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독교의 비열한 아전인수격의 경전해석(13)

개독시러2009.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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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개독교회의 먹사들은 자신들이 일반인들과 다름없이 월급을 받고 자신들이 현재의 먹사생활을 하는 것, 교회내에 집사 권사 장로 강도사 전도사 같은 계급 모든 것이 기독경에 근거가 있다고 내세운다.

 

그러나 기독경에는 지금과 같은 목사에 대한 규정이나 언급은 전혀 없다.

또한 위의 한국교회에서만 존재하는 온갖 계급또한 언급되는 부분이 없다,

 

기독경에 오직 한 곳 엡4:11을 유일한 근거로 내세우는데 그럼 그런 건지 함깨 보자...

 

 

(에베소서 4:8-13)

그가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서 사로잡은 자들을 데리고 가셨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나누어주셨다."라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올라가셨다는 말은 또한 땅 아래의 세계에까지 내려가셨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리로 내려가셨던 바로 그분이 모든 것을 완성하시려고 하늘 위로 올라가셨습니다.

바로 그분이 사람들에게 각각 다른 선물을 은총으로 주셔서 어떤 사람들은 사도로, 어떤 사람들은 예언하는 사람으로, 어떤 사람들은 전도자로, 어떤 사람들은 목자와 교사로 삼으셨습니다. (11절)

그것은 성도들을 준비시켜서 봉사 활동을 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자라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마침내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 있어서 하나가 되어 성숙한 인간으로서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Ephesians 4:11)

Christ chose some of us to be apostles, prophets, missionaries, pastors, and teachers

 

 

위의 pastors 는 사전적으로 ‘목사들’ 이지만 실제로 서구에서는 ‘한국교회 같은 목사’라는 뜻 보다는 ‘장로들’ 라는 뜻으로 더 많이 쓰이고 있다.

그런만큼 저 것을 ‘목사’라고 해석한 것은 번역상의 한계라고 볼 수 있다.

 

오늘날의 목사제도가 성립될 명분의 정당성을 위의 구절에서 유도해 낸다는 것은 성경을 아전인수격인 해석을 가하여 이해한 언어도단의 범주를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현재 목사의 권리(?)로서 교훈권, 성례권, 축복권, 치리권, 등을 인정하여 교회 내에서의 막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인정하고 있으나, 이러한 권리(이것은 권리라기 보다는 의무 쪽에 더 가까울 것이다)는 예수께서 모든‘교회’를 향하여 맡기신 것이며, 이와같은 권한을 가져야할 직분이란 존재할 수가 없고(마태23장), 인간으로서 어떤 특정한 개인이 가질 수 없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고유권한을 침해한 것으로 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다.

 

이는‘목사’도 마찬가지의 경우에 포함 된다고 할 수 있다. 모든 개독교회가 정경으로 인정하고 있는 신·구약 경전을 통틀어서 살펴본다고 하더라도 ‘목사’에게 그와 같은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는 곳은 전혀 찾아 볼 수 없으며, 전례도 없고, 다만 가르치는 장로와 치리하는 장로로서 기독경에서는 구분하고 있다 .

 

 ‘현재 개독교에서 목사(성직자)’의 자격을 구비하는 방식또한 기독경을 조금이라도 접해 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을 정도로 전혀 비기독경 적이다. 일반적으로 일정기간 각종 신학과 목회학 등의 교육과정을 거치고 난 후 전도사제도를 거쳐 적당한 연륜과 순서에 따라서 목사로서 안수하고 있는 현실과 성경에서 기록하고 있는 자격 사이에는 도무지 수렴할 수 있는 부분을 찾을 수 없다.

 

 

딤전3:1-7

 

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지며(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 보리요)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

 


그렇다면 이 내용과 현재의 목사를 안수하는 방법은 공통점이 전혀 없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흔히 목사의 주장을 관철하는 데 있어서는 하나님의 종이라는 아무 근거가 없으면서도 무슨 확실한 근거를 갖춘 듯한 말을 하여 다른 사람들의 반론을 반 강제적인 수단으로 입막음하며, 자신의 주관적인 주장을 하나님의 전권을 위임 받은 종으로서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하나님의 뜻과 동일 시 하기까지 하고, 목사의 잘못된 부분이 드러나게 될 때에는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고 목사도 다 같은 인간이라는 점을 강조하여 그 실상의 양면성을 합리화하려는 태도는 교회에서 수없이 겪고 보아온 구태의연한 한가지의 공식 내지 수법으로 보아왔다.

 

 혹시 기독경내용에 부합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느냐고 반박할지 모르지만 기독경은 최소의 기준을 설정한 것이며 그 기준에 가장 근접해 있는 사람을 회중에서 선출하기를 권하고 있다. 심지어 믿지 않는 외부인에게까지 선한 증거를 얻은 사람을 야훼는 원하고 있다.

 

 ‘목사’의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신을 향한 뜨거운 사명감과 신께서 부여하신 소명감의 결여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우리의 주변에서 사명감을 가지지 않고 목양을 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는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례를 보고 있다. 야훼가 맡기지도 않은 직분을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하는 것과 같은 불순종이 어디에서 정통성을 찾을 수 있는가

 

야훼는 그의 사역에 가장 적절한 사람을 모든 시대에 걸쳐서 찾았으며, 그의 뜻을 따라서 사명을 주었음을 우리는 역사와 기독경의 증거를 통해 알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난립하는 신학교를 통해 수없이 많은 신학도들이 배출되고, 그들의 대부분이 목회의 길을 가려고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과연 하나님의 사명은 그리도 헤프게 주어지는 것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고, 그 점에 대해서 기독경의 기록은 당연히 그렇지 않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고전12:17).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고전12:29).

 

예수을 향한 제자 베드로와 같은 사랑이 없으면, 또 기독경의 선지자들에게 준 것과 같은 사명과 소명이 없으면 예수의 종을 빙자하여 목사가 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사역’을 빙자하여 사례금을 받고 목회를 한다는 것은,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기독경에서도 예수를 통해서도 정당성을 내세울 수가 없다. 물론 기독경의 문장이나 구절만 잘라 와서 지들 괘변이랑 억지로 짜 맞추어서 정당성을 주장하려고 할 것이지만, 구약 신약 모두 통털어서 아무리 보아도 예수의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 그 대가나 보수를 받는 일은 분명히 용납하지 않고 있다.(요10:1-끝, 마16:24, 눅14:27, 마10:8)

 

 오늘날의 목사들은 주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할 수 있는 한 교인들이 하나님께 드린 헌금의 가장 많은 부분을 사례비, 자녀 교육비, 교통비, 각종세금, 판공비, 주거비, 노후보장비, 도서비, 연료비, 경조사 비 등으로 사취하고 있으며, 개중에는 축재하여 부동산이나 증권·저축 등으로 치부하는 사람도 있는 것을 본다. 말로는 야훼와 예수에게 삶을 헌신한다면서, 어찌하여 신에게 드린 헌금 중에서 사례를 착복하는가? 이것이야말로 개독교회가 강도의 소굴이라고 욕을 먹는 가장 중요한 근거라고 할 수 있겠다.

 

온전한 봉사라면 자기 손으로 부지런히 일하여 자기 생업을 꾸려가면서 목회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되며, 또한 예수역시 자기 십자가(짐)을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지 않있던가?

 

기독경에서 예수는 아무런 대가나 보수가 없이 목양을 하였고, 열두제자와 바울도 사례를 정하여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은 성경을 조금이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을 줄로 생각한다.

 

바울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근본이라고 기록했으며(딤전6:10),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고 예수는 욕하고 있다.(눅16:14)

 

더구나 신에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려서 신의 필요에 따라 각종 구제사업과 이웃사랑을 나타내는 일과 믿지 않는 자의 심령을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효과적으로 전도하는 일 등에 사용되어져야할 자금이 거의 반은 목회자에게 나머지는 거의 건축하는 곳에 사용하고 있는 현 실정으로 볼 때, 무엇으로 진정한 하나님의 원하시는 사업(성경 중에 계속 강조하고 있는 사업들 미6; 8절 참조)에 투자할 수 있겠으며, 무엇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것인가? 실컷 쓰고 남는 찌꺼기로 최대의 효과를 노려보자는 것인가?

 

예수가 말한 사랑하라는 이웃은 개먹들이 먹고 남은 찌꺼기나 받아먹는 ‘개’ 에 불과한 것인가?

 

목사가 돈을 받고 사역을 함으로써 교회는 갈수록 무력해져 가며, 안정된 직장으로서 고소득의 직업으로서, 존재가치를 인정받는 유망한 인사로서 사람들과 자신들의 보기에는 잘되어가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기독경에서는 분명하게 정의하고 있다.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막7:8),

 

“자기만 먹이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겔34:2)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유1:2)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요12:6)

 

 

돈을 받고 하는 일은 아무런 헌신이 될 수가 없다. 혹자가 말하기를 거룩한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달리 세상으로 나가서 세상적인 일을 목사가 해서야 되겠느냐 하면서 놀고먹는 것에(노는 것이 아니더라도 전혀 하나님을 향해서 쓸데없는 일을 하므로 놀고 있는 것이나 같다) 대한 이유를 들런지는 모르지만 목사의 직분이나 목사 자신이 거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거룩하며 하나님 앞에서 그 누구도 특별히 거룩한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이 땅 위에서는 거룩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는 것(마태 23장) 은 진정으로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인정할 것으로 안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땀 흘려 일해서 잘살아 보려고 온갖 아우성을 쳐도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으로 인하여 어려운 형편을 벗어나지 못하고, 또 자신의 노력한 결과를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여 가난한 자와, 온갖 형편과 여건으로 좌절하고 실패하여 허덕이고 굶주리는 성실한 많은 사람들이 수고하지 않고도 기름진 것으로 먹고 마음껏 생활의 여유를 누리는 목사를 볼 때, 과연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다고 깨달을 수가 있겠는가? 또 누구든 이토록 먹고살기 힘든 세상에 그런 좋은 아이템이 있는 줄을 알면서 쓸데없이 다른 일을 하려고 하겠는가? 하여 아무나 신학교를 선호하게 되고 그 결과 저리도 많은 신학교가 난립한 것이 아닌가?

 

목사의 사례제도는 완전히 철폐되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참으로 불타는 사명감에 헌신하는 옳은 목사들만 남을 것이며, 교회의 부조리한 면을 많은 부분 갱신할 수가 있을 것이며, 남은 재정이 참된 에수의 가르침대로 명시된 장소에 사용되어질 것이다. 분명히 기독경에 언급하지 않는 목사의 사례제도는 없어지는 것이 가장 마땅하다고 본다.

 

 오늘의 목사는 구약의 제사장처럼 십일조나 그 외의 몫을 받을 수가 없다. 지금은 누구든지 제사장이며(엡2:18, 히10:19-25, 벧전2:5,9) 그 외 기독경의 원칙에 의거한다면 그 누구도 고정적인 사례를 받은 적은 없기 때문이다.

 

현재 목사제도의 반 그리스도적인 운영은 점점 더 기독경의 범주를 벗어나 이제 교회와 목사와 하나님의 관계는 기독경에 비추어 엄격히 비교하여 볼 때,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