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고치는 당당하다 윤은경 이마에 깊은 주름을 잡으며 번데기처럼 웅크린 한 덩이의 어둠, 진료대기실 소파의 끝부분에 엉덩이를 붙이고 그는 그의 소중한 상자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고정핀 아래에서 날개를 편 나비들 그의 손은 상자 모서리의 닳고 닳은 부분에 얹혀 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어요 어찌해도 이젠 통 말을 하지 않아요 의사는 말없이 챠트를 덮으며 그를 본다 메마른 입술과 희고 빽빽한 잇속과 딱딱해졌을 혀 안쪽의 심연, 그 안에 갇힌 사내를, 들고 있는 상자를 만지작거리며 구두코를 마주 비비기도 하고 나비표본액자가 걸린 진료실 벽장식을 표정없이 흘깃 쳐다보는 그를 아내도 의사도 알아듣질 못 한다 그를 가두는 많은 말들을 흘깃, 한 번의 눈짓에도 흘러내리는 저 커다란 신음조차도 최대한의 침묵이 만든 최소한의 방어벽 그의 연약한 전략은 성공적이었을까 유리창을 통과한 햇살 아래 웅크린 한 덩이 질긴 고요, 고요 속을 날아오르는 나비떼, 더 깊은 고요를 향해 소용돌이치는 그의 상자, 말의 고치는 당당하기까지 하다. 충남 공주 출생 1996년 계간 [시와 시학] 등단 시집 <벙어리구름> 외
말의 고치는 당당하다
말의 고치는 당당하다
윤은경
이마에 깊은 주름을 잡으며 번데기처럼 웅크린 한 덩이의 어둠, 진료대기실 소파의 끝부분에 엉덩이를 붙이고 그는 그의 소중한 상자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고정핀 아래에서 날개를 편 나비들
그의 손은 상자 모서리의 닳고 닳은 부분에 얹혀 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어요
어찌해도 이젠 통 말을 하지 않아요
의사는 말없이 챠트를 덮으며 그를 본다 메마른 입술과 희고 빽빽한 잇속과 딱딱해졌을 혀 안쪽의 심연, 그 안에 갇힌 사내를, 들고 있는 상자를 만지작거리며 구두코를 마주 비비기도 하고 나비표본액자가 걸린 진료실 벽장식을 표정없이 흘깃 쳐다보는 그를
아내도 의사도 알아듣질 못 한다 그를 가두는 많은 말들을 흘깃, 한 번의 눈짓에도 흘러내리는 저 커다란 신음조차도
최대한의 침묵이 만든 최소한의 방어벽
그의 연약한 전략은 성공적이었을까
유리창을 통과한 햇살 아래 웅크린 한 덩이 질긴 고요, 고요 속을 날아오르는 나비떼, 더 깊은 고요를 향해 소용돌이치는
그의 상자, 말의 고치는 당당하기까지 하다.
충남 공주 출생
1996년 계간 [시와 시학] 등단
시집 <벙어리구름>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