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훈의 러브 토크] 나도 차였다… 연애 기술만 내세웠다가

김랩퍼2009.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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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연재한 연애칼럼을 찬찬히 읽어볼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알아버렸다. 내가 쓴 글의 대부분이 철저히 남성 중심적인 시각에서 쓰였다는 것!

남성 필자가 연재하는 칼럼이니 어쩔 수 없다는 책임회피성 발언으로 변명해 볼까 싶지만, 그냥 고백하는 게 낫겠다. 난 철저히 마초이즘으로 무장한 시대를 살아온 평범한 남자라는 사실을 말이다. 난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권상우가 입었던 검은색 교복을 입고 중학교에 입학했고, 두주불사의 음주 습관은 미덕으로 배웠다. 새로운 시대에 적응을 위해 내가 연습한 건 고작 부드러운 미소뿐. 사고방식은 아직도 마초를 숭상하던 1980년대에 머물러 있는지 모르겠다.

뒤늦은 고해성사를 늘어놓는 것은 며칠 전 본 영화 때문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 안젤리나 졸리 주연의 영화 '체인즐링'. 영화는 유괴된 아들을 찾으려는 어머니의 힘겨운 투쟁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영화의 중반부, 아들을 찾았다는 소식에 어머니는 한걸음에 달려간다. 담당 경찰은 조소 섞인 한 마디를 내뱉는다. "여자들이란."

이 대사 한 줄엔 여성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이 담겨 있다. 영화의 말미, 어머니의 위대함을 확인한 다른 경찰은 가벼운 인사를 통해 예를 갖춘다. 여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내가 영화 '체인즐링'을 보고 감동을 받은 것은 단순히 이 영화 한 편이 전달하는 메시지 때문만은 아니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전형적인 마초다. '석양의 무법자' 시리즈나 '더티 해리' 시리즈를 본 관객들이라면 다 알겠지만,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은 보통 사고 능력이 없는 성적 대상일 뿐이었다.

그의 세계관이 변화한 건 '용서받지 못한 자'부터로 보인다. 그는 이 영화에서 남성 중심의 영웅상을 전복시키고 여성에게 자의식을 부여했다. 사건을 해결하는 것은 은퇴한 총잡이인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아니다. 보안관의 폭압에 항거하기 위해 돈을 모아 그를 고용하는 매춘부들이다.

이후 그의 대표작이 된 '밀리언달러 베이비'의 주인공은 아예 여성 복서이다. 이어진 영화 '체인즐링'에서 한 어머니의 투쟁으로 결국 LA의 경찰서장마저 사임하게 만든 실화를 소재로 택한 것은 마초이즘의 숭배자가 세상을 보는 시각이 바뀌었음을 보여준 증거이다. 여성에 대한 세계관의 변화를 겪으며 비로소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작가라는 칭호를 얻은 거장이 되었다.

나를 포함한 많은 남성들은 연애를 주제로 수다를 떨면서, 스스럼없이 여성을 성적인 대상으로 국한 짓고, 그녀들에게 자의식이란 없는 것처럼 얘기할 때가 많다. 뚜렷한 이데올로기 때문이라기보단 그렇게 이야기하는 데 익숙해져 있고, 애써 다른 시각을 가질 필요도 없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리라.

지난 칼럼을 들추어보면서 난 부끄러워졌다. 연애론에 선행돼야 할 이성관에 대한 성찰이 전무했다는 자각 때문이다. 진짜 연애를 하고 싶다면, 여성을 '대상'이 아닌 연애의 '동반자'로 받아들여야 하는 게 아닐까. 여자들이 나를 떠난 건 '연애의 기술' 이 미숙해서가 아니라, 그녀들을 존중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남자라는 걸 알아챘기 때문 아닐까? 연애카운슬러라는 명칭이 부끄러워지는 요즈음이다.

[김태훈 팝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