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러남이 지나칠 때

phantom2026.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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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남이 지나칠 때

우리는 노출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모든 생각과 감정, 경험을 게시합니다. 사람들은 사랑과 결혼의 세부 사항, 육아, 구애 과정, 사적인 고뇌, 그리고 삶의 가장 은밀한 부분에 대해 공개적으로 인터뷰를 받습니다. 신성한 것은 없습니다. 거룩한 것은 없습니다. 지성소는 없습니다. 오직 우리만의 것으로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생각이 공유되고, 모든 감정이 게시되며, 모든 경험이 기록되고, 저장되고, 업로드되고, 방송됩니다. 연애, 결혼, 육아, 고난, 승리, 이 모든 것이 콘텐츠가 되고, 콘텐츠가 왕인 세상에서 경쟁하는 이들에게 과도한 공유만큼 유혹적인 것은 없습니다.

물론 취약함에도 가치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의 경험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공유는 메하제크(מְחַזֵּק: 강화)가 될 수 있으며, 다른 이들을 강하게 할 수 있습니다. 비난을 줄일 수 있고, 연결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 점을 이해될 수 있습니다.

파라샤 테루마(תְּרוּמָה)는 성막(מִשְׁכָּן 미쉬칸)의 배치와 평면도를 소개합니다. 바깥뜰에는 제물이 바쳐지는 제단이 있었습니다. 성소(קֹדֶשׁ,코데쉬)에는 등대(מְנוֹרָה, 메노라)와 성탁(שֻׁלְחָן, 슐찬)이 놓여 있었습니다. 마지막 구역은 지성소(קֹדֶשׁ הַקֳּדָשִׁים, 코다쉬 하코다심)로, 궤(ארון, 아론)가 보관된 곳으로 대제사장만이 속죄일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성스러운 돌판과 원본 토라 두루마리를 보관한 성스러운 성궤는 성막에서 가장 사적이고 접근이 불가능한 곳에 있었습니다.

솔로베이치크(Soloveitchik) 랍비는 우리의 개인적인 삶을 성막의 구조와 배치에 따라 모범을 삼을 것을 제안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저는 감정을 억제하고 내 감정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드러내지 않도록 배웠습니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감정이 더 거룩하고 친밀할수록 더 숨겨야 한다고.

내면과 외부를 가르는 숨겨진 휘장이 있습니다: "분리하는 휘장이 거룩한 곳과 지성소를 너희를 위해 갈라놓으리라." 우리 삶의 감정적인 부분에 내면 성소보다 더 거룩한 장소가 어디 있겠습니까?

지성소는 파로케트, 즉 휘장으로 분리되었습니다. 즉 모든 것이 공개적으로 보여지도록 의도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이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도록 의도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만약 우리 마음속에 지성소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 모든 것이 세속적이고 속된 것이며 공개적으로 공유되는 세상에서 산다면, 우리 삶에 무엇이 남겠습니까? 무엇이 친밀함을 유지하겠습니까? 무엇이 우리의 신성한 공간으로 남겠습니가?

하나님과 나누는 모든 대화가 마이크와 카메라 앞에서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당신과 하나님 사이에 진정한 친밀함이 존재할까요? 배우자와 나누는 모든 대화가 공개적으로 공유해도 편안한 것이라면, 두 사람 사이에 감정적 친밀함이 있을까요? 가장 친한 친구에게만 털어놓던 모든 감정과 생각이 이제는 온라인에 게시되는 것이라면, 그 뒤에 무엇이 남을까요? 휘장이 없다면 지성소도 없습니다. 지성소가 없다면 친밀함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우려는 영적인 차원을 넘어 심리적, 관계적 문제이기도 합니다. 연구에 따르면 적당한 공유는 유대감을 형성하지만, 습관적인 과도한 공유는 정서적 친밀감을 훼손할 수 있습니다. 연구 결과 성인 60% 이상이 가까운 관계에서 정서적 친밀감 형성에 어려움을 겪으며, 노출에 대한 두려움과 모호해진 개인적 경계가 주요 원인이라고 답했습니다.

미국심리학회(APA)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소셜미디어를 과도하게 사용하는 사람들은 빈번한 공유에도 불구하고 외로움과 피상적인 유대감이 훨씬 더 많이 보고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퓨리서치센터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성인의 거의 절반이 소셜미디어가 관계에서 의미 있는 경계를 유지하기 어렵게 만든다고 말합니다. 관계 치료사들은 온라인이든 사회적으로 넓은 범위 내에서든, 사적인 부부 갈등을 공개적으로 처리하는 부부들이 장기적으로 신뢰도가 낮아지고 정서적 안전감이 감소하는 것이 일관되게 보여진다고 말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친밀함은 경계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감정적 친밀함은 단순히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보호된 공간 안에서 선택적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공유할 때, 아무것도 선택된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독점적인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신성한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과도한 공유는 심리학자들이 '가짜 친밀감'이라 부르는 것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지나친 공유함에서 비롯되는 깊이 없이 가까움의 환상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모든 감정이 청중에게 외부화될 때, 그것은 더 이상 관계 안에서 조심스럽게 간직되지 않습니다. 친밀감은 간직한 것에서 자랍니다.

우리는 성소 없는 세대가 될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아무것도 간직하지 않는 세대, 기록하기에 너무 신성한 대화도 없는 세대, 공개하기에 너무 사적인 고뇌도 없는 세대입니다. 그러나 거룩함은 분리에서 비롯됩니다. 토라의 거룩함(קְדֻשָּׁה, 케두샤) 체계 전체는 하브달라(הַבְדָּלָה), 즉 구분 위에 세워졌습니다. 거룩한 것과 속된 것 사이,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사이, 바깥 뜰과 안뜰 사이의 구분입니다. 감정의 휘장이 없다면 감정의 성소도 없습니다. 성소가 없다면 결혼을 위한 신성한 공간도 없습니다. 결혼을 위한 신성한 공간이 없다면 깊은 신뢰도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신성한 공간이 없다면, 기도는 만남이 아닌 공연이 될 위험에 처합니다.

분명히 말하건대, 이는 특정 개인에 대한 비판이 아닙니다. 적절한 공유에는 진정한 가치가 있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타인에게 도움이 될 때가 있습니다. 고통을 나누는 것이 고립감을 덜어줄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누군가에게 힘을 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공유할 것인가가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가리고, 무엇을 보존하며, 무엇을 보호할 것인가입니다.

모든 관계에는 오직 그 관계만의 것이 필요합니다. 결혼에는 다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대화가 필요합니다. 영혼에는 기록되지 않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가족에는 게시되지 않는 기억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파로케트(פרוכת,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칸막이)를 되찾아야 합니다. 공개적으로 소비되지 않는 삶의 영역을 재창조해야 합니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감정의 지성소를 지정해야 합니다. 친밀함은 배타성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거룩함은 경계를 필요로 합니다. 배우자와의 관계든 하나님과의 관계든, 연결은 오직 우리 사이에만 존재하는 무언가를 요구합니다.

모든 것이 공유된다면, 신성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다시 휘장을 드리워야 하겠습니다.

By Rabbi Efrem Goldberg (the Senior Rabbi of the Boca Raton Synagogue (B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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