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할아버지의 영향력도. 할아버지가 가시고 난 다음날 바로, 당숙에게서 전화가 오고,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은 어느새 당연한 듯이 ‘부르고뉴’ 강남점의 사장이 돼 있었다.
당숙은 시간을 쪼개 그를 데리고 다니며 이런저런 일들을 가르쳤고 다른 영업점들을 견학시켜 주었다. 불안해진 야기가 자신이 없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더니 그는 껄걸 웃으며 처음에는 다 그런 거라고 격려해 주었다. 하루에도 몇번씩 그만두겠다는 소리가 입안에서 맴돌았지만 꺼내놓기도 뭐한 분위기라 야기는 눈치를 보다가 내일로 내일로 하며 미루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 점점 발을 뺄 수가 없어졌다.
지금 돌이켜보면 폭풍 같은 시간들이었다.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레스토랑이 오픈했고 그때부터 쏟아지는 일들에 허둥대다 보니 어느새 1년, 이라는 심정이었다. 처음에는 별 것 아닌 일에도 허둥대고 당황했지만 과연 1년의 세월은 만만치 않아서인지 이제는 일도 어느정도 익숙해졌고 사람들과도 많이 친해졌다. 어디에 있어도 그닥 눈에 띄지 않는 야기였기에 더욱 쉽게 그들 사이에 융해되었는지도 모른다. 레스토랑의 장식이나 비품처럼 되어가는 자신이 한심하기도 했지만 익숙한 포지션에는 역시 안심이 되는 건, 자신이 못난 탓이리라.
휴일이었다. 한 달에 네 번의 휴일이라는 건 생각보다 하드한 스케줄이라서 도통 무언가를 할 마음이 나지 않았다. 나가서 돌아다닌다는 생각만으로도 피곤해진 야기는 결국 하루종일 빈둥거리기로 결정, 단 하나 가지고 있는 준원의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소풍도 체육대회도 없는 고3 생활 중에 딱 한번, 여름방학을 맞아 반 전체가 물청소를 한 적이 있었다. 스트레스를 풀고 다시 수험공부에 열중하라는 담임의 배려였다. 평소 같으면 대충 시간만 때우거나 조퇴라도 했을 테지만 반 전체 참가라는 담탱이의 강요로 별 수 없이 양동이를 들고 물을 날랐다. 그리고 놀랍게도 즐거웠었다.
말이 물청소지 사실은 물놀이였다. 흠뻑 젖어 물싸움을 하는 틈틈이 야기는 눈으로 준원을 찾았다. 그리고 드물게 조금 미소지은 그녀를 발견하고는 홀린듯 바라보았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시침을 뗐지만 가슴이 쿵쿵 뛰었다.
사진을 전공할 거라는 민영은 준원의 하나뿐인 친구였다. 그날 반 전체가 즐거웠던 기억을 남겨놓으려는지 민영은 계속해서 사진을 찍었고 반 아이들은 그런 민영의 사진기 앞에서 온갖 포즈를 다 취하면서 즐거워했다. 그리고 계속 준원을 바라보고 있던 야기는 민영이 그녀의 사진을 찍는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조그맣게 항의하는 준원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민영은 그야말로 뻔뻔한 태도로 무시해 버렸고 그 모습에 잠깐이지만 야기는 가슴이 아팠다.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준원이를 대할 수 있었으면 했다. 준원의 옆에서 웃는 것이 자신이었으면 하고 바랬다. 그러나 꿈은 단지 꿈일뿐. 야기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멀리서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그때의 사진이다. 상당한 거금을 들여 마련했지만 야기에게는 그야말로 최고의 보물이었기에 돈이 아깝다는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다. 아니, 그 사진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이 행운이라 생각될 정도였다. 자신의 어디에 그런 용기가 있었는지…
사진속의 준원이 살짝 미소짓고 있었다. 사진전 입상경력의 민영답게 그가 포착한 순간의 준원은 그야말로 그녀, 그 자체였다. 야기가 늘 바라보았던 대로 깨끗하고 정갈한, 그러면서도 어딘가 따뜻함이 느껴지는… 무엇보다도 드물던 그녀의 미소가 담겨 있었다.
사진을 손에 넣은 후로 야기는 시간이 날 때마다 거실 바닥에 배를 갈고 누워 계속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사진 속의 그녀에게 말을 건다.
“잘 지내? 학교는 잘 다니고 있어? 아직도 고개 숙이고 공부만 하니?”
야기는 잠깐 그 모습을 떠올리고 슬쩍 웃었다.
“남자친구는 있어? 못 사귀었다고? 하긴… 그런 성격으로 있을 리가 없지. 안 그래?”
언제부터 사진하고 이야기하는 버릇이 생겼을까. 조금 민망하지만 야기는 그녀의 사진을 붙잡고 이야기하는 것이 좋았다. 비록 진짜 준원과는 한번도 말을 나누지 못했지만 사진 속의 준원은 늘 미소를 띄고 자신의 곁에 있어줬다. 슬플 때도, 기쁠 때도, 아플 때도, 우울할 때도… 언제나 자신을 격려하는 듯 웃어준다. 해묵은 미련도 준원의 사진을 들여다볼 때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야기는 늘 사진 속의 그녀와 대화를 나누었다.
“보고 싶다… 준원아… 보고 싶어…”
야기는 말과 함께 그녀의 사진을 얼굴에 부비다가 쪽~ 하고 입을 맞췄다.
딩동- 딩동-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누구세요?”
“저, 광고보고… 룸메이트를 구하신다고 해서요.”
여자의 목소리에 야기는 아차 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텅 비어 보이는 집이 왠지 쓸쓸해서 충동적으로 그런 광고를 냈었다. 방도 남아돌고 사람도 그립고 해서 친구나 만들어볼까 싶은 생각에. 그러고 보니 남녀지정을 안 했었네 그래. 에휴, 남사스럽게.
“죄송합니…”
문을 연 순간 야기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어머, 남자분이셨네요.”
조금 멋쩍은 얼굴로 그녀가 웃었다. 그때까지도 야기는 그대로 굳어있었다.
“죄송해요. 남자라는 생각은 전혀 못하고… 먼저 전화로 확인할 걸 그랬네요.”
밝은 얼굴로 웃으며 준원이 고개를 숙였다. 야기를 알아보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제서야 야기는 조금씩 정신을 차리고 준원의 모습을 관찰했다.
2년하고도 몇 개월만에 보는 그녀는 이전의 모습이 무색 할만큼 밝은 표정이었다. 약간 웨이브가 들어간 머리모양과 귀에 매달린 귀걸이를 제외하면 그녀는 기억속의 모습과 거의 비슷했다. 여전히 말이 나오지 않아 야기는 멍하니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침묵만을 지켰다. 그녀를 만났다는 충격으로 혼란스러운 머리에는 둥둥 이런저런 상념들이 어지럽게 떠다녔다. 그런 야기의 침묵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그녀는 다시 한번 머리를 숙였다.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왠지 남자분일 거라는 생각은 전혀 못해서… 급한 마음에 실례했어요. 미리 연락드리고 왔어야 하는 건데.”
순간 야기는 다급해졌다. 이렇게 그녀를 보낼 수는 없었다. 일생에 오는 세 번의 기회 중, 그녀에 관해서라면 이번이 두 번째이다. 올지 안 올지 모르는 세 번째까지 기다릴 여유는 없었다! 자, 생각해내라, 생각해내. 어떻게든 그녀를 붙잡을 구실을 생각해 내라고!
“그럼 저는 이만...”
“자, 잠깐만요!”
급하게 불러 세우는 야기의 머리 속에서 순간 최고의 변명이 만들어졌다.
팟-하고 들어온 불을 야기는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소리쳤다.
“저, 저는 게이입니다!”
“……”
준원은 한참 동안을 야기의 얼굴만 들여다봤다. 이 남자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라는 표정으로. 그러나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야기는 약간의 쑥스러운 웃음을 보이며 최대한 선량하게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스스로에게 연기력이 있다는 걸 처음으로 깨닫는 순간이었다.
“저기, 이해가 안 되시는 모양인데…”
“아니요! 알아들었어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준원은 자신이 무안하게 빤히 쳐다보았다는 사실을 자각하고는 쑥스러움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스스로가 다른 사람에게서 관심을 받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인지 다른 사람에게 그러한 시선을 보내는 것도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 아무리 게이, 라고 해도 말이다. 아니, 그러니까 더 그런 거다. 마치 뭔가 신기한 것을 보듯 호기심 어린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는 사실에 수치감마저 느꼈다.
“그러니까… 룸메는 여자여도 상관없어요.”
말을 하면서 야기는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꾸며냈지만 머리속은 엉망진창이었다.
무엇보다도! 2년만에 만나는 그녀에게, 그것도 처음 건네는 말이 왜 하필 난 게이에요, 가 되었어야 하는지… 당장이라도 쥐구멍에 머리를 박고 숨고 싶었다.
그러나 겉모습만은 태연자약이었으니 연기를 해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을 것 같은 소질이었다.
준원은 이 남자가 무슨 말을 하고 있나 헤아리다가 문득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이는 여자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될 수 있는 게 아니었던가.
물론 마돈나 아줌마가 게이는 여자의 적이라고 했지만, 그거야 어디까지나 얽혔을 때의 이야기고…
“방, 보여줄래요?”
준원의 말에 야기의 안색이 환해졌다. 야기로서야 자신의 작은 계략이 성공한 것에 기뻐서였지만 준원은 다른 쪽으로 해석해 버렸다. 게이임을 밝힐 정도로 당당한 사람인데도 다른 사람의 눈을 신경 쓰는구나 하는 데서 묘한 비애를 느끼고 말았던 것이다.
“드, 들어오세요.”
야기는 현관문을 등으로 밀어 그녀가 들어올 수 있도록 자리를 내주었다. 그녀는 가볍게 목례하고는 야기를 지나쳐 현관에 단정하게 구두를 벗어 놓았다. 그녀의 삼푸 냄새가 확 끼쳐서 헤롱헤롱 정신을 못 차리던 야기는 그 와중에 혹시 그녀에게 보여선 안 될 물건이라도 있나 해서 목을 빼고 거실을 살폈다. 이를테면… 속옷이라던가… 그… 책이라던가…까지를 떠올리던 야기는 순간 그녀가 오기 전까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기억해내고 헉 숨을 삼켰다.
악! 그러고 보니… 사진!
그녀가 오기전까지 보고 있던 사진이 아직 거실바닥에 딩굴고 있다.
“인테리어가 참 심플하네요.”
조금 감탄 어린 그녀의 말에 당연하지, 이건 디자이너의 솜씨라고, 따위를 생각하던 야기는 아앗, 이럴 때가 아니잖앗! 하는 자각과 함께 준원의 뒤에서 몸을 날려 사진위로 다이빙했다.
마루 바닥과 부딪힌 몸이 소리를 냄과 동시에 사진을 바지속으로 쑤셔 넣었다. 으아, 눈물이… 쿵 소리가 날 정도였으니 아픈게 당연하지.
“왜 그러세요?”
“예? 아, 와, 왁스칠한지가 얼마 안 돼서… 하하. 조심하세요. 바닥이 미끄럽습니다.”
약간 의아해하는 그녀의 눈길을 뒤로 하고 야기는 하하 웃으며 그녀에게 줄 방문을 열었다.
물론 처음에 내놓기로 한 방은 이 방이 아니지만 그녀란 말이다! 가장 전망이 좋고 가장 넓은 이 방은 현재는 야기의 놀이방이다. 컴이랑 플스, 티비, 비디오, 디비디, 덤으로 아직 풀지도 않은 박스에 가득한 시디랑 타이틀들. 야기는 마음속으로 ‘미안하다, 동지들. 사랑을 위해 너희들은 이사 가줘야겠다. 알고보면 옮길 방도 괜찮아, 임마.’ 따위를 중얼거리며 어떻게든 준원에게 눈치 채이지 않도록 허허 웃어 보였다.
“쓰시던 방인가봐요.”
“아뇨, 물건들을 마땅히 둘 데가 없어서…아직 정리가 다 안 끝났거든요. 하하…”
바빠서 놀 시간이 없었던 고로 다행히 아직 연결도 다 안 끝난 상태다. 잘하면 믿어줄 것도 같은 거짓말을 하고 그녀를 베란다쪽으로 데려갔다. 이 방은 전망이 가장 좋아서 개인적으로도 마음에 들어하는 방이다. 그녀 역시 조금 감탄한 얼굴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야기에게 늘 창밖을 바라보던 그녀가 떠올랐다. 당장이라도 뛰어나가고 싶은 눈으로, 그러나 그럴 용기가 없어 안타까운 표정을 짓던 것을 기억한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기억 속에 숨어있던 것이 무의식적으로 그녀에게 이 방을 보여 달라고 한 건지도 모른다. 실은 이 방이 가장 크고 전망이 좋은 방이라 그녀에게 어떻게든 잘해주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지만.
그리고 예상대로 그녀는 시원하게 펼쳐진 밖의 풍경에 매료된 눈치였다. 잠시 말없이 그 자리에 서있던 그녀가 살짝 몸을 돌려 웃어 보였을 때 야기는 이미 이 일이 성공했음을 깨달았다.
“전망이 너무 좋은데요.”
환하게 웃는 그녀의 얼굴에 야기는 찌릿한 행복감을 느꼈다. 1년 동안을 훔쳐봤어도 그녀가 이렇게 밝은 얼굴인 것은 처음 본다. 이미 준원은 고등학교때 와는 비교할 수 없이 밝은 모습이긴 했지만.
“예, 이 방은 화장실과 베란다가 따로 있어서 가장 독립적인 공간이거든요.”
“네, 그것도 너무 좋아요.”
조금 열린 창 틈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날렸다.
그 바람이 야기의 볼에까지 불어왔다. 그 시원한 기운에 야기는 살짝 미소 지었다.
한동안 그렇게 서 있던 준원이 이윽고 야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불안한 심정으로 그녀의 동작 하나하나를 살피던 야기는 준원의 입에서 나오는 한 마디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아무리 게이라고는 했어도 과연 그녀가 남자와 같이 사는 것을 허락할 것인가. 조그마한 음모가 성공하기를 빌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그녀는 그야말로 천사의 미소를 띈 채 야기를 향해 입을 열었다.
헉! 너무 기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준원의 이름을 말해버린 야기는 이 작은 실수 하나가 모든걸 망쳐 놓을수 있다는 사실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옴을 느꼈다. 그녀의 시선을 피해 그녀의 어깨를 타고 내려온 핸드백을 보던 야기는 손잡이에 새겨진 J.W 라는 이니셜을 발견해 냈다. 역시, 오늘 하루 동안 신은 야기의 편을 들어주기로 한 것 같았다.
“제가 뭐가 그랬죠? 지원 이라고 했나요?”
“준원이라고 제 이름을 분명히 말씀하신 것 같은데요?”
“아~ 아까 핸드백에 새겨진 이니셜을 보구 옛날 친구였던 지원 이라는 이름을 떠올렸는데… 그게 어쩌다 준원으로 들렸나 보네요. 하하하…”
자신이 생각해도 말도 안되는 변명이었다. 젠장… 이걸로 끝인가?
“저도 지원이라는 이름의 친구가 있는데… 하지원… 영화배우인데 혹시 아세요?”
“하하! 하지원… 물론 알죠. 근데 정말 친구세요?”
“그럼요. 정말 좋아하는 친구에요. 근데, 여자배우들 보단 남자배우들한테 더 관심이 많으시게다. 그쵸?”
“하하하하! 물론 입니다. 근육 미끈한 몸짱 남자배우들만 보면 가슴이 설레는게…”
자알~ 하는 짓이다. 어찌 어찌 넘어가긴 하는 것 같은데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야기를 게이로 만들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로 일단은 만족이었다.
정말로 자신이 준원이와 한 집에 살게 될 것일까? 눈앞에서 웃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이준원. 야기는 자기도 모르게 헤벌쭉 웃어 보였다.
- 아임게이(i'm gay) - #2-2
- 아임게이(i'm gay) - #2-2 -
그러나 야기의 예상은 멋지게 빗나가고 말았다. 문중의 힘을 너무 얕봤던 것이다.
더불어 할아버지의 영향력도. 할아버지가 가시고 난 다음날 바로, 당숙에게서 전화가 오고,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은 어느새 당연한 듯이 ‘부르고뉴’ 강남점의 사장이 돼 있었다.
당숙은 시간을 쪼개 그를 데리고 다니며 이런저런 일들을 가르쳤고 다른 영업점들을 견학시켜 주었다. 불안해진 야기가 자신이 없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더니 그는 껄걸 웃으며 처음에는 다 그런 거라고 격려해 주었다. 하루에도 몇번씩 그만두겠다는 소리가 입안에서 맴돌았지만 꺼내놓기도 뭐한 분위기라 야기는 눈치를 보다가 내일로 내일로 하며 미루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 점점 발을 뺄 수가 없어졌다.
지금 돌이켜보면 폭풍 같은 시간들이었다.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레스토랑이 오픈했고 그때부터 쏟아지는 일들에 허둥대다 보니 어느새 1년, 이라는 심정이었다. 처음에는 별 것 아닌 일에도 허둥대고 당황했지만 과연 1년의 세월은 만만치 않아서인지 이제는 일도 어느정도 익숙해졌고 사람들과도 많이 친해졌다. 어디에 있어도 그닥 눈에 띄지 않는 야기였기에 더욱 쉽게 그들 사이에 융해되었는지도 모른다. 레스토랑의 장식이나 비품처럼 되어가는 자신이 한심하기도 했지만 익숙한 포지션에는 역시 안심이 되는 건, 자신이 못난 탓이리라.
휴일이었다. 한 달에 네 번의 휴일이라는 건 생각보다 하드한 스케줄이라서 도통 무언가를 할 마음이 나지 않았다. 나가서 돌아다닌다는 생각만으로도 피곤해진 야기는 결국 하루종일 빈둥거리기로 결정, 단 하나 가지고 있는 준원의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소풍도 체육대회도 없는 고3 생활 중에 딱 한번, 여름방학을 맞아 반 전체가 물청소를 한 적이 있었다. 스트레스를 풀고 다시 수험공부에 열중하라는 담임의 배려였다. 평소 같으면 대충 시간만 때우거나 조퇴라도 했을 테지만 반 전체 참가라는 담탱이의 강요로 별 수 없이 양동이를 들고 물을 날랐다. 그리고 놀랍게도 즐거웠었다.
말이 물청소지 사실은 물놀이였다. 흠뻑 젖어 물싸움을 하는 틈틈이 야기는 눈으로 준원을 찾았다. 그리고 드물게 조금 미소지은 그녀를 발견하고는 홀린듯 바라보았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시침을 뗐지만 가슴이 쿵쿵 뛰었다.
사진을 전공할 거라는 민영은 준원의 하나뿐인 친구였다. 그날 반 전체가 즐거웠던 기억을 남겨놓으려는지 민영은 계속해서 사진을 찍었고 반 아이들은 그런 민영의 사진기 앞에서 온갖 포즈를 다 취하면서 즐거워했다. 그리고 계속 준원을 바라보고 있던 야기는 민영이 그녀의 사진을 찍는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조그맣게 항의하는 준원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민영은 그야말로 뻔뻔한 태도로 무시해 버렸고 그 모습에 잠깐이지만 야기는 가슴이 아팠다.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준원이를 대할 수 있었으면 했다. 준원의 옆에서 웃는 것이 자신이었으면 하고 바랬다. 그러나 꿈은 단지 꿈일뿐. 야기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멀리서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그때의 사진이다. 상당한 거금을 들여 마련했지만 야기에게는 그야말로 최고의 보물이었기에 돈이 아깝다는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다. 아니, 그 사진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이 행운이라 생각될 정도였다. 자신의 어디에 그런 용기가 있었는지…
사진속의 준원이 살짝 미소짓고 있었다. 사진전 입상경력의 민영답게 그가 포착한 순간의 준원은 그야말로 그녀, 그 자체였다. 야기가 늘 바라보았던 대로 깨끗하고 정갈한, 그러면서도 어딘가 따뜻함이 느껴지는… 무엇보다도 드물던 그녀의 미소가 담겨 있었다.
사진을 손에 넣은 후로 야기는 시간이 날 때마다 거실 바닥에 배를 갈고 누워 계속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사진 속의 그녀에게 말을 건다.
“잘 지내? 학교는 잘 다니고 있어? 아직도 고개 숙이고 공부만 하니?”
야기는 잠깐 그 모습을 떠올리고 슬쩍 웃었다.
“남자친구는 있어? 못 사귀었다고? 하긴… 그런 성격으로 있을 리가 없지. 안 그래?”
언제부터 사진하고 이야기하는 버릇이 생겼을까. 조금 민망하지만 야기는 그녀의 사진을 붙잡고 이야기하는 것이 좋았다. 비록 진짜 준원과는 한번도 말을 나누지 못했지만 사진 속의 준원은 늘 미소를 띄고 자신의 곁에 있어줬다. 슬플 때도, 기쁠 때도, 아플 때도, 우울할 때도… 언제나 자신을 격려하는 듯 웃어준다. 해묵은 미련도 준원의 사진을 들여다볼 때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야기는 늘 사진 속의 그녀와 대화를 나누었다.
“보고 싶다… 준원아… 보고 싶어…”
야기는 말과 함께 그녀의 사진을 얼굴에 부비다가 쪽~ 하고 입을 맞췄다.
딩동- 딩동-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누구세요?”
“저, 광고보고… 룸메이트를 구하신다고 해서요.”
여자의 목소리에 야기는 아차 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텅 비어 보이는 집이 왠지 쓸쓸해서 충동적으로 그런 광고를 냈었다. 방도 남아돌고 사람도 그립고 해서 친구나 만들어볼까 싶은 생각에. 그러고 보니 남녀지정을 안 했었네 그래. 에휴, 남사스럽게.
“죄송합니…”
문을 연 순간 야기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어머, 남자분이셨네요.”
조금 멋쩍은 얼굴로 그녀가 웃었다. 그때까지도 야기는 그대로 굳어있었다.
“죄송해요. 남자라는 생각은 전혀 못하고… 먼저 전화로 확인할 걸 그랬네요.”
밝은 얼굴로 웃으며 준원이 고개를 숙였다. 야기를 알아보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제서야 야기는 조금씩 정신을 차리고 준원의 모습을 관찰했다.
2년하고도 몇 개월만에 보는 그녀는 이전의 모습이 무색 할만큼 밝은 표정이었다. 약간 웨이브가 들어간 머리모양과 귀에 매달린 귀걸이를 제외하면 그녀는 기억속의 모습과 거의 비슷했다. 여전히 말이 나오지 않아 야기는 멍하니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침묵만을 지켰다. 그녀를 만났다는 충격으로 혼란스러운 머리에는 둥둥 이런저런 상념들이 어지럽게 떠다녔다. 그런 야기의 침묵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그녀는 다시 한번 머리를 숙였다.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왠지 남자분일 거라는 생각은 전혀 못해서… 급한 마음에 실례했어요. 미리 연락드리고 왔어야 하는 건데.”
순간 야기는 다급해졌다. 이렇게 그녀를 보낼 수는 없었다. 일생에 오는 세 번의 기회 중, 그녀에 관해서라면 이번이 두 번째이다. 올지 안 올지 모르는 세 번째까지 기다릴 여유는 없었다! 자, 생각해내라, 생각해내. 어떻게든 그녀를 붙잡을 구실을 생각해 내라고!
“그럼 저는 이만...”
“자, 잠깐만요!”
급하게 불러 세우는 야기의 머리 속에서 순간 최고의 변명이 만들어졌다.
팟-하고 들어온 불을 야기는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소리쳤다.
“저, 저는 게이입니다!”
“……”
준원은 한참 동안을 야기의 얼굴만 들여다봤다. 이 남자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라는 표정으로. 그러나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야기는 약간의 쑥스러운 웃음을 보이며 최대한 선량하게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스스로에게 연기력이 있다는 걸 처음으로 깨닫는 순간이었다.
“저기, 이해가 안 되시는 모양인데…”
“아니요! 알아들었어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준원은 자신이 무안하게 빤히 쳐다보았다는 사실을 자각하고는 쑥스러움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스스로가 다른 사람에게서 관심을 받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인지 다른 사람에게 그러한 시선을 보내는 것도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 아무리 게이, 라고 해도 말이다. 아니, 그러니까 더 그런 거다. 마치 뭔가 신기한 것을 보듯 호기심 어린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는 사실에 수치감마저 느꼈다.
“그러니까… 룸메는 여자여도 상관없어요.”
말을 하면서 야기는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꾸며냈지만 머리속은 엉망진창이었다.
무엇보다도! 2년만에 만나는 그녀에게, 그것도 처음 건네는 말이 왜 하필 난 게이에요, 가 되었어야 하는지… 당장이라도 쥐구멍에 머리를 박고 숨고 싶었다.
그러나 겉모습만은 태연자약이었으니 연기를 해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을 것 같은 소질이었다.
준원은 이 남자가 무슨 말을 하고 있나 헤아리다가 문득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이는 여자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될 수 있는 게 아니었던가.
물론 마돈나 아줌마가 게이는 여자의 적이라고 했지만, 그거야 어디까지나 얽혔을 때의 이야기고…
“방, 보여줄래요?”
준원의 말에 야기의 안색이 환해졌다. 야기로서야 자신의 작은 계략이 성공한 것에 기뻐서였지만 준원은 다른 쪽으로 해석해 버렸다. 게이임을 밝힐 정도로 당당한 사람인데도 다른 사람의 눈을 신경 쓰는구나 하는 데서 묘한 비애를 느끼고 말았던 것이다.
“드, 들어오세요.”
야기는 현관문을 등으로 밀어 그녀가 들어올 수 있도록 자리를 내주었다. 그녀는 가볍게 목례하고는 야기를 지나쳐 현관에 단정하게 구두를 벗어 놓았다. 그녀의 삼푸 냄새가 확 끼쳐서 헤롱헤롱 정신을 못 차리던 야기는 그 와중에 혹시 그녀에게 보여선 안 될 물건이라도 있나 해서 목을 빼고 거실을 살폈다. 이를테면… 속옷이라던가… 그… 책이라던가…까지를 떠올리던 야기는 순간 그녀가 오기 전까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기억해내고 헉 숨을 삼켰다.
악! 그러고 보니… 사진!
그녀가 오기전까지 보고 있던 사진이 아직 거실바닥에 딩굴고 있다.
“인테리어가 참 심플하네요.”
조금 감탄 어린 그녀의 말에 당연하지, 이건 디자이너의 솜씨라고, 따위를 생각하던 야기는 아앗, 이럴 때가 아니잖앗! 하는 자각과 함께 준원의 뒤에서 몸을 날려 사진위로 다이빙했다.
마루 바닥과 부딪힌 몸이 소리를 냄과 동시에 사진을 바지속으로 쑤셔 넣었다. 으아, 눈물이… 쿵 소리가 날 정도였으니 아픈게 당연하지.
“왜 그러세요?”
“예? 아, 와, 왁스칠한지가 얼마 안 돼서… 하하. 조심하세요. 바닥이 미끄럽습니다.”
약간 의아해하는 그녀의 눈길을 뒤로 하고 야기는 하하 웃으며 그녀에게 줄 방문을 열었다.
물론 처음에 내놓기로 한 방은 이 방이 아니지만 그녀란 말이다! 가장 전망이 좋고 가장 넓은 이 방은 현재는 야기의 놀이방이다. 컴이랑 플스, 티비, 비디오, 디비디, 덤으로 아직 풀지도 않은 박스에 가득한 시디랑 타이틀들. 야기는 마음속으로 ‘미안하다, 동지들. 사랑을 위해 너희들은 이사 가줘야겠다. 알고보면 옮길 방도 괜찮아, 임마.’ 따위를 중얼거리며 어떻게든 준원에게 눈치 채이지 않도록 허허 웃어 보였다.
“쓰시던 방인가봐요.”
“아뇨, 물건들을 마땅히 둘 데가 없어서…아직 정리가 다 안 끝났거든요. 하하…”
바빠서 놀 시간이 없었던 고로 다행히 아직 연결도 다 안 끝난 상태다. 잘하면 믿어줄 것도 같은 거짓말을 하고 그녀를 베란다쪽으로 데려갔다. 이 방은 전망이 가장 좋아서 개인적으로도 마음에 들어하는 방이다. 그녀 역시 조금 감탄한 얼굴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야기에게 늘 창밖을 바라보던 그녀가 떠올랐다. 당장이라도 뛰어나가고 싶은 눈으로, 그러나 그럴 용기가 없어 안타까운 표정을 짓던 것을 기억한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기억 속에 숨어있던 것이 무의식적으로 그녀에게 이 방을 보여 달라고 한 건지도 모른다. 실은 이 방이 가장 크고 전망이 좋은 방이라 그녀에게 어떻게든 잘해주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지만.
그리고 예상대로 그녀는 시원하게 펼쳐진 밖의 풍경에 매료된 눈치였다. 잠시 말없이 그 자리에 서있던 그녀가 살짝 몸을 돌려 웃어 보였을 때 야기는 이미 이 일이 성공했음을 깨달았다.
“전망이 너무 좋은데요.”
환하게 웃는 그녀의 얼굴에 야기는 찌릿한 행복감을 느꼈다. 1년 동안을 훔쳐봤어도 그녀가 이렇게 밝은 얼굴인 것은 처음 본다. 이미 준원은 고등학교때 와는 비교할 수 없이 밝은 모습이긴 했지만.
“예, 이 방은 화장실과 베란다가 따로 있어서 가장 독립적인 공간이거든요.”
“네, 그것도 너무 좋아요.”
조금 열린 창 틈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날렸다.
그 바람이 야기의 볼에까지 불어왔다. 그 시원한 기운에 야기는 살짝 미소 지었다.
한동안 그렇게 서 있던 준원이 이윽고 야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불안한 심정으로 그녀의 동작 하나하나를 살피던 야기는 준원의 입에서 나오는 한 마디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아무리 게이라고는 했어도 과연 그녀가 남자와 같이 사는 것을 허락할 것인가. 조그마한 음모가 성공하기를 빌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그녀는 그야말로 천사의 미소를 띈 채 야기를 향해 입을 열었다.
“결정했어요. 이 방, 너무 마음에 들어요.”
“네? 정말이요?”
뭔가 믿기지 않는 심정으로 멍하니 그렇게 되묻자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저, 저야말로….”
“이사는 내일 하고 싶은데… 너무 이른가요?”
“아닙니다. 절대로요. 물건들만 치우면 되니까 준원씨가 원하신다면 오늘이라도 상관없습니다.”
“네?”
“예?”
“제 이름을 말씀 드렸던가요?”
헉! 너무 기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준원의 이름을 말해버린 야기는 이 작은 실수 하나가 모든걸 망쳐 놓을수 있다는 사실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옴을 느꼈다. 그녀의 시선을 피해 그녀의 어깨를 타고 내려온 핸드백을 보던 야기는 손잡이에 새겨진 J.W 라는 이니셜을 발견해 냈다. 역시, 오늘 하루 동안 신은 야기의 편을 들어주기로 한 것 같았다.
“제가 뭐가 그랬죠? 지원 이라고 했나요?”
“준원이라고 제 이름을 분명히 말씀하신 것 같은데요?”
“아~ 아까 핸드백에 새겨진 이니셜을 보구 옛날 친구였던 지원 이라는 이름을 떠올렸는데… 그게 어쩌다 준원으로 들렸나 보네요. 하하하…”
자신이 생각해도 말도 안되는 변명이었다. 젠장… 이걸로 끝인가?
“저도 지원이라는 이름의 친구가 있는데… 하지원… 영화배우인데 혹시 아세요?”
“하하! 하지원… 물론 알죠. 근데 정말 친구세요?”
“그럼요. 정말 좋아하는 친구에요. 근데, 여자배우들 보단 남자배우들한테 더 관심이 많으시게다. 그쵸?”
“하하하하! 물론 입니다. 근육 미끈한 몸짱 남자배우들만 보면 가슴이 설레는게…”
자알~ 하는 짓이다. 어찌 어찌 넘어가긴 하는 것 같은데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야기를 게이로 만들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로 일단은 만족이었다.
정말로 자신이 준원이와 한 집에 살게 될 것일까? 눈앞에서 웃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이준원. 야기는 자기도 모르게 헤벌쭉 웃어 보였다.
그녀와의 동거! 생각만 해도 짜릿하다. 이로써 첫사랑과의 동거에 성공한 것이다.
장하다, 이야기!
3편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