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TA content="Namo WebEditor v4.0" name=generator> [She...] 거실 벽에 걸려있는 시계는 자정 10분전을 가리키고 있는 가운데 난 거의 드러눕듯이 소파 에 앉아 TV를 보았다. 늦은 시간인지라 공중파 방송에선 지루한 시사프로그램이나 다큐멘터리가 방영되고 있었다. 리모콘을 TV를 향해 들이 내밀고는 케이블 방송으로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보지만 특별히 흥미를 유발시키는 프로그램은 없었다. 그저 이미 시청했던 프로그램들이 다반사(茶飯事)였다. 그나마 어제 재미있게 보았던 드라마의 재방송을 보기로 했다. 그때 TV에서 나오는 소리 때문일까...? 캄캄한 안방에서 환한 거실의 불빛 때문인지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엄마가 나오셨다. 말없이 주방으로 가시더니 물 한 잔을 드시곤 다시 안방으로 걸음 하시며 말씀하셨다. "내일이 생일인데 일찍 자야 일찍 일어나지?" 내일이 내 생일이라는 사실과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에 대해선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 더구나 지금은 졸업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라 학교도 가지 않으니 당연히 반문했다. "내 생일이랑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어?" "또 작년처럼 오전부터 남자친구 만나러 가야 되잖니? 우리 공주님께서 올해는 과연 얼마나 좋고 많은 선물을 받아 오실까?" "엄마, 지금 누구 놀려?! 내가 남자친구랑 헤어졌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어? 이제 금방 알아차리네? 우리 공주님께서 상당히 눈치가 빨라지셨어" "엄마?!" 난 눈살을 매섭게 찌푸리며 울컥거린 마음에 소파 위에 있던 조그마한 쿠션을 던졌다. 하지만 그 쿠션은 안방 근처에도 가지 못해 떨어졌고 엄마는 이미 안방으로 들어 가신지 오 래였다. 난 거실바닥에 떨어진 쿠션을 주우려 일어날 찰나에 엄마는 다시 안방의 문을 조그만 열고 는 얼굴만 살짝 비치시며 말씀하셨다. "괜찮은 거지...? 이 엄마는 네가 많이 힘들지나 않았으면 좋겠구나. 지금 내가 너한테 해줄 수 있는 말은 그저 힘내라는 말과 언젠가는 좋은 인연이 나타날 거라는 말밖에 없구나." 그리고 엄마는 다시 안방으로 모습을 감추셨다. 난 엄마가 나를 얼마나 걱정하시는지 잘 알고 있기에 좀 전의 울컥거린 마음은 사라지고 그 저 씁쓸한 미소만이 입가에 머물 뿐이었다. 그보다 도무지 TV에서 나오는 드라마 재방송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임에 지루한 나머지 결국은 TV 전원을 꺼버렸다. 더불어 거실의 전등도 꺼버린 채 아직 잠은 오지 않지만 그래도 잠을 청해볼 심상으로 방으 로 들어갔다. 우선 침대 옆에 있는 조그마한 테이블 스탠드를 키고는 방안의 전등을 껐다. 테이블 스탠드에서 나오는 오렌지 빛은 더욱 짙어 진 가운데 나는 침대에 누웠다. 그때 휴대폰에서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람음이 울렸다. 난 침대 위를 어정쩡한 모습으로 기어가 팔을 쭉 뻗어 책상 위에 있는 휴대폰을 집었다. 이것이 다행인지 아닌지 몰라도 내 방은 그다지 크지 않기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휴대폰 폴더를 열어 메시지를 확인했다. 「생일 축하해!! 언제나 행복했으면 좋겠고 예정대로 저녁에 보자. ㅋㅋㅋ - 정혜」 학교 친구인 정혜였다. 연이어 몇 개의 문자 메시지가 더 들어왔다. 확인해보니 정혜와 같이 생일을 축하한다는 내용이나 그런 의미의 그림 문자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휴대폰 외부 LCD창에 있는 시계는 자정을 넘어섰다. 그럼 이제 내 생일인 것이다. 오늘 일정대로라면 낮 시간동안에는 여느 때처럼 학원을 갈 것이고 저녁엔 식구들과 근사한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 것이다. 그리고 친구들이 마련한 생일파티 빙자한 술자리에 참석해서 친구들이 건네주는 선물도 받 고 재미있게 노는 등 그렇게 나의 생일을 마감할 것이다. 마지막 겨울 방학을 맞이하는 동시에 졸업을 앞두는 나에게 이런 바쁘고 특별한 일정은 며 칠 사이 무료했던 나날들을 무색하게 만들기에 충분할 것이다. 무엇보다 여러 친구들과 모여 이런저런 얘기도 하면서 노는 것 자체가 기쁜 일이며 한편으 로 기대되는 일이기도 할텐데... 순간 나의 한쪽 가슴구석에서부터 영문모를 허전함이 몰려왔다. 왜 이리 허전한 것일까...? 난 괜스레 휴대폰 폴더를 열고는 좀 전에 왔던 문자 메시지를 다시 보았다. 대부분의 친구들로부터 문자를 받았다. 그런데 아직 그로부터는 문자가 오지 않았다. 아무리 이별했다한들 그의 성격상 예의 상으로나마 생일 축하한다는 전화는 없다고 한들 그 런 내용의 문자 메시지 한 통은 보내줄 거라 생각했다. 문득, 그가 무심하게... 섭섭하게 느껴진 나머지 울적해졌다. 물론 그와 이별했기에 이런 감정들이 불필요한 것이라고 잘 알고 있다. 게다가 내가 먼저 그에게 주어진 상황에 지쳐 나를 향한 그의 사랑까지 의심하면서까지 그 에게서 떠나길 원했고 결국은 내가 먼저 헤어지자고 했다. 그리고 그 이별의 아픔을 잊으려 그에 대한 그리움도 그렇게나 부정하고 외면했건만 다시 그가 원망스러울 만큼 그리워졌다. 이런 이기적인 내 모습이 너무 싫었다. 하지만 내 자신 스스로 이런 이기적인 모습을 알고 느끼면서 오늘만큼은 더욱 그가 그립다. 물론 그와 나는 이별한 사이이며 어쩌면 지금쯤 그는 이렇게 이기적인 나같이 못된 여자 따 윈 잊고 다른 새로운 사랑을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이런 나의 이기심에 내 자신 스스로에게 치를 떨었을 때 갑작스레 작년 이맘이때가 생각났다. 자정이 되기 무섭게 그에게 전화가 왔었었다. 난 당연히 휴대폰 외부 LCD창에 나타나는 그의 이름을 보고는 기쁜 마음에 재빨리 휴대폰 폴더를 열었었다. "Happy birthday to you∼♪" 갑자기 생일축하노래가 그의 목소리를 타고 나의 귓가에 들여왔었다. 난 기쁜 마음에 그가 노래를 부르는 동안에 소리내어 웃었고 그가 노래를 다 불러도 그 기 쁜 마음은 쉽사리 가지 않아 계속 소리내어 웃었었다. 그렇게 기뻐서 웃는 내 마음도 모르는지 그는 수줍음을 감추지 못한 채 웃지 말라며 계속 말했었다. 이러면 안되면서도... 그가 들려준 생일축하노래와 그의 수줍은 말투가 내 머릿속에 한편의 영화처럼 고스란히 다 시 재생되고 있다. 이러면 안되면서도... 그가 그립다. 그가 들려준 생일축하노래는 물론 그의 수줍은 말투조차도... [He...] "일어나, 다 왔어." 정연이의 목소리가 들여왔다. 눈을 떠보니 정연이의 차는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 내에 이미 정차한 상태였다. 난 취기에 풀린 눈을 비벼대자 정연이는 측은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많이 마신 거 아니니?" "고작 칵테일 석 잔 마셨을 뿐인데... 괜찮아." 난 안전벨트를 풀고 정연의 차에서 내릴 찰나였다. "잠깐만...!" 정연이의 목소리에 난 잠시 멈칫했다. "왜 그러니?" "있잖아... 그냥 그 애한테 솔직히 말하는 게 어떻겠니? 그럼 그 애가 다시 너한테 돌아올 수도 있잖아. 왜 모든 잘못과 그에 대한 책임을 너 혼자만 지려고 하니? 물론 네가 잘못한 점도 있지만... 네가 말한 대로 그 애가 좋은 애라면 그 사실을 알고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너한테 미안해하며 다시 돌아올 거란 말이야." 난 정연이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됐어." "네가 그 애한테 말할 자신이 없으면 내가 대신 만나서 얘기해 줄게. 모든 게 다 오해라고..." 순간 나도 모르게 약간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됐다고 그랬잖아! 그렇게 해서 다시 그녀를 사랑하고 싶지 않아. 물론 내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한 그럴 일은 없겠지만, 설사 다시 그녀를 사랑한다고 해도 더 나아질 건 없어. 똑같은 아픔만을 다시 겪을 뿐이니깐." 정연은 나의 그런 모습에 고개를 떨구며 나직이 말했다. "미안... 난 그냥 네가 너무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아냐, 오히려 내가 미안해. 괜히 흥분했어. 그리고 언젠가는 나아지겠지. 이 세상에 영원한 사랑이 없듯 영원한 이별의 아픔도 없을 테니깐." 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연은 다시 고개를 들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살포시 나의 손을 잡는 것이었다. "그럼 그 아픔이 다 치유가 된다면 나한테 말해줄래? 그때는 그 애 대신 내가 너의 사랑을 받고 싶고 내가 너를 정식으로 사랑하고 싶으니깐." 난 은근슬쩍 손을 빼고는 그녀의 물음에 그저 웃음으로만 답할 뿐이었다. 솔직히 그녀와 헤어지고 언제인가부터 오랫동안 내게 자신의 감정을 표하는 정연에게 점점 호감이 가기 시작했다. 물론 정연이로 인해서 그녀와 심하게 다툰 적도 있어 그 동안 약간의 나쁜 감정도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정연이는 한없이 모자란 나 같은 남자를 좋아 해준다는 사실은 지금 나의 심정에선 큰 위안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정연이와 사랑이란 명목으로 만날 수는 없다. 이별의 아픔이 남아있어 다른 누군가를 사랑할 여력이 없는 것이 이유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아직 내 가슴속에는 그녀의 흔적과 그녀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다. 정연이의 차에서 내렸다. "정연아, 오늘 고마웠어. 물론 너 덕분에 기분도 많이 괜찮아졌고." "뭘, 그 정도 가지고." "그런데 너도 술 마셨는데 운전하기 괜찮겠니?" "뭐, 칵테일 한 잔밖에 마시지 않았는데... 괜찮아. 어서 들어가기나 해. 감기 걸리겠어." "그래, 알았어. 조심해서 가." "응, 도착하면 전화할게." 그렇게 정연이는 조금씩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고 있었다. 난 정연이의 차를 향해 손을 흔들어 그렇게나마 배웅할 뿐이었다. 잠시 후 정연이의 차는 더 이상 내 시야에서 보이지 않았고 그제야 흔들던 손을 내렸다. 그리고 아파트 현관에 들어섰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고작 5층이 전부인데다 우리 집은 4층이고 당연히 엘리베이터도 없으니 계단을 오를 수밖에 없었다. 계단을 하나씩 밟고 오르며 나의 상념(想念)은 시작되었다. 만약 지금 정연이의 마음을 받아들여 정연이를 사랑한다면 지금보다 나아질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 그녀를 잊을 수 있을까? 이런저런 상념은 우리 집 현관에 들어서서야 끝이 났다. 그리고 하나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속물(俗物)이라는 사실이다. 비록 상념(想念)이라 할지라도 이별에 대한 아픔을... 그녀에 대한 미련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를 향한 정연이의 순수한 마음을 이용하여 들다니... 나의 지독한 이기적인 속물근성(俗物根性)에 지쳤고 나의 몸까지 지쳤으니 입었던 옷가지들 을 벗어 던지곤 샤워를 했다. 샤워꼭지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줄기에 머리는 물론 전신에 맞으니 아직도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여러 상념들이 내 몸에 칠해져 있는 비누거품과 함께 씻겨져 내려갔다. 그렇게 샤워를 다하고 온 몸을 닦은 후 마지막으로 젖은 머릿결을 수건으로 털며 방에 들어 섰다. 행여나 내가 샤워하고 있을 동안 정연이에게 연락이 왔는지 휴대폰을 보니 부재중이란 문구 가 휴대폰 LCD창에 나타나 있었다. 확인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정연이었다. 난 서슴없이 전화했고 통화 연결음이 짧게나마 흐르고 나서야 정연이가 받았다. "전화했었네, 미안. 샤워하느라고 전화를 못 받았어." "그럴 줄 알았지. 나도 막 이제 샤워하려고 했는데." "그래, 피곤할 텐데 어서 샤워하고 자." "응. 참! 근데 20일 날 저녁에 시간 있니?" 이제 졸업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그저 하루하루를 무료하게 살아가는 내가 유일하게 가지 고 있는 것이 시간이었다. "20일? 특별한 일은 없는데... 왜?" "그럼 우리 뮤지컬 보러가자. 아빠가 티켓 두 장을 주셨거든. 그런데 너랑 가고 싶더라고." "뮤지컬 제목이 뭐야?" "Mouse!" 뮤지컬 [Mouse]라 함은 그녀와 내가 그렇게 보고 싶어했던 것이다. 하지만 티켓 가격이 비싸 서로의 아쉬움만 달래야 했던 씁쓸한 기억이 있다. "그래, 그렇게 하자. 정말 보고 싶었는데..." 난 기어이 수락했고 대략적인 약속을 정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깜박하기 전에 다이어리에 기록하기 위해 펼쳤다. 20일이라.... 오늘이 12월 18일이니깐... 가만, 나의 다이어리에 19일이란 날짜를 보니 조그마한 글씨와 함께 빨간색 펜으로 짙게 표 시되어 있었다. 12월 19일... 내일은 그녀의 생일인 것이다. 아니, 지금 시계가 막 11시 55분을 지나고 있다. 정확히 5분 후면 날짜가 바뀌어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는 동시에 그녀의 생일이다. 이별의 아픔에 아주 잠시 잊고 있었다. 아니, [이젠 잊어도 되는 날이며 반드시 잊어야 하는 날이다]라고 마음은 먹지만 괜한 복잡 한 심정은 다시 나를 상념에 잠기게 했다. 20일에 약속이 있다는 것을 다이어리에 기록하는 것조차 망각한 채 휴대폰을 들곤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점점 나른해진 내 몸을 버티지 못한 나머지 몸을 벽에 기대어 간신히 버텼다. 난 휴대폰 폴더를 열어 문자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메뉴를 선택했다. 비록 이별하기 했지만 간단한 생일축하메시지라도 보내줄까? 그게 최소한의 예의겠지? 난 차근차근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다. 「오늘이 생일이지? 생일 축하해!^^」 나의 휴대폰에서 그녀의 전화번호를 지웠다지만 그건 내 휴대폰에서나 지워졌지 아직 내 머 릿속에는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능숙히 그녀의 번호를 눌러댔다. 이제 [전송] 버튼만 누르면 될텐데 그냥 폴더자체를 덮어버렸다. 그래, 그녀는 그렇게 내 곁을 떠나길 원했고 결국은 떠나갔다. 지금쯤 자신에게 사랑보다 아픔만 안겨주는 나를 잊으려 노력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지금쯤 날 완전히 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리 예의 상이라 할지라도 나의 문자 메시지가 괜히 그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대폰을 바닥에 던지듯 내려놓고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시계는 어느덧 11시 59분 58초를 지났다. 11시 59분 59초... 비로소 자정이 됨과 동시에 그녀의 생일이 찾아왔다. 일순 작년 이맘때가 생각났다. 난 19일 정확히 자정에 맞추어 그녀에게 전화를 했었다. 그리고 그녀가 받자마자 수줍음을 무릅쓰고 생일축하노래를 불러 주었었다. 그녀는 나의 형편없는 노래실력에 웃어댔지만 그녀가 나로 인해 웃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 에 행복했었다. 난 여전히 형편없는 노래실력으로 그녀를 위한 생일축하노래를 불렀다. "Happy birthday to you∼♪ Happy birthday to you∼♪" 노래가 끝나자 어느새 나의 눈망울엔 촉촉한 눈물이 자리잡은 듯 했으나 내가 그 눈물의 존 재를 인식하기도 전에 그 눈물은 나를 향한 그녀의 마음처럼 미련 없이 떨어졌다. 그리고 나직이 나 홀로 중얼거렸다. 생일 축하해... 1
이별, 그 후... <제 6 회> - Happy Birthday To...
<META content="Namo WebEditor v4.0" name=generator>
[She...]
거실 벽에 걸려있는 시계는 자정 10분전을 가리키고 있는 가운데 난 거의 드러눕듯이 소파
에 앉아 TV를 보았다.
늦은 시간인지라 공중파 방송에선 지루한 시사프로그램이나 다큐멘터리가 방영되고 있었다.
리모콘을 TV를 향해 들이 내밀고는 케이블 방송으로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보지만 특별히
흥미를 유발시키는 프로그램은 없었다.
그저 이미 시청했던 프로그램들이 다반사(茶飯事)였다.
그나마 어제 재미있게 보았던 드라마의 재방송을 보기로 했다.
그때 TV에서 나오는 소리 때문일까...?
캄캄한 안방에서 환한 거실의 불빛 때문인지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엄마가 나오셨다.
말없이 주방으로 가시더니 물 한 잔을 드시곤 다시 안방으로 걸음 하시며 말씀하셨다.
"내일이 생일인데 일찍 자야 일찍 일어나지?"
내일이 내 생일이라는 사실과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에 대해선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
더구나 지금은 졸업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라 학교도 가지 않으니 당연히 반문했다.
"내 생일이랑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어?"
"또 작년처럼 오전부터 남자친구 만나러 가야 되잖니? 우리 공주님께서 올해는 과연 얼마나
좋고 많은 선물을 받아 오실까?"
"엄마, 지금 누구 놀려?! 내가 남자친구랑 헤어졌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어? 이제 금방 알아차리네? 우리 공주님께서 상당히 눈치가 빨라지셨어"
"엄마?!"
난 눈살을 매섭게 찌푸리며 울컥거린 마음에 소파 위에 있던 조그마한 쿠션을 던졌다.
하지만 그 쿠션은 안방 근처에도 가지 못해 떨어졌고 엄마는 이미 안방으로 들어 가신지 오
래였다.
난 거실바닥에 떨어진 쿠션을 주우려 일어날 찰나에 엄마는 다시 안방의 문을 조그만 열고
는 얼굴만 살짝 비치시며 말씀하셨다.
"괜찮은 거지...? 이 엄마는 네가 많이 힘들지나 않았으면 좋겠구나. 지금 내가 너한테 해줄
수 있는 말은 그저 힘내라는 말과 언젠가는 좋은 인연이 나타날 거라는 말밖에 없구나."
그리고 엄마는 다시 안방으로 모습을 감추셨다.
난 엄마가 나를 얼마나 걱정하시는지 잘 알고 있기에 좀 전의 울컥거린 마음은 사라지고 그
저 씁쓸한 미소만이 입가에 머물 뿐이었다.
그보다 도무지 TV에서 나오는 드라마 재방송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임에 지루한 나머지
결국은 TV 전원을 꺼버렸다.
더불어 거실의 전등도 꺼버린 채 아직 잠은 오지 않지만 그래도 잠을 청해볼 심상으로 방으
로 들어갔다.
우선 침대 옆에 있는 조그마한 테이블 스탠드를 키고는 방안의 전등을 껐다.
테이블 스탠드에서 나오는 오렌지 빛은 더욱 짙어 진 가운데 나는 침대에 누웠다.
그때 휴대폰에서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람음이 울렸다.
난 침대 위를 어정쩡한 모습으로 기어가 팔을 쭉 뻗어 책상 위에 있는 휴대폰을 집었다.
이것이 다행인지 아닌지 몰라도 내 방은 그다지 크지 않기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휴대폰 폴더를 열어 메시지를 확인했다.
「생일 축하해!! 언제나 행복했으면 좋겠고 예정대로 저녁에 보자. ㅋㅋㅋ - 정혜」
학교 친구인 정혜였다.
연이어 몇 개의 문자 메시지가 더 들어왔다.
확인해보니 정혜와 같이 생일을 축하한다는 내용이나 그런 의미의 그림 문자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휴대폰 외부 LCD창에 있는 시계는 자정을 넘어섰다.
그럼 이제 내 생일인 것이다.
오늘 일정대로라면 낮 시간동안에는 여느 때처럼 학원을 갈 것이고 저녁엔 식구들과 근사한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 것이다.
그리고 친구들이 마련한 생일파티 빙자한 술자리에 참석해서 친구들이 건네주는 선물도 받
고 재미있게 노는 등 그렇게 나의 생일을 마감할 것이다.
마지막 겨울 방학을 맞이하는 동시에 졸업을 앞두는 나에게 이런 바쁘고 특별한 일정은 며
칠 사이 무료했던 나날들을 무색하게 만들기에 충분할 것이다.
무엇보다 여러 친구들과 모여 이런저런 얘기도 하면서 노는 것 자체가 기쁜 일이며 한편으
로 기대되는 일이기도 할텐데...
순간 나의 한쪽 가슴구석에서부터 영문모를 허전함이 몰려왔다.
왜 이리 허전한 것일까...?
난 괜스레 휴대폰 폴더를 열고는 좀 전에 왔던 문자 메시지를 다시 보았다.
대부분의 친구들로부터 문자를 받았다.
그런데 아직 그로부터는 문자가 오지 않았다.
아무리 이별했다한들 그의 성격상 예의 상으로나마 생일 축하한다는 전화는 없다고 한들 그
런 내용의 문자 메시지 한 통은 보내줄 거라 생각했다.
문득, 그가 무심하게... 섭섭하게 느껴진 나머지 울적해졌다.
물론 그와 이별했기에 이런 감정들이 불필요한 것이라고 잘 알고 있다.
게다가 내가 먼저 그에게 주어진 상황에 지쳐 나를 향한 그의 사랑까지 의심하면서까지 그
에게서 떠나길 원했고 결국은 내가 먼저 헤어지자고 했다.
그리고 그 이별의 아픔을 잊으려 그에 대한 그리움도 그렇게나 부정하고 외면했건만 다시
그가 원망스러울 만큼 그리워졌다.
이런 이기적인 내 모습이 너무 싫었다.
하지만 내 자신 스스로 이런 이기적인 모습을 알고 느끼면서 오늘만큼은 더욱 그가 그립다.
물론 그와 나는 이별한 사이이며 어쩌면 지금쯤 그는 이렇게 이기적인 나같이 못된 여자 따
윈 잊고 다른 새로운 사랑을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이런 나의 이기심에 내 자신 스스로에게 치를 떨었을 때 갑작스레 작년 이맘이때가 생각났다.
자정이 되기 무섭게 그에게 전화가 왔었었다.
난 당연히 휴대폰 외부 LCD창에 나타나는 그의 이름을 보고는 기쁜 마음에 재빨리 휴대폰
폴더를 열었었다.
"Happy birthday to you∼♪"
갑자기 생일축하노래가 그의 목소리를 타고 나의 귓가에 들여왔었다.
난 기쁜 마음에 그가 노래를 부르는 동안에 소리내어 웃었고 그가 노래를 다 불러도 그 기
쁜 마음은 쉽사리 가지 않아 계속 소리내어 웃었었다.
그렇게 기뻐서 웃는 내 마음도 모르는지 그는 수줍음을 감추지 못한 채 웃지 말라며 계속
말했었다.
이러면 안되면서도...
그가 들려준 생일축하노래와 그의 수줍은 말투가 내 머릿속에 한편의 영화처럼 고스란히 다
시 재생되고 있다.
이러면 안되면서도...
그가 그립다.
그가 들려준 생일축하노래는 물론 그의 수줍은 말투조차도...
[He...]
"일어나, 다 왔어."
정연이의 목소리가 들여왔다.
눈을 떠보니 정연이의 차는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 내에 이미 정차한 상태였다.
난 취기에 풀린 눈을 비벼대자 정연이는 측은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많이 마신 거 아니니?"
"고작 칵테일 석 잔 마셨을 뿐인데... 괜찮아."
난 안전벨트를 풀고 정연의 차에서 내릴 찰나였다.
"잠깐만...!"
정연이의 목소리에 난 잠시 멈칫했다.
"왜 그러니?"
"있잖아... 그냥 그 애한테 솔직히 말하는 게 어떻겠니? 그럼 그 애가 다시 너한테 돌아올
수도 있잖아. 왜 모든 잘못과 그에 대한 책임을 너 혼자만 지려고 하니? 물론 네가 잘못한
점도 있지만... 네가 말한 대로 그 애가 좋은 애라면 그 사실을 알고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너한테 미안해하며 다시 돌아올 거란 말이야."
난 정연이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됐어."
"네가 그 애한테 말할 자신이 없으면 내가 대신 만나서 얘기해 줄게. 모든 게 다 오해라고..."
순간 나도 모르게 약간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됐다고 그랬잖아! 그렇게 해서 다시 그녀를 사랑하고 싶지 않아. 물론 내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한 그럴 일은 없겠지만, 설사 다시 그녀를 사랑한다고 해도 더 나아질 건 없어. 똑같은
아픔만을 다시 겪을 뿐이니깐."
정연은 나의 그런 모습에 고개를 떨구며 나직이 말했다.
"미안... 난 그냥 네가 너무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아냐, 오히려 내가 미안해. 괜히 흥분했어. 그리고 언젠가는 나아지겠지. 이 세상에 영원한
사랑이 없듯 영원한 이별의 아픔도 없을 테니깐."
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연은 다시 고개를 들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살포시 나의 손을 잡는 것이었다.
"그럼 그 아픔이 다 치유가 된다면 나한테 말해줄래? 그때는 그 애 대신 내가 너의 사랑을
받고 싶고 내가 너를 정식으로 사랑하고 싶으니깐."
난 은근슬쩍 손을 빼고는 그녀의 물음에 그저 웃음으로만 답할 뿐이었다.
솔직히 그녀와 헤어지고 언제인가부터 오랫동안 내게 자신의 감정을 표하는 정연에게 점점
호감이 가기 시작했다.
물론 정연이로 인해서 그녀와 심하게 다툰 적도 있어 그 동안 약간의 나쁜 감정도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정연이는 한없이 모자란 나 같은 남자를 좋아 해준다는 사실은 지금 나의 심정에선
큰 위안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정연이와 사랑이란 명목으로 만날 수는 없다.
이별의 아픔이 남아있어 다른 누군가를 사랑할 여력이 없는 것이 이유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아직 내 가슴속에는 그녀의 흔적과 그녀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다.
정연이의 차에서 내렸다.
"정연아, 오늘 고마웠어. 물론 너 덕분에 기분도 많이 괜찮아졌고."
"뭘, 그 정도 가지고."
"그런데 너도 술 마셨는데 운전하기 괜찮겠니?"
"뭐, 칵테일 한 잔밖에 마시지 않았는데... 괜찮아. 어서 들어가기나 해. 감기 걸리겠어."
"그래, 알았어. 조심해서 가."
"응, 도착하면 전화할게."
그렇게 정연이는 조금씩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고 있었다.
난 정연이의 차를 향해 손을 흔들어 그렇게나마 배웅할 뿐이었다.
잠시 후 정연이의 차는 더 이상 내 시야에서 보이지 않았고 그제야 흔들던 손을 내렸다.
그리고 아파트 현관에 들어섰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고작 5층이 전부인데다 우리 집은 4층이고 당연히 엘리베이터도 없으니
계단을 오를 수밖에 없었다.
계단을 하나씩 밟고 오르며 나의 상념(想念)은 시작되었다.
만약 지금 정연이의 마음을 받아들여 정연이를 사랑한다면 지금보다 나아질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 그녀를 잊을 수 있을까?
이런저런 상념은 우리 집 현관에 들어서서야 끝이 났다.
그리고 하나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속물(俗物)이라는 사실이다.
비록 상념(想念)이라 할지라도 이별에 대한 아픔을... 그녀에 대한 미련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를 향한 정연이의 순수한 마음을 이용하여 들다니...
나의 지독한 이기적인 속물근성(俗物根性)에 지쳤고 나의 몸까지 지쳤으니 입었던 옷가지들
을 벗어 던지곤 샤워를 했다.
샤워꼭지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줄기에 머리는 물론 전신에 맞으니 아직도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여러 상념들이 내 몸에 칠해져 있는 비누거품과 함께 씻겨져 내려갔다.
그렇게 샤워를 다하고 온 몸을 닦은 후 마지막으로 젖은 머릿결을 수건으로 털며 방에 들어
섰다.
행여나 내가 샤워하고 있을 동안 정연이에게 연락이 왔는지 휴대폰을 보니 부재중이란 문구
가 휴대폰 LCD창에 나타나 있었다.
확인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정연이었다.
난 서슴없이 전화했고 통화 연결음이 짧게나마 흐르고 나서야 정연이가 받았다.
"전화했었네, 미안. 샤워하느라고 전화를 못 받았어."
"그럴 줄 알았지. 나도 막 이제 샤워하려고 했는데."
"그래, 피곤할 텐데 어서 샤워하고 자."
"응. 참! 근데 20일 날 저녁에 시간 있니?"
이제 졸업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그저 하루하루를 무료하게 살아가는 내가 유일하게 가지
고 있는 것이 시간이었다.
"20일? 특별한 일은 없는데... 왜?"
"그럼 우리 뮤지컬 보러가자. 아빠가 티켓 두 장을 주셨거든. 그런데 너랑 가고 싶더라고."
"뮤지컬 제목이 뭐야?"
"Mouse!"
뮤지컬 [Mouse]라 함은 그녀와 내가 그렇게 보고 싶어했던 것이다.
하지만 티켓 가격이 비싸 서로의 아쉬움만 달래야 했던 씁쓸한 기억이 있다.
"그래, 그렇게 하자. 정말 보고 싶었는데..."
난 기어이 수락했고 대략적인 약속을 정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깜박하기 전에 다이어리에 기록하기 위해 펼쳤다.
20일이라....
오늘이 12월 18일이니깐...
가만, 나의 다이어리에 19일이란 날짜를 보니 조그마한 글씨와 함께 빨간색 펜으로 짙게 표
시되어 있었다.
12월 19일...
내일은 그녀의 생일인 것이다.
아니, 지금 시계가 막 11시 55분을 지나고 있다.
정확히 5분 후면 날짜가 바뀌어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는 동시에 그녀의 생일이다.
이별의 아픔에 아주 잠시 잊고 있었다.
아니, [이젠 잊어도 되는 날이며 반드시 잊어야 하는 날이다]라고 마음은 먹지만 괜한 복잡
한 심정은 다시 나를 상념에 잠기게 했다.
20일에 약속이 있다는 것을 다이어리에 기록하는 것조차 망각한 채 휴대폰을 들곤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점점 나른해진 내 몸을 버티지 못한 나머지 몸을 벽에 기대어 간신히 버텼다.
난 휴대폰 폴더를 열어 문자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메뉴를 선택했다.
비록 이별하기 했지만 간단한 생일축하메시지라도 보내줄까?
그게 최소한의 예의겠지?
난 차근차근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다.
「오늘이 생일이지? 생일 축하해!^^」
나의 휴대폰에서 그녀의 전화번호를 지웠다지만 그건 내 휴대폰에서나 지워졌지 아직 내 머
릿속에는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능숙히 그녀의 번호를 눌러댔다.
이제 [전송] 버튼만 누르면 될텐데 그냥 폴더자체를 덮어버렸다.
그래, 그녀는 그렇게 내 곁을 떠나길 원했고 결국은 떠나갔다.
지금쯤 자신에게 사랑보다 아픔만 안겨주는 나를 잊으려 노력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지금쯤 날 완전히 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리 예의 상이라 할지라도 나의 문자 메시지가 괜히 그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대폰을 바닥에 던지듯 내려놓고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시계는 어느덧 11시 59분 58초를 지났다.
11시 59분 59초...
비로소 자정이 됨과 동시에 그녀의 생일이 찾아왔다.
일순 작년 이맘때가 생각났다.
난 19일 정확히 자정에 맞추어 그녀에게 전화를 했었다.
그리고 그녀가 받자마자 수줍음을 무릅쓰고 생일축하노래를 불러 주었었다.
그녀는 나의 형편없는 노래실력에 웃어댔지만 그녀가 나로 인해 웃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
에 행복했었다.
난 여전히 형편없는 노래실력으로 그녀를 위한 생일축하노래를 불렀다.
"Happy birthday to you∼♪ Happy birthday to you∼♪"
노래가 끝나자 어느새 나의 눈망울엔 촉촉한 눈물이 자리잡은 듯 했으나 내가 그 눈물의 존
재를 인식하기도 전에 그 눈물은 나를 향한 그녀의 마음처럼 미련 없이 떨어졌다.
그리고 나직이 나 홀로 중얼거렸다.
생일 축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