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기적절한 남자(2)

리드미온2004.03.28
조회6,918

일요일 오후의 신촌 현대 백화점 앞은 이 세상 약속 있는 모든 사람들이 모인 듯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핸드폰도 없던 시절에는 저 인파 속에서 어떻게 자신의 약속 상대를 찾았을까 의아할 정도였다.

그러고보니 신촌의 이런 중심가에서 누군가 만나기로 약속을 한 적이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교 때부터 남자 친구가 있었던 때까지는 신촌에 자주 왔었다.

강북에 살던 나와 강남에 살던 남자친구가 그래도 서로 쉽게 움직일 수 있는 곳고 갈 곳도 많았던 곳이 신촌이었던 것 같은데...

신촌의 좋은 점은 카페부터 음식점 그리고 모텔까지 있었다는 것이었다.

현대 백화점 앞에서 나는 잠시 남자친구와의 추억을 회상하고 있었다.

 

그 때 그의 청혼을 받아들였다면?

이 나이에 독립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거나 혹은 불쾌한 맞선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3-4살 된 아이의 손을 잡고 주말 외출을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사람 인생이라고 했던가...

 

나는 이제 독립만이 내 살길이라 생각하며 현대백화점 앞의 인파 속에 섞여 있었다.

핸드폰 시계를 보며 약속 시간 보다 약 10분 가량 늦은 것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저...지금 도착했는데 어디 계셔요?'

 

'네. 여기가 현대백화점을 등지고 오른 쪽쯤에 있는데....연보라색 정장을 입고 있어요.'

 

'아..네...!'

 

나는 주위를 두리번 거리다 그만 깜짝 놀랐다.

전화기를 닫으며 내 앞에 다가온 남자는?

 

"안녕하세요?"

 

뭐가 우스운지 능글거리는 미소를 인사를 하는 그 남자는 아까 재수없다고 생각하며 돈을 던져 버렸던 그 맞선남이었다.

 

이럴 수가.....

마주 앉아 대화했는데도 전화기 속의 목소리와 동일인물이란 것도 모르다니...

내가 이렇게 둔한 여자가 된 건지...

 

"네....."

 

나는 간신히 대답을 하고 이 자리를 어떻게 모면할 것인지 고민하고 있었다.

 

"원래 전화하실 때는 그렇게 상냥한 목소리로 얘기하시나봐요. 연기 공부라도 하셨나...."

 

"그러는 댁도 마찬가지죠. 전화할 때는 억양마저 바뀌던 걸요."

 

나는 이번에도 질 수 없었다.

 

"약속이라고 하시길래 전 집안 몰래 숨겨놓은 애인이라도 있는 줄 알았는데 집 구하시나봐요."

 

또 한 가지 걱정이 생겼다. 이 남자가 내가 집을 구하고 있단 것을 말해서 엄마의 귀에도 들어간다면 이 계획은 무효가 된다.

 

"미국 간다고 서둘러 선 보는 남자보다 나은 거 아닌가요?"

 

"결혼 안하고 미국 간다고 하도 뭐라고 하시길래 한번 나간 거죠. 피차일반이겠지만...."

 

피차일반이라....

그건 인정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화창한 일요일에 마음에 없는 선을 봐야만 하는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없는 대한민국의 노처녀 노총각들.....

 

"집...보러 가셔야죠?"

 

이 남자의 집이라면 굳이 보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이제 와서 그 집을 포기할 순 없었다.

내가 끌렸던 것은 인터넷에서 보았던 집 사진과 조건이었다. 다른 집에 비해 인테리어가 좋아보였고 보증금이나 월세가 쌌다. 아마도 급히 집을 내놓아야 해서 그런 조건이 된 것 같았다.

기분은 나쁘지만 돈이라는 것 앞에서는 자존심을 죽여야 했다.

만약 이 남자가 집을 세놓고 미국을 간다면 앞으로 볼 일은 없으리라 싶었다.

그리고 어떻게든 오늘 집을 구하려고 만났다는 얘기만은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도 해야했다.

그러나....선본 남자와 이렇게 얽힌다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니었다.

차라리 조건이 조금 더 나쁜 집에 마음 편한 쪽을 선택하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아직 돈과 자존심 중에 자존심을 선택할 만큼 철이 덜 들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아..죄송해요. 다른 집을 알아볼래요."

 

"이거 보세요....최소한의 예의도 없으신 분이네요. 저도 바쁜 사람입니다. 집을 보러 오신다고 했으면 최소한 둘러보고라도 거절하셔야죠."

 

역시 인내심이 없는 남자임에 틀림 없었다. 또 화를 내고 있었다.

 

"누구 집이냐에 따라 다르죠. 댁한테 제가 세입자가 되어야 하는 건데.... 전 반갑지 않아요."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전 일주일 후에 미국에 가야 하고 그 전에 돈이 필요합니다."

 

아쉬운 건 내가 아니라 오히려 이 사람인 것 같았다.

미국으로 간다는 저 사람에게는 집보다는 현금이 당장 필요하리라....

아까 이 맞선 남은 결혼 상대자나 연애 대상자로 부적합할지도 모르겠지만 단순히 집주인의 관계라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시 인터넷으로 본 그 집의 모양과 다른 집보다 싸다는 그 조건을 떠올렸고 이 남자 말대로 집을 보자고 생각했다.

 

"솔직히 이 집은 세 놓기가 아깝습니다. 부모님에게서 독립하려고 3년 동안 모은 돈으로 대출을 끼고 마련한 집입니다. 의자 하나도 제가 사고 싶은 것으로 산 거고요. 제가 인터넷에도 썼지만 이 집의 가구 구조를 하나도 바꾸지 않는다는 조건을 내 건 것도 그런 이유죠. 제가 미국에서 돌아오면 이 집에서 살 거니까요."

 

집 쪽으로 안내하며 걸어가는 동안 이 남자는 자신이 이 집을 얼마나 아끼고 있는지 설명하고 있었다.

 

"저...죄송하지만요. 우리는 오늘 맞선만 보고 헤어진 걸로 해주세요."

 

"아..네. 야반도주하실 건가 봐요?"

 

이 남자는 내 비밀 독립 계획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건 아니지만...."

 

"알겠습니다. 요즘 한국 여자들 결혼보다 독립을 꿈꾼다고 하더라고요."

 

또 시작이다. 요즘..한국 여자들...

 

"요즘 한국 여자들이 아니라 인간은 누구나 독립을 꿈꾸고 있죠. 다만 여건이 안되니까 못하는 거고요."

 

"네네....알겠습니다. 이번엔 뭘 던질까 걱정되는군요."

 

아무튼 이 남자 여자를 약올리는 천부적 기질을 타고 난 사람 같았다.

 

"걱정 마세요. 집을 보고 마음에 안들면 우린 이제 다시 만날 일 없으니까요."

 

"그러시죠."

 

약간 교통이 불편하다 생각될 정도로 언덕 길을 올라 남자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남자가 멈춘 곳은 주변의 어느 건물보다 세련된 곳이었다.

현관은 바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비밀번호를 입력하도록 보안 설치도 나름대로 되어 있는 곳이었다.

 

"이렇게 현관에서 비밀번호를 눌러야만 들어올 수 있기 때문에 보안은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남자는 건물과 집에 대해서 설명하는 집주인으로 충실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이렇게 밖이 보이도록 되어 있어서 갑갑하지 않죠."

 

나는 엘리베이터가 밖이 보이든 안보이든 상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겨우 몇 초 타는 엘리베이터가 밖이 보이든 안보이든 상관이 없죠. 다만 고장이 안나면 좋은 거죠."

 

"그건 그렇겠지만 어떤 엘리베이터가 있느냐에 따라 집이 달라보이죠. 백화점에 왜 굳이 전망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겠어요?"

 

남자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609호 앞에서 멈추었다.

 

"호수도 좋지 않아요? 609호?"

 

어떤 의미로 그 호수가 좋다고 하는지...원....

 

"아예 69호로 바꾸지요. 그렇게 좋으시다면...."

 

"훗...이상이란 시인이 차렸던 카페 이름이 69였다고 하더라고요..."

 

이 남자 집에 애착이 많은 것은 사실인 것 같았다. 자신의 집 호수까지 이런 많은 생각을 하다니....

 

"자 들어와 보세요....."

 

남자는 문을 열었다.

 

'냐...옹.....'

 

우선 우리를 맞이한 것은 까만 고양이였다. 까만 고양이는 어슬렁거리며 현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나 왔다. 밥은 먹었구?"

 

남자는 고양이를 향해 몇 마디 던졌다.

 

"걱정 마세요.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강아지보단 고양이가 훨씬 키우기 쉬워요..."

 

이 남자 정말 희한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살면서 고양이까지 키우다니.....

거기다 집안도 정말 깔끔했다. 그리고 이 남자가 미리 설명한 것처럼 모든 가구들이 적절한 장소에 기품있게 배치되어 있었다.

인터넷에 설명한 대로라면 이 모든 가구는 그대로 놓고 갈 것이라고 했기 때문에 내가 이 집에서 산다면 이 모든 것을 누리며 살 수 있으리라....

마음에 드는 옷을 입어 보고 몸에 딱맞을 때 아무리 비싸더라도 사고 싶은 유혹이 강하게 드는 것처럼 집에 욕심이 생겼다.

그런데 또 이상한 점은 싱글 침대가 두 개가 있다는 것이었다.

 

"저 침대가....?"

 

"아...네. 왜 두 개냐고요?"

 

클릭, 시기적절한 남자(3)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