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침대로 옮겨졌는지 기억은 없지만, 누워있던 자신의 이마에 기분 좋은 서늘한 손이 올려졌다 사라지자 가진은 잠결에 칭얼거리는 아이처럼 투덜거렸다. 그러자 바로 낮은 남자의, 아니 자신은 그녀의 남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또 다른 남편의 웃음소리가 잠시 멈추었던 가진의 이성을 억지로 깨어나게 만들었다. '꿈이 아니였군' 가진이 깨어난 것을 알아차린 남자가 그녀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조용히 앉자 몸을 사리며 눈을 자신의 몸을 덮고있는 시트를 두 손으로 틀어쥐었다. '차라리 악몽을 꾸는 것이 나을 거 같네'
[이제 눈을 뜨고 외출 준비해야 한다니까.]
눈을 뜨고 자신의 눈앞에 있을 것이 분명한 남자를 대하는 것조차 두려웠지만 가진은 억지로 눈꺼풀을 들어올려 남자의 눈을 바라보며 입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당신 진짜 누구예요? 그리고..어디에서 나타난 거지요?] 가진은 이성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히스테리는 커녕 냉정하게 답을 요구하는 자신이 대견스러울 정도였다.
[내가 말하는 것을 믿을 자신이나 있는 지 모르겠군.]
자신의 옆에 앉아있던 남자가 일어나 위에서 내려보자 짜증이 난 가진은 거칠게 시트를 걷어차며 침대에서 일어나 그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며 심술궂게 물었다. '대체 내가 이 웃기는 사태에 태연한 이유는 대체 뭐람?' 자신의 심리상태에 의심을 품으면서도 이 상황이 점점 재미있어야하는 자신의 모습에 가진은 기가 막혔지만 얼굴은 정색을 하고는 남자만 뚫어지게 쳐다 보아주었다. [믿던지 아니던지 결정하는 사람은 당신이 아니고 나라는 걸 잊은 것 같군요. 그러니 당신은 당연히 나에게 설명을 해줘야겠어요.] '흥! 그런데 어쩌면 얄밉게 말 빙빙 돌려서 사람 짜증스럽게 만드는 재주는 두 남자 모두 똑 같지?'
[흠~]
'뭐야? 대답하라니까 지금 얼굴을 왜 벌겋게 만들고 난니야?'의 눈이 향하는 곳을 따라 내려간 가진은 기겁을 했다. 그녀가 조금 전 침대에서 거칠게 일어나는 통에 가운의 앞섶이 벌어져 가슴이 유두까지 보였던 것이었다. [뭐....뭐에요? 진작에 말을 해 줘야지. 그리고 여자 몸 처음 봐요?] 홍당무처럼 빨간 얼굴을 가운을 고쳐 매는 척하며 숨기던 가진에게 한가지 새로운 사실이 떠올라 당황하고 말았다. 이 남자는 진정 그녀의 남편 태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태민이라면 그녀가 조금 전의 상태였다면 여자가 조신하지 못하다는 둥 하면서 얼굴하나 붉히지 않을 인간이었고 게다가 그 환상적인 유정의 육체를 이미 지겹도록 경험을 했으니 말이다.말하기는 비참하지만은 태민이게 있어서 가진은 성적인 환상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란 사실을 그녀 본인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당신..... 확실히 내 남편은 아니군요.]
[자 이리로 와서 봐요.]
가진은 자신이 스스로 타인이라고 인정한 남자가 내민 손을 전혀 어색함도 없이 자연스럽게 붙잡고는 남자가 데리고 가 선 화장대의 거울 앞에서 멍하니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분명 있어야 할 남자의 모습이 거울 속에 없이, 오직 가진만이 외롭게 비추어 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다시금 기절하고도 남을 사건이었지만 가진은 오히려 즐거운 비명같은 웃음이 입술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정상적인 상태라면 분명 자신이 미쳤다고 머리를 어디다 박던지 아니면 정신병원에 감금된 여자처럼 소리를 지르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가진은 이 환상 속에서나 존재할 듯한 남자를 현실로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내가 지금 미치지 않고 멀쩡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냐? 그리고 내가 지금 이 상황을 현실로 쉽게 받아들이는 이유? 물론 없.어! 동화책에서 신데렐라가 요정 대모가 나타나 호의를 베풀어주었을 때 그 이유를 물었어? 아니잖아? 여하튼 내가 해석한 동화는 그러니 현재 나는 신데렐라야.' [우와~ 정말 멋있잖아요? 그렇죠?] 거울을 보고 뒤를 돌아 자신의 뒤에 확실히 존재하고 있는 남자를 확인하기를 수차례를 거듭하고 나서 남자에게 돌아선 가진은 그제야 진짜 질문다운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어차피 내가 물어도 이해 자체가 불가능한 대답만 들을 것이 분명하니.....자~그럼 이렇게 황당한 일로 인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말해봐요.]
[지금 당장 화장하고 제일 좋은 옷을 입고 나하고 부부동반에 나가는 것! 그래서 당신 남편 바보로 만드는 일!]
9장 -(2)
[흠~ 당신에게 황금 호박마차를 만들 수 있는 재주가 없다는 것은 알겠어요.]
자신의 팔을 잡고 빌라의 계단을 내려가던 가진이, 빌라의 정문 앞에 '예약'이라는 등을 키고 대기하고 있는 모범택시를 보며 연극 조로 심각하게 평가하자 그 역시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렇다고 그렇게 실망한 얼굴을 하면 내가 슬퍼지지.] 그가 일부러 커다랗게 한숨을 쉬어 보이며 우는 표정을 지어 보이자 여자가 고운 얼굴에 어울리는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귀엽게 흘겨보는 것이 그를 정말 유쾌하게 했다. '저렇게 고운 여자를 그 자식은 왜 외롭고 슬프게 만들었을 까? 정말 미쳐 돌아가는 놈이야'
[뭐 그래도 저 빌어먹을 차보다야 골백번 나은 선택이랍니다.]
가진이 일부러 말하지 않아도 그 ' 빌어먹을 차'가 바로 문제의 '볼보'임을 그녀의 혐오감이 가득한 말투로 알 수가 있었던 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을 수밖에 없었다. [저걸 왜 그냥 두었지?]
[당신 돈을 주고 샀던 차니 내 마음대로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순간 가슴속에 차갑게 식혀 두었던 분노가 다시 고개를 들어 그 화염을 내뿜기 시작하면서 독기가 그득한 목소리로 태민에게 쏘아 붙였다. [내가 저 괴물을 볼 때마다 말라 비틀어져 가는 모습이 재미있었어요? 그래 당신은 충분히 나를 미쳐 버리게 만들고도 남을 남자야. 그렇지 않았다면 그 여자하고 놀아났던 물건을 내게 주었을 턱이 없지. 정말 당신은 저질이야!] 가진은 자신이 잡고 있던 태민의 팔을 거세게 뿌리치고 혼자 남은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남자같으니. 자기가 그렇게 말해 놓고 나에게 다시 물어보는 저의가 대체 뭐야? 이미 죽은 물고기를 뜨거운 기름에 던지고 나서 지글거리며 튀겨지는 모습을 보고는 - 아~ 이제 진짜 죽었구나- 하는 심보잖아.' 태민을 뒤에 남겨주고 남아있는 계단을 내려가면서 속으로 욕을 퍼붓던 가진은 빌라의 정문이 보이기 시작한 계단 끝에서야 자신의 뒤에서 마땅히 들려야 할 발자국소리가 없다는 사실에 몸이 경직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는 태민이 아니란 현실이 가진을 빌라의 정문을 헤집고 들어오는 겨울의 차가운 공기처럼 얼어붙게 만들고야 말았다. [내가 미쳤나 봐. ] 아직도 등뒤에서 들리지 않는 발소리때문에 자신이 미워졌다. 그랬다. 아직까지도 그는 가진에게 있어서 태민이면서 동시에 전혀 다른 존재였다.
'왜 내 가슴이 이렇게 아픈 걸까? '
그는 가진이 앙칼지게 내뱉은 단어들이 자신의 가슴에 깨어진 유리조각처럼 박혀 버리는 것에 당황스러웠다. 자신을 이곳에, 그녀에게 보낸 존재들 중 하나가 '너는 여자의 남편이란 남자의 대역'이라고 말했을 때에는 그것이 그의 임무라고만 생각했던 그였지만, 지금 그의 가슴은 너무나 쓰리고 아퍼서 그냥 사라지고만 싶었다. [하지만....... 너는 그녀를 첫눈에 사랑했잖아.] 그는 슬픈 미소를 지으며 자조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한 얼굴에 억지로 환한 미소를 만들어 보이며 경쾌한 구두소리를 내며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를 이곳에 보낸 당신들을 저주해야만 하나 아니면 고마워해야 할까? 나도 그걸 모르겠어' 그런 그의 눈앞에 어깨를 늘어뜨린 가진이 보였다.
[미안해요. 당신이 남편으로 보였어요.]
'아, 그랬겠지......나는 당신에게 그런 존재겠지. 그래서 나는 가슴이 너무 아파.' 자신의 가슴이 찢어져도 그는 그 사실에 대해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농담을 할 수밖에 없었다. [뭐 그걸 가지고 미안해하고 그래. 나는 상관없어. 그나저나 당신이 원하면 저 차를 내가 깡통따개로 조각을 내 줄 수도 있다구. 어때 저걸 조각을 내서 엿이나 먹을 까?]
'이 남자는 정말 현실에는 존재할 수 없는 사람인가 보다. 그러니 저렇게 웃을 수가 있겠지.' [기왕이면 그 '엿' 내 남편에게 주고 싶은 데, 어때요?] '엿'이라는 단어를 묘한 억양으로 말하며 그에게 슬쩍 미소를 지어 보인 가진이지만 언뜻 지나가듯이 보였던 남자의 슬픈 미소에 가슴이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자신이 타인에게서 상처를 받을 수 있듯이 자신의 생각 없는 말 한마디가 남에게 깊은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사실에 자신이 미워졌고 지금 자신의 앞에서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눈으로 미소를 짓는 그가 얄미워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마 그 엿 다 먹으려면 늙어 죽을 때까지 먹어야 할거야. 자, 이제 우리도 출발을 해야지?] 그는 가진의 손을 잡아 자신의 팔에 다시 얹고는 빌라의 밖에서 대기중인 택시를 향해 걸어갔다.
9장 -(3)
[안녕하십니까?]
택시가 호텔의 정문 앞에 정차하기가 무섭게 문을 열며 인사를 건네는 직원에게 미소를 지으며 그와 같이 내린 가진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값비싼 밍크코트의 윤기 나는 검은 모피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크게 심호홉을 했다. '내가 미쳤지. 하지만 이판사판 아니겠어?' 왠지 자신이 몰래 바람을 피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심장이 당장에라도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이 아닐까 걱정스러워 자신의 팔 대신에 손을 잡아 깍지를 끼며 즐거운 미소를 지어보이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나 지금 바람피러 다니는 여자같은 생각이 든다는 거 알아요?]
[오호? 남편하고 바람나는 여자도 있던 가?]
[문제는 당신이 내 남편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점점 내 이성이 나에게 정신차리라고 한다구요.]
[저럼, 그 이성이란 정신없는 놈에게 지금 자기가 여기서 나와서 설칠 때가 아니라고 전해주라구.] 자동회전문을 지나 대리석 바닥을 깐 로비를 경쾌한 구두소리를 내며 걸으면서 그는 속으로 만세를 외치며 뛰어 다니고 있었다. '내가 남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니..' 물론 자신을 보낸 존재가 알면 그렇게 좋아할 일은 아니지만 그는 정말 기뻤다. 언제나 거울 속에서 지켜만 보던 여인을 그 평면적인 거울에서 벗어나 만나고 만지고 있는 이 순간 순간이 그는 너무나 행복했다. '이 행복을 영원하게 해달라면 그것은 욕심이겠지?'
로비를 지나 모임이 있는 장소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자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가 화려하고 아름다운 장식을 자랑하며 서있는 것을 본 가진은 그제야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 생각이 나자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올해 내가 무슨 착한 일을 했는 지는 몰라도 정말 끝내주는 선물을 받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네.]
[이럴 줄 알았으면 커다랗고 붉은 리본을 묶고 나타나는 건데!]
[하긴 당신이 입고 온 그 양복도 멋지지만, 기왕이면...... 흠~~~~ 영화에서처럼 홀딱 벗은 몸에 리본만 달고 나왔다면 금상첨화였을 걸요?] '대체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말을 끝내고 나니 얼굴이 저절로 홍당무처럼 붉어져 버린 가진은 고개를 푹 숙이고는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에스켈레이터의 계단을 노려보기만 하던 그녀의 귀에 낮게 울리는 남자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정말 즐거웠다. 그러고 보니 결혼 전, 태민과 데이트때 조차도 이렇게 유쾌한 시간을 보낸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했다.
[
그렇게 아래만 쳐다보다 에스컬레이터 끝에서 앞으로 보기좋게 넘어지고 말걸? 하긴 그러면 내가 당신을 핑계삼아 앉을 수 있으니 좋기는 하지만.]
벌써 지하에 위치한 그랜드 볼룸이 있는 층에 도착한 가진은 얼른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 주위를 살피면서 그와 함께 홀의 입구로 발을 옮겼다. 혹시라도 자신이나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까 걱정스러워 팔에 소름이 돋았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며 자신의 손과 깍지를 낀 남자의 손을 힘껏 움켜쥐었고 그런 그녀를 안심이라도 시키려는 듯 그 역시 그녀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고마워요.]
[천만에 말씀을, 부인] 평상시 낮에는 결혼식장으로 사용되는 홀이라 그런지 상당히 넓은 내부를 눈으로 대충 살피던 그는 어느새 자신들의 앞에서 좌석을 안내하는 호텔직원에게 초대장과 이름을 말해주고는 부드럽게 가진을 에스코트하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이미 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자리에 앉아 간단한 음료나 와인을 기울이며 이야기하는 모습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불안해 졌다. '혹시라도 실수하는 일이 없어야 하는 데.....' 물론 그가 언제나 거울로 알고 있는 태민의 모든 것을 파악하고는 있다지만 걱정이 앞서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 자신은 언제나 거울 앞에 마주섰던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의 태민과는 전혀 다른 존재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MIRROR 제 9장
9장 -(1)
언제 침대로 옮겨졌는지 기억은 없지만, 누워있던 자신의 이마에 기분 좋은 서늘한 손이 올려졌다 사라지자 가진은 잠결에 칭얼거리는 아이처럼 투덜거렸다. 그러자 바로 낮은 남자의, 아니 자신은 그녀의 남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또 다른 남편의 웃음소리가 잠시 멈추었던 가진의 이성을 억지로 깨어나게 만들었다.
'꿈이 아니였군'
가진이 깨어난 것을 알아차린 남자가 그녀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조용히 앉자 몸을 사리며 눈을 자신의 몸을 덮고있는 시트를 두 손으로 틀어쥐었다.
'차라리 악몽을 꾸는 것이 나을 거 같네'
[이제 눈을 뜨고 외출 준비해야 한다니까.]
눈을 뜨고 자신의 눈앞에 있을 것이 분명한 남자를 대하는 것조차 두려웠지만 가진은 억지로 눈꺼풀을 들어올려 남자의 눈을 바라보며 입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당신 진짜 누구예요? 그리고..어디에서 나타난 거지요?]
가진은 이성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히스테리는 커녕 냉정하게 답을 요구하는 자신이 대견스러울 정도였다.
[내가 말하는 것을 믿을 자신이나 있는 지 모르겠군.]
자신의 옆에 앉아있던 남자가 일어나 위에서 내려보자 짜증이 난 가진은 거칠게 시트를 걷어차며 침대에서 일어나 그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며 심술궂게 물었다.
'대체 내가 이 웃기는 사태에 태연한 이유는 대체 뭐람?'
자신의 심리상태에 의심을 품으면서도 이 상황이 점점 재미있어야하는 자신의 모습에 가진은 기가 막혔지만 얼굴은 정색을 하고는 남자만 뚫어지게 쳐다 보아주었다.
[믿던지 아니던지 결정하는 사람은 당신이 아니고 나라는 걸 잊은 것 같군요. 그러니 당신은 당연히 나에게 설명을 해줘야겠어요.]
'흥! 그런데 어쩌면 얄밉게 말 빙빙 돌려서 사람 짜증스럽게 만드는 재주는 두 남자 모두 똑 같지?'
[흠~]
'뭐야? 대답하라니까 지금 얼굴을 왜 벌겋게 만들고 난니야?'의 눈이 향하는 곳을 따라 내려간 가진은 기겁을 했다. 그녀가 조금 전 침대에서 거칠게 일어나는 통에 가운의 앞섶이 벌어져 가슴이 유두까지 보였던 것이었다.
[뭐....뭐에요? 진작에 말을 해 줘야지. 그리고 여자 몸 처음 봐요?]
홍당무처럼 빨간 얼굴을 가운을 고쳐 매는 척하며 숨기던 가진에게 한가지 새로운 사실이 떠올라 당황하고 말았다.
이 남자는 진정 그녀의 남편 태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태민이라면 그녀가 조금 전의 상태였다면 여자가 조신하지 못하다는 둥 하면서 얼굴하나 붉히지 않을 인간이었고 게다가 그 환상적인 유정의 육체를 이미 지겹도록 경험을 했으니 말이다.말하기는 비참하지만은 태민이게 있어서 가진은 성적인 환상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란 사실을 그녀 본인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당신..... 확실히 내 남편은 아니군요.]
[자 이리로 와서 봐요.]
가진은 자신이 스스로 타인이라고 인정한 남자가 내민 손을 전혀 어색함도 없이 자연스럽게 붙잡고는 남자가 데리고 가 선 화장대의 거울 앞에서 멍하니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분명 있어야 할 남자의 모습이 거울 속에 없이, 오직 가진만이 외롭게 비추어 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다시금 기절하고도 남을 사건이었지만 가진은 오히려 즐거운 비명같은 웃음이 입술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정상적인 상태라면 분명 자신이 미쳤다고 머리를 어디다 박던지 아니면 정신병원에 감금된 여자처럼 소리를 지르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가진은 이 환상 속에서나 존재할 듯한 남자를 현실로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내가 지금 미치지 않고 멀쩡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냐? 그리고 내가 지금 이 상황을 현실로 쉽게 받아들이는 이유? 물론 없.어! 동화책에서 신데렐라가 요정 대모가 나타나 호의를 베풀어주었을 때 그 이유를 물었어? 아니잖아? 여하튼 내가 해석한 동화는 그러니 현재 나는 신데렐라야.'
[우와~ 정말 멋있잖아요? 그렇죠?]
거울을 보고 뒤를 돌아 자신의 뒤에 확실히 존재하고 있는 남자를 확인하기를 수차례를 거듭하고 나서 남자에게 돌아선 가진은 그제야 진짜 질문다운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어차피 내가 물어도 이해 자체가 불가능한 대답만 들을 것이 분명하니.....자~그럼 이렇게 황당한 일로 인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말해봐요.]
[지금 당장 화장하고 제일 좋은 옷을 입고 나하고 부부동반에 나가는 것! 그래서 당신 남편 바보로 만드는 일!]
9장 -(2)
[흠~ 당신에게 황금 호박마차를 만들 수 있는 재주가 없다는 것은 알겠어요.]
자신의 팔을 잡고 빌라의 계단을 내려가던 가진이, 빌라의 정문 앞에 '예약'이라는 등을 키고 대기하고 있는 모범택시를 보며 연극 조로 심각하게 평가하자 그 역시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렇다고 그렇게 실망한 얼굴을 하면 내가 슬퍼지지.]
그가 일부러 커다랗게 한숨을 쉬어 보이며 우는 표정을 지어 보이자 여자가 고운 얼굴에 어울리는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귀엽게 흘겨보는 것이 그를 정말 유쾌하게 했다.
'저렇게 고운 여자를 그 자식은 왜 외롭고 슬프게 만들었을 까? 정말 미쳐 돌아가는 놈이야'
[뭐 그래도 저 빌어먹을 차보다야 골백번 나은 선택이랍니다.]
가진이 일부러 말하지 않아도 그 ' 빌어먹을 차'가 바로 문제의 '볼보'임을 그녀의 혐오감이 가득한 말투로 알 수가 있었던 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을 수밖에 없었다.
[저걸 왜 그냥 두었지?]
[당신 돈을 주고 샀던 차니 내 마음대로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순간 가슴속에 차갑게 식혀 두었던 분노가 다시 고개를 들어 그 화염을 내뿜기 시작하면서 독기가 그득한 목소리로 태민에게 쏘아 붙였다.
[내가 저 괴물을 볼 때마다 말라 비틀어져 가는 모습이 재미있었어요? 그래 당신은 충분히 나를 미쳐 버리게 만들고도 남을 남자야. 그렇지 않았다면 그 여자하고 놀아났던 물건을 내게 주었을 턱이 없지. 정말 당신은 저질이야!]
가진은 자신이 잡고 있던 태민의 팔을 거세게 뿌리치고 혼자 남은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남자같으니. 자기가 그렇게 말해 놓고 나에게 다시 물어보는 저의가 대체 뭐야? 이미 죽은 물고기를 뜨거운 기름에 던지고 나서 지글거리며 튀겨지는 모습을 보고는 - 아~ 이제 진짜 죽었구나- 하는 심보잖아.'
태민을 뒤에 남겨주고 남아있는 계단을 내려가면서 속으로 욕을 퍼붓던 가진은 빌라의 정문이 보이기 시작한 계단 끝에서야 자신의 뒤에서 마땅히 들려야 할 발자국소리가 없다는 사실에 몸이 경직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는 태민이 아니란 현실이 가진을 빌라의 정문을 헤집고 들어오는 겨울의 차가운 공기처럼 얼어붙게 만들고야 말았다.
[내가 미쳤나 봐. ]
아직도 등뒤에서 들리지 않는 발소리때문에 자신이 미워졌다.
그랬다. 아직까지도 그는 가진에게 있어서 태민이면서 동시에 전혀 다른 존재였다.
'왜 내 가슴이 이렇게 아픈 걸까? '
그는 가진이 앙칼지게 내뱉은 단어들이 자신의 가슴에 깨어진 유리조각처럼 박혀 버리는 것에 당황스러웠다.
자신을 이곳에, 그녀에게 보낸 존재들 중 하나가 '너는 여자의 남편이란 남자의 대역'이라고 말했을 때에는 그것이 그의 임무라고만 생각했던 그였지만, 지금 그의 가슴은 너무나 쓰리고 아퍼서 그냥 사라지고만 싶었다.
[하지만....... 너는 그녀를 첫눈에 사랑했잖아.]
그는 슬픈 미소를 지으며 자조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한 얼굴에 억지로 환한 미소를 만들어 보이며 경쾌한 구두소리를 내며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를 이곳에 보낸 당신들을 저주해야만 하나 아니면 고마워해야 할까? 나도 그걸 모르겠어'
그런 그의 눈앞에 어깨를 늘어뜨린 가진이 보였다.
[미안해요. 당신이 남편으로 보였어요.]
'아, 그랬겠지......나는 당신에게 그런 존재겠지. 그래서 나는 가슴이 너무 아파.'
자신의 가슴이 찢어져도 그는 그 사실에 대해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농담을 할 수밖에 없었다.
[뭐 그걸 가지고 미안해하고 그래. 나는 상관없어. 그나저나 당신이 원하면 저 차를 내가 깡통따개로 조각을 내 줄 수도 있다구. 어때 저걸 조각을 내서 엿이나 먹을 까?]
'이 남자는 정말 현실에는 존재할 수 없는 사람인가 보다. 그러니 저렇게 웃을 수가 있겠지.'
[기왕이면 그 '엿' 내 남편에게 주고 싶은 데, 어때요?]
'엿'이라는 단어를 묘한 억양으로 말하며 그에게 슬쩍 미소를 지어 보인 가진이지만 언뜻 지나가듯이 보였던 남자의 슬픈 미소에 가슴이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자신이 타인에게서 상처를 받을 수 있듯이 자신의 생각 없는 말 한마디가 남에게 깊은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사실에 자신이 미워졌고 지금 자신의 앞에서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눈으로 미소를 짓는 그가 얄미워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마 그 엿 다 먹으려면 늙어 죽을 때까지 먹어야 할거야. 자, 이제 우리도 출발을 해야지?]
그는 가진의 손을 잡아 자신의 팔에 다시 얹고는 빌라의 밖에서 대기중인 택시를 향해 걸어갔다.
9장 -(3)
[안녕하십니까?]
택시가 호텔의 정문 앞에 정차하기가 무섭게 문을 열며 인사를 건네는 직원에게 미소를 지으며 그와 같이 내린 가진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값비싼 밍크코트의 윤기 나는 검은 모피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크게 심호홉을 했다.
'내가 미쳤지. 하지만 이판사판 아니겠어?'
왠지 자신이 몰래 바람을 피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심장이 당장에라도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이 아닐까 걱정스러워 자신의 팔 대신에 손을 잡아 깍지를 끼며 즐거운 미소를 지어보이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나 지금 바람피러 다니는 여자같은 생각이 든다는 거 알아요?]
[오호? 남편하고 바람나는 여자도 있던 가?]
[문제는 당신이 내 남편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점점 내 이성이 나에게 정신차리라고 한다구요.]
[저럼, 그 이성이란 정신없는 놈에게 지금 자기가 여기서 나와서 설칠 때가 아니라고 전해주라구.]
자동회전문을 지나 대리석 바닥을 깐 로비를 경쾌한 구두소리를 내며 걸으면서 그는 속으로 만세를 외치며 뛰어 다니고 있었다.
'내가 남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니..'
물론 자신을 보낸 존재가 알면 그렇게 좋아할 일은 아니지만 그는 정말 기뻤다.
언제나 거울 속에서 지켜만 보던 여인을 그 평면적인 거울에서 벗어나 만나고 만지고 있는 이 순간 순간이 그는 너무나 행복했다.
'이 행복을 영원하게 해달라면 그것은 욕심이겠지?'
로비를 지나 모임이 있는 장소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자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가 화려하고 아름다운 장식을 자랑하며 서있는 것을 본 가진은 그제야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 생각이 나자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올해 내가 무슨 착한 일을 했는 지는 몰라도 정말 끝내주는 선물을 받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네.]
[이럴 줄 알았으면 커다랗고 붉은 리본을 묶고 나타나는 건데!]
[하긴 당신이 입고 온 그 양복도 멋지지만, 기왕이면...... 흠~~~~ 영화에서처럼 홀딱 벗은 몸에 리본만 달고 나왔다면 금상첨화였을 걸요?]
'대체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말을 끝내고 나니 얼굴이 저절로 홍당무처럼 붉어져 버린 가진은 고개를 푹 숙이고는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에스켈레이터의 계단을 노려보기만 하던 그녀의 귀에 낮게 울리는 남자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정말 즐거웠다. 그러고 보니 결혼 전, 태민과 데이트때 조차도 이렇게 유쾌한 시간을 보낸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했다.
[
그렇게 아래만 쳐다보다 에스컬레이터 끝에서 앞으로 보기좋게 넘어지고 말걸? 하긴 그러면 내가 당신을 핑계삼아 앉을 수 있으니 좋기는 하지만.]
벌써 지하에 위치한 그랜드 볼룸이 있는 층에 도착한 가진은 얼른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 주위를 살피면서 그와 함께 홀의 입구로 발을 옮겼다.
혹시라도 자신이나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까 걱정스러워 팔에 소름이 돋았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며 자신의 손과 깍지를 낀 남자의 손을 힘껏 움켜쥐었고 그런 그녀를 안심이라도 시키려는 듯 그 역시 그녀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고마워요.]
[천만에 말씀을, 부인]
평상시 낮에는 결혼식장으로 사용되는 홀이라 그런지 상당히 넓은 내부를 눈으로 대충 살피던 그는 어느새 자신들의 앞에서 좌석을 안내하는 호텔직원에게 초대장과 이름을 말해주고는 부드럽게 가진을 에스코트하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이미 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자리에 앉아 간단한 음료나 와인을 기울이며 이야기하는 모습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불안해 졌다.
'혹시라도 실수하는 일이 없어야 하는 데.....'
물론 그가 언제나 거울로 알고 있는 태민의 모든 것을 파악하고는 있다지만 걱정이 앞서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 자신은 언제나 거울 앞에 마주섰던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의 태민과는 전혀 다른 존재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