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멜랑2026.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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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만인가, 8년만인가. 햇수도 헷갈릴만큼 시간이 지났다.
거래처에 미팅을 가는 날이었다.
여름에 접어들어가는 날씨는 서서히 뜨겁게 익어가고 있었고, 대리였던 나는 팀장과 함께 미팅 자료를 챙겨 거래처로 향했다.
차 안에서 팀장이랑 무슨 대화를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마 평소처럼 거래처 과장 누구씨가 어떤 사람이더라, 회사 분위기가 어떻더라 따위의 얘기였던 것 같다.
미팅 장소에 들어갈 때까지도, 그 날 내가 널 다시 만나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 했다.

회의실에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눈을 의심했다.
네가 그 자리에 앉아 나와 똑같은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헛기침을 하며 명함을 건네고, 네게서도 명함을 건네어 받았다.
익숙한 이름이, 낯선 명함에 반듯하게 적혀있었다.
살이 조금 쪘구나. 너도 나이가 들었네. 얼굴에서 세월이 느껴졌다.

혹시 이런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가끔 거래처 미팅을 가며 상상하곤 했었는데, 막상 그런 일이 생기니 마음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네 손의 온기도, 네 목소리의 다정함도, 네 품의 포근함도 이제는 희미해져가고 있었는데, 다시 만난 너는 왼손 네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고 있었다.

미팅을 마치고 회사로 복귀해 일을 마무리 할 때 까지도 네 명함은 내 지갑 안에 얌전히 숨죽여있었다.
전화를 할까 하다가 그 반지를 떠올리고는 마음을 접었다.
과거 연인과 구구절절 세월 성토 대회 같은건 하고싶지 않았다.

그런데, 퇴근 길에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명함을 꺼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직감이 너라고 알려주는 듯 했다.

여보세요. 라는 말에 너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잘 지냈냐고 물었다.
그게 참, 너 답다고 생각했다. 나이가 들었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구나.
우리는 짧게 서로의 안부를 물었고, 결혼 했냐는 내 물음에, 너는 얼마 전 식을 올렸다고 했다.
그래, 그거면 됐지.

- 나도 올해 결혼해.
그 말에 네가 축하한다고 얘기해줬던 것 같다.
우리가 함께 했던 그 해, 그 계절이 불현듯 떠올랐다.
네 옆자리를 욕심냈던 나는, 내 곁을 욕심냈던 너는 결국 서로의 근처에조차 남아있지 못했다.
순리로 따져도 그게 맞겠지.

몇 해 전, 사실 그 사람의 여자친구, 그러니까 내 친구였던 그녀의 소식을 들었다.
사과를 했고, 사과를 받아줬지만 당연하게도 우리는 끝끝내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 했다.

그녀는 내 연인이었던 사람과 결혼을 했다고 한다.
그 소식을 듣고 돌이켜 생각해보니 두 사람이 퍽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우리가 끝끝내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 했던 이유 중 하나는, 내가 사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했던 이야기 때문이었다.

- 나 사실은 그 오빠 좋아했었어.

내가 네 연인을 탐내 선을 넘었을 때, 너도 내 연인에게 마음을 품고 있었구나.
그래서 네가 날 용서해줄 수 있었구나.
그 모든것이 내가 네게 지었던 죄에 비하면야...


이제는 다 지난 이야기다.
그녀와 그는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잘 살고있다고 한다.
다정하고 세심한 사람들이었으니, 결혼 생활도 따뜻하게 잘 하고 있겠지.

그들의 소식까지는 전하지 않았다.
아내와 임신을 준비하고있다는 얘기를 끝으로, 나는 밥 한 번 먹자는 의례적인 인사조차 건네지 않고 잘 지내라고 전화를 끊었다.
그 전화를 끝으로 우리는 다시 거래처 사람으로 돌아가겠지.

겨울의 삭풍같았던 사랑 이야기는, 현실 속에서 마무리지어졌다.
몇 번의 미팅에서 너와 나는 낯선 사람처럼 마주앉아 이야기했고, 미팅이 끝난 이후로는 연락 한 번 주고받지 않았다.
예쁜 아이를 낳아 행복한 결혼 생활을 영위하길 바란다.


나 역시 그렇게 살고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