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판타지] Avalanche [1] : 신비의 섬 아스렌

정화니2004.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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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장 : 신비의 섬 아스렌

로엔 왕조 997년. 바야흐로 봄이 다가오고 있었고, 이를 증명하듯 들판에는 꽃과 나무가 서서히 피기 시작했다. 고요하고 신비로운 아스렌의 숲속에는 그 어떤 때보다 화창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었다. 아스렌은 비록 작으나 로엔 왕국의 영토 중 역사가 가장 깊은 섬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때문에 천 여명 남짓한 현지 사람들은 항상 자신들의 존재에 긍지를 가지고 살아왔다. 아름다운 풍경 외에도, 나라가 전쟁에 휩싸여 혼란스러울 때마다 걸출한 기사들을 배출하여 “기사의 섬” 이라는 애칭으로 또한 통하였다. 겉 모습 대로 아스렌은 평화롭고 차분한 마을이었지만,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무사도 정신은 그 어느 지방에 견줘도 손색이 없을 만 하였다.

로엔은 아주 오래 전 많지 않은 인구에도 불구, 치열한 전쟁 끝에 승리 국이 되어 넓은 땅을 지배하는 강국이 되었지만, 최근에 반란군과 저항 세력의 공격 조짐이 여기저기서 이어져 오랜 평화가 위협 받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국경에 한정된 것이며, 아직도 변방에 있는 아스렌은 너무나도 고요한 곳이었다.

 

           “인생이란 무엇이며, 나란 무엇일까. 이 세상에 태어나 내가 할 일은 무엇일까..”

 

언뜻 봐서 갓 성인이 되었을 법 한 이 소년은, 한참 사춘기인 듯 나직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는 여느 다른 소년과 달리 매우 지적이면서도 날카로운 눈매를 지녔으며, 눈에 띌 정도는 아니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알 수 없는 호감과 신비함에 이끌리게 하였다. 소문에 의하면 그는 북쪽에서 온 어느 유명한 귀족 집안의 자손으로, 어릴 적 무슨 일로 부모를 여의였다. 오로지 그만이 화를 피해, 말 한 필에 의지하여 한달 동안 도주하여 겨우 살아 남았고, 훗날 우연히 그의 모습을 본 아스렌의 토박이에 의해 입양 되었다. 사실, 좀처럼 타국 사람들을 꺼리는 것으로 유명한 현지인들이 그를 받아드린 것은 아직까지 풀리지 않은 의문이 되곤 하였다. 그는 어릴 적부터 검술, 창술을 비롯한 무를 익히는 아스렌인들과는 달리 글과 음악을 즐기는 예술인이었지만, 그의 큰 키와 탄탄한 몸, 그리고 이상하리만큼 타고난 검술은 다른 이들로 하여금 그를 무시하지 못하게 하는 수단이 되었다.

 

그의 행동을 얼마동안 뒤에서 물끄러미 쳐다보던 소녀가 문득 비웃으며 쏘아대기 시작하였다.

 

“넌 또 너의 그 지긋지긋한 명상에 빠진거니? 그럴 시간 있으면 검술이나 제대로 익히라고!”

 

그녀는 아스렌 영주의 딸 답게 전형적인 아스렌인의 특징을 지니고 있었는데, 큰 키와 호리호리한 몸매는 물론, 조각 같은 얼굴과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 명랑한 성격을 지녔었다. 그녀의 눈은 보름달 만한 크기였으며, 앵두 같은 입술과 함께 뾰족한 코 등, 아리따운 이목구비는 뭇 남성들의 설레임 대상이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그녀는 쟁쟁한 집안의 사내들에겐 시선을 주는 법이 없었으며, 오로지 소꿉시절 자신의 집으로 입양되어 온 그 소년만 그녀의 관심 대상인 듯 하였다.

“아이젠, 또 너니?”, 소년이 귀찮은 듯 얼버무렸다.

“어쩜 넌 여자한테 지고도 아무렇지 않니? 나였으면 혀를 열 번 깨물고 창피해 죽은지 오래겠다…”

그 말에 소년은 파안대소를 하며 동감을 표하였는데, 실제로 얼마 전 아스렌 청소년 무술대회에서 아이젠에 밀려 탈락 했었다. 물론 아이젠은 아스렌에서 가장 뛰어난 여전라는 평을 듣고 있을 만큼 빼어난 기질을 지니고 있었지만, 소년 또한 그 잠재력 하나는 아이젠 이상으로 인정 받고 있었다. 뭐든지 한번 배운 동작은 절대 잊는 법이 없었으며, 그의 최대 장기인 힘과 민첩성을 살린 공격은 아스렌의 손꼽는 기사들조차 버거워 했다.  그러나 소년은 검술에 집념하기 보다는 주로 책과 악기에 집착하였으며, 이는 “기사의 섬” 아스렌 정서에 크게 위배되어 꾸지람을 듣곤 하였다.

 

“아이젠! 그렇게 직설적으로 말하기엔 너무 잔인한 일 아니니? 하지만 이 세상에 너만큼 빼어난 무사가 있을지 또한 의문이네…”

-    “어휴! 아부성 발언은 그만두고 나랑 같이 이따 회복 약에 쓸 재료나 구하러 가자고… 내일 아침이 나랑 검술 연습하기로 한 날 인건 잊지 않고 있었겠지?”

-                “하하… 물론이지! 잊을게 따로 있지 아무렴 그걸 잊어버리겠니…”

-                 

소년은 장난기 서린 목소리로 가볍게 대꾸하였는데, 말투로 봐서는 그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아이젠은 약간 못마땅한 투로 째려보다 가볍게 덧붙였다.

 

           “혹시 모르니 검 가져 가는 것 잊지 말고! 요즘 산속에 호랑이가 빈번히 목격 되었다는 것쯤은 들어서 알겠지?”

-           “그럼요! 아이젠 마님”

 

역시나 웃으며 대꾸하는 그 소년의 모습은 익살맞기까지 하였으나, 왠지 아이젠은 그런 그의 모습에 분홍빛 홍조를 띄며 살짝 미소를 보였다.

 

             한나절이나 지났을까, 둘은 각자 필요한 것을 챙겨 산속으로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역시나 조금 불평이 잠잠해지나 싶자 아이젠이 못마땅한 듯 투덜거리기 시작하였다.

 

“으휴! 좀 빨리 좀 오면 어디가 덧나니!”

-           “나도 나름대로 노력 중이라고. 너무 그러면 나 상처 받는다?”

-           “정말 못 말려. 바보. 너 때문에 날이 다 어두워 지기 시작 했잖아. 오늘 집에 늦으면 아빠가 날 죽이려 들 꺼야.”

-           “하하… 그럴 일 없을 테니 걱정 마”

소년은 목표 지에 도달하자 평소와는 매우 다른, 신기하리만큼 진지한 모습으로 일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윽고 원하던 재료를 다 구하자 지친 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

-           “아이젠. 늦었다. 이제 그만 내려가는 게 어때?”

-           “그래, 그러자고.”

-            

대충 말을 맞춘 그 둘은 내려갈 채비를 마치자 마자 서서히 온 길을 되돌아 가고 있었다. 그날은 이상하리만큼 빨리 저물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길이 잘 안보일 지경까지 이르렀으며, 곧 이어 안개가 숲을 뒤덮었다. 아이젠은 꿈지럭 거린 소년을 다시 한번 혼낼까 하다, 웬일 인지 생각을 고치고 그냥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이유인즉 갑자기 걸음을 멈춘 소년이 하늘의 무엇인가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뭐하는거니?”

-           “아이젠… 뭔가 이상하지 않아? … 우린 지금 같은 곳을 네 번째 지나고 있어…”

-           “뭐? 그걸 어떻게 알아?”

-           “별들을 봐. 원래대로라면 우린 저 중앙에 있는 카시오페아를 기준으로 동쪽으로 가고 있어야 맞는 거라고…. 그런데… 이상하게 아까부터 별들의 위치에 변동이 없어…”

-           “그게 말이 되니? 우린 온길 그대로 걸어가고 있었잖아… 야! 듣고 있니?…”

-            

상황이 그쯤 되자 아이젠 또한 걸리는 게 있는 듯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얘기하고 있었다. 실인즉 워낙 검술에 익숙한 그녀라 특별히 두려워하는 것은 없었지만, 소년이 이토록 창백해지고 진지해지는 것 또한 처음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소년이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역사 책에서 본적이 있어…”

-           “뭔데?”

-           “이건… 아주 오래 전… 로엔의 적국인.. 그랑카가 처음 선보였다는 …  환영진인 것 같아…”

 

아이젠은 멍하니 그 말을 듣고 있다가 문뜩 정신이 들은 듯 쏘아댔다.

 

          “뭐야? 너 지금 나 놀리는 거니? 그랑카는 멸망한지 오래고 또…”

 

그녀는 원래 “그 정도 되는 고급 마법을 아스렌 같이 작은 섬에 낭비할 리가 없잖아!” 라고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 또한 아스렌이 로엔의 오랜 상징이자 자부심이기에, 전쟁이 일어나면 항상 적군의 첫번째 재물 되곤 하였다는 것을 부모님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이윽고 정신을 가다듬은 소년이 급한 목소리로 다그쳤다.

 

             “이럴 때가 아니야…! 무언가가 아주 잘못 돌아가고 있어… 어서 가자!”

 

             난생 처음으로 아이젠은 소년의 말에 즉시 동조를 하며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 긍정이 긴 여정의 첫 획이 될 줄은 소년은 미처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기억하죠, 그날. 아이젠과 마지막으로 함께 한 날. 그 날로 돌아가고 싶어요”.

(아발랑슈의 일기 제 2쪽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