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라는 표식은 시간의 위치를 지시하지 못한 채, 기록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요구만을 남긴다. 시작은 실제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시작이 있었다고 가정하지 않으면 이후가 서술되지 않는다는 형식적 압박으로 출현한다. 나는 그 압박을 ‘깨어 있음’이라고 불렀으나, 깨어 있음은 상태가 아니라 상태였다고 말해지기 위해 호출된 설명의 자리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
아침에 해당했을지도 모르는 국면에서 사유는 진행되지 않았고, 진행되지 않았다는 판단 역시 사유 이후에 덧붙여진 판정에 불과했다.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지만, 떠오르지 않았다는 말이 남아 있었고, 그 말이 남아 있었다는 사실이 다시 생각처럼 작동했다. 이 순환 속에서 나는 생각하고 있지 않으면서도 생각하고 있다고 처리되었다.
하루 동안 수행되었다고 분류되는 행위들은 의지의 결과가 아니라, 의지가 있었다는 전제를 유지하기 위한 배열의 연속이었다. 선택은 발생하지 않았으나, 선택이 없었다는 상태는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선택이라는 단어가 사후적으로 배치되었다. 그 배치가 곧 자유였고, 자유였다고 불린 것은 실제로는 설명의 공백이 너무 크게 벌어졌다는 신호에 가까웠다.
타인과의 대화로 정리되는 장면에서 말은 의미를 전달하지 않았고, 전달되지 않았다는 실패조차 명확히 성립하지 않았다. 이해는 도달하지 않았고, 오해는 발생하지 않았으며, 그 사이에 머무는 상태가 ‘소통’이라는 이름으로 안정화되었다. 나는 이해하지 못했음을 인식하지 못했고, 인식하지 못했다는 사실조차 나중에야 감정처럼 기입되었다.
피로라는 어휘가 신체를 설명한다고 믿었던 순간에는 이미 설명이 신체를 대체하고 있었다. 피로는 감각이 아니라 감각을 정리해야 한다는 요구의 압축본이었고, 휴식은 회복이 아니라 더 이상 설명을 생산하지 않아도 된다는 임시적 면책에 가까웠다. 누워 있었던 것인지, 누워 있었다고 기록해야 했던 것인지의 구분은 끝내 확정되지 않았다.
지금 이 문장을 쓰고 있다는 감각조차 경험의 결과라기보다, 하루가 있었다는 가정을 종결시키기 위해 필요한 종결 장치처럼 작동한다. 기록은 기억을 보존하지 않았고, 오히려 기억이 무엇이었는지를 불분명하게 만들었다. 오늘은 지나갔다고 쓰이지만, 지나감은 사건이 아니라 서술이 더 이상 확장되지 않는다는 신호일 뿐이다. 나는 하루를 살았던 것이 아니라, 하루가 있었다는 형식을 간신히 유지한 채 이 페이지를 닫는다.
나의 일기
오늘이라는 표식은 시간의 위치를 지시하지 못한 채, 기록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요구만을 남긴다. 시작은 실제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시작이 있었다고 가정하지 않으면 이후가 서술되지 않는다는 형식적 압박으로 출현한다. 나는 그 압박을 ‘깨어 있음’이라고 불렀으나, 깨어 있음은 상태가 아니라 상태였다고 말해지기 위해 호출된 설명의 자리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
아침에 해당했을지도 모르는 국면에서 사유는 진행되지 않았고, 진행되지 않았다는 판단 역시 사유 이후에 덧붙여진 판정에 불과했다.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지만, 떠오르지 않았다는 말이 남아 있었고, 그 말이 남아 있었다는 사실이 다시 생각처럼 작동했다. 이 순환 속에서 나는 생각하고 있지 않으면서도 생각하고 있다고 처리되었다.
하루 동안 수행되었다고 분류되는 행위들은 의지의 결과가 아니라, 의지가 있었다는 전제를 유지하기 위한 배열의 연속이었다. 선택은 발생하지 않았으나, 선택이 없었다는 상태는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선택이라는 단어가 사후적으로 배치되었다. 그 배치가 곧 자유였고, 자유였다고 불린 것은 실제로는 설명의 공백이 너무 크게 벌어졌다는 신호에 가까웠다.
타인과의 대화로 정리되는 장면에서 말은 의미를 전달하지 않았고, 전달되지 않았다는 실패조차 명확히 성립하지 않았다. 이해는 도달하지 않았고, 오해는 발생하지 않았으며, 그 사이에 머무는 상태가 ‘소통’이라는 이름으로 안정화되었다. 나는 이해하지 못했음을 인식하지 못했고, 인식하지 못했다는 사실조차 나중에야 감정처럼 기입되었다.
피로라는 어휘가 신체를 설명한다고 믿었던 순간에는 이미 설명이 신체를 대체하고 있었다. 피로는 감각이 아니라 감각을 정리해야 한다는 요구의 압축본이었고, 휴식은 회복이 아니라 더 이상 설명을 생산하지 않아도 된다는 임시적 면책에 가까웠다. 누워 있었던 것인지, 누워 있었다고 기록해야 했던 것인지의 구분은 끝내 확정되지 않았다.
지금 이 문장을 쓰고 있다는 감각조차 경험의 결과라기보다, 하루가 있었다는 가정을 종결시키기 위해 필요한 종결 장치처럼 작동한다. 기록은 기억을 보존하지 않았고, 오히려 기억이 무엇이었는지를 불분명하게 만들었다. 오늘은 지나갔다고 쓰이지만, 지나감은 사건이 아니라 서술이 더 이상 확장되지 않는다는 신호일 뿐이다. 나는 하루를 살았던 것이 아니라, 하루가 있었다는 형식을 간신히 유지한 채 이 페이지를 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