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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나라의엘리스2009.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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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정치범수용소 공개…"한 번 가면 절대 살아나올 수 없는 곳"
“당장 죽어 가는 사람을 앞에 보고 있으면서도 어떤 사람들은 땅바닥에 돋아난 풀을 뜯어먹고 있거든요. 이것은 수용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인간이 아닌 짐승처럼 변했다는 겁니다”
북한 관련 문제들을 주로 다루는 미국의 RFA(radio free asia)는 비영리 북한인권운동단체인 북한인권위원회의 북한 비밀 수용소에 관한 보고서 내용을 소개하면서 요덕 수용소에서 탈출한 안혁씨의 이같은 말을 전했다.

RFA가 북한인권위원회의 보고서를 인용보도한 바에 따르면, 북한내 관리소들은 과거에는 12곳이 넘게 있었는데, 현재는 6개 관리소만이 실제 운영되는 것으로 파악되며 각 관리소마다 적게는 5천명 많게는 5만명씩, 모두 약 20만명이 수감돼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특히 90년대에 들어오면서 무너진 옛소련이나 동유럽에서 일했던 외교관이나 유학생들도 끌려들어오기 시작했으며, 김일성 김정일의 사진을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혹은 남한 노래를 불렀다고 해서 잡혀들어 온 사람들도 있었다고 전했다.

RFA는 유엔인권고등판무관실 출신인 데이비드 호크씨를 비롯해 요덕수용소 탈북자, 관리소 경비대 출신, 평남 개천 1호 교화소 탈북자 등의 발언내용을 통해 북한의 대부분의 비밀 수용소가 재판 없이 '자의적 구금(arbitrary detention)' 등 인권유린을 일삼으며 강제노역을 자행한다고 덧붙였다.


유해성 기자 chongmu@hses.com 11/10


다음은 RFA의 보도내용 전문이다.

북한인권위원회 보고서-북한의 비밀수용소의 실체 (2003. 10. 24)

미국의 비영리 북한인권운동단체인 북한인권위원회가 올해 처음으로 북한의 비밀 수용소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하고, 북한내 인권탄압의 실태를 폭로했다. 저희 자유아시아 방송은 앞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이 보고서 내용을 소개할 예정입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한번 들어가면 살아나오기 힘들다는 북한내 비밀 정치범 수용소인 "관리소"의 전반적인 현황에 대해 알아본다.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내 관리소들은 과거에는 12곳이 넘게 있었는데, 현재는 6개 관리소만이 실제 운영되는 것으로 파악된다고 전했다. 각 관리소마다 적게는 5천명 많게는 5만명씩, 모두 약 20만명이 수감돼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대부분 산과 산 사이 지형이 험한 곳에 위치해 주변에는 철조망이 겹겹이 둘러쳐 있는 등 사람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삼엄한 경비가 이뤄지고 있다고 보고서는 말했다.

보고서는 또 관리소 내부에는 죄를 진 장본인들을 가두는 수감시설과 또 그 가족들을 가두는 마을형태의 수감시설로 나뉘어 있으며, 일부 관리소는 한번 들어가면 평생 나오지 못하는 "완전 통제구역"과 그렇지 않은 "혁명화 구역"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북한의 관리소 중 이러한 "혁명화 구역"이 있는 곳은 요덕 15호 관리소등 일부이며, 일반적으로 북한의 관리소는 한번 들어가면 절대 나오지 못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고 보고서는 덧붙였다.

이 보고서를 작성한 유엔인권고등판무관실 출신인 데이비드 호크씨에 따르면, 북한내 관리소에는 몇가지 비정상적인 특징이 있다고 한다. 그는 먼저 반역자는 씨를 말려야 한다는 이유로 온가족을 함께 수감시키는 "연좌제"가 행해진다는 점, 그리고 최소한의 식량만을 공급하며 엄청나게 힘든 노역을 시킨다는 점, 그리고 대부분 재판 과정을 거치지 않고 종신형을 선고 받은 채 수감된다는 점을 들었다. 이 중에서도 특히 재판도 받지 않고 수감되는 것은 유엔이 규정하고 있는 "자의적 구금(arbitrary detention)"에 해당하는 것으로, 관리소 수감자들은 모두 북한 당국의 "자의적 구금"에 의한 피해자들이라고 호크씨는 강조했다.

HAWK: “Thousands of Koreans imprisoned in the Kwan-li-So, political penal forced labor camps, are victims of what the UN defines as ‘arbitrary detention’.”

북한에 이러한 형태의 수용소가 처음 생긴것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혁명에 적이 될 수 있는 자본가나 지주계급, 친일파, 종교인, 혹은 월남한 자의 가족들을 수감하기 위해서 였다고 보고서는 지적했다. 그러던 것이 한국 전쟁 이후에는 미군이나 남한군에 협조한 사람들이 이곳에 수감되기도 했으며, 북한 노동당과 군, 그리고 체제에 반대하는 사람들, 즉 숙청대상이 된 사람들을 수감시키는 실질적인 정치범 수용소가 됐다고 이 보고서는 설명했다.

특히 90년대에 들어오면서 무너진 옛소련이나 동유럽에서 일했던 외교관이나 유학생들도 끌려들어오기 시작했으며, 김일성 김정일의 사진을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혹은 남한 노래를 불렀다고 해서 잡혀들어 온 사람들도 있었다고 보고서는 전했다.

실제 열 아홉의 나이로 호기심에 중국으로 넘어갔다가 국가보위부에 간첩죄로 체포돼 함경남도 요덕 15호 관리소에서 지난 87년부터 약 1년 반동안 수감생활을 했던 탈북자 안혁씨에 따르면, 북한당국은 사소한 것이라도 김일성, 김정일 정권에 반한 행동이라고 여겨질 경우 모두 정치범으로 붙잡는다고 증언한다.

안혁: “정치범으로 잡혀들어오는 사람들은 김일성 사진에 잉크 방울을 떨어뜨렸던 사람들, 그리고 해외에서 유학도중 서양 여자와 춤을 추다 키스를 한번 한 죄, 김일성 사진에 먼지가 깔렸는데 그걸 안 닦은 죄, 가족이 같이 TV를 보다가 김정일이 나오는 사진을 보고 저거는 진짜가 아닌 것 같은데 이렇게 얘기했는데 아들이 학교에 가서 선생님 우리아버지가 그건 진짜가 아닌 것 같다고 했다고 그러면 온 가족이 잡혀오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보고서는 이외에도 한국전쟁 이후 남한으로 송환되지 못한 국군 포로들이나 베트남 전쟁 때 베트콩들에게 붙잡혀 북송된 국군 포로들, 북한당국에 의해 납치된 남한인들과 일본인들도 다수 이곳 관리소에 수용돼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덧붙였다.

북한인권위원회 보고서 - 북한의 비밀수용소의 실체 II (2003. 11. 03)

오늘은 보고서 내용중 비밀 정치범 수용소인 함남 요덕 "15호 관리소" 출신 탈북자들의 증언을 소개한다

탈북자 강철환, 안혁, 김태진, 이영국. 이들은 모두 북한 함경남도 요덕에 위치한 15호 관리소에 수감됐었던 사람들이다. 보고서는 이들이 왜 수감됐으며 그곳에서 어떤 생활을 겪었었는지에 대해 이들로부터 직접 들은 증언들을 적어놓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먼저 강철환씨는 1968년생으로 할아버지 할머니가 일본에서 빠징코 사업을 하던 재일교포 출신이라고 한다. 김일성이 이끄는 북한 노동당에 충실한 지지자였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사회주의 국가 건설에 이바지하기 위해 자진해서 평양으로 되돌아갔으나, 북한당국은 이들의 재산을 하나 둘씩 몰수해 갔다고 보고서는 전했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강씨의 할아버지가 행방불명이 됐으며, 그 후 몇 주 지나지 않아 출신성분이 좋았던 강씨의 어머니를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은 모두 함경남도 요덕에 위치한 15호 관리소로 붙잡혀 갔다고 보고서는 말했다. 보고서는 당시 그가 수감됐었던 곳은 15호 관리소 내에 재일교포 북송교포들을 가둬놓고 재교육시키는 "혁명화구역" 마을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때 나이가 9살이었던 강철환씨는 그곳에서 77년부터 87년까지 무려 10년 동안 살아남기 위해 인간임을 포기한 삶을 살았다고 말한다.

강철환: “당장 죽어 가는 사람을 앞에 보고 있으면서도 어떤 사람들은 땅바닥에 돋아난 풀을 뜯어먹고 있거든요. 이것은 수용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인간이 아닌 짐승처럼 변했다는 겁니다. 이성이 마비되고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고 오직 먹을 것만 찾는 동물처럼 돼 있었습니다.”

보고서는 이어 당시 강철환씨와 함께 수감생활을 했던 안혁씨의 증언을 소개했다. 자강도 만포시 북한 노동당 고위급 가정에서 태어난 안혁씨의 인생은 그가 19살 되던 해, 호기심으로 중국 국경선을 넘으면서 달라졌다고 이 보고서는 말했다. 중국으로 건너간 안씨는 중국에서 북한 국가안전보위부에게 체포돼 북송됐으며 지옥 같은 보위부 마람 초대소 지하감방 수감생활을 거쳐 1987년 요덕 15호 관리소로 보내졌다. 그는 그곳에서 건설과 벌목, 버섯 채취 등 강제 노역에 2년여 동안 시달리다 89년 풀려 나와, 요덕 관리소에서 만난 친구 강씨와 함께 1992년 중국 대련에서 배를 타고 남한에 입국했다고 이 보고서는 전했다. 안혁씨는 자신이 요덕 관리소에서 직접 겪은 인권 유린 참상에 대해 최근 남한 국회에서 열렸던 북한 인권 개선 토론회에 참석해 낱낱이 고발한 바 있다. 안혁씨의 증언이다.

안혁: “전체 수감자들이 교수형 당하는 사람을 두고 돌을 던져야 합니다. 그런데 큰돌을 던지냐 작은 돌을 던지냐에 따라 충성심이 가려집니다. 그리고 탈출자가 생기면 탈출자가 잡힐 때까지 수감자들을 잠을 재우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장 두려운 것은 여기서 죽으면 끝나는 거구나. 그리고 여기서 죽으면 죽음과 동시에 집안과 친척들은 북한에서 제재를 받다가 죽은 사람의 가족이 됩니다. 그래서 자살도 마음대로 못합니다.”

또 다른 탈북자 김태진씨는 아버지가 군인으로 일했던 중국 길림성에서 1956년도 태어났다. 그 후 그는 어머니를 따라 북한으로 되돌아 왔으나, 85년 중국에 있는 친척집을 방문하기 위해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다고 보고서는 전했다. 그러나 김씨는 그곳에서 중국 공안에게 체포됐으며 청진에 있는 무산군 인민보안성 구류장과 보위부 구류장을 거쳐 요덕 15호 관리소 혁명화구역으로 보내졌다고 보고서는 말했다. 요덕 관리소에서 88년부터 92년까지 4년을 보낸 김태진씨는 그곳에서의 생활은 한마디로 절망 그 자체였다고 표현한다.

김태진: “절망적이죠. 불안에 빠져있는 거죠. 그 안에서 언제 나가는지 모르니까. 그리고 옆에서 굶어죽고 그런 사람들이 많이 보이고 그러니 대단히 불안한 상태죠. 그런 정도로 배가 고팠어요. 쥐나 뱀 개구리도 잡아먹었고 하다 못해 어떤 사람들은 개구리 알까지 먹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보고서는 또 1995년부터 99년까지 요덕 관리소 혁명화 구역에 수감됐었던 이영국씨를 증인으로 소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62년 함남 무산에서 태어난 이씨는 김정일을 보위하는 친위 부대에서 10년 동안 근무했던 경력이 있다. 고위급 신분이었던 그는 군 제대 후 무산 군당 지도원으로 근무 중 남한 방송을 접할 수 있었고, 그 방송을 통해 남한사회에는 진정한 자유와 민주주의가 있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고 보고서는 전했다. 1994년 이씨는 남한으로 망명하기 위해 중국으로 갔으나 결국은 붙잡혀 요덕 관리소에 수감됐다. 보고서는 이씨가 당시 조사과정에서 받은 고문으로 인해 치아 여섯 개가 부러지고 한쪽 고막이 터졌으며, 그의 정강이는 아직도 검붉은 색이라고 덧붙였다.

현재 이들은 모두 남한에 정착해 살고 있으며, 지난 6월 "북한 민주화를 위한 정치범 수용소 해체본부"라는 단체를 조직해 자신들이 그곳에서 겪었던 인권 유린 참상을 고발하고 북한 내 정치범의 석방과 수용소 해체를 위해 함께 활동하고 있다.

북한인권위원회 보고서 - 북한의 비밀수용소의 실체 III(2003. 11. 4)

오늘은 관리소에서 탈옥에 성공했던 탈북자 김용씨와 관리소 경비대 출신 안명철씨의 증언을 소개한다.

보고서에 따르면 1950년 황해도에서 태어난 김용씨는 북한 국가 보위부에서 달러 획득을 위해 일본에 어류를 수출하는 서해아사히무역회사 부사장으로 일했다. 보고서는 고위 관리였던 김씨가 관리소에 수감된 것은 김씨의 출생 성분과 관련된 과거가 우연한 사건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김씨의 어머니는 그의 아버지와 형이 미군의 간첩으로 활동하다 발각돼 처형됐다는 과거를 감추기 위해 그의 출생서류를 위조한 바 있다고 보고서는 덧붙였다. 그 일로 인해 김씨는 1995년 평남 개천 14호 관리소와 북창군 덕창리 18호 관리소에 수감됐으며, 탈옥에 성공한 98년까지 4년여 동안 그는 그곳 탄광에서 인권을 유린당하며 강제노역에 시달려야 했다고 증언했다.

김용: “저는 관리소를 최초로 탈옥했습니다. 나는 고위 관리였기 때문에 거기에 가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가보니 상상을 초월하는 생활이었습니다. 아버지가 간첩이었다는 이유로 영문도 모르고 체포된 이후 인권을 유린당했습니다. 고문자국이 아직도 손목과 이마에 남아 있습니다. 좁은 방에 가두고 배꼽까지 물을 채우고는 움직이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김용씨는 한번 들어가면 절대 살아 나올 수 없다고 알려진 18호 관리소에서 자신의 목숨을 지탱해준 것은 그곳에서 극적으로 다시 만난 어머니였다고 보고서는 전했다. 보고서는 김씨의 어머니가 자신의 목숨이 위험에 처하게 되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탈옥을 격려했으며, 결국 김씨는 탄광에서 석탄을 나르는 기차를 숨어 타고 관리소를 탈출해 중국과 몽골을 거쳐 99년 남한에 입국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용씨는 현재 미국 로스앤젤레스 신학대학원에 다니고 있으며, 지난 8월에는 "재미 탈북난민협회"를 결성해 탈북자들을 돕는 활동을 펼치고 있다.

보고서가 소개한 또 다른 증인은 국가 안전보위부 산하 인민 경비대에 선발돼 온성 13호, 회령 22호 관리소 등에서 7년 동안 경비대원으로 근무했었던 탈북자 안명철씨다. 보고서에 따르면 안씨의 아버지는 공공 배급소에서 근무했는데 북한에 기아가 극심할 당시 이웃에게 식량을 줬다는 이유로 반동으로 낙인찍히게 됐다. 이러한 아버지의 사정을 알게된 안씨는 본인도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1994년 아내와 함께 중국으로 탈출했고, 구사일생으로 같은해 남한까지 올 수 있었다고 보고서는 전했다.

보고서는 안씨가 관리소 수감자들은 매우 야위고 작으며, 나이 들어 보이는 것은 물론 사고로 장애를 입었다고 설명했다고 전했다. 그는 특히 그가 탈북하기 직전까지 경비대 운전병으로 일했던 함경북도 회령시 22호 관리소에서는 매달 수십명이 병과 기아로 죽었다고 증언했다.

안명철: “제일 많이 걸리는 병이 간염하고 결핵, 그리고 가을에 제일 많이 걸리는 유행성 출혈열, 쥐병, 이것은 쥐 때문에 생기는 병인데 가을이면 이 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간다. 전염병이기 때문에 쥐를 안먹은 사람도 많이 걸리고 경비병들도 걸려 죽은 사람이 많다.”

안씨는 이어 관리소에서는 수감자들을 "이주자"(emigrant)로 불렀는데, 수감자 중에서도 특히 혁명에 방해와 위협이 돼는 "종파분자"(factionalist)와 "계급의 원수"(class enemies)들은 특별 관리 대상으로, 어떻게 그들을 잡초처럼 뿌리 채 뽑고 3대에 걸쳐 씨를 없애 파괴시켜야 하는지에 역점을 두었다고 보고서는 전했다. 따라서 그는 경비대는 관리소 수감자들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도록 교육받는다고 덧붙였다.

보고서는 또한 안씨가 관리소 안에서는 아주 특별 취급을 받는 수감자를 제외하고는 결혼이 허용되지 않으며, 여자가 임신을 할 경우 금지된 성관계를 가졌다는 이유로 사형을 당하게 된다고 말했다고 덧붙였다.

한편, 안명철씨는 남한에 정착한 후 "그들이 울고 있다"라는 책을 저술해 베일에 가려있던 회령 제22호 관리소의 실상을 폭로했으며, 지난해 12월에는 홍콩의 파이스턴 이코노믹 리뷰지에 의해 최초 공개된 22호 관리소 위성사진의 실체를 확인해 주기도 해 국제적인 관심을 끈 바 있다.

북한인권위원회 보고서-북한의 비밀수용소의 실체 IV (2003. 11. 5)

오늘은 "죽음의 수용소"라고 불리는 북한 교화소의 실태를 소개한다. .

보고서는 북한 교화소는 노동 훈련을 통해 재교육을 받는 장소로써 보통 중형을 선고받은 무거운 죄를 지은 사람이 가는 곳을 말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 보고서를 작성한 전 유엔인권고등판무관실 출신인 데이비드 호크씨에 따르면, 교화소 수감자 중에는 정말 죄를 범하고 잡혀 들어오는 경우도 있지만, 단순히 남한 노래를 불렀거나 남한 라디오를 들은 경우, 혹은 중국에서 남한 사람과의 접촉을 가졌거나 중국과의 국경지역에서 사적인 경제 활동을 한 경우 등 독재체제가 아닌 다른 국가에서는 범죄로 취급되지 않는 일반적 행위로 인해 이곳에 끌려와 열악한 환경 속에서 노역에 시달리는 주민도 있다고 밝혔다.

Hawk: “North Koreans imprisoned and condemned to hard labor under extremely harsh condition for singing South Korean songs, listening to South Korean radio...”

보고서는 또한 교화소에서 행해지는 재교육 역시 김일성과 김정일의 연설을 강제로 외우게 하거나, 하지도 않은 잘못을 거짓으로 고백하게 하고 자아비판 시간을 갖는 등 원칙적 의미의 재교육과는 다르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실제 북한 평안남도 개천에 위치한 1호 교화소에서 87년부터 94년까지 수감생활을 한 탈북자 이순옥씨의 증언을 소개했다. 이씨는 이 보고서를 통해 당과 경찰간부와의 불화로 절도와 뇌물행위죄로 몰려 재판에서 14년형을 선고받았다고 밝혔습니다. 함경북도에서 당간부 전용 물자 공급소장을 지낸 이씨는 당시 경찰간부들이 자신들에게 분배되는 물자의 양이 적어 불만스러워 했었고 그로 인해 자신이 체포된 것이라며, 교화소 내에는 자신처럼 억울하게 형을 받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말했습니다. 이씨는 최근 미국 의회 청문회에서도 그 같은 내용을 증언한 바 있습니다. 이순옥씨의 말입니다.

이순옥: “80년대에 들어서면서 경제난과 식량난이 악화되자 식량이나 생필품들이 암시장을 통해 거래 됐고 이러한 것들이 정치적인 사건들로 취급됐습니다. 그 결과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교화소에 수감됐고, 개천 교화소는 원래 남자들만 수감됐었는데 많은 여자들이 생필품과 식량구입을 다니다가 집중 단속에 걸려 체포되자 여자들까지도 수감시켰습니다. 그들은 북한 독재체제의 대표적인 희생양들입니다. 그들은 식량 배급이 중지 됐기 때문에 식량을 구하려다 체포된 사람들이며 만약 억울하다고 호소하면 형기가 늘어나고 정치범으로 몰리게 됩니다”

보고서는 또 북한 교화소에는 수감자들의 노동 현장인 공장이나 탄광 벌목장 등이 함께 위치해 있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관리소 수감자들과 마찬가지로 목숨 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식량만을 공급받으며 강제 노역에 시달리고 있고, 그 결과 수감자 중에는 영양실조나 체중저하, 혹은 작업장 사고로 병에 걸리거나 사망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보고서는 설명했다.

보고서는 그러나 의사도 약도 없는 교화소 내 병원은 아프거나 다친 이들을 치료하기 위한 장소가 아니라, 더 이상 노동을 할 수 없는 이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장소라고 지적했다. 단지 교화소 수감자들이 관리소 수감자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정식으로 재판 과정을 거쳐 형을 선고받고 들어온다는 점이지만, 형을 다 마치고 살아서 나간다는 것을 기대하기는 힘든 실정이어서 교화소는 "죽음의 수용소"로 알려져 있다고 보고서는 덧붙였다.

이곳에서 이뤄지는 강제 노동이 얼마나 가혹한지에 대해 보고서는 평남 개천 1호 교화소에 93년부터 3년 동안 수감됐던 탈북자 지해남씨의 증언을 실었다. 동무들과 노는 자리에서 남한노래를 불렀다는 죄목으로 그곳 의류공장에서 노역을 했던 지씨는 열악한 노동 환경으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사람도 있었다고 이 보고서를 통해 밝혔다. 그는 최근 워싱턴에서 열린 국립민주주의 기금이 주최한 포럼에서도 이같은 내용을 증언한 바 있다. 지해남씨의 말이다.

지해남: “교화소 들어가면 하루 징벌 노동을 해야만 밥덩이 180그램을 먹습니다. 징벌 노동을 못하면 밥덩이를 감식합니다. 그래서 어떡하든 큰 밥덩이를 찾아먹기 위해 징벌노동을 하는데 북한은 전력 사정이 긴박해 마선(미싱)을 인력으로 손으로 돌리고 손바닥을 온통 피멍이 들고 껍질이 벗겨기고... 특히 분이란 여자는 마선 바늘 5개 손바늘 5개 실바늘 8개를 먹고 자살하려고 했는데, 인간의 목숨을 귀중히 여기는 사회라면 배를 열어 꺼내던가 해야 하는데 대장을 통해 밑으로 꺼내려고 양배추 떡잎을 반 바게쓰씩 무조건 먹여 한 달 동안 배 안에 있는 것 다 꺼낸 사실이 있습니다.

보고서는 이러한 북한 교화소내 열악한 노동 환경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북한 당국은 범죄자들의 자유를 빼앗고 수용할 수는 있지만, 그들의 먹을 권리와 치료받을 권리마저 빼앗으며 노동력을 착취할 자격은 없다고 강조했다. 또한 북한 당국은 재판 과정을 거쳐 형을 선고받은 교화소 수감자들에게 음식을 제공해야 할 책임이 있으며, 수감자들에게도 당연히 살아야 할 권리가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