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우는 정말로 나와 동거를 할 작정이 아닐지도 모르고 자신도 나가서 다른 방법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막연한 기대를 해보기도 했으나 아까 진우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미 다른 방법은 없다는 것이 현실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완전한 나의 집이라고 생각해서 익숙하던 모든 가구들이 낯설게만 보였다.
처음에는 라꾸라꾸 침대는 접어둘 작정이었으나 이젠 주인이 나타나 버린 셈이라 그대로 두어야 할 것 같고 깔끔하게 정리된 주방도 비누 거품 향기가 좋은 목욕탕도 진우와 공유해야 하다니...
정말 기가 막혀 눈물이 날 정도였다.
모든 것은 정당한 댓가를 치루고 손에 넣어야 한다는 진리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싼 집에 이런 무서운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다니 더구나 부모님께 어떻게든 가출 사실을 알려야 하는 시점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아주 잠깐 어린 아이처럼 엄마에게 돌아가 모든 사실을 알리고 어리광을 부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러기엔 너무 늙은 딸이었다.
매일 엄마가 잔소리하는 것처럼 '난 네 나이 때 애가 셋이었다'라는 말이 떠올라 꿋꿋하게 이 상황을 헤쳐 나가리라 결심했다.
까짓 남자와의 동거가 대수랴...하는 배짱도 생겼다.
요즘은 동거도 흔한 상태이고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는 혼전 동거를 소재로 한 '옥탑방 고양이'라는 드라마도 있었다. 그거에 비하면 나는 건전한 동거를 하는 셈이었다.
여자로서 '성'에 대한 공포감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이 나이에 몸 하나 못지킨다는 건 말도 안되는 일이라 생각하며 씩씩해지자 생각하고 있었다.
시계를 보았다. 오후 6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고 새벽 6시에 집에서 나왔으니까 가출 12시간을 기록하고 있는 셈이었다. 배가 고파왔다.
아침에 오면서 사온 컵라면이 생각났다. 당장 배가 고프면 그거라도 해먹자 생각하며 비상 식량으로 사온 것이었다.
혼자니까 음식을 주문해 먹기에도 눈치가 보여 일단 컵라면으로라도 허기를 채우자는 생각에 뜨거운 물을 끓이고 있을 때였다.
반갑기도 하고 놀랍게도 전화벨이 울렸다. 혹시 엄마의 전화가 아닐까 싶었지만 벨소리는 친구 지정 벨 소리였고 '민석'이었다.
이상했다. 갑자기 눈가에 눈물이 맺히는 것 같았다.
물은 다 끓어서 이제 컵라면에 붓기만 하면 되는데 때마침 울린 전화벨 소리에 자동반사처럼 눈물이 났다.
잃어버린 3천만원, 자유, 처량한 컵라면 끓이기가 복합적으로 눈물샘으로 자극하고 있었다.
"여보세요?"
나는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고마운 자식....
어차피 내 가출 계획을 알고 있는 것도 민석밖에 없었지만 이 시간에 전화해준 민석이가 고맙다고 느껴졌다.
그래, 네가 여자라면 좋겠어. 차라리 게이가 되고 나랑 여자 친구처럼 지내자....
"나다. 목소리가 기운 없네. 지금쯤 독립 만세라도 부르고 있을 줄 알았는데..."
역시 목소리만으로 내 상황을 짐작해 주는 눈치 빠른 녀석이었다.
"그게....근데 지금 어딘데?"
"현아랑 피시방 왔다가 화장실 가는 척하고 나와서 전화하는 거야. 잘 들어갔는지..."
"아...그럼 오래 통화 못하겠구나..."
"왜? 무슨 일 있어?"
"나....사기 당한 것 같아..."
민석에게만은 늘 솔직할 수 있었다. 다른 남자와의 성경험까지 솔직하게 말하는 사이라서 문제지만...
"뭐라고?"
"설명하자면 긴데..."
"야...너 거기 신촌이라고 했지...기다려. 내가 지금 갈테니까..."
"아니...올 필요는 없고..."
"야...이럴 때 처형을 도와줘야지. 기다려봐."
민석은 내 대답을 듣기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 상황에서 민석이 온다고 하니 힘이 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민석이가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친구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 것도 안해도 옆에 있으면 힘이 되는....
나는 민석과 전화를 끊고 눈물을 닦으며 컵라면을 먹었다.
이렇게 억울하고 힘든 상황에서도 왜 배는 고픈 것일까...
민석이가 도착한 것은 10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계속 전화를 하며 집 위치를 물어보며 용케도 찾아왔다.
"내가 너 그럴 줄 알았다. 가출 계획 짤 때 말리는 건데...꼭 똑똑한 척 하다가 이렇게 당하는 여자가 있지..."
방금 전까지만해도 민석에게 고마운 마음이었는데 저런 비아냥거리는 말을 듣고 있자니 화가 났다.
"누가 알고 당하냐고? 아니 맞선 남이면 집안도 괜찮고 믿을 수도 있는 남자라고 생각했지... 이럴 줄 알았냐고...?"
"그래..차근차근 얘기 좀 해봐라."
나는 민석에게 오늘 아침부터 진우를 만난 것까지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말이 진실인 것을 확인시켜주는 진우의 여행 가방을 가리켰다.
"된통 걸렸구나..."
민석은 진우의 여행 가방을 이리저리 살피면서 말했다.
"근데 진우란 사람 잘 생겼어?"
뜬금없이 진우가 잘 생겼느냐고 묻다니.....
민석은 무슨 상상을 하는 걸까...?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생각해봐. 일단 친구 원룸에 싸게 들어올 정도면 돈은 그다지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4천만원은 있다는 거고...여자 친구가 있다니깐 그래도 못생기진 않았을 테고...회사에서 늦게 돌아온다고 하니까 일도 열심히 하는 걸 테고...괜찮은 남자 아냐?"
민석이 상상하는 것은 알만했다. 그저 남자라니까 어떻게든 나랑 엮어볼라는 심산이었다.
"야. 그 4천만원도 사기 당해서 날릴 판이고, 나더러 깡마르고 신경질적이라 자기 타입이 아니라고 했고, 회사에서 야근까지 하는 사람 난 정말 질색이다. 괜히 엮으려고 들지마...노처녀가 억울한 게 이런 거야. 주변에 남자만 나타났다 하면 어떻게든 엮으려고 난리라니깐...."
도대체 민석은 날 놀리려고 온 건지 위로하려고 온 건지 아니면 도움을 주려고 온 건지 모르겠다.
내가 우정이란 이름으로 믿고 의지하는 민석도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뻔뻔하게 진우처럼 동거 제안을 할 지도 모르는 남자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울화가 치밀었다.
그래, 엄마 말이 틀린 게 없지. 세상 모든 남잔 다 똑같다고....
"낯선 남자와 동거라....야.... 스릴 있어 보인다. 영화 같은 데 보면 꼭 그러다 결혼하고 그러잖아?"
결혼? 그거야 영화니깐 그런 거고 세상에 영화와 비슷한 일은 현실에서 일어나기란 번개맞는 확률보다 낮을 것이다.
"내가 널 부른 게 잘못이지...그만 가라...."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민석을 떠밀며 내쫓으려 할 때 민석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상의할 게 있는데..."
"뭐?"
"너희 부모님 보수적이잖냐. 더구나 내가 너 차버리고 현아랑 연애하는 걸로 착각하셔서 네가 결혼하기 전까지 우린 결혼 안시켜주신다고 했잖아. 근데 나랑 현아는 빨리 결혼하고 싶고...아무튼 그래서 동거를 할까 하는데..."
"동거?????"
이번엔 내가 놀랄 일이었다. 나의 이 억울한 동거보다 민석의 입에서 나온 '동거'가 주는 충격은 해머로 뒷통수를 가격당한 기분이었다.
"현아가 그러자고 했어?"
언제나 새초롬한 얼굴로 얌전한 모습을 하고 있던 현아가 민석의 동거 제안에 동의를 할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응."
"정말? 현아가?"
"너 현아가 어리다고 생각하지? 벌써 27살이야. 너 때문에 앞길이 막혀서 그렇지 시집 가고 애 낳을 나이라고..."
그래, 집안의 문제아는 나란 말이지, 제 때 결혼도 못해서 동생의 앞날을 막고 동거까지 하게 만드는 파렴치한...그렇다고 내가 아무나하고 결혼할 수는 없지 않은가...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봐라. 너희가 뭐가 부족해서 결혼식도 못하고 동거를 해?"
"결혼식이 중요한 건 아니잖아. 우리 같이 있고 싶어. 결혼식을 하고 싶은 게 아니라 같이 있고 싶은 거라고..."
이렇게 민석이 낭만적이고 용의주도한 사람이었단 말인가. 사랑을 위해 동거를 선택할 만큼?
나야 의미 없는 동거고 이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동거지만 민석과 현아의 동거는 말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이해해...사랑은 그런 거겠지. 서로 함께 있고 싶어서 그걸 방해하는 것은 모든 것이 적으로 보이는 거...하지만 부모님 허락을 받고 정식으로 결혼하는 그런 절차는 왜 무시를 하는 거니?"
나는 무언가 강렬한 말로 민석을 말려야 한다고 생각해서 시작한 말이 남들이 하는 흔한 말이 되어버리는 것이 안타까웠다.
"너도 그런 사람이구나. 겉으로는 트인 척 쿨한 척, 동거하는 게 어떠냐고 하지만 만약 그게 자기 가족이면 말리는 거..."
민석은 결국 내 급소를 찌르고 말았다.
"아니 그거야...사정이 있는 사람들 얘기지. 너희가 뭐가 아쉽다고 동거를...."
"그게...현아가...지금....임신했거든...."
뭐라고? 현아가 임신을?
오늘은 정말로 새벽부터 저녁까지 충격으로 일관하는 날인 것 같았다. 지금 이 문제에 비하면 나의 돈이나 낯선 동거는 아무 문제거리도 아닌 것처럼 생각되었다.
평소의 친구가 그런 상황이라면 당장 애를 지우고 남자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했겠지만 이건 정말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동거하겠다는 거야?"
"현아가 고민이 많아. 부모님한테 말했다간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내가 나쁜 놈 되서 헤어질지도 모른다고...그 녀석 겁이 많잖아."
말도 안된다. 겁많은 녀석이 남자와 자고 임신을 했다고?
이 입장은 정말 난처하다. 여자는 동생이고 남자는 친구다.
동생의 입장이라면 당장 동생을 앞장 세워 남자를 찾아가 실컷 패준 다음 동생을 지키겠다는 혈서라도 받아올 일이고,
남자 친구의 입장이라면 임신이 전부가 아니니까 신중하게 생각하라고 충고할 그런 문제였다.
가만가만...그렇다면 현아는?
"아니 근데 현아는 어쩌고? 달려온 거야?"
인간은 이기적인 게 맞는 것 같았다. 내 문제 때문에 민석이 현아와 같이 있다가 어떻게 현아를 두고 왔는지는 묻지 않았었다.
"요즘 약간 입덧을 하는 것 같은데 컴퓨터 오락을 하면 괜찮아 진다더라...집에서는 눈치 보이고 해서...피시방 갔던 거고...나 갑자기 친구한테 일이 생겼다고 온 거야. 온 김에 이 문제도 상의하고..."
이건 상의하고 말고할 문제가 아니라 통보였다.
"야....정말 부모님한테 얘기 안 할 생각이야?"
나는 다시 되물었다. 나도 부모님께 말못하고 가출한 주제에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몰랐지만...
시기적절한 남자(6)
진우가 나간 뒤로 나는 불안한 마음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진우는 정말로 나와 동거를 할 작정이 아닐지도 모르고 자신도 나가서 다른 방법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막연한 기대를 해보기도 했으나 아까 진우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미 다른 방법은 없다는 것이 현실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완전한 나의 집이라고 생각해서 익숙하던 모든 가구들이 낯설게만 보였다.
처음에는 라꾸라꾸 침대는 접어둘 작정이었으나 이젠 주인이 나타나 버린 셈이라 그대로 두어야 할 것 같고 깔끔하게 정리된 주방도 비누 거품 향기가 좋은 목욕탕도 진우와 공유해야 하다니...
정말 기가 막혀 눈물이 날 정도였다.
모든 것은 정당한 댓가를 치루고 손에 넣어야 한다는 진리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싼 집에 이런 무서운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다니 더구나 부모님께 어떻게든 가출 사실을 알려야 하는 시점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아주 잠깐 어린 아이처럼 엄마에게 돌아가 모든 사실을 알리고 어리광을 부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러기엔 너무 늙은 딸이었다.
매일 엄마가 잔소리하는 것처럼 '난 네 나이 때 애가 셋이었다'라는 말이 떠올라 꿋꿋하게 이 상황을 헤쳐 나가리라 결심했다.
까짓 남자와의 동거가 대수랴...하는 배짱도 생겼다.
요즘은 동거도 흔한 상태이고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는 혼전 동거를 소재로 한 '옥탑방 고양이'라는 드라마도 있었다. 그거에 비하면 나는 건전한 동거를 하는 셈이었다.
여자로서 '성'에 대한 공포감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이 나이에 몸 하나 못지킨다는 건 말도 안되는 일이라 생각하며 씩씩해지자 생각하고 있었다.
시계를 보았다. 오후 6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고 새벽 6시에 집에서 나왔으니까 가출 12시간을 기록하고 있는 셈이었다. 배가 고파왔다.
아침에 오면서 사온 컵라면이 생각났다. 당장 배가 고프면 그거라도 해먹자 생각하며 비상 식량으로 사온 것이었다.
혼자니까 음식을 주문해 먹기에도 눈치가 보여 일단 컵라면으로라도 허기를 채우자는 생각에 뜨거운 물을 끓이고 있을 때였다.
반갑기도 하고 놀랍게도 전화벨이 울렸다. 혹시 엄마의 전화가 아닐까 싶었지만 벨소리는 친구 지정 벨 소리였고 '민석'이었다.
이상했다. 갑자기 눈가에 눈물이 맺히는 것 같았다.
물은 다 끓어서 이제 컵라면에 붓기만 하면 되는데 때마침 울린 전화벨 소리에 자동반사처럼 눈물이 났다.
잃어버린 3천만원, 자유, 처량한 컵라면 끓이기가 복합적으로 눈물샘으로 자극하고 있었다.
"여보세요?"
나는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고마운 자식....
어차피 내 가출 계획을 알고 있는 것도 민석밖에 없었지만 이 시간에 전화해준 민석이가 고맙다고 느껴졌다.
그래, 네가 여자라면 좋겠어. 차라리 게이가 되고 나랑 여자 친구처럼 지내자....
"나다. 목소리가 기운 없네. 지금쯤 독립 만세라도 부르고 있을 줄 알았는데..."
역시 목소리만으로 내 상황을 짐작해 주는 눈치 빠른 녀석이었다.
"그게....근데 지금 어딘데?"
"현아랑 피시방 왔다가 화장실 가는 척하고 나와서 전화하는 거야. 잘 들어갔는지..."
"아...그럼 오래 통화 못하겠구나..."
"왜? 무슨 일 있어?"
"나....사기 당한 것 같아..."
민석에게만은 늘 솔직할 수 있었다. 다른 남자와의 성경험까지 솔직하게 말하는 사이라서 문제지만...
"뭐라고?"
"설명하자면 긴데..."
"야...너 거기 신촌이라고 했지...기다려. 내가 지금 갈테니까..."
"아니...올 필요는 없고..."
"야...이럴 때 처형을 도와줘야지. 기다려봐."
민석은 내 대답을 듣기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 상황에서 민석이 온다고 하니 힘이 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민석이가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친구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 것도 안해도 옆에 있으면 힘이 되는....
나는 민석과 전화를 끊고 눈물을 닦으며 컵라면을 먹었다.
이렇게 억울하고 힘든 상황에서도 왜 배는 고픈 것일까...
민석이가 도착한 것은 10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계속 전화를 하며 집 위치를 물어보며 용케도 찾아왔다.
"내가 너 그럴 줄 알았다. 가출 계획 짤 때 말리는 건데...꼭 똑똑한 척 하다가 이렇게 당하는 여자가 있지..."
방금 전까지만해도 민석에게 고마운 마음이었는데 저런 비아냥거리는 말을 듣고 있자니 화가 났다.
"누가 알고 당하냐고? 아니 맞선 남이면 집안도 괜찮고 믿을 수도 있는 남자라고 생각했지... 이럴 줄 알았냐고...?"
"그래..차근차근 얘기 좀 해봐라."
나는 민석에게 오늘 아침부터 진우를 만난 것까지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말이 진실인 것을 확인시켜주는 진우의 여행 가방을 가리켰다.
"된통 걸렸구나..."
민석은 진우의 여행 가방을 이리저리 살피면서 말했다.
"근데 진우란 사람 잘 생겼어?"
뜬금없이 진우가 잘 생겼느냐고 묻다니.....
민석은 무슨 상상을 하는 걸까...?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생각해봐. 일단 친구 원룸에 싸게 들어올 정도면 돈은 그다지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4천만원은 있다는 거고...여자 친구가 있다니깐 그래도 못생기진 않았을 테고...회사에서 늦게 돌아온다고 하니까 일도 열심히 하는 걸 테고...괜찮은 남자 아냐?"
민석이 상상하는 것은 알만했다. 그저 남자라니까 어떻게든 나랑 엮어볼라는 심산이었다.
"야. 그 4천만원도 사기 당해서 날릴 판이고, 나더러 깡마르고 신경질적이라 자기 타입이 아니라고 했고, 회사에서 야근까지 하는 사람 난 정말 질색이다. 괜히 엮으려고 들지마...노처녀가 억울한 게 이런 거야. 주변에 남자만 나타났다 하면 어떻게든 엮으려고 난리라니깐...."
도대체 민석은 날 놀리려고 온 건지 위로하려고 온 건지 아니면 도움을 주려고 온 건지 모르겠다.
내가 우정이란 이름으로 믿고 의지하는 민석도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뻔뻔하게 진우처럼 동거 제안을 할 지도 모르는 남자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울화가 치밀었다.
그래, 엄마 말이 틀린 게 없지. 세상 모든 남잔 다 똑같다고....
"낯선 남자와 동거라....야.... 스릴 있어 보인다. 영화 같은 데 보면 꼭 그러다 결혼하고 그러잖아?"
결혼? 그거야 영화니깐 그런 거고 세상에 영화와 비슷한 일은 현실에서 일어나기란 번개맞는 확률보다 낮을 것이다.
"내가 널 부른 게 잘못이지...그만 가라...."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민석을 떠밀며 내쫓으려 할 때 민석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상의할 게 있는데..."
"뭐?"
"너희 부모님 보수적이잖냐. 더구나 내가 너 차버리고 현아랑 연애하는 걸로 착각하셔서 네가 결혼하기 전까지 우린 결혼 안시켜주신다고 했잖아. 근데 나랑 현아는 빨리 결혼하고 싶고...아무튼 그래서 동거를 할까 하는데..."
"동거?????"
이번엔 내가 놀랄 일이었다. 나의 이 억울한 동거보다 민석의 입에서 나온 '동거'가 주는 충격은 해머로 뒷통수를 가격당한 기분이었다.
"현아가 그러자고 했어?"
언제나 새초롬한 얼굴로 얌전한 모습을 하고 있던 현아가 민석의 동거 제안에 동의를 할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응."
"정말? 현아가?"
"너 현아가 어리다고 생각하지? 벌써 27살이야. 너 때문에 앞길이 막혀서 그렇지 시집 가고 애 낳을 나이라고..."
그래, 집안의 문제아는 나란 말이지, 제 때 결혼도 못해서 동생의 앞날을 막고 동거까지 하게 만드는 파렴치한...그렇다고 내가 아무나하고 결혼할 수는 없지 않은가...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봐라. 너희가 뭐가 부족해서 결혼식도 못하고 동거를 해?"
"결혼식이 중요한 건 아니잖아. 우리 같이 있고 싶어. 결혼식을 하고 싶은 게 아니라 같이 있고 싶은 거라고..."
이렇게 민석이 낭만적이고 용의주도한 사람이었단 말인가. 사랑을 위해 동거를 선택할 만큼?
나야 의미 없는 동거고 이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동거지만 민석과 현아의 동거는 말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이해해...사랑은 그런 거겠지. 서로 함께 있고 싶어서 그걸 방해하는 것은 모든 것이 적으로 보이는 거...하지만 부모님 허락을 받고 정식으로 결혼하는 그런 절차는 왜 무시를 하는 거니?"
나는 무언가 강렬한 말로 민석을 말려야 한다고 생각해서 시작한 말이 남들이 하는 흔한 말이 되어버리는 것이 안타까웠다.
"너도 그런 사람이구나. 겉으로는 트인 척 쿨한 척, 동거하는 게 어떠냐고 하지만 만약 그게 자기 가족이면 말리는 거..."
민석은 결국 내 급소를 찌르고 말았다.
"아니 그거야...사정이 있는 사람들 얘기지. 너희가 뭐가 아쉽다고 동거를...."
"그게...현아가...지금....임신했거든...."
뭐라고? 현아가 임신을?
오늘은 정말로 새벽부터 저녁까지 충격으로 일관하는 날인 것 같았다. 지금 이 문제에 비하면 나의 돈이나 낯선 동거는 아무 문제거리도 아닌 것처럼 생각되었다.
평소의 친구가 그런 상황이라면 당장 애를 지우고 남자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했겠지만 이건 정말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동거하겠다는 거야?"
"현아가 고민이 많아. 부모님한테 말했다간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내가 나쁜 놈 되서 헤어질지도 모른다고...그 녀석 겁이 많잖아."
말도 안된다. 겁많은 녀석이 남자와 자고 임신을 했다고?
이 입장은 정말 난처하다. 여자는 동생이고 남자는 친구다.
동생의 입장이라면 당장 동생을 앞장 세워 남자를 찾아가 실컷 패준 다음 동생을 지키겠다는 혈서라도 받아올 일이고,
남자 친구의 입장이라면 임신이 전부가 아니니까 신중하게 생각하라고 충고할 그런 문제였다.
가만가만...그렇다면 현아는?
"아니 근데 현아는 어쩌고? 달려온 거야?"
인간은 이기적인 게 맞는 것 같았다. 내 문제 때문에 민석이 현아와 같이 있다가 어떻게 현아를 두고 왔는지는 묻지 않았었다.
"요즘 약간 입덧을 하는 것 같은데 컴퓨터 오락을 하면 괜찮아 진다더라...집에서는 눈치 보이고 해서...피시방 갔던 거고...나 갑자기 친구한테 일이 생겼다고 온 거야. 온 김에 이 문제도 상의하고..."
이건 상의하고 말고할 문제가 아니라 통보였다.
"야....정말 부모님한테 얘기 안 할 생각이야?"
나는 다시 되물었다. 나도 부모님께 말못하고 가출한 주제에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몰랐지만...
'띠리리리리'
또 다시 현관의 벨이 울렸다. 인터폰을 들었을 때 보이는 얼굴은 이십대의 여자였다.
"누구세요?"
"여기가 박진우씨댁 맞지요?"
박진우씨댁이라...아니 이 남자 벌써 자기 집이라고 여자 친구에게 말해놨단 말인가?
나랑 동거한다고까지 말한 걸까?
도대체 이 대책 없는 남자는 뭐란 말인가?
내 인생에 시기적절한 사람들은 하나도 없고 불청객만 왜 이리 늘어만 가는 걸까...
-----------클릭, 시기적절한 남자 7편 보기-----------
추신1: 마음은 언제나 자주 올리려하지만 쉽지 않네요...
기다려주는 분들께 늘 감사드립니다...
추신2: 당신은 누군가에게 혹은 누군가는 당신에게 시기적절한 여자(혹은 남자)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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