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탱이 목소리에 슬며시 섞인 짜증기, 더불어 아까부터 꾹 눌러참았던 야기의 짜증도 순식간에 배로 증폭했다. 야기는 킥킥거리며 웃는 친구 놈들을 한번 쫙 째려주고 새어 나오는 한숨을 간신히 눌러 참았다.
몇 년째 반복되는 상황인데도 그렇게 재밌냐? 아니, 그냥 저 녀석 이름이 ‘이자, 야자, 기자, 합쳐서 이야기예요’ 라고 말해주면 어디가 덧나냐? 알면서 킥킥대는 놈들이나 못 알아먹고 자꾸 되묻는 담탱이나 어째 해마다 변하지를 않냐 그래.
“밤 야(夜), 기운 기(氣). 야기가 제 이름입니다.”
“이.야.기?”
황당한 표정으로 담임이 반문하자 참고 있던 녀석들의 웃음소리가 터지면서 순식간에 반 전체가 웃음도가니가 되어 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남녀공학이라 신경 쓰이는데 웃음소리가 이중창으로 들려오니 죽을 맛이다. 첫날부터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나중에 웃긴애라고 기억되면 어쩌냐고요.
소근소근 ‘그럼 이름이 밤기운이야? 거 노골적이네’ 따위의 농담이 오가고 여기저기 웃음소리가 그칠 줄을 모른다.
3년 내내, 아니지, 초등학교때부터 지금까지 야기가 기억하는 해마다 있어왔던 일이니 이제 와서 새삼 마음 상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지만 썩 유쾌하진 않다. 세상엔 아무리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일들이 있는데 이게 바로 그런 경우라고 야기는 생각했다.
게다가 야기는 체질적으로 남들의 시선에 약했다. 자의식과잉인지도 모르지만 늘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야기로서는 조금이라도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쪽이 편했다. 주목을 끈다거나 하는 일은 딱 질색인데 이렇게 일년에 한번은 연례행사처럼 치르게 된다. 다행히 친구녀석들의 존재감이 강해서 그 안에 묻히고 나면 대부분 잊어버리고 말지만.
반쯤 포기한 심정으로 시선을 돌리던 야기는 반에서 유일하게 웃지않는 사람을 발견했다. 창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마치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이 유리되어 있는 그녀. 바로 옆에서 폭탄이 터져도 모를 것 같은 무심한 -아니 그건 어쩌면 다른 무언가에 강렬하게 사로잡혀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얼굴로 그녀는 짧은 한숨을 불어내고 있었다. 한 동안 야기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이름은 이준원.
사실 야기에게는 그때가 그녀를 가장 가깝게 바라본 순간이었다.
준원이는 참 특이한 아이였다. 야기는 홀린듯이 준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사건이 있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날 이후 야기는 확실하게 준원에게 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작은 늘 그렇듯 일상적인 아침에 일어났다. 준원은 그날도 창쪽으로 시선을 주었고 야기는 이유도 모른 채 그녀를 훔쳐보고 있었다. 일주일에 한번 자리를 바꾸는 월요일이라 소란스러웠던 걸로 기억한다. 담임의 강압적인 명령에 입을 삐죽이면서도 아직 아이들인 학생들은 별다른 불만 없이 자신의 자리를 찾아 칠판에 커다랗게 그려진 그림을 바라보았다. 오자마자 찾은 야기의 자리는 운 좋게도 준원과 줄을 뗀 대각선의 뒷자리였다. 속으로 럭키를 외치며 처음으로 담임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때였다.
“야! 너 진짜…”
앙칼진 여자애의 목소리에 야기는 깜짝 놀라 위장용으로 펴던 책을 떨어트렸다. 정적과 함께 시선이 집중되었다.
“니가 그렇게 잘났어? 뭔데 그 따위로 재수없게 굴어?”
꽤나 귀엽다고 평판이 자자한 유리였다. 유별나게 성격이 나쁘지도 않은 아이였던 걸로 기억한다. 야기는 1학년때 한 반이었던 유리를 돌이켜보며 의구심이 들었다. 분명히 유리는 자신의 짝인 준원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여자애들의 싸움이라 그런지 교실 전체의 눈이 쏠렸다.
“왜 그런 말을 들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
담담한 어조로 준원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유리를 바라보았다. 말 걸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대꾸한게 그렇게 화를 낼 일인가? 준원은 시시콜콜 이야기를 붙이고 수다를 떠는 여자애들과 친하게 지낼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런 자신에게 시간 낭비하지 말고 다른 애들이랑 친하게 지내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에 말해 준 것 뿐인데. 왜 여기서 잘났느니 못났느니 하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이해할수 없었다.
“뭐 이딴게 다 있어?”
유리는 분노에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붉게 물든 볼을 하고 주먹을 움켜쥔 채 준원을 노려보는 유리에게 동정의 시선이 모아졌다.
“어휴, 쟤 또 저러네.”
“그러게 말야. 졸라 재수없어.”
“씨발, 뭐가 그렇게 잘 났는지… 우리 같은 쌍것들 하곤 말도 붙이기 싫다는 거야?”
여기저기서 터져나온 비난에도 준원은 끄떡하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유리에게도 관심이 없는듯 슥 고개를 돌려 창을 향했다. 자신을 완전히 무시하는 처사에 유리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손을 날렸다.
“엇차, 그만둬.”
“미진아!”
간발의 차이로 손을 낚아챈 키가 큰 여학생에게 유리는 비명과도 같은 소리를 지르면서 와락 달려들었다. 미진이는 유리의 단짝으로 보호자 같은 면이 있었다. 유리는 미진에게 매달려 아이처럼 흐느끼고 말았다.
“괜찮아, 괜찮아. 자, 나가자.”
유리의 등을 토닥이며 일으켜 세운 미진은 조금 미간을 세워 준원을 노려보았다.
“너 말야, 계속 그런 식이면 서로 피곤하지 않냐? 그렇게 다른 사람이랑 섞이는게 싫으면 학교부터 그만두지 그래.”
“피곤하게 하는 건 그 쪽인 것 같은데. 난 그저 혼자 있고 싶을 뿐이야. 그러니까 그냥 내버려 둬.”
잠깐 동안 미진과 눈을 마주친 준원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미진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유리를 부축해 교실 밖으로 나갔다. 한동안 정적이 이어지다가 소란스러워진 교실에는 소근소근 준원에 대한 여러 일화가 떠돌았다.
중학교때 깡패였다는 이야기에서부터 애를 뗐다는 소리까지… 하나같이 악의적이고 확인되지 않은 스캔들이었다. 그나마 신빙성이 있는 건 단 한가지, 별로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친구도 어렸을 때부터의 소꿉친구말고는 사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가만히 떠도는 이야기들을 듣던 야기는 다시 한번 등에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 이래서야 어디 말이라도 한번 붙일 수 있을까. 그러면서 자각한 것은 안타까움이었다. 그리고 그때 야기는 자신이 준원에게 반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학기초에 있었던 그 사건으로 준원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하루에 한번 입을 여는 것도 보기 힘들었으니 그녀의 의도대로 된 것인지도 몰랐다. ‘따’ 와는 달랐다. 준원이 그런 것을 겁내는 것 같지도 않았지만 그렇게 반발했던 유리조차도 시간이 지나면서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의 시선으로 준원을 비껴갔다. 반의 대부분이 그랬다. 단 한 사람, 민영을 제외하고는 준원에게 말을 거는 사람도, 준원이 대꾸하는 사람도 없었다.
야기는 내내 준원을 바라보았다. 반년이 지나도록 한번도 눈을 떼지 않았다. 숨기듯 고개를 수그리고 책을 보는 척하면서 살피는 데도 도가 텄다. 다행히 야기에게 주목하는 이가 없는 데다가 준원 자신이 철저하게 스스로의 장벽 안에 들어앉아서인지 어느 누구도 야기의 은밀한 시선을 눈치채는 사람은 없었다.
“야, 정유리 어떠냐?”
“귀엽지. 저 정도면 랭크A는 맡아놓은 당상이야.”
“응, 게다가 애교는 또 어떻고… 아주 살살 녹더라.”
더위에 지친 고3들은 해파리처럼 흐물흐물 거리며 시원한 그늘을 찾아 드러누웠다. 등에 와닿은 화학실 바닥에선 그럭저럭 냉기가 올라와서 점심시간이면 늘 이 자리를 차지하려는 다툼이 치열했다. 다행히 야기의 반은 화학실과 맞닿아 있었고 야기의 친구들은 발이 빨랐다. 덕택에 늘 처지면서도 야기는 그 틈바구니에 끼어들어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이렇게 더워서는 머리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아예 점심시간의 공부 따위는 포기하고 조금 쉬어두는 것이 다음에 있을 수업을 위해서는 훨씬 나았다. 그러나 역시 고3도 피끓는 청춘. 모이면 사내녀석들이라고 수다가 없을까. 야기 본인의 의견으로는 여자들보다 더하면 더 했지 못하지는 않다, 라는 게 결론이었다.
그리고 오늘도 시원한 그늘에 등을 붙이고 누운 녀석들의 입에서는 당연한 듯이 반 여자애들의 품평이 시작되었다. 늘 첫번째로 오르는 것은 정유리. 귀엽고 화사한 얼굴에 조그마한 몸이 남자들의 눈에는 인형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한번 꼭 껴안아보고 싶어. 정유리~”
“응큼한 놈.”
“야, 나만 그러냐? 너도 그렇다며?”
“에라이, 너 같은 놈과 이 고매하신 인격자를 어디에 같이 놓냐. 난 어디까지나 여동생으로서 말이지.”
“지랄. 여동생이라면 그야말로 훌륭한 변태다, 새꺄.”
“무슨 그런 섭한 말을. 난 위대한 변태다, 크하하하하.”
“응, 이제 완전히 돌았구나.”
“젠장, 날이 이렇게 더우니 안 돌고 배기냐.”
“우리 학교는 에어컨 안 해주냐?”
“씹탱, 니 아부지 돈 많으면 기부 좀 하라 그래라.”
“미친놈. 그런 돈 있었으면 나 벌써 해외로 나갔다. 거기는 수능도 없고 여자애들도 많은 천국일 건데.”
“앉으나서나 그 생각뿐이냐, 넌.”
“그려, 나 욕구불만이여. 워쩔텨. 너라도 한몸 희생해 볼텨?”
“나 오늘 아침에 샤워했거든? 하해와 같은 은혜를 베풀어 너에게 나의 순결을 바치마.”
“우웩, 쏠려~ 저리 꺼져 새꺄!”
아웅다웅하는 녀석들의 가벼운 말장난을 들으며 야기는 슬쩍 웃었다. 대화에 끼지 않아도 야기는 패거리의 한명이었고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였지만 서로를 친구라고 인정하는 사이였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야기는 그런 자신의 위치가 편했다.
“근데 말야. 이준원도 은근히 괜찮지 않냐?”
순간 야기는 숨을 멈췄다. 준원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처음부터 재수없는 애, 라고 찍힌 덕에 남자애들도 준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신경을 끄고 지내왔다. 더구나 늘 책상이나 창을 향하는 바람에 준원의 얼굴을 제대로 본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야기는 자신 외에 누군가가 준원을 발견했다는 사실에 놀랐고 충격을 받았다. 싸늘하게 피가 식는 느낌이었다. 머리 한 구석이 하얗게 비워져 현기증이 났다.
“오오, 괜찮지. 성깔도 있고… 건방진 여자들은 나름대로 매력이 있다니까.”
“걘 건방진 것도 아니고 그냥 귀찮아 하는 거 같던데.”
“응, 솔직히 기집애들 몰려다니는 거 보면 가끔 질릴 때가 있거든.”
“맞아, 화장실에도 우르르, 매점에도 우르르. 그런 면에서 보면 이준원은 특이 케이스야.”
“아주 딱 부러지더라. 속이 다 시원하더라니까.”
“이쁘면 모든 것이 다 용서되는 법이지. 커커커커.”
제멋대로 지껄여대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야기는 한마디 말도 하지 못했다. 가슴 속은 화르르 타오르는 불로 뜨거웠지만 준원이에 관해 무슨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자신에게는 불가능했다. 그저 벙어리 냉가슴 앓듯 하고픈 말을 삼키고 침묵하는 것 외에 야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아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다만 친구들의 관심이 다른 애한테 쏠리기를 바라는밖에. 무력하고 소심한 자신에게 신물이 넘어올 것 같았지만 가만히 미소를 짓고 외면하는 수 외에 야기에게 다른 선택은 없었다. 그리고 다행히 화제는 임신으로 휴가중인 미술선생님에게로 넘어갔다.
그렇게 1년이 지나갔다. 더위에 지쳐 개처럼 혀를 빼어 물었던 것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이내 찬바람이 불고 곧 추위가 찾아왔다. 그리고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야기는 그 해 대학에 떨어졌다. 일년 내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으니 공부했을 리는 당연히 없고 야기의 머리는 공부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좋은 게 아니었다. 하긴. 답안지에조차 준원의 이름을 써넣었을 정도니 이미 합격은 그른 일이었다. 그에 반해 그녀는 손꼽히는 여자대학에 합격했다. 볼 때마다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으니까 꽤 공부를 잘했었던 모양이다.
대학에 떨어졌다는 결과를 듣자마자 아버지는 뭔가 말씀하고 싶으신 눈치였지만 야기는 모른척 했다. 오기라면 오기일지도 모르지만 자신의 힘으로 그녀와 대등해지고 싶었다.
은근히 물어오는 기부금 입학 이야기는 야기가 재수를 결심하고 나서 조용히 사라졌다. 솔직히 천재나 수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돌머리도 아니다. 야기는 재수를 결심하고 정말 죽어라 공부했다. 과목당 몇백짜리 과외까지 받아가며 미친듯이 들이 판 결과 다음해 당당하게 대학생의 딱지를 이마에 붙였다. 물론 그녀와 비슷한 레벨의 대학이었다. 생전 그렇게 노력해 본 것은 처음이었다. 성취감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역시 그녀에게 꿇리지 않겠다는 집념의 결과였다. 비록 그녀와는 연락도 끊기고 접점도 사라졌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그렇게라도 해서 준원이에게 가까이 가겠다는 고집이 남아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것은 고집 따위가 아니다. 그 바보 같은 감정은 미련이었다.
하지만 그런 이유만으로 들어간 대학이 즐거울 리가 없었다. 야기는 입학식에 들어선 순간 자신이 찾는 것이 그곳에 없음을 새삼 깨달아야 했다. 그제서야 야기는 왜 그녀와 같이 있었던 시간 동안에 그녀와 작은 끈조차 잇지 못했는지 후회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그녀를 그리워할 거면서 왜 그땐 그런 사실들을 들키기 싫었을까. 그런 것은 자존심 같은 것도 아니다. 그저 사랑 받는데 익숙해진 자만심일 뿐이었다. 손 내밀어 원하는 것을 붙잡을 용기조차 없이 그저 내밀어진 것만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어린애에 지나지 않았다. 후회하고 또 후회했지만 다시 한번 그 시간이 돌아온다 하더라도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을지 모른다. 생전 처음으로 야기는 자신의 비겁함이 지긋지긋하게 싫어졌다.
학교에 나가지 않은지도 벌써 한달이 넘었다. 입학하고 바로이니 학교에 간 날을 세는 것이 빠를까. 고등학교때와 마찬가지로 대학에도 야기의 자리는 없었다. 가뜩이나 어울림에는 소질이 없는 야기라 그의 존재는 처음부터 잊혀져 있었다. 나서서 관계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겁이 났다. 그래서 도망치듯 등을 돌려 버린 것이다.
완벽하게 무의욕인 상태로 날들이 지나갔다. 하루하루 지나가는 날을 멍한 머리로 관조했다. 시간은 정말 더럽게도 느리게 흘렀다.
- 아임게이(i'm gay) - #1
* 1편 입니다. 주말에 밤을 새워서 월요일에 꼭 꼭 올리겠습니다!
CHAPTER 1. 소년, 소녀를 훔쳐보다
“이야기입니다.”
“뭔 얘기?”
“아니, 그게 아니고… 저기, 이야기입니다.”
“뭔 이야기…”
“그러니까, 제 이름이 이야기라구요.”
“너, 대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야?”
담탱이 목소리에 슬며시 섞인 짜증기, 더불어 아까부터 꾹 눌러참았던 야기의 짜증도 순식간에 배로 증폭했다. 야기는 킥킥거리며 웃는 친구 놈들을 한번 쫙 째려주고 새어 나오는 한숨을 간신히 눌러 참았다.
몇 년째 반복되는 상황인데도 그렇게 재밌냐? 아니, 그냥 저 녀석 이름이 ‘이자, 야자, 기자, 합쳐서 이야기예요’ 라고 말해주면 어디가 덧나냐? 알면서 킥킥대는 놈들이나 못 알아먹고 자꾸 되묻는 담탱이나 어째 해마다 변하지를 않냐 그래.
“밤 야(夜), 기운 기(氣). 야기가 제 이름입니다.”
“이.야.기?”
황당한 표정으로 담임이 반문하자 참고 있던 녀석들의 웃음소리가 터지면서 순식간에 반 전체가 웃음도가니가 되어 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남녀공학이라 신경 쓰이는데 웃음소리가 이중창으로 들려오니 죽을 맛이다. 첫날부터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나중에 웃긴애라고 기억되면 어쩌냐고요.
소근소근 ‘그럼 이름이 밤기운이야? 거 노골적이네’ 따위의 농담이 오가고 여기저기 웃음소리가 그칠 줄을 모른다.
3년 내내, 아니지, 초등학교때부터 지금까지 야기가 기억하는 해마다 있어왔던 일이니 이제 와서 새삼 마음 상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지만 썩 유쾌하진 않다. 세상엔 아무리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일들이 있는데 이게 바로 그런 경우라고 야기는 생각했다.
게다가 야기는 체질적으로 남들의 시선에 약했다. 자의식과잉인지도 모르지만 늘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야기로서는 조금이라도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쪽이 편했다. 주목을 끈다거나 하는 일은 딱 질색인데 이렇게 일년에 한번은 연례행사처럼 치르게 된다. 다행히 친구녀석들의 존재감이 강해서 그 안에 묻히고 나면 대부분 잊어버리고 말지만.
반쯤 포기한 심정으로 시선을 돌리던 야기는 반에서 유일하게 웃지않는 사람을 발견했다. 창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마치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이 유리되어 있는 그녀. 바로 옆에서 폭탄이 터져도 모를 것 같은 무심한 -아니 그건 어쩌면 다른 무언가에 강렬하게 사로잡혀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얼굴로 그녀는 짧은 한숨을 불어내고 있었다. 한 동안 야기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이름은 이준원.
사실 야기에게는 그때가 그녀를 가장 가깝게 바라본 순간이었다.
준원이는 참 특이한 아이였다. 야기는 홀린듯이 준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사건이 있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날 이후 야기는 확실하게 준원에게 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작은 늘 그렇듯 일상적인 아침에 일어났다. 준원은 그날도 창쪽으로 시선을 주었고 야기는 이유도 모른 채 그녀를 훔쳐보고 있었다. 일주일에 한번 자리를 바꾸는 월요일이라 소란스러웠던 걸로 기억한다. 담임의 강압적인 명령에 입을 삐죽이면서도 아직 아이들인 학생들은 별다른 불만 없이 자신의 자리를 찾아 칠판에 커다랗게 그려진 그림을 바라보았다. 오자마자 찾은 야기의 자리는 운 좋게도 준원과 줄을 뗀 대각선의 뒷자리였다. 속으로 럭키를 외치며 처음으로 담임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때였다.
“야! 너 진짜…”
앙칼진 여자애의 목소리에 야기는 깜짝 놀라 위장용으로 펴던 책을 떨어트렸다. 정적과 함께 시선이 집중되었다.
“니가 그렇게 잘났어? 뭔데 그 따위로 재수없게 굴어?”
꽤나 귀엽다고 평판이 자자한 유리였다. 유별나게 성격이 나쁘지도 않은 아이였던 걸로 기억한다. 야기는 1학년때 한 반이었던 유리를 돌이켜보며 의구심이 들었다. 분명히 유리는 자신의 짝인 준원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여자애들의 싸움이라 그런지 교실 전체의 눈이 쏠렸다.
“왜 그런 말을 들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
담담한 어조로 준원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유리를 바라보았다. 말 걸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대꾸한게 그렇게 화를 낼 일인가? 준원은 시시콜콜 이야기를 붙이고 수다를 떠는 여자애들과 친하게 지낼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런 자신에게 시간 낭비하지 말고 다른 애들이랑 친하게 지내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에 말해 준 것 뿐인데. 왜 여기서 잘났느니 못났느니 하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이해할수 없었다.
“뭐 이딴게 다 있어?”
유리는 분노에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붉게 물든 볼을 하고 주먹을 움켜쥔 채 준원을 노려보는 유리에게 동정의 시선이 모아졌다.
“어휴, 쟤 또 저러네.”
“그러게 말야. 졸라 재수없어.”
“씨발, 뭐가 그렇게 잘 났는지… 우리 같은 쌍것들 하곤 말도 붙이기 싫다는 거야?”
여기저기서 터져나온 비난에도 준원은 끄떡하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유리에게도 관심이 없는듯 슥 고개를 돌려 창을 향했다. 자신을 완전히 무시하는 처사에 유리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손을 날렸다.
“엇차, 그만둬.”
“미진아!”
간발의 차이로 손을 낚아챈 키가 큰 여학생에게 유리는 비명과도 같은 소리를 지르면서 와락 달려들었다. 미진이는 유리의 단짝으로 보호자 같은 면이 있었다. 유리는 미진에게 매달려 아이처럼 흐느끼고 말았다.
“괜찮아, 괜찮아. 자, 나가자.”
유리의 등을 토닥이며 일으켜 세운 미진은 조금 미간을 세워 준원을 노려보았다.
“너 말야, 계속 그런 식이면 서로 피곤하지 않냐? 그렇게 다른 사람이랑 섞이는게 싫으면 학교부터 그만두지 그래.”
“피곤하게 하는 건 그 쪽인 것 같은데. 난 그저 혼자 있고 싶을 뿐이야. 그러니까 그냥 내버려 둬.”
잠깐 동안 미진과 눈을 마주친 준원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미진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유리를 부축해 교실 밖으로 나갔다. 한동안 정적이 이어지다가 소란스러워진 교실에는 소근소근 준원에 대한 여러 일화가 떠돌았다.
중학교때 깡패였다는 이야기에서부터 애를 뗐다는 소리까지… 하나같이 악의적이고 확인되지 않은 스캔들이었다. 그나마 신빙성이 있는 건 단 한가지, 별로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친구도 어렸을 때부터의 소꿉친구말고는 사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가만히 떠도는 이야기들을 듣던 야기는 다시 한번 등에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 이래서야 어디 말이라도 한번 붙일 수 있을까. 그러면서 자각한 것은 안타까움이었다. 그리고 그때 야기는 자신이 준원에게 반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학기초에 있었던 그 사건으로 준원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하루에 한번 입을 여는 것도 보기 힘들었으니 그녀의 의도대로 된 것인지도 몰랐다. ‘따’ 와는 달랐다. 준원이 그런 것을 겁내는 것 같지도 않았지만 그렇게 반발했던 유리조차도 시간이 지나면서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의 시선으로 준원을 비껴갔다. 반의 대부분이 그랬다. 단 한 사람, 민영을 제외하고는 준원에게 말을 거는 사람도, 준원이 대꾸하는 사람도 없었다.
야기는 내내 준원을 바라보았다. 반년이 지나도록 한번도 눈을 떼지 않았다. 숨기듯 고개를 수그리고 책을 보는 척하면서 살피는 데도 도가 텄다. 다행히 야기에게 주목하는 이가 없는 데다가 준원 자신이 철저하게 스스로의 장벽 안에 들어앉아서인지 어느 누구도 야기의 은밀한 시선을 눈치채는 사람은 없었다.
“야, 정유리 어떠냐?”
“귀엽지. 저 정도면 랭크A는 맡아놓은 당상이야.”
“응, 게다가 애교는 또 어떻고… 아주 살살 녹더라.”
더위에 지친 고3들은 해파리처럼 흐물흐물 거리며 시원한 그늘을 찾아 드러누웠다. 등에 와닿은 화학실 바닥에선 그럭저럭 냉기가 올라와서 점심시간이면 늘 이 자리를 차지하려는 다툼이 치열했다. 다행히 야기의 반은 화학실과 맞닿아 있었고 야기의 친구들은 발이 빨랐다. 덕택에 늘 처지면서도 야기는 그 틈바구니에 끼어들어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이렇게 더워서는 머리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아예 점심시간의 공부 따위는 포기하고 조금 쉬어두는 것이 다음에 있을 수업을 위해서는 훨씬 나았다. 그러나 역시 고3도 피끓는 청춘. 모이면 사내녀석들이라고 수다가 없을까. 야기 본인의 의견으로는 여자들보다 더하면 더 했지 못하지는 않다, 라는 게 결론이었다.
그리고 오늘도 시원한 그늘에 등을 붙이고 누운 녀석들의 입에서는 당연한 듯이 반 여자애들의 품평이 시작되었다. 늘 첫번째로 오르는 것은 정유리. 귀엽고 화사한 얼굴에 조그마한 몸이 남자들의 눈에는 인형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한번 꼭 껴안아보고 싶어. 정유리~”
“응큼한 놈.”
“야, 나만 그러냐? 너도 그렇다며?”
“에라이, 너 같은 놈과 이 고매하신 인격자를 어디에 같이 놓냐. 난 어디까지나 여동생으로서 말이지.”
“지랄. 여동생이라면 그야말로 훌륭한 변태다, 새꺄.”
“무슨 그런 섭한 말을. 난 위대한 변태다, 크하하하하.”
“응, 이제 완전히 돌았구나.”
“젠장, 날이 이렇게 더우니 안 돌고 배기냐.”
“우리 학교는 에어컨 안 해주냐?”
“씹탱, 니 아부지 돈 많으면 기부 좀 하라 그래라.”
“미친놈. 그런 돈 있었으면 나 벌써 해외로 나갔다. 거기는 수능도 없고 여자애들도 많은 천국일 건데.”
“앉으나서나 그 생각뿐이냐, 넌.”
“그려, 나 욕구불만이여. 워쩔텨. 너라도 한몸 희생해 볼텨?”
“나 오늘 아침에 샤워했거든? 하해와 같은 은혜를 베풀어 너에게 나의 순결을 바치마.”
“우웩, 쏠려~ 저리 꺼져 새꺄!”
아웅다웅하는 녀석들의 가벼운 말장난을 들으며 야기는 슬쩍 웃었다. 대화에 끼지 않아도 야기는 패거리의 한명이었고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였지만 서로를 친구라고 인정하는 사이였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야기는 그런 자신의 위치가 편했다.
“근데 말야. 이준원도 은근히 괜찮지 않냐?”
순간 야기는 숨을 멈췄다. 준원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처음부터 재수없는 애, 라고 찍힌 덕에 남자애들도 준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신경을 끄고 지내왔다. 더구나 늘 책상이나 창을 향하는 바람에 준원의 얼굴을 제대로 본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야기는 자신 외에 누군가가 준원을 발견했다는 사실에 놀랐고 충격을 받았다. 싸늘하게 피가 식는 느낌이었다. 머리 한 구석이 하얗게 비워져 현기증이 났다.
“오오, 괜찮지. 성깔도 있고… 건방진 여자들은 나름대로 매력이 있다니까.”
“걘 건방진 것도 아니고 그냥 귀찮아 하는 거 같던데.”
“응, 솔직히 기집애들 몰려다니는 거 보면 가끔 질릴 때가 있거든.”
“맞아, 화장실에도 우르르, 매점에도 우르르. 그런 면에서 보면 이준원은 특이 케이스야.”
“아주 딱 부러지더라. 속이 다 시원하더라니까.”
“이쁘면 모든 것이 다 용서되는 법이지. 커커커커.”
제멋대로 지껄여대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야기는 한마디 말도 하지 못했다. 가슴 속은 화르르 타오르는 불로 뜨거웠지만 준원이에 관해 무슨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자신에게는 불가능했다. 그저 벙어리 냉가슴 앓듯 하고픈 말을 삼키고 침묵하는 것 외에 야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아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다만 친구들의 관심이 다른 애한테 쏠리기를 바라는밖에. 무력하고 소심한 자신에게 신물이 넘어올 것 같았지만 가만히 미소를 짓고 외면하는 수 외에 야기에게 다른 선택은 없었다. 그리고 다행히 화제는 임신으로 휴가중인 미술선생님에게로 넘어갔다.
그렇게 1년이 지나갔다. 더위에 지쳐 개처럼 혀를 빼어 물었던 것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이내 찬바람이 불고 곧 추위가 찾아왔다. 그리고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야기는 그 해 대학에 떨어졌다. 일년 내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으니 공부했을 리는 당연히 없고 야기의 머리는 공부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좋은 게 아니었다. 하긴. 답안지에조차 준원의 이름을 써넣었을 정도니 이미 합격은 그른 일이었다. 그에 반해 그녀는 손꼽히는 여자대학에 합격했다. 볼 때마다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으니까 꽤 공부를 잘했었던 모양이다.
대학에 떨어졌다는 결과를 듣자마자 아버지는 뭔가 말씀하고 싶으신 눈치였지만 야기는 모른척 했다. 오기라면 오기일지도 모르지만 자신의 힘으로 그녀와 대등해지고 싶었다.
은근히 물어오는 기부금 입학 이야기는 야기가 재수를 결심하고 나서 조용히 사라졌다. 솔직히 천재나 수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돌머리도 아니다. 야기는 재수를 결심하고 정말 죽어라 공부했다. 과목당 몇백짜리 과외까지 받아가며 미친듯이 들이 판 결과 다음해 당당하게 대학생의 딱지를 이마에 붙였다. 물론 그녀와 비슷한 레벨의 대학이었다. 생전 그렇게 노력해 본 것은 처음이었다. 성취감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역시 그녀에게 꿇리지 않겠다는 집념의 결과였다. 비록 그녀와는 연락도 끊기고 접점도 사라졌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그렇게라도 해서 준원이에게 가까이 가겠다는 고집이 남아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것은 고집 따위가 아니다. 그 바보 같은 감정은 미련이었다.
하지만 그런 이유만으로 들어간 대학이 즐거울 리가 없었다. 야기는 입학식에 들어선 순간 자신이 찾는 것이 그곳에 없음을 새삼 깨달아야 했다. 그제서야 야기는 왜 그녀와 같이 있었던 시간 동안에 그녀와 작은 끈조차 잇지 못했는지 후회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그녀를 그리워할 거면서 왜 그땐 그런 사실들을 들키기 싫었을까. 그런 것은 자존심 같은 것도 아니다. 그저 사랑 받는데 익숙해진 자만심일 뿐이었다. 손 내밀어 원하는 것을 붙잡을 용기조차 없이 그저 내밀어진 것만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어린애에 지나지 않았다. 후회하고 또 후회했지만 다시 한번 그 시간이 돌아온다 하더라도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을지 모른다. 생전 처음으로 야기는 자신의 비겁함이 지긋지긋하게 싫어졌다.
학교에 나가지 않은지도 벌써 한달이 넘었다. 입학하고 바로이니 학교에 간 날을 세는 것이 빠를까. 고등학교때와 마찬가지로 대학에도 야기의 자리는 없었다. 가뜩이나 어울림에는 소질이 없는 야기라 그의 존재는 처음부터 잊혀져 있었다. 나서서 관계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겁이 났다. 그래서 도망치듯 등을 돌려 버린 것이다.
완벽하게 무의욕인 상태로 날들이 지나갔다. 하루하루 지나가는 날을 멍한 머리로 관조했다. 시간은 정말 더럽게도 느리게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