 다른 질문을 언급하는데, 이 역시 모쉐에게 귀속됩니다: "하나님이 과연 땅에 거하실 수 있겠는가?" (열왕기상 8:37)
미드라쉬는 하나님의 답변으로 이어집니다. "...너희가 이해하는 방식대로, 북쪽 20개, 남쪽 20개, 서쪽 8개의 널빤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내가 내려와 내 신성한 임재를 축소할 것이며, 나아가 그것을 한 큐빗의 정사각형으로 축소할 것이다!“
이 놀라운 역설—“하늘과 하늘의 하늘도 감당하지 못할” 분을 한 큐빗의 제한된 공간 안에서 경배한다는 점—은 어떤 공간적 한계 안에서도 하나님을 경배한다는 개념에 내재된 긴장감을 더욱 고조시킵니다. 아름다운 탈무드 격언이 이 역설을 낭만적으로 표현합니다: "우리 사랑이 깊었을 때는 칼끝 위에도 함께 누울 수 있었노라. 이제 사랑이 식어버린 지금은 육십 규빗 침대조차도 좁아 부족하도다." (산헤드린 7a)
아마도 이것이 미쉬칸의 역할일 것입니다. 사랑이 있을 때 하나님이 머무실 수 있는 '칼끝'이 되는 것. 우리 파르샤에서 미쉬칸을 지탱하는 유대 민족과 하나님 사이의 사랑은 하나님이 요구하시고 백성이 제공하는 '마음의 기꺼움'으로 구체화 됩니다.
왜 지으려 하셨을까?
그런데 애초에 하나님은 왜 백성들에게 성막을 지으라고 하셨을까요? 주석가들은 성막이 하나님께서 백성을 위해 세우신 원래 계획의 일부였는지, 아니면 백성들이 금송아지 죄를 통해 하나님을 '구체화'하려는 시도의 결과였는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합니다.
후자의 관점에 따르면, 종교적 체험의 진정한 본질은 하나님이 한 곳에 국한되지 않고 어디에나 계신다는 인식입니다. 즉, 하나님을 한 장소에 묶어둘 필요 없이 어디서나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세 주석가 스포르노(Sforno)는 시나이 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심지어 보았던 체험이 그분과의 다른 만남을 위한 모범이 되었을 것이므로, 하나님 숭배를 구체적인 장소에 고정시킬 필요가 없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스포르노는 이어서, 금송아지 우상 숭배의 죄 이후에는 하나님을 숭배하기 위한 보다 가시적인 수단이 필요해졌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성막과 그 가구, 기구, 의식이 생겨난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 견해는 성막과 성전에 관한 계명들을 하나님께서 창세 초부터 주려 하신 법들로 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어 이 세상에 거하실 수 있게 하시고, 숭배자들을 만나실 집에서 안식하실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관점에 따르면, 마콤(מָקוֹם, 장소) 개념은 예루샬라임과 성전을 '그 장소'로 지칭하는 데서 드러나듯 유대교에 큰 의미를 지닙니다. 또한 하나님의 이름 중 하나가 마콤입니다.
오늘날 홀로코스트 이후의 세상에서 유대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재구성해야 하는 깊은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유대 신앙에 대한 두 가지 매우 다른 개념이 공존해 왔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마콤(מָקוֹם, 장소)에 묶여 있다고 보는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분을 장소가 없는 '아인 소프(אֵין סוֹף, 무한)'로 보는 관점입니다.
우리 시대에 이러한 차이점은 새로운 신학적 대화의 토대가 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하나님이 성소에 거하신다는 관점과 장소의 신성함에 대한 종교적 체험이 종종 강화됩니다. 그러나 바로 이 관점이 격렬한 갈등의 원천이 되기도 했습니다.
반대로, 디아스포라에서 주로 발견되는 추상적이고 '장소 없는' 신 개념은 엄청난 종교적 열정의 원천이 될 수 있으며 독특한 영적 탐구를 촉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유대인들이 정의된 장소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보다 구체적인 이미지를 경험하는 능력을 제한할 수도 있습니다.
이 두 관점 사이의 의미 있는 대화는 우리의 신앙에 대한 더 넓은 시각을 얻는 데 도움이 될 것이며, 특히 우리 세계에서 하나님의 위치를 더 잘 이해하는 데 기여할 것 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또 다른 주요 속성인 진정한 샬롬(שׁלום, 평화)을 이루기 위한 우리의 노력을 진전시키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성막은 하나님의 집인가요?
성막은 하나님의 집인가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게 하라 마음에서 기쁘게 내어주는 자마다 그 예물을 받으라.” (출애굽기 25:1)
613개 계명(מִצְווֹת, 미쯔보트) 중, 파라샤 테루마(תְּרוּמָה)에 나오는 성막 건축을 위한 귀중한 소유물 헌납 계명은 자발성이라는 요소로 차별성이 있으며, 이는 일반적으로 명확한 할라카(הֲלָכָה, 유대법)의 성격을 벗어납니다. 성막(מִשְׁכָּן, 미쉬칸) 건축을 위한 헌금은 의무가 아닐 뿐만 아니라, 자유로운 마음과 너그러운 마음에서 비롯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승인을 받을 만한 헌금이 됩니다: "마음을 내어 기꺼이 드리는 자마다.“
미쉬칸이란 무엇인가?
미쉬칸이란 무엇이며, 무엇이 이 순수한 의지의 행위를 요구하나요? 성전의 이동식 선구자인 미쉬칸은 지붕이 없습니다. 사막의 천막처럼 염소 가죽으로만 덮여 있습니다. 내부는 더 정교하게 꾸며져 있으며, 아론 하브리트(אָרוֹן הַבְּרִית, 언약궤), 루호트 하브리트(לוחות הברית, 언약의 돌판), 메노라, 슐탄(שֻׁלְחָן,상), 금 제단, 그리고 다른 제사장 의복과 부속품들이 있습니다. 토라에 이 구조물에 대해 무려 450절이나 할애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는 미쉬칸의 목적을 하나님의 우주 창조 배경 속에서 바라봄으로써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와 에덴 동산 이야기는 토라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다양한 상호 관계—그 본질과 역학, 기대와 실망, 안정의 시기 및 유배의 시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성막은 중대한 기능을 수행합니다. 우주의 창조가 인간을 위한 신적 행위였다면, 성막의 창조는 그 보완으로서 우주의 창조주를 향한 인간의 행위였으며, 그분께서 이 세상에 거처를 마련하시도록 초대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그분의 광대한 우주 안에 자신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들이 나를 위하여 성소를 지으리니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리라" (출애굽기 25:8).
인간이 하나님을 위한 집을 마련한다는 이 개념은 결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드라쉬(탄후마 키-티사 10)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하나님이 모쉐에게 하신 세 가지 말씀이 그를 두려움에 떨게 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모쉐에게 '그들이 나를 위하여 성소를 지을 것이라' 하셨을 때"였다. 모쉐는 물었습니다: "오 전능하신 분이여, '보라, 하늘과 땅도 주를 모실 수 없사오니(열왕기상 8:27)'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나를 위하여 성소를 지을 것이라' 하실 수 있습니까?“
흥미롭게도 미드라쉬는 모쉐가 예루살렘 성전 봉헌식 당시 솔로몬 왕의 말을 인용했다고 전하는데, 이는 성막이 세워진 지 500년 후의 일이었습니다.
이후 미드라쉬는 솔로몬이 제기한 또 다른 질문을 언급하는데, 이 역시 모쉐에게 귀속됩니다: "하나님이 과연 땅에 거하실 수 있겠는가?" (열왕기상 8:37)
미드라쉬는 하나님의 답변으로 이어집니다. "...너희가 이해하는 방식대로, 북쪽 20개, 남쪽 20개, 서쪽 8개의 널빤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내가 내려와 내 신성한 임재를 축소할 것이며, 나아가 그것을 한 큐빗의 정사각형으로 축소할 것이다!“
이 놀라운 역설—“하늘과 하늘의 하늘도 감당하지 못할” 분을 한 큐빗의 제한된 공간 안에서 경배한다는 점—은 어떤 공간적 한계 안에서도 하나님을 경배한다는 개념에 내재된 긴장감을 더욱 고조시킵니다. 아름다운 탈무드 격언이 이 역설을 낭만적으로 표현합니다: "우리 사랑이 깊었을 때는 칼끝 위에도 함께 누울 수 있었노라. 이제 사랑이 식어버린 지금은 육십 규빗 침대조차도 좁아 부족하도다." (산헤드린 7a)
아마도 이것이 미쉬칸의 역할일 것입니다. 사랑이 있을 때 하나님이 머무실 수 있는 '칼끝'이 되는 것. 우리 파르샤에서 미쉬칸을 지탱하는 유대 민족과 하나님 사이의 사랑은 하나님이 요구하시고 백성이 제공하는 '마음의 기꺼움'으로 구체화 됩니다.
왜 지으려 하셨을까?
그런데 애초에 하나님은 왜 백성들에게 성막을 지으라고 하셨을까요? 주석가들은 성막이 하나님께서 백성을 위해 세우신 원래 계획의 일부였는지, 아니면 백성들이 금송아지 죄를 통해 하나님을 '구체화'하려는 시도의 결과였는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합니다.
후자의 관점에 따르면, 종교적 체험의 진정한 본질은 하나님이 한 곳에 국한되지 않고 어디에나 계신다는 인식입니다. 즉, 하나님을 한 장소에 묶어둘 필요 없이 어디서나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세 주석가 스포르노(Sforno)는 시나이 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심지어 보았던 체험이 그분과의 다른 만남을 위한 모범이 되었을 것이므로, 하나님 숭배를 구체적인 장소에 고정시킬 필요가 없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스포르노는 이어서, 금송아지 우상 숭배의 죄 이후에는 하나님을 숭배하기 위한 보다 가시적인 수단이 필요해졌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성막과 그 가구, 기구, 의식이 생겨난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 견해는 성막과 성전에 관한 계명들을 하나님께서 창세 초부터 주려 하신 법들로 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어 이 세상에 거하실 수 있게 하시고, 숭배자들을 만나실 집에서 안식하실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관점에 따르면, 마콤(מָקוֹם, 장소) 개념은 예루샬라임과 성전을 '그 장소'로 지칭하는 데서 드러나듯 유대교에 큰 의미를 지닙니다. 또한 하나님의 이름 중 하나가 마콤입니다.
오늘날 홀로코스트 이후의 세상에서 유대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재구성해야 하는 깊은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유대 신앙에 대한 두 가지 매우 다른 개념이 공존해 왔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마콤(מָקוֹם, 장소)에 묶여 있다고 보는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분을 장소가 없는 '아인 소프(אֵין סוֹף, 무한)'로 보는 관점입니다.
우리 시대에 이러한 차이점은 새로운 신학적 대화의 토대가 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하나님이 성소에 거하신다는 관점과 장소의 신성함에 대한 종교적 체험이 종종 강화됩니다. 그러나 바로 이 관점이 격렬한 갈등의 원천이 되기도 했습니다.
반대로, 디아스포라에서 주로 발견되는 추상적이고 '장소 없는' 신 개념은 엄청난 종교적 열정의 원천이 될 수 있으며 독특한 영적 탐구를 촉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유대인들이 정의된 장소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보다 구체적인 이미지를 경험하는 능력을 제한할 수도 있습니다.
이 두 관점 사이의 의미 있는 대화는 우리의 신앙에 대한 더 넓은 시각을 얻는 데 도움이 될 것이며, 특히 우리 세계에서 하나님의 위치를 더 잘 이해하는 데 기여할 것 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또 다른 주요 속성인 진정한 샬롬(שׁלום, 평화)을 이루기 위한 우리의 노력을 진전시키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예호슈아(Yehoshua) 랍비의 말처럼: "평화는 위대하니, 거룩하신 분 스스로가 평화라 불리우심이라." (미드라쉬 시프라, 레위기)
By Rabbi Moti Bar-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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