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대한 반발등을 계기로 유생들이 주도하여 봉기한 한말 최초의 항일의병전쟁.
을사의병(1905년)
1905년 을사늑약으로 한국이 독립국가로서의 자주권(외교권)을 상실하게 되자, 1905~1906년 국권회복을 위해 민중과 양반유생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반일무장투쟁을 말한다.
1904년 한일의정서• 제1차 한일협약이 체결되고, 이어 1905년에는 통감부설치와 한국의 외교권박탈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반일감정은 전국적으로 고조되었고,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다시 조직되었다.
정미의병(1907년)
일제의 조선침략에 맞서 1907년~1910년 사이에 일어난 구국항일의병 전쟁을 말한다.
일제는 1907년 6월 헤이그 밀사사건을 계기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정미 7조약을 체결하여 한국의 내정과 외정권의 대부분을 통감부가 장악하게 된다. 이어 통감부는 더 나아가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해산하여 한국민의 저항을 무력화시키려 했다. 이에 해산군인들을 중심으로 대규모로 의병전쟁이 일어나게 되었음
남한 대토벌 작전(南韓大討伐作戦 ( なんかんだいとうばつさくせん ) )
일본 제국이 1909년 9월부터 10월까지 2개월에 걸쳐 호남 지방의 의병 세력을 근절하기 위해 실시한 군사 작전
배경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후,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하면서 의병의 활동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갔다. 이에 따라서 1907년에서 1909년 전반기에 이르기까지 약 2년간은 전국적으로 의병투쟁 과정에서 가장 격렬한 투쟁이 전개된시기였다.
1907년에서 1909년까지 의병의 대(對) 일본군 전투횟수는 무려 약 2천 7백회나 되었고, 참가 의병들 숫자만해도 약 4만여명에 이르렀다. 이들 항일의병 투쟁은 한성부를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활발했었는데, 전국적으로 활발하게 의병전쟁이 이어졌는데 유독 호남 지방만 1909년 중반 이후에야 의병들이 들어섰고 이를 위해 일제는 9월~10월 두달간 소탕을 시작하고 다시 다른 지역에 병력을 투입한다. 그래도 2달간 격렬한 저항에 부딪힌다.
과정
일본 제국은 1909년 9월 1일부터 약 2개월 동안 소위 '남한 폭도(暴徒) 대토벌 작전'이라는 명칭으로 항일 의병이 가장 격렬한 지역인 전라남도 지역에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다.
2,000여 명의 정규군을 동원하여 3단계에 걸친 작전으로 전라남도 지역에 항일 의병들을 진압했는데, 제1단계 작전은 전북 남원을 기점으로 고흥, 광주, 영광 등으로 이어지는 외곽 지대, 제2단계는 고흥, 광주, 영광 근방을 기점으로 남서해안에 이르는 지대, 제3단계는 전라남도 서쪽 지방으로 탈출하는 항일 의병들을 섬멸하기 위해 무인도 지역까지를 대상으로 한 이른바 '초토화 작전'이었다.
일본 제국 군대는 압도적인 화력의 우세로 잔학한 방법을 동원하여, 양민과 민가에 무참히 살육하고 방화하고 심지어 약탈 등을 일삼으면서 수많은 민간인과 양민들이 학살당했다.
이과정에서 항일 의병장들만도 103명이 희생되었는데, 그중 항일 의병장 전해산 등 23명은 일본군에 체포되어 형장에서 순국했다. 이때, 일본군에 잡힌 항일 의병들은 강제노동을 당하기도 했는데, 그 대표적 경우가 해남에서 장흥, 보성, 낙안, 순천을 경유하는 광양에서 하동까지의 도로작업에 강제노역 동원된 것이었다. 뒷날, 일본군들은 이 도로를 '폭도 도로'(暴徒道路)라고 명명
일본 육군의 정예 2개 보병 연대, 육군 헌병이 일본 해군의 보조를 받아 투입되어 진행된 이 작전은 의병과 같은 게릴라 저항 세력의 생존을 위해서 필수적이라고 볼 수 있는 해당 지역 민간인들의 지원을 차단하기 위한 각종 초토화 작전을 동시 수반하였고, 결국 작전이 종결될 시점에 이르면 호남 지역의 의병들은 사실상 궤멸 상태
결과
의병 1만 7,779명이 사망
부상자가 376명,
포로가 2,139명
이 작전 후 근거지를 상실한 의병세력은 만주·연해주 등지로 이동하여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준비
조선 항일 의병 전쟁
을미의병(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대한 반발등을 계기로 유생들이 주도하여 봉기한 한말 최초의 항일의병전쟁.
을사의병(1905년)
1905년 을사늑약으로 한국이 독립국가로서의 자주권(외교권)을 상실하게 되자, 1905~1906년 국권회복을 위해 민중과 양반유생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반일무장투쟁을 말한다.
1904년 한일의정서• 제1차 한일협약이 체결되고, 이어 1905년에는 통감부설치와 한국의 외교권박탈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반일감정은 전국적으로 고조되었고,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다시 조직되었다.
정미의병(1907년)
일제의 조선침략에 맞서 1907년~1910년 사이에 일어난 구국항일의병 전쟁을 말한다.
일제는 1907년 6월 헤이그 밀사사건을 계기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정미 7조약을 체결하여 한국의 내정과 외정권의 대부분을 통감부가 장악하게 된다. 이어 통감부는 더 나아가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해산하여 한국민의 저항을 무력화시키려 했다. 이에 해산군인들을 중심으로 대규모로 의병전쟁이 일어나게 되었음
남한 대토벌 작전(南韓大討伐作戦 ( なんかんだいとうばつさくせん ) )
일본 제국이 1909년 9월부터 10월까지 2개월에 걸쳐 호남 지방의 의병 세력을 근절하기 위해 실시한 군사 작전
배경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후,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하면서 의병의 활동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갔다. 이에 따라서 1907년에서 1909년 전반기에 이르기까지 약 2년간은 전국적으로 의병투쟁 과정에서 가장 격렬한 투쟁이 전개된시기였다.
1907년에서 1909년까지 의병의 대(對) 일본군 전투횟수는 무려 약 2천 7백회나 되었고, 참가 의병들 숫자만해도 약 4만여명에 이르렀다. 이들 항일의병 투쟁은 한성부를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활발했었는데, 전국적으로 활발하게 의병전쟁이 이어졌는데 유독 호남 지방만 1909년 중반 이후에야 의병들이 들어섰고 이를 위해 일제는 9월~10월 두달간 소탕을 시작하고 다시 다른 지역에 병력을 투입한다. 그래도 2달간 격렬한 저항에 부딪힌다.
과정
일본 제국은 1909년 9월 1일부터 약 2개월 동안 소위 '남한 폭도(暴徒) 대토벌 작전'이라는 명칭으로 항일 의병이 가장 격렬한 지역인 전라남도 지역에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다.
2,000여 명의 정규군을 동원하여 3단계에 걸친 작전으로 전라남도 지역에 항일 의병들을 진압했는데, 제1단계 작전은 전북 남원을 기점으로 고흥, 광주, 영광 등으로 이어지는 외곽 지대, 제2단계는 고흥, 광주, 영광 근방을 기점으로 남서해안에 이르는 지대, 제3단계는 전라남도 서쪽 지방으로 탈출하는 항일 의병들을 섬멸하기 위해 무인도 지역까지를 대상으로 한 이른바 '초토화 작전'이었다.
일본 제국 군대는 압도적인 화력의 우세로 잔학한 방법을 동원하여, 양민과 민가에 무참히 살육하고 방화하고 심지어 약탈 등을 일삼으면서 수많은 민간인과 양민들이 학살당했다.
이과정에서 항일 의병장들만도 103명이 희생되었는데, 그중 항일 의병장 전해산 등 23명은 일본군에 체포되어 형장에서 순국했다. 이때, 일본군에 잡힌 항일 의병들은 강제노동을 당하기도 했는데, 그 대표적 경우가 해남에서 장흥, 보성, 낙안, 순천을 경유하는 광양에서 하동까지의 도로작업에 강제노역 동원된 것이었다. 뒷날, 일본군들은 이 도로를 '폭도 도로'(暴徒道路)라고 명명
일본 육군의 정예 2개 보병 연대, 육군 헌병이 일본 해군의 보조를 받아 투입되어 진행된 이 작전은 의병과 같은 게릴라 저항 세력의 생존을 위해서 필수적이라고 볼 수 있는 해당 지역 민간인들의 지원을 차단하기 위한 각종 초토화 작전을 동시 수반하였고, 결국 작전이 종결될 시점에 이르면 호남 지역의 의병들은 사실상 궤멸 상태
결과
의병 1만 7,779명이 사망
부상자가 376명,
포로가 2,139명
이 작전 후 근거지를 상실한 의병세력은 만주·연해주 등지로 이동하여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준비
의병장
이인영(李麟榮, 1868년 9월 23일~1909년 9월 20일)은 구한말의 의병장
이때 일본군은 맥심 기관총을 최초로 도입하여 최초 사용 의병학살을 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