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국 - 1962년 함경북도 무산군에서 태어났다. 1978년 조선노동당 조직지도부 5과 대상으로 선발되어 입대, 당중앙위원회 호위부 6처에서 김정일 경호원으로 10년간 근무했다. 1988년 군 제대 후 1994년 중국으로 탈출, 한국행을 시도했으나 체포되었다. 1999년 수용소를 출소해 중국으로 탈출, 한국에 입국했다. 2004년 현재 백룡건강식품 대표로 있다.
책추천글
김정일은 자기의 생활상 비밀이 밖에 나가는 것을 그 무엇보다도 두려워하였으며 중앙당과 간부들까지도 경호원과 접촉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김정일의 생활 내막에 대해서는 당과 국가의 고위 간부들도 잘 모르고 있다. 이 점에서 이 책은 김정일의 일상 생활을 가장 구체적으로 상세히 밝힌 첫 문헌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황장엽( 북한의 ‘국가적 이데올로그’, ‘주체사상’의 완성자, 권력 서열 24위, 전 조선 노동당 비서, 남한으로 망명 후 북한 민주화 운동 중)
[북한의 선거]
“김정일이 선택한 사람을 지지해주는 요식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투표소에 ‘국가 보위부’ 요원들이 감시한다
기권하면 반국가행위에 적용되어 ‘정치범’이 된다
반대표 던지면 외딴 곳에 추방된다
친위대는 투표권이 아예 없다.
“북한 헌법에는 만 17세 되면 선거에 참가할 의무를 가지고 참가할 수 있으며 공민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물론 김정일의 명령이면 헌법이든 헌법 할아비든 아무 소용이 없다. 이렇게 헌법 규정을 무시하고, 일반 국민들은 하기 싫어도 꼭 해야 하는 선거를 ‘해서는 안 되는’ 예외 집단이 있으니 바로 경호원들이다. 경호부대의 비밀이 새어나가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선거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우선 선거에 참가하면 부대 명칭이 밝혀지고 사회적으로 노출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심지어 인원수까지 밝혀질 우려도 있다. 그래서 경호부대원은 누구도 선거에 참가시키지 않는다. 경호부대는 특수 대상이어서 북한주민등록에도 따지지 못하게 되어 있다. 만약 무슨 일이 있어 신분을 조사하다가도 그것으로 끝을 맺는 것이다. 이렇듯 북한 땅에 살면서도 북한 사람이 아닌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경호원이다.”
11년 동안 고향에 계신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편지 한 장 전하지 못했다. 나처럼 외부와 차단된 상태에서 김정일의 말만 듣다 보면 누구라도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김정일이 좀 건방지고 성격이 급하여 애매한 사람들을 많이 죽였어도 개의치 않고 경호근무 도중 졸음이 오면 눈에다 성냥개비까지 받치고 참아내며 김정일에게 충성을 다하였다.
(충성의 추억들)
1.김정일 별장에 불이 나서 물동이를 들고 지쳐 쓰러질 때까지 불을 껐다. 다시 정신이 들면 일어나 또 불을 껐다. à그 공로로 전사 1급 훈장
2. 직업병
신경쇠약: 김정일의 괴팍한 성격 때문에 언제 무슨 지적이 날아올지 몰라 늘 신경만 곤두세우고 10년을 살았다. 하룻밤에 5시간 이상 자지 못하고, 잠이 들어도 편히 잘 수 없으니 나중에는 잠꼬대를 심하게 하고 심장까지 약하게 되었다.
김정일의 주위에서 일하는 타자수, 교환수, 친위대 등 ‘중앙당 5과’ 대상은 사촌이라 할지라도 형제들끼리 근무할 수가 없다. : 필자 생각으로는 혈육들끼리 무언가 꾸미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인 거 같다고 한다.
사촌 동생이 ‘중앙당 5’과 대상으로 신체검사를 받은 것은 1981년이었다고 한다. 선발과정에서 11촌까지 성분을 따져 보는데, 사촌인 필자는 인민군으로만 나오고 근무하는 부대는 어디인 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북한의 선거] 카테고리에 이미 설명했지만, 김정일 경호부대에 대해서 철저히 비밀에 부쳐지고 있다) 그 해에는 선발되지 않았고 그 다음해에 김정일의 교환수’로 뽑혔다고 한다.
여자가 비밀을 지킬 지 의문이다라는 김정일의 판단으로 남자 교환수를 선발했는데, 그 중 하나로 뽑힌 것이다. 1년간 남자 교환수를 운영하다가 다시 여자 교환수로 바꾸었는데 이미 1년을 근무한 남자 교환수들이 이모저모를 너무 많이 알고 있어서 고향으로 돌려 보낼 수 없었고, 필자의 사촌동생에게는 김정일의 운전수가 되는 엄청난 행운이 찾아왔다.
사촌동생이 김정일의 운전사가 된 건 1982년 이었는데 필자는 이 사실을 1986년까지 모르고 있었다. 1986년에 있던 어느 행사장에서 장군 계급장을 달고 있던 김정일의 운전사인 사촌동생이 필자를 발견하고 불러서 이야기를 나눴다. 둘은 이 사실을 1988년까지 약 2년간 숨겼으나 발견되었다. 사촌동생의 계급이 높고 최측근인 운전수라서 경호원인 필자가 제대하게 되었다.
11년 만의 귀향으로 군당 간부들과 가족, 친척, 친구들이 나를 반겨 맞아 주었다. 그때 부모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고 나도 부모님을 언뜻 알아보지 못했다. 필자는 얼굴이 너무 좋아져서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했고 부모님은 얼굴이 너무 나빠져 내가 알아볼 수 없었다. 50살에도 70세의 노인처럼 허리가 휘고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제대한 뒤에야 북한을 알게 되다. 다른 세상에 대해 궁금해져 중국TV를 보고 중국 라디오를 듣기 시작하다]
“고향에 돌아온 이후 나는 안절부절못하며 돌아다녔다. 과연 이것이 내가 사는 땅이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내가 혹시나 잘못되고 나쁜 것만 보고 예단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 친구들과 주변 동네를 돌아보면서 좀 좋은 면을 찾아보려고 애쓰기도 했으나 모두 헛수고였다. 우리 고향은 중국을 지척에 두고 있어 몰래 중국 TV를 볼 수 있었다. 그때부터 중국TV를 보게 되었다. 라디오도 구해 듣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방송도 자연스럽게 듣게 되었다. 이렇게 TV를 보고 라디오를 들을수록 지금 북한이 어떠한 현실에 처해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나는 경호원 시절에는 북한 땅에 살면서도 북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제대하고 나서야 비로소 북한을 알게 되었다.
1. 원칙을 들이밀면 “나는 이모 김모 부장과 인간관계를 맺고 있다”고 하면서 오히려 “원칙대로 할 테면 하라”고 큰소리를 쳤다.이것을 부장에게 보고하면 부장은 자신이 인간관계를 맺고 있는 터라 상급에 보고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처리하곤 하였다.
2. 공장과 학교, 농장을 돌아다니니 단위 초급당비서들이 작전트럭에 쌀과 부식물, 술, 담배 등으로 한 차 되게 부장에게 뇌물을 갖다 고이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실제 하부 단위에서는 엉망으로 사업을 하고 있는데 부장은 뇌물을 받고 사업성과를 올리는 것처럼 상부에 보고하였다.
[중앙당 민방위 대학의 실상: 김일성 김정일 초상화 걸린 곳만 아무도 없어도 온도 관리 철저히]
1991년 4월 필자는 중앙당 민방위대학으로 가게 되었다. 김정일이 “친위대는 누구나 당 정권기관에 있어야 하니 대학을 보내라”는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다.
중앙당 민방위대학은 3년 대학 과정에 연구반 2년 등 총 5년제로 되어있다. 학생수는 1000명 정도였고 99%가 전직 당 일꾼이며 당원이 100%였다.
중앙당 민방위대학이라면 북한에서 ‘당 자금으로 운영되는’ 4개 대학 중 하나다.
하지만 대학 안에서 오직 김일성, 김정일의 사상을 배우다 보니 대학인지 아니면 김정일을 연구하는 집단인지 분간하기가 어렵다. 오늘 김정일의 사상에 대하여 연구 학습하고 비숫한 것을 내일 또 하고, 이렇게 되풀이하면서 사람들에게 ‘김정일은 신적인 존재’라는 것을 주입시킨다.
민방위대학의 물질사정은 형편없었다. 겨울에는 추워서 술을 마시고 침실에 들어와서 동복을 입은 채로 자고, 개인적으로 침실에 비닐 박막을 치고 자야했다. 그런데도 김일성과 김정일의 혁명역사를 배우는 연구실은 초상화가 손상된다고 하여 아무도 없는데도 온도관리를 철저히 했다.
대대로 '그 분'의 별장을 관리하고 있는데요
나는 김정일의 경호원이었다.
나는 김정일 경호원이었다 - 김정일 친위대원의 수기
이영국 (지은이) | 시대정신
이영국 - 1962년 함경북도 무산군에서 태어났다. 1978년 조선노동당 조직지도부 5과 대상으로 선발되어 입대, 당중앙위원회 호위부 6처에서 김정일 경호원으로 10년간 근무했다. 1988년 군 제대 후 1994년 중국으로 탈출, 한국행을 시도했으나 체포되었다. 1999년 수용소를 출소해 중국으로 탈출, 한국에 입국했다. 2004년 현재 백룡건강식품 대표로 있다.
책추천글
김정일은 자기의 생활상 비밀이 밖에 나가는 것을 그 무엇보다도 두려워하였으며 중앙당과 간부들까지도 경호원과 접촉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김정일의 생활 내막에 대해서는 당과 국가의 고위 간부들도 잘 모르고 있다. 이 점에서 이 책은 김정일의 일상 생활을 가장 구체적으로 상세히 밝힌 첫 문헌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황장엽( 북한의 ‘국가적 이데올로그’, ‘주체사상’의 완성자, 권력 서열 24위, 전 조선 노동당 비서, 남한으로 망명 후 북한 민주화 운동 중)
[북한의 선거]
“김정일이 선택한 사람을 지지해주는 요식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투표소에 ‘국가 보위부’ 요원들이 감시한다
기권하면 반국가행위에 적용되어 ‘정치범’이 된다
반대표 던지면 외딴 곳에 추방된다
친위대는 투표권이 아예 없다.
“북한 헌법에는 만 17세 되면 선거에 참가할 의무를 가지고 참가할 수 있으며 공민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물론 김정일의 명령이면 헌법이든 헌법 할아비든 아무 소용이 없다. 이렇게 헌법 규정을 무시하고, 일반 국민들은 하기 싫어도 꼭 해야 하는 선거를 ‘해서는 안 되는’ 예외 집단이 있으니 바로 경호원들이다. 경호부대의 비밀이 새어나가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선거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우선 선거에 참가하면 부대 명칭이 밝혀지고 사회적으로 노출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심지어 인원수까지 밝혀질 우려도 있다. 그래서 경호부대원은 누구도 선거에 참가시키지 않는다. 경호부대는 특수 대상이어서 북한주민등록에도 따지지 못하게 되어 있다. 만약 무슨 일이 있어 신분을 조사하다가도 그것으로 끝을 맺는 것이다. 이렇듯 북한 땅에 살면서도 북한 사람이 아닌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경호원이다.”
http://www.fnkradio.com/board.php?board=qqq904&page=5&command=list&command=body&no=26
[김정일이 쓰는 건물, 별장 관리하기]
1.김정일만 들어가는 건물과 유희시설의 건설과 보수를 담당하는 부서가 따로 있다.재정 경리부 8과 김정일이 출입하는 건물이라 보안 유지를 위해 8과에 한 번 들어가면 그 집안 대대로 8과에 종사하게 된다. (인의 장막을 제대로 치는군요…)
2.김정일만 들어가는 건물과 유희시설의 건설과 보수에 동원되는 노동력을 담당하는 부서가 따로 있다. : 노동당 11과
노동당 11과도 재정경리부 8과와 마찬가지로 대를 이어 종사한다. 지방 별장들의 관리원과 기술 정비원들은 지방에서 생활하지만 거주지는 평양시 해방산 구역으로 되어 있다. 한 개 별장의 직원만 200명이 넘고, 그 가족들까지 합치면 800명은 족히 된다.
김정일 별장들이 소비하는 전력은 북한에서 손꼽히는 생산시설인 무산광산에서 소비하는 전기량과 맞먹는다. 김정일이 별장에 내려와서 15일~2달 정도 지내다 가면 부식물 찌꺼기와 물품만도 엄청난데, 이들은 이것을 재활용하여 생활하기도 한다.
http://www.fnkradio.com/board.php?board=qqq904&page=5&command=body&no=26&command=body&no=27
[외부와 단절된 상황에서, 경호원으로 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 김정일에게 충성했던 필자]
김정일이 “인민을 위하여 산다”고 말하기 때문에 그런 줄로만 알았다.
11년 동안 고향에 계신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편지 한 장 전하지 못했다. 나처럼 외부와 차단된 상태에서 김정일의 말만 듣다 보면 누구라도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김정일이 좀 건방지고 성격이 급하여 애매한 사람들을 많이 죽였어도 개의치 않고 경호근무 도중 졸음이 오면 눈에다 성냥개비까지 받치고 참아내며 김정일에게 충성을 다하였다.
(충성의 추억들)
1.김정일 별장에 불이 나서 물동이를 들고 지쳐 쓰러질 때까지 불을 껐다. 다시 정신이 들면 일어나 또 불을 껐다. à그 공로로 전사 1급 훈장
2. 직업병
신경쇠약: 김정일의 괴팍한 성격 때문에 언제 무슨 지적이 날아올지 몰라 늘 신경만 곤두세우고 10년을 살았다. 하룻밤에 5시간 이상 자지 못하고, 잠이 들어도 편히 잘 수 없으니 나중에는 잠꼬대를 심하게 하고 심장까지 약하게 되었다.
http://www.fnkradio.com/board.php?board=qqq904&page=5&command=body&no=30&command=body&no=28
[필자가 김정일 친위 부대서 제대하게 된 사연: 사촌 동생이 김정일의 운전사]
김정일의 주위에서 일하는 타자수, 교환수, 친위대 등 ‘중앙당 5과’ 대상은 사촌이라 할지라도 형제들끼리 근무할 수가 없다. : 필자 생각으로는 혈육들끼리 무언가 꾸미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인 거 같다고 한다.
사촌 동생이 ‘중앙당 5’과 대상으로 신체검사를 받은 것은 1981년이었다고 한다. 선발과정에서 11촌까지 성분을 따져 보는데, 사촌인 필자는 인민군으로만 나오고 근무하는 부대는 어디인 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북한의 선거] 카테고리에 이미 설명했지만, 김정일 경호부대에 대해서 철저히 비밀에 부쳐지고 있다) 그 해에는 선발되지 않았고 그 다음해에 김정일의 교환수’로 뽑혔다고 한다.
여자가 비밀을 지킬 지 의문이다라는 김정일의 판단으로 남자 교환수를 선발했는데, 그 중 하나로 뽑힌 것이다. 1년간 남자 교환수를 운영하다가 다시 여자 교환수로 바꾸었는데 이미 1년을 근무한 남자 교환수들이 이모저모를 너무 많이 알고 있어서 고향으로 돌려 보낼 수 없었고, 필자의 사촌동생에게는 김정일의 운전수가 되는 엄청난 행운이 찾아왔다.
사촌동생이 김정일의 운전사가 된 건 1982년 이었는데 필자는 이 사실을 1986년까지 모르고 있었다. 1986년에 있던 어느 행사장에서 장군 계급장을 달고 있던 김정일의 운전사인 사촌동생이 필자를 발견하고 불러서 이야기를 나눴다. 둘은 이 사실을 1988년까지 약 2년간 숨겼으나 발견되었다. 사촌동생의 계급이 높고 최측근인 운전수라서 경호원인 필자가 제대하게 되었다.
http://www.fnkradio.com/board.php?board=qqq904&page=5&command=body&no=30&command=body&no=29
[열차를 타고 지방으로 내려오면서 본 비참한 모습]
“경호원 울타리 속에서 너무나도 사회와 동떨어져 살아왔다는 생각이 뇌리에 엄습했다.”
유리가 하나도 없어서 겨울에 비닐막을 친 기차
견인기가 부족하여 하루 18시간 정도는 예사로 연착되는 기차.
11년 만의 귀향으로 군당 간부들과 가족, 친척, 친구들이 나를 반겨 맞아 주었다. 그때 부모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고 나도 부모님을 언뜻 알아보지 못했다. 필자는 얼굴이 너무 좋아져서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했고 부모님은 얼굴이 너무 나빠져 내가 알아볼 수 없었다. 50살에도 70세의 노인처럼 허리가 휘고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모든 건물들이 하나같이 낡은 모습이었고 사람들의 모습은 내가 어릴 적보다 더 비참하였다.
http://www.fnkradio.com/board.php?board=qqq904&page=5&command=body&no=29&command=body&no=30
[제대한 뒤에야 북한을 알게 되다. 다른 세상에 대해 궁금해져 중국TV를 보고 중국 라디오를 듣기 시작하다]
“고향에 돌아온 이후 나는 안절부절못하며 돌아다녔다. 과연 이것이 내가 사는 땅이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내가 혹시나 잘못되고 나쁜 것만 보고 예단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 친구들과 주변 동네를 돌아보면서 좀 좋은 면을 찾아보려고 애쓰기도 했으나 모두 헛수고였다. 우리 고향은 중국을 지척에 두고 있어 몰래 중국 TV를 볼 수 있었다. 그때부터 중국TV를 보게 되었다. 라디오도 구해 듣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방송도 자연스럽게 듣게 되었다. 이렇게 TV를 보고 라디오를 들을수록 지금 북한이 어떠한 현실에 처해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나는 경호원 시절에는 북한 땅에 살면서도 북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제대하고 나서야 비로소 북한을 알게 되었다.
http://www.fnkradio.com/board.php?board=qqq904&page=5&command=body&no=30&command=body&no=31
[노동당 지도원 생활: 중간 조직인 군당의 부패상]
직장을 배정 받기 위해 대기하고 있으니 무산군당 조직지도부 간부 5과에서 찾아 내 생활과 사상 동향을 조사해갔다. 군당 민방위부 지도원의 직책을 주었다.
http://www.fnkradio.com/board.php?board=qqq904&page=5&command=body&no=33&command=body&no=32
1. 원칙을 들이밀면 “나는 이모 김모 부장과 인간관계를 맺고 있다”고 하면서 오히려 “원칙대로 할 테면 하라”고 큰소리를 쳤다.이것을 부장에게 보고하면 부장은 자신이 인간관계를 맺고 있는 터라 상급에 보고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처리하곤 하였다.
2. 공장과 학교, 농장을 돌아다니니 단위 초급당비서들이 작전트럭에 쌀과 부식물, 술, 담배 등으로 한 차 되게 부장에게 뇌물을 갖다 고이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실제 하부 단위에서는 엉망으로 사업을 하고 있는데 부장은 뇌물을 받고 사업성과를 올리는 것처럼 상부에 보고하였다.
http://www.fnkradio.com/board.php?board=qqq904&page=5&command=body&no=33&command=body&no=33
[중앙당 민방위 대학의 실상: 김일성 김정일 초상화 걸린 곳만 아무도 없어도 온도 관리 철저히]
1991년 4월 필자는 중앙당 민방위대학으로 가게 되었다. 김정일이 “친위대는 누구나 당 정권기관에 있어야 하니 대학을 보내라”는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다.
중앙당 민방위대학은 3년 대학 과정에 연구반 2년 등 총 5년제로 되어있다. 학생수는 1000명 정도였고 99%가 전직 당 일꾼이며 당원이 100%였다.
중앙당 민방위대학이라면 북한에서 ‘당 자금으로 운영되는’ 4개 대학 중 하나다.
하지만 대학 안에서 오직 김일성, 김정일의 사상을 배우다 보니 대학인지 아니면 김정일을 연구하는 집단인지 분간하기가 어렵다. 오늘 김정일의 사상에 대하여 연구 학습하고 비숫한 것을 내일 또 하고, 이렇게 되풀이하면서 사람들에게 ‘김정일은 신적인 존재’라는 것을 주입시킨다.
민방위대학의 물질사정은 형편없었다. 겨울에는 추워서 술을 마시고 침실에 들어와서 동복을 입은 채로 자고, 개인적으로 침실에 비닐 박막을 치고 자야했다. 그런데도 김일성과 김정일의 혁명역사를 배우는 연구실은 초상화가 손상된다고 하여 아무도 없는데도 온도관리를 철저히 했다.
http://www.fnkradio.com/board.php?board=qqq904&page=5&command=body&no=33&command=body&no=34
[남한 라디오 방송을 중독에 가깝도록 듣다. 그리고 남한으로 갈 결심을 하다]
당 간부이기 때문에 ‘보위부’나 ‘안전부’(현재는 ‘인민보안성’)의 감시를 덜 받고 방송을 듣고 볼 수 있었다.
남한 방송을 통해, 국민들이 여행을 하려면, 친척을 방문하러 간다 해도 통행증이 있어야 이동이 가능한 나라가 지구상에 북한밖에 없다는 것을 그날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 전에는 모든 나라가 다 그런 줄 알았다.
“대한민국으로 가는 것이다. 사람 사는 곳을 찾아가는 것이다.”
http://www.fnkradio.com/board.php?board=qqq904&page=5&command=body&no=34&command=body&no=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