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로망) 치명적인 사랑 [12]

귀여운누나2004.03.24
조회766

 

 

드디어 여 주인공이 등장 했네요.

이제부턴 일인칭으로 시점이 바뀝니다.

재밌게 읽어 주시면 좋구요.

즐거운 일만 가득한 하루 되세요.!!!!!!!!!!!!!!!!!!!

 

 

 

 

 


#12. 새로운 시작...

 

 

 

 

 

 

미치도록 슬프다.


더욱 슬퍼지고 싶다.


그래서 미쳐버리게...


너무 슬퍼서 죽음조차 두렵지 않던지...


모든 걸 다 잃은 것 같다.


그렇게 인생의 전부를 걸었던 일들이 일순간 무너져버린 아픔...


더 이상 날 지탱해줄 끈이 보이지 않는다.


' 아~ 저 줄은 무엇이지?...'


' 엄마... 엄마구나... '


엄마가 웃고 있다.


엄마가 금빛이 나는 줄을 포근한 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내려준다.


" 혜인아! 이 줄을 잡으렴... 그러면 엄마와 행복하게 살 수 있단다. "


' 아~ 엄마! '


갑자기 편안한 이 느낌...


줄을 잡았다.


엄마는 재촉하지 않는다.


포근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올라오라고 미소짓고 있다.


난 줄을 잡았다.


위를 올려다보니 하얀빛이 눈부시다.


빛 속에서 꽃가루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줄이 서서히 올라간다.


이제 조금만 올라가면 엄마와 만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데 갑자기 세상이 암흑으로 변하고 혼돈이 일기 시작한다.


태초의 혼돈 같다.


번개가 치고 검은 폭풍이 밀려오는지 사방이 허황하다.


위를 올려다보니 검은 비가 내리퍼붓는다.


금빛을 발하던 줄이 썩은 줄로 바뀌었다.


줄이 끊어진다...


나는 혼돈의 나락 속으로 무겁게 침강한다.


그러면서 소리친다....


" 엄마... 엄마... "

 

꿈이다....


머리가 무겁고 몸에 땀이 흥건했다.


책상 위에 놓인 엄마사진이 눈에 띄었다.


' 엄마... '


갑자기 울음이 났다.


소리내어 실컷 울었다.


나올 눈물마저 마른 지금 난 더 이상 할 일이 없다.


며칠이 지났는지... 아니 몇 달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젠장,


배가 고프다.


어제까지만 해도 해가 떠도 해가 져도 배가 고픈 줄 몰랐는데...


갑자기 허기가 돌입한 나는 부엌으로 향했다.


여기저기 뒤져보았으나 생활인이 아니었던 나에게 먹을 것이 남아있을 리 없었다.


씽크대 맨 위 찬장구석에서 오래된 라면 한 봉지를 발견했다.


그 위로 바퀴 한 마리가 유유히 지나간다.


' 저놈도 같이 끓여 먹을까? '


' 히.... 엽기적인데? '


씁쓸한 웃음이 난다.


그리곤 냄비에 물을 올렸다.


한시라도 빨리 먹기 위해 생 라면을 반 갈라 그냥 찬물이 든 냄비에 스프와 함께 넣어버렸다.


가스 렌지의 불도 최대한 높이고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냄비를 쳐다보았다.


또 다시 슬퍼지려 한다.


사람의 인생이란 한치 앞을 알 수가 없는 거였다.


그래서 더욱더 지나간 날들이 아쉽다.


너무 바쁘게 야박하게 살아서, 못했던 일들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흐려진 눈으로 멍하니 바닥을 바라보았다.


눈물이 그렁한 눈에 희미하게 커져버린 바퀴벌레 한 마리가 지나간다.


난 손으로 그놈의 행로를 막고는 집게손가락으로 지긋이 눌렀다.


배에 가득 고인 진액이 툭 터져 나오는 느낌이 느껴졌다.


불쌍한 놈...


눈에 다시 눈물이 고이려 할 때쯤 냄비뚜껑이 들썩거리며 김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냥 바닥에 놓고 쭈그리고 앉아  먹었다.


' 오혜인 너 웃긴다. 이렇게 상도 차리지 않고 먹으면서 또 한껏 불쌍해지려 구 그러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피식 웃음이 났다.


배가 부르니 그래도 좀 힘이 나는 것일까?


처음으로 마당에 나가고 싶어졌다.


이 세상에 처음으로 나 혼자 나온 것 같았다.


어수선하게 정리가 되어있지 않은 마당...


그 한구석에 엄마가 손수 가꾸던 작은 화단엔 맨드라미가 빨갛게 피어있었다.


' 엄마 생각은 그만! '


스스로 에게 다짐하면서 방으로 들어왔다.


커텐을 걷어내니 화한 가을 햇살이 침침했던 방안에 스믈스믈 기어 들어온다.


컴퓨터 앞에 앉았다.


새 직업을 찾아야 한다.


구인광고란을 뒤져보았다.


.....


.....


.....


' 이건 뭐지? '


' 가정부를 구한다??? '


' 상주 가정부? '


' 상주... 숙식제공... 쾌적한 자연환경.... 급구 '


' 전화번호가? '


난 용기를 내어 전화를 걸었다.


정말 용기가 나지 않았지만,


' 목소리로 알아보는 데 뭐 어때?'


'떨 것 없어.'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면서...


'세 번 울리고 안 받으면 끊어야지...'


하나... 둘... 셋...


" 여보세요"


' 제길, 전화를 받다니.'


" 아, 네... 저... 구인광고보고... 가정부 구하신다고...."


" 아, 네? 예.  저희가 좀 급하게 필요해서요. 경험은 있으세요? "


젊고 낭랑한 여자 목소리다.


' 경험? 은 없는데? '


" 네. 한 일년정도 했어요. "


" 그래요. 잘 됐네요. 저희가 좀 급해서요. 보수나 그런 건 섭섭잖게 드릴께요. 근데 상주 가정분 거 아시죠? "


" 네. 그럼 어떤 곳에서 일을 하는 건지? "


" 네. 개인 가정집은 아니 구요. 저 혹시 오렌지 기획이라고 아세요? "


" 오렌지 기획이요? 잘 모르겠는데요."


" 저런 그 유명한 가수 영원도 모르신 단 말씀이세요? "


" 영원이요? "


" 아무튼 저희 기획사 소속사람들이 묵는 곳에서 일을 하셔야 해요. "


" 어떻게, 하실 의향은 있으신 지? 전에 있던 가정부 할머니가 치매로 그만 두신지가 한 달이 다 돼가서요. 저흰 많이 급하거든요. 그 쪽만 오케이 하시면..."


" 네. 그렇게 하죠. 뭐 . 그럼 언제부터..."


" 내일부터 어떠세요? "


그렇게 해서 나는 상주 가정부라는 새 직업을 얻게 되었다.


하늘에 계신 엄마가 들으면 다시 살아 돌아오실 지도 모르겠다.


황당해서...


제발 그렇게 라도 됐으면 좋겠다.

 

난 오혜인...


불과 몇 달 전 만해도 너무나 잘 나가는 여자였다.


난 소위 요즘 얘기하는 영재였다.


그래 학교도 다른 아이들보다 일찍 들어갔고 학년도 여러 학년을 동시에 뛰어넘어 대학교도 일찍 들어갔다.


 그래서 26의 젊은 나이에 수련의 과정을 마치고 전문의를 딴 의사였었다.


진료과목은 안과...


또 나는 특유의 성실함과 깔끔한 일처리로 귀여움을 독차지했었다.


그런 나에게 이런 시련이 다가온 것은 불과 얼마전이다...


얼마전이지?...


시간 관념이 없어져 서리...


평소에도 병약하여 늘 내가 어린 시절부터 자리보존하고 살던 엄마가 드디어 딸이 그 어려운 과정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호강시켜드릴 시점에서 돌아가셨다.


불과 몇 달 전의 일이었다.


아버지 없이 자란 나는 그 슬픔이 극에 달했다.


그러나 그 즈음에 내가 전문의가 되어 첫 수술을 진행하였으므로 잘 이겨낼 수 있었다.


그런데...


 옛말에 설상가상이란 말이 있던가?


난 첫 수술을 실패했다.


정석대로 잘 했지만...


내 환자는 6살 정도의 아이였는데...


나의 잘못된 수술로 인해 아이가 양안을 실명했다.


슬프다...


법원에선 의사과실을 어느 정도 인정해야한다는 판결이 나왔다.


젠장 난 내가 배운 대로했다 구...


그 녀석이 요즘 흔히 얘기하는 특이체질이라 그런 거지...


그렇게 복 많던 내가 한순간 복 없는 인간으로 전락했다.


난 이제 의사가 아니다...


의사였다는 사실조차 아픔이다...


또 엄마의 부재도...


힘들다...


그래서 얼마를 방에 처박혀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냥 이대로 죽어 버렸으면 좋으련만...


얼마를 울고 누워 자다보니 그래도 인간이라고, 허리도 쑤시고 배도 고파서 오늘에야 일어났다.


그래 어차피 죽지 못할 거라면 살자! 용감하게 살자!


이제 다시 새 인생을 살아보는 거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왜 그 백의 종군이라고 하던가?

 

나를 알지 못하는 낯선 곳에 가려니 이상하게 흥분되면서 새 삶에 대한 용기가 생겼다.


예전의 나는 다 버릴 것이다.


하나도 남기지 않고...


그래서 서랍을 뒤져 가지고 갈 옷가지와 몇몇 소지품들을 커다란 가방에 넣었다.


그리곤 서랍을 다 비웠다. 

 

 서랍 속의 물건들을 하나씩 불 태워버렸다.


의대 앞에서 찍은 사진...


졸업식사진...

 

이것도 가운입고 찍은 사진...


이것은 원서...


인체 해부책...


아픔도... 추억도...과거도... 조금씩  타 없어졌으면 좋겠다...


방에 들어와 방안 구석구석을 뒹굴었다.


그동안 남겨 두었던 나의 채취 마져도 다 가져가리라...


나 나름대로의 미련을 남기지 않고 떠나는 방법이라고나 할까?...


이제 나는 내일 떠난다.

 


버스가 터미널에 도착했나보다.


많지 않은 사람들이 바쁘게 자기 짐을 챙겨서 내리고 있었다.


나도 내려야지... 그러나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사람들 틈에 끼여 아등바등 부딪히며 내리기가 싫었다.


그래서 다들 내리기만 기다려 마지막 사람이 의자에서 일어나는 걸 보고서야 짐을 들고 내렸다.


' 아! 굉장히 한적한 곳이구나... 이젠 어떻게 가야하지? ...'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입구에 자리잡은 슈퍼가 눈에 띄었다.


터미널에 있는 슈퍼들이 그렇듯 밖에 아무렇게나 내놓은 물건들은 매연으로 인해 검은 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있었다.


가을인데도 내리쬐는 햇볕이 따가웠다.


안으로 들어갔다.


큰 가방을 들어서인지 덥고 갈증이 났다 .


가게에서 생수 한 병을 사면서 아저씨에게 쪽지를 보여주었다.


" 아! 여기요. 여기는 버스가 안 다니는 곳인데... 아마 택시로 가더라도 따블을 줘야 할거요. 저기 큰길에 나가면 미장원이 있거든, 그 쪽 편에서 택시를 타면 될 거예요. "


" 네, 고맙습니다. "


생수를 한 모금 마시면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대답했다.


생수를 마져 벌컥거리며 마시고는 들고있는 짐을 생각해서 반정도 남았는데도 그냥 휴지통에 버리고 나왔다.


큰길에 나가서니 바람이 살랑살랑 적당히 불어주었다.


멀리를 바라봐도 택시는 한 대도 없다.


잠시 여유를 찾은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나름대로 이 마을 전체의 번화가인가보다.


각종 가게들이 작게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사진관도 있고 그 옆에는 세탁소, 그리고 그 옆에는 작은 화원도 약국도 있고 병원도 있네.


한 이십분여가 지났는데도 택시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대로의 턱에 주저앉았다.


가끔 불어오는 바람에 원피스가 날려서 다리가 드러났다.


내 트레이드마크인 긴 생머리도 바람에 가닥가닥 날려서 미끄러졌다.


그리곤 잠시 우울에 빠지려는 순간 택시한대가 채 의식도 하기 전에 앞을 지나갔다.


난 무심결에 일어나 지나쳐 가는 택시에 대고 손을 흔들었다.


이 택시를 꼭 잡겠다는 생각에 뛰어가면서 소리쳤다.


그 노력이 가상했기 때문일까 택시가 저만치에서 섰다.


난 가방을 손에 들고는 죽을힘을 다해 뛰기 시작했다.


그리곤 차에 가방을 아무렇게나 밀어 넣고 기다려준 아저씨에게 감사함을 표시하며 차에 올랐다.


" 아저씨, 여기로 가 주세요."


아저씨에게 쪽지를 내밀고는 의자에 몸을 깊숙이 넣고 숨고르기를 했다.


차 창문을 내리니 시원한 바람이 폐의 깊숙한 곳까지 파고드는 게 가슴이 뻥 뚫리는 듯했다.

 

택시는 한 십 분 여를 쌩하니 달리더니 인적이 전혀 없는 곳으로 날 끌고 간다.


순간 난 긴장이 되었다.


5 분 여를 좁은 도로를 달리더니 이젠 아예 으슥한 숲 속 길로 들어섰다.


아니 대체 이런 곳에 집이 있을 리가 없는데...


난 순간 긴장이 되어 아저씨의 얼굴을 살폈다.


이상스레 험상궂어 보이는 얼굴...


손에는 왜 장갑을 끼었을 까?


아까 까진 몰랐는데 손에 가죽 장갑을 끼었다.


그냥 장갑도 아니고 가죽장갑...


긴장이 극에 달했다.


여차 하면 차에서 뛰어내릴 생각으로 각오를 단단히 하고 앉아있는 데 이젠 비포장 언덕길을 오른다.


' 이 아저씨가 도대체 어딜 가는 거야? '


불안 불안해하다가는


' 그래 어디 두고 보자... '


주먹을 불끈 쥐고 최악에 사태에 대처하려는 순간 택시는 비포장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조금을 더 내려가니 밝은 빛이 비치는 너른 평지가 나오고  조금 떨어진 곳에 큰 호수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곤 호수를 뒷 배경 삼아 그림 같은 이층집이 눈에 들어왔다.


" 다 왔습니다."


난 차에서 정신 없이 내렸다.


 내가 가방을 힘들게 꺼내는 동안 무심하게 앞 만 보던 아저씨는 차 문이 닫히자마자 차를 돌려서는 손살 같이 가버렸다.


순간 무심하다는 생각을 하다가 오는 내내 가슴 조렸던 걸 생각하니 오히려 멋쩍은 웃음이 났다.

 

집을 바라보았다.


여기가 내가 일할 곳이구나!


하얀 돌로 만든 집이었다.


근사하다.


 낮은 창살 대문이라 마당이 훤히 들여다  보였다.


마당에 잔디들은 아직은 여전히 푸른빛을 발하고 있었다.


대문에 적힌 주소를 확인하고는 다시 긴장이 되었다.


들어가기 전에 심호흡을 하고는 다시 한번 집 전체를 바라보았다.


대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현관 앞에 서서는 작은 목소리로 안에 대고 소리쳤다.


" 아무도 안 계세요? "


" .... "


' 계셔도 대답할 수 없겠다. 들려야 말이지? '


조금 더 큰소리로 불러 보았다.


" 저... 아무도 안 계세요?"


문을 살짝 미니 문이 잠겨 있지 않았다.


안을 들여다보며 다시 큰소리로 불렀다.


인기척이 없다.


그래서 그냥 나도 모르게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안은 다소 어두웠으나 호수 쪽으로 나있는 큰 창으로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 아무도 안 계세요. "


나는 마루에다 가방을 올려놓으며 물었다.


' 정말 아무도 없나보다. ' 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난 안으로 들어가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누구세요? "


저 쪽에서 먼저 묻는다.


" 저기... 오늘부터 새로 일하기로 한 ... "


난 어떻게 얘기해야할지 잘 몰라 머뭇거리고 있는 데 그쪽에서 금방 알아들은 것 같았다.


" 아! 네. 도착하셨네요. 안 그래도 그 일 때문에 전화 드린 건데. 지금 안에 아무도 없나요? "


" 네. 그런 것 같은 데요. "


" 네. 아마 다들 바빠서 그럴 거예요. 다른 사람들에겐 얘기 해놨으니까 그냥 일하시면 돼요. 어떤 일 하시는 지는 말씀 안 드려도 잘 아시죠?  그리고 방은 이따가 서경 씨가 알려 줄 거예요. 그럼 궁금한 거 있으시면 거기 사람들 오면 얘기하세요. "


" 네... "


' 어쩐다, 뭐부터 해야하지 우선 청소부터 해야하나? '


한 번도 해 본적이 없는 일이라 막상 닥치니 겁이 나기 시작했다.


우선 집안 구경부터 좀 해야지...


난 일층을 차근차근 둘러보았다.


일층엔 거실이 제법 크고 호수 쪽으로 넓은 창이 나 있었다.


화장실이 있고 부엌이 있고 그 옆은 방인 것 같은 데...


이층으로 올라갔다.


이층계단 중간 중간엔 큰 유리로 된 창이 바닥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마침 스러져 가는 빛을 받아 반짝이는 호수가 눈에 들어왔다.


그 창 앞에는 작은 화분이 두 개 놓여 있었다.


화분엔 작은 들꽃 종류가 피어있었다.


누굴까? 이런걸 가꾸는 사람은?...


순간 이 집안 사람들에 대한 막연한 궁금증이 일었다.


화분의 꽃에서 은은한 향이 났다.


들꽃들도 향을 가지고 있구나...


새삼 무미건조했던 내 삶에 대한 아쉬운 한숨이 났다.


잠시 코에다 대고는 향을 음미했다.


화분을 내려놓고는 다시 이층으로 올라갔다.


조심스럽게 올라오던 나는 이층 쇼파에 잠들어 있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잡지책을 읽다가 잠이 들었는지 가슴에 잡지책을 안고 있었다.


다가가 그의 앞에 앉았다.


그는 지금 꿈을 꾸고 있을 까? ...


어떤 꿈일까?...


순간 그의 얼굴에 슬픔이 번져간다.


슬픈 꿈인가 보다...


순간 그의 슬픈 꿈이 나에게로 전이 되어왔다.


사람들이란 다 들 슬픔을 간직하고 있는 것일까?


그도 나만큼 슬픈 걸까?


그의 얼굴위로 흘러내린 찰랑찰랑한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 올려 주었다.


' 슬프게 잘생겼다....슬프게... '


그는 깨지 않는다.


깊은 잠에 빠진 것 같았다.

 


한시간여가 지나자 두 명의 여자가 들어왔다.


" 어머. 새로 온 가정분가 보네...어째 좀 나이가 젊네..."


여우같이 생긴 여자가 나를 촌닭 쳐다보듯 아래위로 훑어본다.


" 좀 젊은 게 아니라 아주 젊어, 그 때 그 할망구에 비하면. 히히 그 할망구 나이가 얼마였지? 한 칠십은 넘었었지 . 급기야 노망이 나서는..."


여우같은 여자가 계속 지껄여 댄다.


" 쓸데없는 소리. "


맏언니 인 듯한 다른 여자가 냉정하면서 차분한 목소리로 나무란다.


" 반가워요. 저는 한서경이라고 해요. 얘기는 들었어요. 그리고 이쪽은 나영,  "

" 잘 부탁드립니다. 저는 오혜인 이라고 해요. "


" 오혜인... 어울리지 않게 이름은 세련됐네... "


그 여우같은 여자가 눈을 약간 치켜 뜨면서 빈정거린다.


' 아무래도 저 여우같은 여자가 처음부터 좀... 어째 좀 순탄치 않을 것 같다 '


" 하긴 뭐 처음부터 가정부 할 줄 알았겠어. "


" 저기 나가서 차에 있는 물건들 좀 들고 들어와. "


" ... "


" 까불지 말고 네가 나가서 가져와."


" 치~ 언니는 "


투덜대면서 그 여우같은 여자가 나갔다.


나영 이라던가?


그리곤 쇼핑백을 여러 개 버겁게 들고 들어온다.


" 아이참 거기 그렇게 서있지 말고 좀 받지... "


하면서 맘에 안 든다는 듯이 나를 밀치면서내 옆에다가 패대기를 친다.


" 아이구 더워 목말라... 가서 물 좀 가져와. "


손사래를 치면서 주저앉는다.


 말끝마다 반말이다.


" 내가 가져다 마셔. 짐 정리도 안한 사람한테 벌써부터 일을 시키고 그래. "


서경이 나무라자 투덜대며 일어나려 한다.


" 아니 예요. 제가 떠다 드릴 께요. "


난 얼른 주방으로 가서 냉장고에서 물을 꺼냈다.


그리곤 컵에 따르다가 괜히 오기가 발동했다.


좀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에는 이. 코에는 코다 이거야.


그래서 손을 쑴풍 담가 휘휘 저어 주고는 가져갔다.


진짜 목이 마르긴 했는지 그 물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잘도 마신다.


' 간이 맞아서 그런가... 히~ 어째 좀 미안하네 '


" 어디 쇼핑 다녀 오시나봐요? "


" 네? 예... 이번 노래에 필요한 의상 사느라고요. "


서경이 대답한다.


" 노래, 의상이요? "


" 네, 저희가 영원씨 코딘 건 아시 구 오신 거죠? "


" 영원?... "


" 영원 몰라. 그 유명한 가수 영원... "


내가 잘 모르겠다는 듯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여우같은 여자가 덩달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 너, 혹시 간첩 아니니? 아니면 혹시 조선족 동포? 여기 일하러온... 언니 그런 것 같아... 맞지?... 그러면 그렇지... 요즘 젊은 여자가 뭐 할 일이 없어서 남의 집 가정부를 하겠어. "


하면서 다시 한번 아래위를 훒어 보더니.


" 어쩐지 촌스럽다 했어... "


" 조선족 동포... 그것도 괜찮겠네... 아예 동포인 척 할까? "


전에는 나 자신을 과시하려고 애썼는데...


이제는 나 자신을 철저히 감추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특별히 대꾸를 하지 않자 묵시적으로 그들은 다같이 날  동포처녀로 인정하는 듯했다.

 

그렇게 그들과의 인사를 마치고 난 주방 옆에 딸린 방을 배정 받았다.


전에 할머니가 쓰시던 방이란다.


가방을 열어 옷들을 작은 서랍이 딸린 장에 넣었다.


그렇게 물건들을 하나둘씩 나의 새 보금자리에 채웠다.


그러다가 가방 맨 밑바닥에서 일기장을 발견했다.


다 태워 버렸으나 차마 태워버리지 못했던 내 과거가 여기 다 있구나...


철저히 예전의 나를 잊으리라는 것은 헛된 각오일까 난 여전히 꿈을 꾼다.


도도했던 내 옛 시절을... 일기장을 넘겼다.


그러자 그 사이에서 이름표가 나왔다.


안과 전문의  오혜인... 병원마크도 선명하다...


다시 한번 쓰다듬어 보았다.


잊어라... 과거다.... 슬픈 과거는....


나는 더 이상 꿈속에서 살지 않는다...


현실에 순종하리라... 철저히...


그리곤 핑그르르 도는 눈물이 떨어질 까봐 이를 악다물었다.


울지 마라...


그리곤 일어나서 거울 앞에 섰다.


차려 자세로 서서 거울을 보고 나 자신에게 맹세했다.


이제 다시 기쁘게 살자...


그냥 난 처음부터 이 상태였어...


다른 것들은 다 꿈속이었어...


긴 꿈에서 이제 깨었으니...


 현실에 충실하자...


거울 앞에 서서 자신 있는 표정을 지어 보이니 더 각오가 다져지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