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라쉬 라바(1:15)는 이 구절에서, ‘다아트(דַּעַת)’가 결여된 탈밈 하하밈(Talmid Chacham: 토라 학자)보다 죽은 짐승이 더 낫다는 교훈을 이끌어 냅니다. (다아트는 일종의 지식.)
이는 모쉐가 여호와께서 미쉬칸에 들어오라고 초대하실 때까지 기다렸다는 사실에서 암시됩니다. 비록 모쉐가 미쉬칸 전체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초대받기 전까지는 들어가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았던 것입니다.
초대받지 않고 남의 집에 들어가는 것은 분명 부적절한 일이지만, 그렇게 했다고 해서 모쉐와 같은 위인의 품격이 다아트(דַּעַת)이라는 근본적인 자질을 결여했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을까요? 또한, 미드라쉬가 다아트(דַּעַת) 없이 행동하는 탈미드 하하밈(Talmid Chacham: 토라 학자)은 죽은 동물보다 낮은 수준에 있다고 말할 때, 우리에게 무엇을 전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이 두 가지 질문에 답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매일 쉐모나 에스레이(שְׁמוֹנֶה עֶשְׂרֵה. 서서 드리는 기도)에서 말하는 세 단어의 의미를 이해해야 합니다. 호크마(חָכְמָה), 비나(בִּינָה), 다아트(דַּעַת)입니다. 우리가 지식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이를 설명하는 데 이 세 단어가 사용됩니다.
호크마(חָכְמָה)는 정보를 아는 것을 의미하고, 비나(בִּינָה)는 기존 지식을 바탕으로 개념을 구성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그러나 다아트(דַּעַת)은 그 정보를 실제로 적용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내면화할 때 비로소 완성됩니다. 라브 아비그도르 밀러(Rav Avigdor Miller)는 이것이 감각에 대한 명확성의 단계로서, 너무나 생생하고 선명하여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밀러(Miller) 랍비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부모는 어린 아이에게 불을 만지면 손가락이 데일 수 있으니 불장난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이는 이를 통해 하나의 정보(호크마)를 얻게 됩니다. 그런 다음 부모는 아이에게 뜨거운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하는 법(비나)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가 실제로 뜨거운 것을 만지는 실수를 저지르고 화상의 고통을 직접 경험하기 전까지는, 뜨거운 것을 만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일이 발생한 후에야 비로소 아이는 불에서 도망치려는 본능을 키우게 되는데, 이는 이제 그 경험이 내면화(다아트)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탈미드 하하밈(Talmid Chacham:토라 학자)이 정보를 내면화하여, 그 정보를 바탕으로 자신의 신념과 원칙, 올바른 습관을 다듬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의 지식과 노력은 헛된 것입니다. 그는 동물 사체보다도 더 무용지물입니다. 적어도 사체에는 여전히 쓸모가 있는 뼈가 남아 있으니까요.
다아트(דַּעַת)가 없다면, 지식은 실현되지 못한 잠재력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활용 가능한 형태로 내면화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쉐가 초대를 받지 않고는 들어가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그가 ‘다아트’를 지녔다고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앞서 언급했듯이, 다아트(דַּעַת)는 생각이 흐려지지 않을 만큼 명확하게 만드는 명료함의 단계입니다. 이러한 명료함의 경지에 이르면 구별할 수 있게 되는데, 바로 이 때문에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을 구분하는 하브달라(Havdalla)가 토요일 저녁 예배에서 “호넨 하다앗(חוֹנֵן הַדָּעַת)”—지혜를 내려주시는 분—이라는 축복의 말씀과 함께 언급되는 것입니다.
모쉐는 미슈칸(성막) 안에 지성소를 지었지만, 부름을 받지 않고는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이는 두 사람이나 두 장소를 가르는 문이 있는 곳에는 자기 자신 밖에도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할 기회가 있음을 그가 깊이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모쉐는 단순히 “하나님이 어디에나 계시다면,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나로서 당연히 들어갈 수 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경계가 있음을 이해하고, 그것을 존중했습니다.
방문객
이 이야기를 보니 ‘비코레트(בִּקֹּרֶת, Bikoret)’라는 히브리어 단어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이 떠오릅니다. 이 단어는 ‘비쿠르(בִּקּוּר, bikur)’라는 단어와 어원이 같으며, ‘비쿠르’는 ‘방문’을 의미합니다. 이 두 단어의 연관성은 다음 비유를 통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파트에 새로운 이웃이 이사 왔습니다. 코헨 부인은 그녀를 따뜻하게 맞이하며 친해졌습니다. 어느 날, 코헨 부인이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며 혼자 있는 동안 뒤를 돌아보니, 새 이웃이 바로 그 자리에 서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여기서 뭐 하세요?” 코헨 부인이 놀라 설거지 도구를 떨어뜨릴 뻔하며 물었습니다.
“그냥 잠깐 들렀어요!” 새 이웃이 대답했습니다.
코헨 부인은 새로 이사 온 이웃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제든 환영합니다. 하지만 문이 있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답니다! 다음번에는 문을 두드려 주세요. 기꺼이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누군가 방문객을 초대하더라도 방문객이 들어오기 전에 노크를 하기를 기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배우자나 친구, 지인에게 비판을 할 때는 먼저 상대방이 자신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긍정적인 비판을 통해 상대방이 성장하도록 돕는 것은 때로 중요하고 건설적인 일이지만, 누군가를 비판하기 전에 우리가 그 사람의 신뢰를 얻었는지, 그리고 상대방이 우리를 마음속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반드시 확인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비록 비판하는 사람의 의도가 좋았더라도 이는 심각한 모욕이 될 수 있습니다. 효과적인 비판이란 경계를 이해하고 이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예절과 지혜(Manners and Wisdom)
예절과 지혜(Manners and Wisdom)
파라샤에서 배우는 인생 코칭:
“여호와께서 모쉐를 부르시고 회막에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레위기 1:1)
미드라쉬 라바(1:15)는 이 구절에서, ‘다아트(דַּעַת)’가 결여된 탈밈 하하밈(Talmid Chacham: 토라 학자)보다 죽은 짐승이 더 낫다는 교훈을 이끌어 냅니다. (다아트는 일종의 지식.)
이는 모쉐가 여호와께서 미쉬칸에 들어오라고 초대하실 때까지 기다렸다는 사실에서 암시됩니다. 비록 모쉐가 미쉬칸 전체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초대받기 전까지는 들어가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았던 것입니다.
초대받지 않고 남의 집에 들어가는 것은 분명 부적절한 일이지만, 그렇게 했다고 해서 모쉐와 같은 위인의 품격이 다아트(דַּעַת)이라는 근본적인 자질을 결여했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을까요? 또한, 미드라쉬가 다아트(דַּעַת) 없이 행동하는 탈미드 하하밈(Talmid Chacham: 토라 학자)은 죽은 동물보다 낮은 수준에 있다고 말할 때, 우리에게 무엇을 전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이 두 가지 질문에 답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매일 쉐모나 에스레이(שְׁמוֹנֶה עֶשְׂרֵה. 서서 드리는 기도)에서 말하는 세 단어의 의미를 이해해야 합니다. 호크마(חָכְמָה), 비나(בִּינָה), 다아트(דַּעַת)입니다. 우리가 지식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이를 설명하는 데 이 세 단어가 사용됩니다.
호크마(חָכְמָה)는 정보를 아는 것을 의미하고, 비나(בִּינָה)는 기존 지식을 바탕으로 개념을 구성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그러나 다아트(דַּעַת)은 그 정보를 실제로 적용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내면화할 때 비로소 완성됩니다. 라브 아비그도르 밀러(Rav Avigdor Miller)는 이것이 감각에 대한 명확성의 단계로서, 너무나 생생하고 선명하여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밀러(Miller) 랍비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부모는 어린 아이에게 불을 만지면 손가락이 데일 수 있으니 불장난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이는 이를 통해 하나의 정보(호크마)를 얻게 됩니다. 그런 다음 부모는 아이에게 뜨거운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하는 법(비나)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가 실제로 뜨거운 것을 만지는 실수를 저지르고 화상의 고통을 직접 경험하기 전까지는, 뜨거운 것을 만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일이 발생한 후에야 비로소 아이는 불에서 도망치려는 본능을 키우게 되는데, 이는 이제 그 경험이 내면화(다아트)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탈미드 하하밈(Talmid Chacham:토라 학자)이 정보를 내면화하여, 그 정보를 바탕으로 자신의 신념과 원칙, 올바른 습관을 다듬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의 지식과 노력은 헛된 것입니다. 그는 동물 사체보다도 더 무용지물입니다. 적어도 사체에는 여전히 쓸모가 있는 뼈가 남아 있으니까요.
다아트(דַּעַת)가 없다면, 지식은 실현되지 못한 잠재력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활용 가능한 형태로 내면화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쉐가 초대를 받지 않고는 들어가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그가 ‘다아트’를 지녔다고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앞서 언급했듯이, 다아트(דַּעַת)는 생각이 흐려지지 않을 만큼 명확하게 만드는 명료함의 단계입니다. 이러한 명료함의 경지에 이르면 구별할 수 있게 되는데, 바로 이 때문에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을 구분하는 하브달라(Havdalla)가 토요일 저녁 예배에서 “호넨 하다앗(חוֹנֵן הַדָּעַת)”—지혜를 내려주시는 분—이라는 축복의 말씀과 함께 언급되는 것입니다.
모쉐는 미슈칸(성막) 안에 지성소를 지었지만, 부름을 받지 않고는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이는 두 사람이나 두 장소를 가르는 문이 있는 곳에는 자기 자신 밖에도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할 기회가 있음을 그가 깊이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모쉐는 단순히 “하나님이 어디에나 계시다면,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나로서 당연히 들어갈 수 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경계가 있음을 이해하고, 그것을 존중했습니다.
방문객
이 이야기를 보니 ‘비코레트(בִּקֹּרֶת, Bikoret)’라는 히브리어 단어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이 떠오릅니다. 이 단어는 ‘비쿠르(בִּקּוּר, bikur)’라는 단어와 어원이 같으며, ‘비쿠르’는 ‘방문’을 의미합니다. 이 두 단어의 연관성은 다음 비유를 통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파트에 새로운 이웃이 이사 왔습니다. 코헨 부인은 그녀를 따뜻하게 맞이하며 친해졌습니다. 어느 날, 코헨 부인이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며 혼자 있는 동안 뒤를 돌아보니, 새 이웃이 바로 그 자리에 서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여기서 뭐 하세요?” 코헨 부인이 놀라 설거지 도구를 떨어뜨릴 뻔하며 물었습니다.
“그냥 잠깐 들렀어요!” 새 이웃이 대답했습니다.
코헨 부인은 새로 이사 온 이웃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제든 환영합니다. 하지만 문이 있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답니다! 다음번에는 문을 두드려 주세요. 기꺼이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누군가 방문객을 초대하더라도 방문객이 들어오기 전에 노크를 하기를 기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배우자나 친구, 지인에게 비판을 할 때는 먼저 상대방이 자신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긍정적인 비판을 통해 상대방이 성장하도록 돕는 것은 때로 중요하고 건설적인 일이지만, 누군가를 비판하기 전에 우리가 그 사람의 신뢰를 얻었는지, 그리고 상대방이 우리를 마음속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반드시 확인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비록 비판하는 사람의 의도가 좋았더라도 이는 심각한 모욕이 될 수 있습니다. 효과적인 비판이란 경계를 이해하고 이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By Rabbi Yosef Farh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